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99화 (299/556)

35-22. 생뢰르반 전투

###

트랑카벨 파견군 소속, 네그라타 용병 연대장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는 조용히 보병들을 전개하고 있었다.

현재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의 보병 연대 정원은 1000명에서 1200명 정도. 정규 보병 연대는 물론, 용병인 지빌링엔이나 슈토르히도 비슷한 숫자이다.

다른 연대로부터 파견된 추가 병력을 지원 받아 1300명이 좀 넘는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가 특이한 케이스이다.

“자, 서두르지 마라. 적의 시야 너머에서 슬그머니 움직이는 거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수 백 명씩 움직이는데 적에게 안 보일 수는 없지. 오히려 대놓고 움직이니까, 멀리서 보면 창대가 겹쳐서 명확하게 어느 정도의 병력이 움직이려 하는지 알 수 없을 거야.”

“옛, 대장님.”

하지만 네그라타 용병대의 현 인원은 무려 1700명이다.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의 모든 단일 연대 중 가장 많은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현 연대장이자 알코자르의 남작이기도 한 미카토가 예비대로 재편성 기간에 부지런히 병력을 모은 덕분이다.

알코자르는 라솔 왕국의 영토이다. 알코자르 남작령도, 네그라타 용병단도 과거에는 트랑카벨과 블랑독의 적이었다.

수시로 국경을 건너 블랑독의 서쪽 끝, 드 누아 백작령에서 군사 훈련을 빙자한 침탈을 저질러 필연적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으니.

하지만 자웅을 겨룬 대규모 전투에서의 철저한 패배 후, 포로로 잡혔던 미카토는 트랑카벨 가문에 포섭되었으며 지금은 영지군의 든든한 일원이다.

트랑카벨 영지군을 중심으로 한, 블랑독 연맹군이 엘랑키아 국왕이 보냈던 대군과 격돌했던 샹다메리 전투에서 대활약 끝에 큰 피해를 입었었다.

바닥을 파내고 흙벽을 쌓아 올리며, 복잡한 구조의 야전 축성에서 거의 세 배가 넘는 국왕군의 공세에 맞서 말 그대로 혈전을 벌였다.

결국 30퍼센트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고, 예비대로 돌려져 이어지는 법황군과의 마르코사르 언덕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용병인 이상, 전공 욕심과 호승심이 없을 수는 없다. 그래도 연대장 미카토는 투덜대는 대신, 짧은 휴식기라 생각하고 연대의 힘을 기르는 데 힘 썼다.

물론 당시에야 다음 상대가 라솔 왕국이 될 줄은 생각 못했을 것이다. 알코자르 남작령도 명목상 라솔 왕국의 일부이며, 네그라타 연대 소속 용병의 태반도 라솔 출신이다.

하지만 어차피 그런 것을 신경쓰는 용병은 없다. 네그라타 연대는 불과 2년 전만 해도 라솔 군대의 일원이었고, 지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역색이 강한 라솔인 특성 상, 가까운 고향 사람이 아니면 응집력이 좀 약하기도 하고. 괜히 타라트라바나 알시라스와 같은 반독립적인 봉신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네그라타의 고참병 대다수는 블랑독 연맹군과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 전향한 이들이 아니던가.

자칫 처형당해도 할 말 없는 상황에서 아쥬흐 트랑카벨의 제의에 따라서 목숨을 연명하기도 했고.

그러므로, 연대장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 이하 네그라타 연대 소속의 모두는 동향 출신일지 모르는 라솔 군과 싸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정확히는 그들이 상대하는 적은 라솔이 아니라 타라트라바 출신이다. 어떤 점에서는 타국보다 더 타국같은 관계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국적과 무관하게, 알코라즈 남작령의 모병소에서는 철저하게 경험과 실력, 추천에 의존해 신병을 모집했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가 현재의 1700여 명으로 구성된 ‘완편’ 네그라타 연대이다.

“우리가 슈토르히처럼 될 수는 없겠지. 그처럼 되고 싶어도 말이야.”

천천히, 하지만 자신감 있게 이동하는 부하들을 보며 연대장 미카토가 말한다.

“하지만 우리도 숫자만 많을 뿐 호락호락한 잡병 무리가 아니란 것은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맞습니다, 대장님.”

“우리가 땅만 잘 파는 게 아니란 것을 보여주자고?”

감사하게도, 콘도티에레는 반격의 선봉으로 자신들을 지명했다.

‘싸워 보셔서 아시겠지만··· 우측의 라솔 보다 좌측의 타라트라바가 더 약합니다.’

짧은 작전 지시 중, 콘도티에레는 그렇게 말했었다.

1차전에서 직접 대열을 부딪쳐 싸웠던 미카토의 판단도 동일했다. 어째 나름 그럴싸해 보이는 타라트라바 계통의 연대이긴 한데, 좀 물렁물렁한 느낌이랄까.

완전히 전장의 반대 방향이라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라솔 연대들이 보여주는 ‘예리함’이 눈 앞의 타라트라바 연대들에는 없었다.

나름 무장은 잘 되어 있고, 보병들의 숙련도도 높다. 굳이 따지자면 트랑카벨 정규 연대에 비해 떨어지지만 화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어딘가··· 하나의 전투 집단으로서의 손발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이유는 둘 중 하나겠지.

단기간에 급하게 편성되었거나, 혹은 장교들의 질이 떨어지거나.

물론 두 가지가 적당히 섞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이상하게 부대가 강해지는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지만, 약해지는 이유는 천차만별이더라.

하여튼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적이 부대로서 약점이 명확하다는 점이니까.

···뭐 슈토르히 수준으로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어보고 싶기는 하지만. 왠지 콘도티에레도 잘 모르는 눈치가 아닌가도 싶고.

‘그러니, 드 레뮤즈 출신 신병들이 더 고생하기 전에, 타라트라바부터 때려 잡읍시다. 괜찮겠죠?’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콘도티에레를 보며 미카토는 전율을 느꼈다. 물론 기쁨의 전율이었다.

‘오늘은 생선의 물이 좋지 않으니 고기 요리를 준비합시다’ 라고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말투의 작전 지시를 받은 미카토는 주의깊게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다.

‘그 때’가 올 때, 반격의 주인공이 자신들이 된다.

어쩐지 수수한 역할만 맡아온 것 같았다. 물론 콘도티에레나 트랑카벨 가문에서는 분명히 네그라타의 공헌을 잊지는 않는다.

특히 실질적인 고용주인 아쥬흐 트랑카벨 영주따님은 네그라타에 ‘특혜’까지 주지 않았던가.

···그때를 생각하면 솔직히 눈물이 난다. ‘트랑카벨을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에게 빚을 받을 수 없다’ 며 사망자들의 빚을 탕감시켜주었으니.

오히려 왜 먼저 요구하지 않았냐며 타박을 했었지. 방금까지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와서, 의료용 백의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말이다.

어떤 형태로든 공헌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물론 돈을 받고 싸워주는 용병인 이상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왠지 이번 고용주인 트랑카벨 가문을 상대로는, 그 이상으로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없지 않았다.

펑! 퍼벙! 꽝!

뻐어엉! 뻐벙!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요란한 대포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는 전쟁터고, 양측 합쳐서 수십 문의 대포가 동원된 대규모 회전이다. 대포 소리 따위야 한참 전부터 끊임 없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그 규모나, 연속성이나.

충분히 준비된, 분명한 목표를 가진 일제사격.

게다가 방향 또한 지금과는 달랐다.

“드디어 시작인가! 아군의 포진 상태는?”

“준비 만전입니다, 대장.”

“좋아, 명령까지 대기한다.”

“옛!”

검의 손잡이를 꽉 잡는다. 공격 신호를 내렸던 것이 얼마만이던가.

콘도티에레는 상황을 보아 공격 명령을 위임한다고 했다. 이제 자신의 판단이 나설 차례였다.

미카토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 검을 치켜든다. 참모들과 명령을 전파하는 군악수들의 눈이 하늘을 향한 검날의 끝을 응시한다.

“네그라타 연대 전진!”

“전진! 전진!”

“전지이인!”

명령의 복창과 함께, 전진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다소 경직되었던 전장에 새로운 혼란을 불러온다.

###

“뭔가? 무슨 일인가?”

“알아보고 있습니다!”

크루사다 틴토 데 타라트라바 공작은 갑작스러운 포성과 전장의 격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금까지 시종일관, 공세는 타라트라바 군의 차지였다.

숫자도 질도 아군이 우세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가 때리고, 적은 맞는다.

제법 끈질기게 버티고는 있지만 곧 한계에 봉착하겠지.

결국 주 방어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적은 기병에게 무리한 기동을 시킬 수밖에 없다.

당당한 모습으로 진군하는 아군 보병 연대의 접근을 무슨 수로도 막을 수 없자, 무리해서 기병을 돌격시키는 적장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럼 그저 수만 많을 뿐, 그저 그런 무장 상태인 적의 경기병들은 아군의 창벽과 일제사격 앞에 이렇다 할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줄줄이 쓰러질 것이다.

적이 예상보다는 노련하고 짜증나긴 하지만, 결국 전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잘 무장된 노련한 보병 군단이다.

적이 기병에서 강점을 가진다고 한들, 완전히 무너지는 주전선을 기병이 지탱할 수는 없다. 그나마도 철제 갑주로 제대로 무장한 중기병의 숫자는 오히려 타라트라바 측이 더 많을 정도이고.

실제로 적은 이쪽의 공세에 꼼짝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소모전이 길어지면 승리하는 것은 수적으로 압도적인 아군이다.

···라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점이 없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포병 규모는 서로 비슷한 것 같은데, 적 측이 유난히 명중률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나.

‘정말로 별 것 아닌’ 소규모 경기병들의 귀찮은 공격에 예비 전력이 동원되는 바람에 아군 포병의 활동이 위축된 점이나.

분명 훨씬 더 많은 숫자로 밀어 붙이고 있는데, 적이 말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아 실질적인 전선의 전진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나.

그래도 크루사다 공작은 이 점들을 애써 무시했다.

항상 적군 중에 소수 기량이 뛰어난 자들은 있는법이다.

경기병들이 아무리 용을 써봤자,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기는 힘들다는 점이나.

결국 전투는 숫자와 힘의 격차를 거스를 수 없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서.

퍼버벙! 뻐엉!

쾅! 퍼퍽, 콰악!

“끄아아아악!”

“포격? 어디서 오는 거지?”

“대열 벗어나지 마! 빈 자리를 채운다”

“우아악!”

갑자기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용맹한 타라트라바의 장교와 병사들이 뜨겁게 달구어진 쇠구슬에 이리저리 치이거나 찢기고 있다.

대체 어디서? 아군과 적군은 이미 꽉 맞물려서 근거리 총격전과 백병전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나?

“우측입니다! 우측입니다!”

“우측이라니? 방금 적 기병에게 공격당하던 와중 아니었나?”

“그··· 바로 그곳입니다!”

그곳이라니. 기병대가 대포라도 들고 다니면서 쏜다는 말인가.

꽈과광!

세 번째 포격이 쏟아진다.

전방에서의 포격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러 대열을 선형으로 재편한 상황이다. 그것을, 비스듬한 측면에서 노려 인간의 육체와 강철을 사정 없이 끊어 놓는다.

엘랑키아의 겁쟁이들을 혼내주기 위해, 머나먼 타라트라바로부터 행군해 온 훌륭한 청년들이 속절없이 무더기로 죽어가고 있었다.

분명, 포격은 방금까지 적의 기병이 있던 방향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

“아아, 결국에는 이번에도 우리는 뒷방 신세네요.”

“하핫, 적이 너무 많아서 결국엔 우리가 주워 먹으러 가야 할 걸?”

“그게 뒷방 신세 아닙니까!”

“하하하하핫!”

방금전까지 ‘아라라라라라’라고 하는 특유의 기성을 외쳐대며 이리 뛰고 저리 뛰던 프리스마라 기병대는 한쪽으로 비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리고 있던 자리에는, 몇 무리로 나누어진 포병대가 적진으로 끊임없이 화력을 투사한다.

화염이 뿜어지고, 하얀 연기가 허공을 뒤덮을 때 마다 어딘가에서 비명이 터지고 있으리라. 멀어서 들리지는 않지만.

“콘도티에레란 남자, 똑똑하네요, 대장.”

“그렇지? 재미있는 녀석이라니까.”

오늘 치 일은 다 했다는 듯, 말 위에서 기지개를 펴며 프리스마라 단장 코바르 리메니에디가 대답한다.

“포병 다 배치하기 전에 적 기병이 돌격해왔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뭘 어째 우리가 막아야지.”

진담인지 농담인지, 코바르와 부하들은 전장의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대화를 주고 받고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말하자면 ‘스크린’이다. 본대 후방에서 빼돌린 포병대가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 전개하는 것을 가리는 역할.

거대한 화포가 가지는 근본적인 둔중함과, 아주 소수의 죽음을 각오한 특공대에도 무력화되기 쉬운 이유로 포병의 단독 활용은 일반적인 전술은 아니다.

실제로 초전의 라솔 군이 그렇게 포병 화력을 일부 낭비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저지르는 것이겠지.

“거 뭐라더라, 생각의 그늘? 뭐 그런 말이 있나 보더라.”

“그건 무슨 말인가요, 대장?”

“콘도티에레가 하던 말이야. 여기는 우리 기병대가 난장을 피고 있으니, 바로 뒤에 포병대가 시간 써가면서 포진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한다는 것이지.”

“허어, 그렇군요.”

코바르는 무심하게 적진을 바라본다. 꼴을 보아하니, 조만간 추격전의 귀재인 프리스마라 기병대 역할이 올 것 같다.

“전진!”

“전지인!”

저 멀리서 아군의 모퉁이를 지키고 있던 보병 부대도 전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을 막아야 할 적의 측위 부대는 집중 포격에 구멍이 뻥뻥 뚫린 상태였지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