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97화 (297/556)

35-20.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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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드 레뮤즈 군의 우측 끝에, 세로로 대열을 짠 두 개의 연대가 보인다.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의 깃발이 나란히 펄럭이는 것을 보며 나는 조금은 안심했다.

내가, 트랑카벨 파견군이 내밀 수 있는 최강의 카드는 명백하게 정해져있다. 바로 슈토르히 연대이다. 이제 대체 얼마나 센지 나도 짐작이 잘 안 가는 녀석들.

어찌 보면 무책임하게 방치하고 엘랑키아로 건너 온 것인데도 무지막지하게 강한 것을 보면 내가 사람 복은 꽤 있는 것 같다.

이게 오토 사냥인가 방치형 사냥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아무것도 안했는데 알아서 엄청 세지다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 슈토르히를 내밀 수는 없다. 슈토르히 연대와, 훌륭하게 좌측 방어선을 지휘하고 있는 루트비히에게는 다른 임무가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신생 트랑카벨 영지군의 최선임 연대인 제10 트랑카벨 보병 연대와, 현재 컨디션이 최고조에 오른 지빌링엔 연대는 그 다음 정도 되는 카드라고 할 수 있다.

제10 보병 연대는 아마 자신들도 잘 모를 것이다. 이들은 트랑카벨 가문의 최선임 부대로서 오랫동안 아실 트랑카벨 자작의 친위대였다.

그 동안은 대체로 슈토르히의 선임 중대장 중 하나인 모리츠의 지휘를 받아 왔고 말이다.

가장 최근으로 따지자면, 법황의 성전군을 마지막으로 궤멸시킨 마르사코르 언덕 전투에도 참여했고 말이다.

그렇게 풍부한 실전 경험과, 오늘 날의 슈토르히가 있게 만든 일등 공신 중 하나인 모리츠의 지휘 훈련을 오랫동안 받은 이들이니···.

알게 모르게 얻은 게 많을 것이다. 실제로 모리츠도 병력을 인계할 때, 슈토르히 만은 못하지만, 슈토르히에 가장 가까운 연대라는 표현도 했고 말이다.

거기에 딱 적정한 수준의 자부심이 있다.

트랑카벨 영지군 최선임, 영주님의 친위대, 의기와 자존심이 찌를 듯 높은 블랑독의 귀족들과 자유민 지원자로 이루어진 부대.

그런 신뢰가··· 그들을 가장 어려운 전장에 내보내도록 만들었으니 착잡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우측에 바짝 붙어서 보좌하는 지빌링엔 연대 역시, 죽음을 불사할 지언정 쉽사리 대열을 무너뜨리지 않을 용맹한 병사들이다.

···과연 아쥬흐는 알고 한 것일까, 모르고 한 것일까.

트랑카벨 가문의 장녀이자 실질적인 자산 관리자인 그녀가 가엾은 지빌링엔의 유랑병들에게 준 ‘특혜’가 그들을 불굴의 정예군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빈틈없는 모습을 볼 때, 계획적으로 했다고 해도 말이 되고.

그녀의 선량한 마음을 볼 때,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해도 말이 되겠지.

아닌가, 둘 다인가.

최소한 평소에도 영민들과 같은 눈높이로 생활하는 블랑독의 귀족들이 아니라면 나오기 어려운 결론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위험하지만 중요한 장소에 두 연대를 파견했다. 이들이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너무 많은 희생이 생기지는 않기를 바란다.

아니지.

내가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기 전에 전투를 끝내야 한다.

지금까지 치열한 전투는 주로 아군의 우익 쪽, 서부군 방향에서 벌어졌다. 결국 서부군 대열이 어떤 이유로든 무너졌으며, 전선에서 탈락한 상황이고.

그에 비해서 반대쪽, 즉 트랑카벨 군 방향에서는 아직 평이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최초의 공세로 접근했던 적, 타라트라바 군의 대열은 든든한 아군 방어선에 생각보다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첫 공세과 좌절로 돌아가고 두번째 공세가 시작되었으며, 지금 양측의 대열이 충돌한 상태.

콰아앙! 뻐엉!

타타타타탕! 타다당!

양측에서 발사된 포탄이 대열을 가르며 인간의 육체와 마음을 함께 찢어 발긴다.

한 발 한 발 인간의 생명을 끝장내기 충분한 납덩어리 수백 발이 한 장소에 쏟아져 피의 비를 내린다.

서로 특별한 전술이나 기동을 사용하지 않는다.

빽빽하게 늘어선 보병들이 군기를 휘날리며 접근해 치명적인 사격을 주고 받고, 창대와 창대가 얽히면서 적을 옭아메고 찌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길게 좌우로 늘어선 대군이 서로를 밀어내기 위해 부딪치는 힘과 힘의 대결.

말 그대로 소모전이다. 과격하게 누가 조금이라도 더 화력을 투사하는데 성공하는가.

어차피 명중은 확률에 의해 결정된다. 때문에 세밀한 조준도, 사격 통제도 차츰 의미를 잃어가는 그런 전투.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이기에, 기교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에.

오히려 그 사이에서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다.

“프리스마라에 전령을 보냈어요, 콘도티에레!”

“잘 했어, 첼레스티나. 아직 때가 좀 이르긴 하지만 포대를 준비해줄래?”

“네에,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는 내 지시를 받더니 선물이라도 받은 듯 활짝 웃으며 포병 장교들을 소집한다. 나는 정말 사람이 아쉽다는 말을 하면 안될 것 같아.

원래는 조금 천천히 하려고 했다.

적이 힘이 빠진 상태에서, 더 철저하게 한계까지 몰아대야 툭 쳐도 와르르 무너질 것이니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지원군이 도착해 적이 오히려 강화된 데다가, 서부군이 밀려난 덕에 더 이상 전선에 부담을 둘 수도 없게 됐다.

멀리 좌측 끝에서 프리스마라 연대의 기병들이 오늘 두 번째로 출격하고 있었다.

부디 그들의 앞길에 승리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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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앗, 하아앗!”

화려한 원색이 많이 섞인 기병대가 엘랑키아 남부의 초원을 달리며 흙먼지를 일으킨다.

정말 좋은 땅이다. 자신의 고향도 이렇게 훌륭한 초원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더라면, 자신은 기병 대신 농부가 됐을지도 모른다.

프리스마라 용병대의 단장, 코바르 리메니에디는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웃었다.

멀리 동쪽, 척박한 초원 출신인 그는 땅이 기름지면 기름진대로 많은 외침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말라 비틀어진 순무 하나 제대로 자라지 않는 회색 땅 조차도 서로 차지하겠다며 다퉈서 그렇게나 많은 피가 흘렀었는데.

이렇게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름진 멋진 땅은, 훨씬 많은 피를 흘려서라도 차지하려고들 하지 않겠는가.

코바르는 오랫동안 땅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자신도, 그의 부모도 땅을 소유했던 적은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 엘랑키아의 드넓은 미개발지를 보자면 왜 사람들이 땅에 환장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자기 같은 말 등짝에서 태어난 놈들은 말 등짝에서나 살아야지.

말이 먹을 수 있는 것 보다 값진 풀이 자라나는 땅에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고 말이다.

“코바르 단장! 지금 갑니다?”

“그래, 하는 김에 똑바로, 화려하게 해 버려!”

“옛, 단장!”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선두의 프리스마라 기병들이 여러개의 작은 집단으로 나뉘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번 전투에서 두 번째 출격, 첫번째 출격에서 이 방식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적군, 타라트라바 역시 어느 정도의 기병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사격전이면 몰라도, 서로 공격할 수단이 제한되는 중기병과 경기병의 백병전에서 양측의 전투력 차이는 극단적이다.

높이와 말의 힘을 이용해 평소보다 강한 공격을 가하는 숙련된 기수의 이야기야 보병을 상대할 때도, 말 위에서 공격 수단이 제한되는지라 한쪽만 갑옷을 입으면 피해를 주기가 더더욱 힘들어진다.

그러니 총기나 기병창을 이용할 수 있는 충돌 직후면 몰라도, 양측이 얽히는 백병전이 되면 빠른 속도로 격차가 발생한다.

다만 이번 경우에는, 프리스마라 기병 측이 두 배가 넘는 숫자였기에, 타라트라바의 기병들은 멀리 후방에서 아예 나와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프리스마라 기병들을 자유롭게 방치한다 해도 결정적인 행동을 못하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그나마 그중에서 튼튼한 갑옷을 챙겨 입고, 기병 창도 챙긴 부대라고는 해도 잘 방비되는 보병 대열에 달려드는 것은 자살행위니까.

기껏해야 집중 사격을 피할 수 있는 모서리 방향을 조금 공격하거나, 어중간한 거리에서 총이나 활을 쏘면서 도발하는 것 말고는 없다.

그나마 그게 성공해도 보병 연대에 가해지는 피해는 긁힌 상처 정도라고 할까.

아까 첫 출격때는 이동하다가 낙오된 외곽의 소수 보병부대나, 산개 배치되었던 단일 포대 몇 개를 잡아먹은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적도 그렇게 중요 전력을 흘리지는 않는다.

초전과 다르게 포대 위치는 보병 연대들의 근처였고, 근거리 포격 지원 중이다. 당연히 억지로 접근한다고 해도 곧바로 보병의 지원에 격퇴당하겠지.

그래서 현재 프리스마라가 적 보병 연대에 가할 수 있는 상처는 ‘긁힌 상처’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연대장 코바르로서는 아쉬운 일이기는 한데···.

평생을 말 위에서만 살아온 용병이다.

거의 항상, 예외 없이 그의 상대들은 자신보다 훨씬 좋은 무기체계로 무장하고, 수도 많고, 키도 크고, 갑주도 말도 값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코바르가 이겼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것은 코바르이다. 덕택에 지금은 수천이나 되는 부하들을 이끄는 기마 용병대의 수장이 된 게 아니겠나.

“엘랑키아 기사님들 말 타는 거 보니까 신통찮더랍니다!”

“아 솔직히 엘랑키아 기사들이 빽빽하게 정면에서 돌격해오면 지릴 것 같은데?”

“그러니까 뒤에서 보죠?”

“푸하하하하하!”

“그리고 라솔 기사들은 확실히 엘랑키아 기사보다 못해요. 뭔가 힘이 없어 보인다 해야 하나?”

“그럼 이번에 시험해 보자고.”

아직 자기 차례가 오지 않은 용병들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전의를 불태운다.

어차피 자신들이 잘 무장된 적 보병 연대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긁힌 상처를 입히는 정도.

피부가 조금 까져서 거칠게 되고, 살짝 피가 베어 나오고, 따갑고 가려워서 신경쓰이는 정도.

대부분은 굳이 의사를 불러 치료 받거나, 약을 바르지 않고 적당히 알아서 회복되게 놔둘 것이다.

아마 조만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기껏해야 딱지가 앉는 정도겠지.

그렇다면 그 긁힌 상처를 온 몸에 입히면 어떨까?

“크헉, 커어억!”

“뭐야 저 새끼들!”

“조심해라,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해!”

화승총 사수 입장에서 눈에 보이고 사선에 들어오더라도, 쏠까 말까 애매한 각도에서 접근한다.

권총을 쏘는 놈도 있고, 화살이나 투창, 돌맹이 따위가 날아오기도 한다.

라솔의 경기병들이 투창을 사용하는 것은 유명하니까, 타라트라바 보병 입장에서도 이런 공격이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지만.

상대는 엘랑키아 기병이라 생각했던 병사들에게는 당황스러운 것은 분명하다.

그러다가 대담하게도 올가미를 던져 모서리를 담당하던 총병 장교의 몸을 잡아챘다. 장교는 그대로 질질 끌려 부대로부터 멀어진다.

발버둥치던 장교는 간신히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 올가미를 잘라내는 데 성공한다.

“그르륵, 커헉!”

숨을 쉬지 못하는 극심한 공포에서 벗어난 장교가 몸부림치며 잘려 나간 올가미를 풀러낸다. 한참 기침을 하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한동안 산소가 부족했기 때문인지, 머리가 멍하고 생각이 잘 되지 않는다.

어서 부대로 돌아가기 위해 주변을 살핀다.

생각보다 거리가 멀다. 더러운 말 탄 야만인 놈, 대체 얼마나 끌고 온 거야.

뿌옇던 시야가 차츰 정상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원래 배치되었던 위치를 확인하고 동료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발을 뻗는다.

동료들이 뭔가 외치며 팔을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아까의 충격 때문인지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어찌됐든 어서 부대로 돌아가야겠기에 발걸음을 빨리···.

빠각.

프리스마라 기병의 철퇴가 투구로 보호받지 못하던 목 뒤편을 때린다.

너무 심한 충격은 피부와 근육 조직을 부수었을 뿐만 아니라, 목을 완전히 꺾어 놓았다.

앞으로 쓰러진 장교는 머리가 땅에 닿기도 전에 절명한 상태였다.

“아라라라라라라라!”

“아라라라라라!

“카라라랏, 카라라라라라라라!”

날카로운 소리가 당황한 타라트라바 보병들의 주변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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