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8.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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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중대 깃발 보이는가?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방어선을 긋는다!”
“옛, 연대장님!”
“이 선은 적이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다. 콘도티에레께서 그렇게 판단하셨고, 나도 거기에 동의했다.”
지빌링엔 연대장 에르만 슈피리가 부하, 휘하 중대장들에게 훈시한다.
“여기가 우리의 무덤이 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자. 지빌링엔의 흑곰은 두려움 없이 피를 흘리기에 가치 있고 존중받는 것이다. 미래의 어린 흑곰들을 위해서!”
“미래의 어린 흑곰들을 위해서!”
능숙한 지빌링엔의 장교들은 주어진 자리에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급박한 상황이다. 겨우 화승총 사거리를 겨우 넘는 정도의 거리에 라솔 군의 선봉이 있었다.
다행히, 적도 방어선을 돌파해온 직후이다. 창병과 총병이 어지러이 뒤섞인 적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간발의 차이로 방어 대열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동료인 트랑카벨 영지군 제10 카르카냑 연대와 함께.
“제10 연대의 트랑카벨 친구들은 괜찮을까?”
“우리보다 늦게 도착했는데 벌써 방어선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네. 우리가 맡은 일이나 잘 하자고.”
에르만은 휘하 중대장인 알골 딘다르트의 말에 선선히 동의했다.
적이 드 레뮤즈 방어선과 서부군 방어선의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그래서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가 파견되었다.
드 레뮤즈 군의 오른쪽 끝을 보호하는 좌측이 제10 연대, 그 오른편이 자신들 지빌링엔 연대이다.
전군의 모서리를 맡은 제10 연대의 방어선에 가해지는 압박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에르만은 내심 자신들이 저기를 지켜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중대를 파견해서 트랑카벨 군을 지원해야 하는 건 아닐까?”
“어이구 연대장님, 콘도티에레께서 판단하신 일이 아닙니까?”
“으으으··· 아니, 그 분의 판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봐도 엄청난 피가 흐를 위험한 전장이 아닌가.”
“...혹시 모르니 언제라도 도울 수 있도록 예비대를 가까이 배치하기는 하겠습니다.”
알골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도 내심 걱정이 아예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위험한 싸움을 많이 겪어온 용병의 자부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유민 출신의 정규 보병들은 ‘마지막의 마지막’ 위험한 순간에는 끝까지 버틸 만큼 근성있지 않다는 선입견이 있는 모양이다.
반대로 정규 보병들 역시, 용병에 대해 비슷한 편견이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믿음직한 친구들이지만, 정말 위험을 목전에 두면 결국 금전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이니 전선을 이탈할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고.
허나 군주의 소집령이나, 금화가 오간 계약이나 병사들이 전장으로 나서게 되는 이유의 일부일 뿐이다.
군주의 명령도, 빛나는 금화도 사람이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극복하게 하는 데엔 부족하니까.
지금 그들이 이 자리에 서서 죽음을 불사하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사실 그들은 모두 알고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두 연대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형태로 대열을 짜고 있지 않았겠지.
딱히 콘도티에레가 시킨 것은 아니다.
두 연대장이 사전에 합의를 본 사항도 아니다.
그럼에도 제10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는 서로가 접촉하는 부분에서 최대한 힘을 아껴, 반대 방향에서 몰려올 적을 막는 방어선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우리를 위해 반드시 버텨주리라.
그리고 우리는 저들을 위해 반드시 버티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서부군은 어떻게 됐지? 설마 이대로 전멸하는 것은 아니겠지?”
에르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글쎄요, 아직 적 건너편에서 총소리가 요란한 것을 보면···.”
“아직 버티고는 있는 것일까.”
알골은 말꼬리를 흐렸다. 총소리가 요란하다는 것은 아직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는 하지만 유불리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최후까지 완강하게 싸우며 적을 붙잡아 주는 상황이라면 좋겠지.
하지만 정 반대로 적의 공세 앞에 이미 완전히 무너졌으며, 소탕전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미, 적지 않은 서부군 병사들이 적으로부터 등을 돌려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 그게 지빌링엔이 전장 반대편에 도착한 이유였으니까.
그리고··· 베테랑 용병으로서 한 번 도주자가 대량으로 나온 경우, 인접한 부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부군의 전력 손실은 심대하겠지.
하지만 동맹군으로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만큼 자신들에 대한 공세는 늦어질 테니까.
“서부군의 높으신 분이 우리 연대를 찾아왔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글쎄, 나도 만나보긴 했는데 대체 알 수 없는 사람이었어. 평생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백면의 도련님 같은 느낌과, 전설 속에서 나온 것 같은 영웅 같은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고 해야 하나?”
“그거야말로 정말 알 수 없는 표현이 아닙니까?”
“으음, 나도 평생 그런 사람은 만나본 적 없어서 모르겠군. 그래도 허튼 소리로 한 말은 아니야. 내가 쓸 수 있는 표현은 전부 써 본 거라고.”
“연대장님이 그러시다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부디 전설 속에서 나온 영웅 같은 사람이라면 좋겠네요.”
그래야 다 무너져가는 병력을 다시 규합해, 아군을 공격해오는 적의 뒤통수를 계속 괴롭힐 수 있을 테니까.
“왕국에 주신의 영광 있으라!”
“왕국에 주신의 영광 있으라아!”
그 때,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대열을 조절하던 적군이 창을 일제히 구호를 외치며 이쪽 방향으로 겨눈다.
“적이 슬슬 움직이려는 모양입니다. 라솔 군과 싸워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룬발트에서 많이 싸웠었지.”
“하지만 이번 적은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라 라솔 국왕이 직접 파견한 정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귀신 같이 강하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이미 엘랑키아 국왕의 정예도 박살낸 적이 있지 않나. 우리도 망신창이가 되기 했었지만.”
“아핫, 맞습니다, 연대장님. 이번에는 망신창이까지 되지는 않았으면 하네요.”
연대장인 에르만도, 휘하 중대장인 알골도 자신들이 이번에 유난히 말이 많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긴장했기 때문인지, 혹은 정말로 생각보다 여유가 있어서 농담을 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직후에 연대에게 아주 가혹한 시간이 올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미래의 어린 흑곰들을 위하여 싸울 것이다.
이제 제법 머리가 길어 어린 아가씨가 된 스테페네트 슈피리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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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온다! 온다아!”
“겁 먹지 마! 자기 자리 지켜어어!”
“엘랑키아를 위하여!”
“왕국에 주신의 영광 있으라!”
타타타타타탕!
“으아악!”
“크흑, 크아아앗!”
“으흐흑, 살려줘어···.”
또 한 차례의 일제사격이 전장을 휩쓴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적을 마주했으면서도 아직까지 살아 남은 비교적 운 좋은 총병들이 서둘러 다음 탄환을 장전한다.
현재 라솔 군은 적진 깊숙이 승리를 향한 쐐기를 박아넣는데 성공했다.
방금 전까지 엘랑키아 군의 연대가 있던 장소를 채운 것은 라솔의 선봉이었다.
돌파의 순간, 일시적으로 대열이 흐트러졌던 라솔 군 우노스 연대는 다시 원래의 사각 대형을 회복했다.
현재 왼쪽과 오른쪽, 양쪽 방향에서 적과 접한 상황이면서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방으로 총탄을 날린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움직이는 요새와도 같다. 물처럼 변화가 무쌍하면서도 돌처럼 단단하다.
왼쪽의 엘랑키아 군도, 오른쪽의 엘랑키아 군도 섣부르게 다가오지 못한다. 이동하는 요새의 위용에 눌린 것처럼 말이다.
다만 거기서 더 전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적 우익 놈들, 왜 이렇게 끈질기지?”
“...더 물러설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적을 너무 우습게 보았는가.
하류 주둔군 사령관, 퀸토 로르케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자신이 판단을 실수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적 연대 하나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와해시켜 버렸다.
그 빈 자리로 용서 없이 밀고 들어간 것은 라솔 전군에서도 손꼽히는 최정예, 검천사의 맏이 우노스 연대였다.
그 직후, 잠시 화력을 무너지기 시작한 적의 우익, 즉 서부군에 집중했다.
전투 초기부터 유난히 오합지졸이라 반응이 신통치 않다 생각한 점도 있었고 완전히 붕괴가 시작되었다 느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전 도주는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일단 부대 하나가 무너지면 주변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쉬웠다.
그러니 여기 병력을 집중한 것은 옳은 판단이라 생각했다.
짧은 시간을 투자해 적 우익의 잔존 병력을 일소하면, 전장에 여유가 생긴 병력으로 아직 버티고 있는 적의 주력군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아직 수천 기에 이르는 적 기병이 남아있고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보병도 없이 기병 주제에’ 그때가서 뭘 할 수 있겠나.
본래 대기병전이 준비된 보병 연대의 방어선에 적 기병이 뛰어들어 오는 것은 오히려 고마운 일이니까.
절대 무리한 기동은 아니다. 오히려 약화된 적을 먼저 때린다는 것은 전술의 상식과도 같은 상황. 부대를 하나 통째로 섬멸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고.
다만 문제는 그 섬멸이라는 것을 못했다는 것이다.
2개 연대, 아니 1.5개 연대 정도밖에 남지 않은 적 우익의 잔존 병력은 갑자기 똘똘뭉쳐서 악착같이 버티기 시작했다.
이대로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 붙이면 머지 않아 완전히 붕괴시킬 수 있겠지.
하지만 적진에 쐐기를 박아 넣은 어정쩡한 상황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적은 생각보다 아주 조금 더 잘 싸웠고, 원래 위치에서 많이 밀려나기는 했으나 전면적인 전열 붕괴는 피해냈다.
그렇게까지 위협적인 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 본대를 공격하면서 후방에 두기에는 찝찝한 규모인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변경백 각하. 적 본진은 어느새 측면에 어설프나마 병력을 추가 파견해 새로이 방어선을 만들고 있습니다.”
“으으음··· 재빠르군, 적장은 미리 근처에 예비대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인가.”
참모장 아드리아니의 말에, 퀸토 변경백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의 한 방에 끝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시간도 화력도 기세도 아주 조금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지, 적 우익은 1개 연대와 예비대를 남겨 견제하고, 나머지는 적의 중앙군을 친다.”
“옛,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아쉽다. 매우 아쉽지만 여전히 우세인 것은 라솔 쪽이다.
분명 1만에 가까울 적의 절반 정도가 죽거나 도망쳤으며, 나머지도 간신히 대열을 유지하고 있을 뿐 위협이 아니다.
그에 비해 아군은 하류 주둔군의 검천사들이 적의 본진을 두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포지션을 확보했다.
전투의 승패가 절반 가량 이쪽으로 넘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변경백 각하, 주공 방향은 어디로 할까요?”
“측면을 지키는 모서리부터 무너뜨리기로 한다. 저 깃발은 무엇이지? 레뮤즈 백작의 깃발은 아니지 않은가? 용병인가?”
“동부 변경의 가문에서 보냈다는 부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용병일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상황에 의존할 병력이 용병 밖에 없다니, 엘랑키아의 보병은 비참하군.”
마치 라솔의 기병처럼.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서로의 치부에 가까웠다.
어느 쪽이든, 라솔의 검천사들의 날카로운 칼 끝을 막아내지는 못하리라.
“명령을 전달하라! 저 보잘것 없는 병력을 무너뜨리고, 드 레뮤즈 백작을 산 채로 끌고 오라고.”
“옛,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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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젱 드 마로텍스 백작은 방금 전까지 최후를 직감하고 있었다.
적의 터무니없이 강력한 공세 앞에서 어설픈 방어 전술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나름 전장에서 뼈가 굵은 경험으로 개선했다 생각한 효율적인 조합이나 배치 따위, 압도적인 기량으로 밀어 붙이는 라솔 보병의 공격 앞에서 무력하다.
마지막으로 참전했던 북방 전쟁에. 거기서 상대했던 나우데사 보병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는 자신과 자신의 연대가 드디어 여기서 끝장나는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짧은 시간이 흐른 지금, 상황이 조금 변했다는 것은 확연하다.
계속 밀리기만 하던 방어선은 어느덧 확고해졌으며, 전방의 지친 병사들을 교대시킬 수 있을 정도까지의 여유가 생겼다.
이유는 명확하다.
적의 기세가 한풀 꺾였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던 적이 전방에서 병력을 속속 빼고 있었다.
그 병력과 기세가 줄어들면서, 한계까지 도달했던 서부군의 방어선은 잠시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아군의 본진, 드 레뮤즈 백작의 진영이 위험하다.
“빌어먹을···.”
그렇다고 욕설 외에 루젱 백작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현재 그들은 적에게 ‘전력을 집중할 필요도 없는’ 취급을 받은 상태. 간신히 숨통을 돌린 상태로 적의 배후를 노리는 공격 따위는 절대 불가능하다.
대체 앙비토 사령관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군인으로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관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그 콘도티에레라 불리는 노련한 용병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면···.
“대열을 벗어난 병력을 수습하고 여유가 생긴 부대는 병력을 재편하라!”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약자에게는 약자의 싸움 방식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