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93화 (293/556)

35-16.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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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군의 보병 연대들이 담당한 우측 방어선의 일각이 무너졌다.

지금까지 평온했던 사령부에는 순식간에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첼레스티나, 제10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 상황은 어떻지?”

“네에, 콘도티에레! 현재 둘 다 행군 대형 편성 중이에요! 제10 연대는 탄약 보급 때문에 시간이 조금 필요하고요오!”

“상황이 급하니 곧바로 출발을 전달해줘. 아니, 기존 이동 명령을 정정해야 하니 여길 봐!”

내가 종이를 꺼내기가 무섭게, 눈치 빠른 첼레스티나가 곧바로 펜을 넘겨준다.

“자, 여기가 드 레뮤즈 보병대의 주 방어선, 그리고 여기가 좌익, 트랑카벨 파견대의 위치야.”

“네에, 콘도티에레!”

나는 펜을 넓은 면으로 선을 지익 지익 두 개 그은 후, 뾰족한 끝으로 좌익의 뒤편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가 현재 제10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가 있는 장소지. 원래는 우익의 서부군을 도우러 갈 예정이었지만, 방어선이 단절 될 것 같아서 여기 새로운 방어선을 설치해야 해.”

화살표를 반대편 끝으로 그린 후,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드 레뮤즈 보병대의 오른쪽 끝에 다시 굵은 선을 지익 그린다.

“이 역할을 제10 연대와 지빌링엔이 해야 해. 지빌링엔이 안쪽, 제10 연대가 드 레뮤즈 방어선과 연결되는 모서리 끝을 맡는다! 이렇게 전달 부탁해!”

“네에, 콘도티에레. 곧바로 전할게요!”

“그래. 이전의 모든 명령을 취소하고 최우선 명령!”

“네에, 최우선 명령!”

나에게서 종이를 받아간 첼레스티나가 서둘러 전령들에게 달려간다.

사전에 계획이 있었던 경우가 아니라면, 지휘관의 의사를 전투 부대에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매우 큰 일이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을 전해질 때 세 명만 거쳐가도 완전히 다른 내용이 된다는 말이 있다.

사전에 용어, 역할, 의도를 지휘부와 공유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령관의 의도가 엉뚱하게 전달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참모와 전령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보통 두 세 다리는 건너기 쉽고, 다시 전방 지휘관의 입에서 일선 전투병들에게 전달되는 한 과정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기존에 내렸던 명령을 덮어씌우는 새로운 명령이 급하게 내려진 경우에 그렇다.

일부 전방 부대가 수령한 명령 최신화가 되지 않는다면, 같은 연대 내부에서 불협화음이 생기게 되고 그 결과는 최악의 참사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이미 적이 장악한 지역으로 ‘행군 대형’으로 나아간다거나 하는 상상하기도 무서운 일이.

정말 첼레스티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녀라면 철저하게 내 의도를 전방에 잘 전달해주겠지.

가장 급한 명령은 첼레스티나에게 전달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할테니, 다음으로 급한 명령을 내릴 차례다.

“전령!”

“옛, 콘도티에레!”

다시 전령을 부른다. 정보 참모가 긴장한 표정으로 전령고 함께 달려온다.

주로 명령 전달을 첼레스티나가 해 오긴 했지만, 이 눈에 익은 젊은 장교 역시 성실하고 수수하게 일을 잘 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은 알고있다.

분명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겠지.

“우익의 소베트르 경에게 전령! 본진으로 귀환하지 말고 병력을 온존하며 서부군이 교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지원할 것! 이상!”

“우익의 소베트르 기병대장에게 전령! 본진으로 귀한하지 말고 병력을 온존, 서부군이 교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지원할 것!”

“그리고 한가지 추가, 명령 수행이 어려워지는 경우 지휘관의 재량에 맡긴다, 이상!”

“본진으로 귀한하지 말고 병력을 온존, 서부군이 교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지원할 것! 명령 수행이 어렵다면 지휘관의 재량에 맡긴다!”

“좋아, 바로 전달하게.”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가장 급한 명령 두 개를 늦지는 않게 전달했다.

다소 후방에 있는 사령부에서 보아도, 서부군의 상황은 엉망이다.

대열을 지켜내지 못하고 밀려내는 부대가 여럿 보이고, 아예 무기까지 버리고 도주하는 병사들이 생겼다.

그리고 당연히, 그 비어버린 자리를 비집고 라솔 군이 들어오고 있었다.

거대한 바위를 파고 들어가는 쐐기의 끝단처럼, 라솔 보병대의 선두가 억지로 틈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좁은 팀을 통해 밀고 들어오는 병력이니, 대열을 갖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솔 보병들은 나름의 진형을 갖추고 협력하고 있었다.

서로 등을 맞대고, 공간이 생기면 새로운 보병이 밀고 들어와 조금씩 공간을 확보한다. 혼란스럽지만 통제되지 않는 혼란이 아니다.

오히려 통제되지 않는 혼란은 막는 쪽인 서부군 보병 사이에서 퍼져나가고 있겠지.

“아인멜츠 경, 아직 서부군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해진 게 없지요?”

“죄송합니다, 참모장! 방금 사람을 파견했습니다만···.”

“알겠습니다.”

딱히 아인멜츠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사령부에 같이 있었는데, 내가 모르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일이다.

서부군에 무슨 일이 생겨서 갑자기 대열이 무너졌는지, 나머지 병력은 어떤 상황인지.

적이 너무 많이 밀고 들어와서 대열이 분단되기 전에 알아야 한다. 적의 침입이 굳어지면, 먼 거리를 우회해서 전령이 오가야 하기 때문에 너무 늦어진다.

나는 최대한 냉정하게 행동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상황에 따라서 서부군을 포기하고, 트랑카벨과 드 레뮤즈의 병력만으로 싸워나가야 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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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티에레에게 좌측 주 방어선 지휘를 맡은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는 예비대의 슈토르히 총병들에게서 예비 화약을 공출하도록 명령했다.

“아 이거 우리건데 아무리 대장 명령이래도 이건 좀.”

“어차피 보급품이지 않냐 이 녀석들. 쟤들 보내고 나서 다시 나눠준다니까.”

“그래도 며칠 같이 잤더니 정 들어서 특별하다고요!”

슈토르히 총병들은 장난스럽게 징징거리면서도 손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이 모인 용병대이다. 명령을 받은 것 만으로도 지휘부의 의도 따위는 파악하고도 남았다.

덕분에 빠르게 전장으로 향해야 하는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총병들은 부족한 탄약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거 가지고 얼른 다녀 와!”

“참고로 빌려 주는 거니까 꼭 나중에 갚아야 해! 이자도 받는다?”

예비 탄약을 받아 허겁지겁 대열로 돌아가는 트랑카벨 정규 연대의 보병들에게 슈토르히 병사들이 너스레를 떤다.

“지원 감사합니다, 루트비히 경.”

“시간에 맞춰 다행입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우측을 잘 부탁드립니다, 기즈 연대장님.”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콘도티에레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겠습니다.”

“예비 탄약과 지원 포병들도 대열이 꾸려지는대로 출발할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루트비히는 각 잡힌 경례를 남긴 후 부대로 돌아가는 동료 연대장의 뒷모습을 굳은 얼굴로 바라본다.

저들은 분명 어려운 전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먼저 출발한 지빌링엔이나, 뒤따르는 제10 연대나.

그 중에서도 제10 연대는 새로운 아군 대열의 한쪽 끝을 맡아야 한다.

공세와 난전에 강점을 지닌 지빌링엔 연대에 비해서 전통적인 밀집대형 싸움에 강점을 보이는 트랑카벨 정규 연대이니 콘도티에레가 그렇게 판단했겠지.

자신도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으니 잘 알고 있다. 무너져가는 아군을 지탱하는 것은 적을 맞아 싸우기만 하는 것보다 어렵다.

그래서··· 저들이 향하는 위험한 전장에 뭔가 더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깝다.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지휘를 맡은 기즈 드 콜롬브는 노련한 군인보다는 무던한 하급 관리와 같은 인상이다.

외모나 성격이나, 둥글둥글하고 모나지 않게 생긴 그는 원래 트랑카벨 가문의 하급 가신이라고 한다.

하지만 외모로는 상상도 못할 만큼, 그가 지난 블랑독에서의 전쟁에서 세운 공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물론 여울목의 전투나 샹다메리 전투, 마르사코르 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 지휘관으로 참전한 것도 그렇지만, 그의 진면목은 병력 양성이다.

드 누아 영지군을 최근 전장에 어울리는 실전 부대로 양성한 것에 이어, 드 레뮤즈 영지군 역시 빠른 속도로 현대화 시키는 데 성공했으니까.

콘도티에레가 일부러 지명해 훈련을 맡길 정도니 남다른 능력자는 분명하겠다.

“루트비히, 예비대 지원이라면 우리가 가는 게 맞지 않나? 콘도티에레는 어째서···.”

잠시 상념에 잠긴 루트비히에게, 슈토르히의 선임 중대장 중 하나인 크레시미르 두브람이 말을 건다.

루트비히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연대급 예비대로는 지빌링엔 연대를 제외하면, 자신들 슈토르히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콘도티에레는 슈토르히를 후방에 남기고, 제10 연대를 잠시 여유가 생긴 전방에서 빼서 지빌링엔 연대와 함께 파견하는 쪽을 택했다.

콘도티에레는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

자신이 현재 좌측 보병 방어선의 명령 전달을 담당하고 있으니, 슈토르히를 나서면 명령체계가 꼬이는 것을 걱정한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을 중견 지휘관으로 남기고, 대신 크레시미르를 연대장 대리로 삼아 파견해도 된다.

주로 루트비히가 전투시에는 연대장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지만, 슈토르히의 선임 중대장들은 어느 누구라도 얼마든지 연대를 훌륭하게 이끌 수 있다.

크레시미르는 물론, 지금은 다른 업무 때문에 연대를 떠나있는 모리츠나 첼레스티나도 말이다.

슈토르히는 그런 용병단이다. 설령 선임 중대장들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모두 부대를 떠났더라도, 남은 장교들이 어떻게든 운용할 정도이기도 하고.

어렴풋이 짐작해보자면, 분명 콘도티에레는 슈토르히를 ‘여기서 쓸 일’이 있다고 판단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때가 될 때 까지, 군소리 없이 기다리고 있어야지.

항상 콘도티에레는 때가 되면 일거리를 주지 않았던가. 때로는 좀 벅찬 일감이 떨어지는 경우도 없진 않았지만서도 말이다.

“나도 잘은 모르겠다. 콘도티에레께서 생각이 있으시겠지.”

“역시 그렇겠지? 쓸데 없는 걸 묻다니,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그보다, 타라트라바 놈들이 다시 들어오려는 모양이야.”

“음···.”

확실히, 잠시 물러났던 적이 다시 대열을 조정하여 이쪽을 향하고 있다.

이번에는 거의 5천명에 가까운 큰 규모의 지원군이 보강된 공세일 것이다. 지원군이 어떤 병력인지는 몰라도 전에 비해서 부하가 걸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기는 전방 연대를 하나 줄여가면서, 반대편 전선으로 2개 연대를 파견한 상태니까. 책임이 막중해졌다.

“급해지면 우리 돌격대 파견해서 구멍 막는 용도로 써도 된다고?”

“아니, 슈토르히는 콘도티에레가 필요로 하실 때까지 예비다. 나머지 힘으로 어떻게든 지킬 거야.”

“허어, 힘들지 않겠어? 어쨌든 만약의 만약에는 우리가 있으니까 혼자 너무 고민하지 말라고. 돌격대 따로 쓴다고 콘도티에레께서 뭐라 하시진 않을 테니까.”

“돌격대 포함해서 콘도티에레가 생각한, 완전편제 슈토르히 연대니까.”

루트비히의 세상 없는 단호한 대답에, 크레시미르는 뭔가 기쁜 표정이 되었다.

전쟁의 명가 자이트리츠 가문 출신이라는 자부심, 콘도티에레의 명령을 받아 전선 하나를 지탱한다는 자부심, 슈토르히의 선임 중대장이라는 자부심.

고양감으로 가득한 루트비히의 눈이 2개 연대가 빠져버린 좌측 전선을 향한다.

아군은 약해졌고, 적군은 강해졌다.

그렇지만 지지 않을 것이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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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팔! 엘랑키아 돼지새끼!”

“쿨럭, 그르륵···.”

서로 단검과 상대방의 멱살을 움켜쥐고 먼저 쓰러진 병사들이 흘린 피로 범벅이 된 진흙탕을 구르던 두 병사가 떨어진다.

승리한 쪽은 라솔 보병이다. 쇄골 뼈 위에 단검을 꽂아넣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엘랑키아 보병대의 하급 장교로 보이는 적은 피거품을 뿜어내더니 곧 절명했다.

그래도 승리자 또한 무사하지만은 못하다.

서로에게 단검을 찔러 넣기 위한 육탄전이 얼마나 격했던지, 가죽 장갑이 다 찢어져 피에 물든 사이로 맨살이 보일 정도였다.

서로 단검을 쳐내고 붙잡은 흔적이다. 만약 장갑이 없었다면 손가락이 잘렸을지도 몰랐다.

체력 소모도 너무 심해 한참 숨을 몰아쉬다가 상체를 세운다. 서로 이기겠다고,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이리도 힘든 일이다.

“돼지새끼 주제에! 빌어먹을, 끈질겨서··· 어억!”

욕설과 함께 일어서려던 병사가 비명과 함께 다시 무릎을 꿇는다. 이제 보니, 허벅지에 적의 단검이 거의 손잡이까지 깊게 찔려 있다.

피가 물처럼 흘러 나와 오줌이라도 싼 것 처럼 바지가 축축하다.

“시팔··· 시파···.”

힘을 다 써서 어지러운 줄 알았더니, 피가 이만큼이나 흘러 나오고 있었나.

견디기 힘든 피곤함이 몰려온다. 철퍼덕 소리. 피로 질척한 바닥이 갑자기 얼굴을 향해 떨어진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그의 몸을 타넘고 라솔 병사 몇 명이 달려간다.

몸에 총알이 박히고 창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을 대체할 동료가 올 때 까지는 기어코 자리를 사수한다.

그렇게 어떻게든 적진에 상처를 내고, 손톱을 박아 찢어 발긴다. 내가, 혹은 다음에 올 동료가.

이것이 항상 최강임을 자부하는 우노스 연대의 방식이다.

“도망간다? 적이 도망간다!”

“꼴 좋다 엘랑키아 돼지 놈들아!”

“추격하지 마. 이대로 선을 긋고 후속부대를 기다린다. 왕국에 주신의 영광 있으라!”

“왕국에 주신의 영광 있으라!”

동료들의 우렁찬 외침을 들으며, 방금 작은 승리를 거두었던 라솔 병사가 실혈로 인해 숨을 거둔다.

바로 옆에는 방금 그가 쓰러뜨린 엘랑키아 하급 장교가 누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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