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3.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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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입은 갑주 차림의 기사가 절뚝거리며 온 힘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주변에서도 자신의 피인지 남의 피인지, 피투성이가 된 기사 여럿이 누군가는 홀로, 누군가는 남의 부축을 받아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멀쩡해 보이는 소수는 여전히 손에서 무기를 놓지 않고 뒤를 경계한다.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 적에 미련이 있는 것인지,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동료들의 시체에 미련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도주하는 기사들은 격렬한 전투 중에 말을 잃은 엘랑키아의 중장기병들이다.
기병이 전투 중에 말을 잃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수와 달리, 최소한의 마갑이나 털가죽 말고는 보호받지 못하는 말이 다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물론 면적이 넓어서 눈 먼 총탄에 맞는 경우도 있었지만, 백병전에서는 일부러 말을 공격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낙마는 물론 기수에게 큰 충격을 주지만, 그 과정에서 크게 다치지 않은 경우에는 그대로 백병전에 돌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 도주하는 생존자들은 그런 경우였다.
말을 탄 생존자들은 이미 퇴각했고, 말을 잃고 뒤쳐진 기사들이 퇴각하도록 기다려 주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 어서 후퇴한다!”
“수고했으니 다음은 우리에게 맡기게.”
이들이 도망치는 방향에는 드 레뮤즈 가문의 기병대가 있었고, 도망쳐오는 방향에는 라솔의 코루냐 연대가 대치하고 있다.
양측의 거리는 100미터 안쪽, 한쪽이 싸우고자 하면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러나 드 레뮤즈의 기사들은 공격하지 않는다. 당연히 겁쟁이라서는 아니다.
드 레뮤즈의 기병대장 소베트르 드 랑두제는 명령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고,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서부군의 기병들을 구하는 한편, 엘랑키아 기병대의 존재감이 여전함을 과시한다.
이들이 전장에 나타나는 순간, 측면을 노리던 타라트라바 중기병들은 빠르게 퇴각했고 역공을 노리던 라솔 보병들 역시도 다시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방금 전까지 죽고 죽이던 상대가 도망치는 꼴을 본 코루냐 연대 소속의 라솔 보병들 역시 그냥 보고만 있고 싶은 건 아니다.
그들 발 밑에는 수 많은 인간과 말의 시체가 쌓여있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다.
몇몇 정말 격렬했던 전장에는 문자 그대로 시체가 겹겹이 쌓이다 못해, 짓밟힌 들풀이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을 정도였다.
그 절반 가까이는 코루냐 연대 소속 동료들의 시체이다. 성공적으로 엘랑키아 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충격력을 고스란히 받아낸 대가가 아무것도 없을 리는 없었다.
장전이 끝난 총을 든 총병들은 도망치는 엘랑키아 기병들의 등을 쏘고 싶을 것이다. 아니, 쏘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쏠 수 없다. 여기서 총을 비워 버리면, 저 새로이 나타난 적들이 돌격해올 때 막을 방도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올 테면 와 보라고 하고 싶을지라도, 누가 보아도 코루냐 연대 역시 격렬한 전투 끝에 한계에 이르러 있다.
지휘체계를 재편하고 부상자를 후송하고 탄약을 재분배하지 않으면, 두 번째 돌격에는 정말 무너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안하여 애매한 거리에서 도발하듯 늘어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라솔 총병들은 더더욱 약이 올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들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측면을 공격해오는 가공할 위력의 인간과 말, 그리고 강철과 화약으로 된 거대한 파도를 막아내는 지대한 공을 세웠다.
잃은 동료들 숫자 이상의 엘랑키아 기사들을 낙마시켰고, 적의 전력을 대폭약화시켰으니까.
드 레뮤즈의 기병대가 간발의 차이로 늦지 않게 도착해서 어느정도 회복이 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라솔 군의 좌측, 엘랑키아 군의 우측 전장에서의 무게추는 라솔 방향으로 기운 것은 분명했다.
“면목이 없구려···.”
“도아주셔서 고맙소이다.”
기병대장 소베트르는 침통한 얼굴로 살아 돌아온 서부군의 기사들을 맞이했다.
당당한 모습으로 출전했던 그들은 시간이 빨리 흐르기라도 한 듯, 그다지 길지 않았던 교전 동안 생명력이 다 빨린 듯 초췌해진 몰골이다.
그 와중에도 투쟁심만은 넘쳐나는 이들도 있었다.
“소베트르 경이라 하셨소? 구해주셔서 감사하오만, 이대로 우리를 선봉으로 다시 공격하게 해 주시오!”
“내 사촌이 전사했소! 지금 라솔 놈들의 발 밑에 비참하게 몸을 누이고 있단 말이오!”
“재공격을 승인해주시오 기병대장! 이번에는 오명을 씻어버리겠소이다!”
생존한 고위 기사들이 가문명을 대고 소베트르를 찾아와서는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그들이 진심으로 비통해서 그런 것인지, 혹은 정말로 재돌격을 통한 승리 가능성을 확신해서 그런 것인지, 패배로 부끄러운 마음을 발산하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 서부군 기병에 더해 드 레뮤즈 기병까지 합쳐져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병 전력이 모여있는 것은 분명하다.
확실히 막대한 희생을 지불한 것으로 보이는 라솔의 후위 연대 정도는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견제하기 위한 라솔 기병대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이 라솔 군의 전면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지원 온 드 레뮤즈의 기병대 역시 큰 피해를 입고 기동 전력으로서의 전술적 가치가 크게 손상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고.
최악의 경우, 연이어 격퇴당한다면 그건 정말 파멸이다.
우측 전역에 존재하는 엘랑키아 군 기병대가 소수의 경기병을 빼고는 소멸해 버리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복잡미묘한 전황은 누구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전술적 상황이야 어떻든 이 자리의 책임자, 사실상 재공격을 승인할 모든 권한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베트르 드 랑두제 전 남작은 눈꼽만치도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괘씸한 서부군 귀족들에 대한 반감이나, 명백한 전술적 판단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냥 그런 명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통치자로서도 기사로서도 평생 실패만 해온 인간이다. 그러므로 분에 넘치는 자의적 판단은 하면 안 된다.
그것이 오랜만에 전장에 나온 소베트르 드 랑두제가 결심한 자신만의 철칙이었다.
어쩌다 주군 라몽 드 레뮤즈 백작에게 불려 다시 지휘관으로 쓰이고는 있지만 그 이유는 자신도 도대체 모르겠다.
오로지 명령대로 하기로 결심한 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다.
물론 적이 먼저 공격해온다면 격렬하게 싸울 것이다.
그래야만 주요 명령 사항인 ‘서부군 기병대의 구출’을 완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닌 한 아무리 높은 인간이 훌륭한 목소리로 떠든다고 한들, 무모한 도박에 나설 일은 없었다.
“소베트르 경, 낙마자들의 수용이 끝났습니다!”
“다른 문제는 없나?”
“옛, 걷기 어려운 부상병들은 예비마에 태우거나, 동료 기병과 함께 이동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럼 귀환하도록 하자. 서부군을 먼저 보내고, 우리는 후위를 지키며 천천히 후퇴한다. 아군 후방으로 물러설 때까지 경계를 늦추면 안 돼.”
“옛, 소베트르 경!”
다시는 실패할 수 없었다.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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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전군의 우측을 담당한 서부군의 사령관,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후방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전장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전투 지휘는 그가 제안 받고, 승인한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오랫동안 엘랑키아 서부의 대표 군사령관으로 싸워온 선대 드 몽파르지에 공작, 앙비토의 아버지는 유능한 참모진을 남겨주었다.
이런 경우, 오히려 군사 방면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앙비토 공작이 나서는 것은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어찌됐든 나름의 효율을 갖추어 돌아가고 있는 복잡한 기계장치에 제대로 맞는지도 모를 톱니바퀴를 억지로 끼워 넣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드 몽파르지에 가문의 가신들은 현 가문의 주인을 지휘관으로서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충실한 자들이었다.
라몽 백작의 사령부에서 내려온 요구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고, 그 내용에 대해서는 보고도 꼬박꼬박 올리고는 있었다.
앙비토 공작은 보고를 유심히 들어보고 모두 승인하기는 했으나, 따로 의견을 말하는 법은 없었다.
그것이 그나마 이 거대하지만 어딘가 지휘부가 결여되어 있는 군대를 무난하게 움직이는 방법이었으며 시간을 아끼는 방법이었다.
“저··· 공작 각하, 어딘가 불편하십니까?”
올리앙 드 브레겔 남작이 트집을 잡아 벌였던 결투에서 실각한 이후, 앙비토 공작을 보좌하던 어린 시종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방금 전부터 그의 주군이 정말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눈이라도 깜빡이지 않았다면, 정말로 굳어버렸나 하고 착각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다음 순간, 공작의 왼쪽 눈에서는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고, 공작님? 이, 이걸 어째··· 어딘가 불편하십니까? 지금 곧바로 사람을···.”
“아니, 괜찮다.”
눈물이 흐르는데 닦아 드려야 하나, 그런데 주군의 얼굴에 손을 올려도 되나, 시종이 허둥대자 앙비토 공작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더니 장갑으로 아무렇게나 눈가를 닦았다. 흰 피부에 불그스름한 자국이 남는다.
“전쟁이란 참으로 비참한 일이로구나. 엘랑키아의 훌륭한 남자들이 이렇게나 많이 참혹한 주검이 되고 말았다니. 전투가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겠지.”
“그, 그렇습니다 공작님···.”
“하지만 또한 아름다운 광경도 보게 되었다.”
“아름··· 답다는 말씀이십니까, 공작님?”
“오, 아니다. 이는 어폐가 있었구나. 나의 가신들, 충성스러운 엘랑키아의 용사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싸우는 일에 아름답다 표현하다니 매우 어리석었다.”
“그, 그렇지는···.”
이제 막 소년 티를 벗어난 시종은 굳어버렸다. 이를 대체 긍정해야 하는가 부정해야 하는가.
높으신 공작님을 완벽하게 섬기는 모든 일을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교육받았고, 나름 자신감도 있었다.
그 중에는 주군이 하는 말은 정말로 상담을 원하는 것이 아니니, 그저 긍정해주고 맞장구치면 된다는 교육도 있었다.
그런데 이걸 긍정해도 되는가? ‘맞습니다, 공작님은 어리석으십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소년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아아, 번뜩이는 점이 보였다 정정하지. 트랑카벨의 에트라는 자는 실로 대단하구나. 그가 갑자기 드 레뮤즈 가문의 기병대를 보냈을 때 말이다.”
“예··· 예, 공작님.”
주제가 넘어간 것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시종이다.
“같은 시점에,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출전한 노브리크 경의 기사들이 당당하게 행동하는 모습만 보았지, 그들이 위험에 처할 미래는 전혀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 그건 그 분이 지휘관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공작님?”
“오오, 지휘관이라면 이 몸도 그렇지 않느냐? 이 몸도 서부군의 지휘관이다. 국왕폐하로부터 지휘권을 위임받은 드 몽파르지에 공작가의 주인이니까.”
“으, 으으···.”
시종은 다시 굳어버렸다. 말 실수, 질책받아도 할 말이 없는 명백한 실수였다.
다행히 그의 주군은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사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내가 더 가까이 있고, 내가 그들을 지휘해야 함에도 마땅하고, 이 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자리에 이 몸이 아니라 저 식량 창고의 소금에 절인 고깃덩이를 가져다 놓아도 아무 차이가 없었으렸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소년 시종은 조금 놀랐다. 여태껏 정면만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앙비토 공작 역시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볼 정도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소년은 공포에 질렸다.
그러나 진심이, 감정이 나온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공작을 모시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억지로 자신의 생각을 짜내 말한다.
“비, 비록 지휘는 라몽 백작님께서 하실지 모르더라도, 앙비토 공작께서는 부장되신 몸으로 이 자리에 계십니다.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저희 형님도, 공작님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습니다···.”
“오, 정말인가, 소년? 그대의 형님은 어디에서 싸우고 있는가?”
“전방의 보병 연대에서 중대 기수를 하고 있습니다.”
“아, 부대의 기수라니, 실로 영광스러운 자리이지 않느냐. 필시 많은 공을 세운 용사겠지. 이번 전투에서 무사하기를 기도하고 있겠구나.”
“그렇습니다. 형님은··· 형님은 저의 자랑··· 앗, 죄송합니다 공작님···. 제가 감히···.”
“아니다. 덕분에 이 몸도 기분이 나아졌다. 적어도 소금에 절인 고깃덩이보다는 나은 인간이 되지 않았느냐?”
“우··· 우···.”
어쩔줄 모르는 소년을 뒤로하고, 빙긋 웃은 앙비토 공작은 다시 전장을 바라본다.
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우익 사령관’의 마음 속에서는 여러가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트랑카벨의 에트라는 자가 바라보는 전장의 풍경은 어떤지 참으로 궁금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