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1.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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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를 지휘해보면 의외로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지휘관으로서의 손맛이라고 할까, 부하를 이끌고 공격에 나섰을 때, 혹은 방어를 시켰을 때 ‘이거다’ 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방금 내 공격 지시가 먹혀 들었다, 혹은 적의 공세는 막혔다 따위의 감이다.
특히 초급 장교 시절, 일개 보병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쏘고 뛰고 구르고 하는 경험을 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전방에서 적과 부딪쳐 본 경험이 연대장이나, 더 나아가 더 상급 지휘관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니.
물론 합리적이어야 할 지휘관 된 몸으로 증명 못할 미신이나 다름 없는 ‘직감’에 의존하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감을 바탕으로, 올라오는 휘하 부대의 보고가 더해진다면 전장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부하가 백 명 안쪽이면 모를까, 그 이상, 특히 천 명 이상 넘어가면 정확한 전장의 정보 따위는 사치이다.
모든것이 불확실하고 부족한 상황에서 부분적인 시야, 부분적인 보고, 부분적인 소리, 부분적인 느낌 등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해야 그나마 지휘가 가능해지니까.
이런 저런 요소들을 모두 긁어모아보면, 이번 방어는 성공하기는 했다.
“간신히 버텨는 냈군!”
라솔 군의 좌측 후방을 지키고 있던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 네 검천사 연대 중 막내인 코루냐 연대의 지휘관 마티오 가엘 데 프라가도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코루냐 연대는 이스키비르 도강 작전에서 선봉을 섰다는 이유로, 이번 전투에서는 후위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할콘 남작의 경기병대를 ‘격파’한 엘랑키아 기사들은 그대로 후위로 공격해왔기에, 전투가 불가피했다.
검천사들 중 서열이 가장 떨어져 재미 없는 역할을 맡았다 생각했는데, 세상에 가장 손해보는 역할일 줄이야.
“퀸토 변경백께 전령!”
“옙, 전령!”
“코루냐 연대가 엘랑키아 기사들의 발목을 묶었다! 하지만 단말마를 지르는 중! 들었나?”
“옛, 코루냐 연대가 엘랑키아 기사의 발목을 묶었다! 하지만 단말마를 지르는 중! 전달하겠습니다.”
상관에게 다소 무례한 보고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나름 효율과 재미를 둘 다 챙긴 블랙 유머이다.
지원이 늦어 연대가 무너진다면 그때는 무례를 나무랄 기회도 없겠지.
허나 지원이 제 때 와서 연대가 살아 남는다면, 그때는 무례하다고 욕 좀 먹어도 상관 없었다. 무려 3천 기의 엘랑키아 기병 돌격인데, 엄살 좀 부리면 어때.
사실 굳이 지원을 청하지 않더라도 현재 코루냐 연대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변경백의 사령부에서는 알 것이다.
안다면 지원군을 보낼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아마 더 큰 승리를 위해 보내지 못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명성 높은 직업 군인들인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은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 그 정도의 신뢰 관계 정도는 쌓여있는 관계였다.
사실 이런 헛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약간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구나··· 라는 생각까지도 했으니까. 물론 이건 농담이 전혀 아니었다.
“밀어내! 밀어내고 사각 대형을 복구해!”
“예비 중대는 대열이 복구되었으면 다른 균열을 지원한다!”
“창벽! 무너지면 다 뒈진다!”
탕, 타당, 탕! 타앙!
단속적으로 총소리가 들린다. 서로 너무나도 뒤섞이고, 너무나도 여유가 없이 빠듯한 상황이기에 연대가 가지고 있는 총기 대부분은 생각만큼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보병과 기병이 싸우는데, 양쪽이 모두 총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보병이 불리하다. 이게 현재 마티오 연대장이 생각하는 불안요소이기도 하다.
총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대열 안쪽까지 저돌적으로 파고 든 엘랑키아 기병들을 상대하는 창벽은 한계였다.
엘랑키아 기병은 악착같이 파고들어 대열 반대편으로 돌파하려 하고, 라솔 보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이런 혼란 통에 총병들이 마음 놓고 장전을 하거나 조준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상당수가 창벽의 일부가 되어 과하게 무겁고 뾰족하지도 않은 쇠막대기가 된 총으로 적을 밀쳐내거나, 말에서 떨어진 엘랑키아 기사의 멱살을 잡고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티오 연대장의 방어전은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령 코루냐 연대가 여기서 전멸하더라도, 엘랑키아 기병대가 부대로서의 기능을 찾으려면 한참이 걸릴 것이다.
이미 막대한 희생이 발생했고, 부대 단위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마구 뒤섞였다. 이대로는 다음 전술 기동에서도 충격력을 발휘하려면 재편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코루냐 연대는 네 검천사 연대 중 하나일 뿐이며 다른 아군 부대까지 포함하면 전군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서 자신들이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는 엘랑키아 기병대는 명실상부한 적 우익의 주력 기병이다.
때문에 서로 치명타를 입고 빈사상태가 되면, 당연히 라솔 군이 이득이다.
이쪽은 후위 연대 하나가 큰 타격을 입었을 뿐이지만, 상대쪽은 한쪽 측면의 기동 전력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것이니까.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랑하는 부하들, 목숨보다 중요한 코루냐 연대이지만 결국 전투 승리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소모품이다.
설령 연대장인 마티오 자신의 목숨이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말이다.
“예비대는 몇 개 중대나 남았지?”
“몇 개 중대가 아니라 이제 예비대라고는 딱 반개 중대 남았습니다!”
“큰일 났구만···.”
괜히 엄지손가락으로 허리에 찬 검의 칼집을 밀어 올려 딸깍 소리를 낸다. 여차하면 사령부 요원들도 백병전에 나서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귀족 계급이라고 갑옷과 투구도 좋은 걸로 입었고, 권총의 수도 많으니 딱 한 번 정도는 충격 부대로 활약 가능할지도 모르지.
사령부가 충격 부대 역할을 해야 할 정도라는 건 이미 연대를 말아 먹었다는 이야기겠지만.
엘랑키아 기병들은 정면으로 밀어붙이며 힘싸움을 거는 한편, 여유 병력을 계속 측면으로 보내며 빙빙 돌며 약점을 찾는다.
때문에 마티오와 참모들은 전 방향에서의 공격을 감내할 수 있는 사각 대형을 친 상태이다. 거기에 어떻게든 예비대를 만들어 약점을 채워 나간다.
최초에 엘랑키아 기사들의 충격력을 그대로 받은 최전방의 병력이 엄청나게 갈려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아직 적과 접하지 않은 ‘후방’에서 예비대를 차출하고, 당장 역할이 애매한 총병들의 일부가 총 대신 창을 드는 등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그 충격력을 거의 받아낸 지금, 그래도 약점이 없을까 후방으로 돌아오는 적 기병이 껄끄럽다.
그야 당연히 후방에 배치된 일부 병력을 급하다는 이유로 전방으로 돌렸기에 후방 중대들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티오에게, 코루냐 연대에게 주신이 웃어주었다.
“마티오 연대장님, 지원군이 옵니다!”
“드디어!”
참모의 담담한 보고에, 마티오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양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오리라 생각하고 있기는 해지만, 그만큼 초조했던 모양이다.
라솔 군의 후방에서 달려온 지원군은 약 2천기가 조금 안되는 기병대였다. 고맙게도 퀸토 변경백은 코루냐 연대를 구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기병 전부를 보낸 것이었다.
절반 가량은 동맹군인 타라트라바의 군주가 빌려준 중기병이고, 나머지 절반은 하류 주둔군이 보유한 보조 전력인 경기병이다.
막강한 엘랑키아 중장기병은 여전히 3천 기가 넘어 보이므로 전력 면에서는 열세다. 하지만 그 전력의 태반이 코루냐 연대라는 늪지대에 빠진 상태니까.
지금으로서는 충분히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전력이다.
“전진! 주신의 가호는 타라트라바에 있도다!”
“타라트라바에 있도다!”
“전진! 전지인!”
선두에서 빠르게 속도를 올린 타라트라바의 귀족 기병들은 저돌적으로 돌격해 들어가지는 않았다.
대신 이미 코루냐 연대의 보병들과 교전하고 있는 엘랑키아 기병들의 후방을 노리며, 마치 날개를 펼친 맹금처럼 날카롭게 다가왔다.
타타탕! 타당!
타다다당! 타타타탕!
적극적인 접근전을 회피하고, 대신 거리를 유지하고 총격을 가한다. 괜히 혼전에 뛰어드는 대신, 유리한 싸움만 하겠다는 영리한 선택이었다.
당장이라도 숨 넘어가기 직전인 코루냐 연대의 최전방에서 보면 답답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장전된 권총을 이미 대부분 써 버렸을 엘랑키아 기병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결정적인 전열 붕괴를 노리는 공격은 아니나, 일방적으로 어느 정도의 사상자를 누적시키며 심리적인 타격도 가하고 있으니까.
확실히 코루냐 연대에 가해지던 압박이 확 줄어든다.
조금 더 일찍, 최소 몇 분 정도만 먼저 상대하던 코루냐 연대를 완전히 붕괴시켰다면 타라트라바 기병대의 어설픈 카라콜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았겠지.
대열이 흐트러졌을지 몰라도, 중기병만 따지면 세 배 가까이, 경기병을 합치더라도 1.5배의 병력 차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못했으니, 이제 엘랑키아 기병대는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선택해야 할 것이다.
병력을 후퇴시켜 병력이라도 잔존시킬 것인지, 아니면 상대인 코루냐 연대도 한계에 이르렀으리라 믿고 마지막 짜내기 공세에 들어갈 것인지.
참고로 코루냐 연대는 아직 여력이 남았다.
이미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지만, 평생을 엘랑키아를 목표로 강 건너에 주둔하며 창날을 날카롭게 갈아온 정예군이다.
마티오 연대장은 긴장을 숨기며 쓰게 웃었다. 공멸을 원해 함께 죽음의 늪 속으로 떨어지고자 한다면 기꺼이 함께 가줄 수 있었다.
코루냐 연대가 전멸할지라도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 그리고 라솔 왕국은 승리 할 것이기에.
“연대장님! 전령, 전령이 왔습니다! 할콘 남작의 기병대에서 보낸 전령입니다!”
“뭐, 할콘 남작이??
그러고보니 할콘 남작을 잊고 있었다.
지휘관들은 어느 정도는 손맛, 즉 감에 의존해 부대를 이끈다.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면, 가령 적이 거짓 패배를 가장해 도망친다면 그 위화감이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데 할콘 남작은 이 ‘가짜 손맛’을 적에게 남겨주는 데 전문가이다. 반대로 말하면 자기 부하의 일부를 버림말로 남겨주고 도망치는 데 귀재라는 이야기다.
국가를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후위를 자처하는 기사들도 아니고, 돈으로 엮인 용병대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돈과 출세의 기회, 그리고 속임수를 통해 어중이떠중이 부하들을 이용하는 면에서는 천재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번에도 그렇게 엘랑키아 기사들을 잘 낚았다.
적의 돌격을 유도했고, 승리감에 취한 그들은 막 약점을 드러내고 있던 코루냐 연대로 돌격해왔으니까.
그리고 적이 속았다는 것을 알 때 쯤이면 돌아와서 적의 후방을 공격하기로 했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
“할콘 남작님이 보내서 왔수다!”
오랜 전투의 흔적과 녹으로 지저분한 흉갑을 걸친, 붉은 머리의 용병이 불손한 말투와 눈빛으로 마티오의 앞에 섰다.
참모들이 그 무례함에 아연실색했지만 나서지는 않는다. 이미 이 군인답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익숙하니까.
“적 기병 후방을 때리려 했으나, 지원군이 오고 있어 불가능하오. 댁들도 어서 대응하시고, 이상!”
지원군? 어디서 지원군이···.
라고 생각한 순간, 정말로 아직 버티고 있던 엘랑키아 보병들의 측면에서 한 무리의 기병들이 튀어나와 정렬하고 있었다.
예비대는 경기병만 남았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건 분명 예상에 없었던 중기병이다.
뭔가 일이 조금 꼬일지도 모르겠다.
“경고 고맙다고 전해라. 지금 할콘 남작과 부대는 어디에 있는가?”
“저기 언덕 너머에 있수다! 때 되면 어련히 올 테니 걱정하진 말아주쇼!”
불손한 전령은 그대로 떠나버렸다. 참모들이 뒤늦게 무례함을 나무랐으나 들리지 않을 테고, 들려봤자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혼전 중에 잘도 적 지원군이 오고 있고, 그게 새롭게 나타난 중기병 부대라는 걸 알아챘구나.
마티오 자신은 혼전의 한가운데, 그것도 말에서 내린 상태라 시야가 좁았다고는 해도, 지금 전령을 받지 못했다면 한참 후에야, 어쩌면 적이 전개를 끝낸 후에야 알았을지도 모 른다.
보고되기까지 시간 차가 있었을 테니 계속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는 말인가.
신기한, 아니 신비로운 인간이다.
“전령! 타라트라바 기병대와 퀸토 사령관께 새로운 기병의 출현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