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87화 (287/556)

35-10.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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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브리크 드 다부아 자작이 이끄는 엘랑키아 기사들의 돌격은 성공적이었다.

돌격의 시작은 다소 충동적이었을지 몰라도, 적은 방금 전과 달리 전혀 통제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돌격에 휘말려 지금 ‘삭제’되고 있는 중이니까.

“흐익! 히이이익!”

“어어억! 이 새끼들 뭐야?”

“도와줘! 도와줘어!”

현재 그의 상대는 한 마디로 오합지졸이었다.

저 멀리 남부나 동부 비문명지역의 떠돌이들인가 싶을 정도로 어중간한 놈들.

대체 무슨 용기로 전장에 나온 것인가 싶다. 복장과 무기 이전에 이런 꼴로 대체 무슨 마음가짐인가.

엘랑키아의 드넓은 초원이 낳은 준마와 철갑, 훌륭한 무기에다가 용맹함과 명예로움까지 겸비.

엘랑키아의 기사들이 파죽지세로 밀고 가는 것도 당연하다.

적이 미처 제대로 퇴각하기도 전에 가속이 붙은 엘랑키아 기사들이 뚫고 지나갔기 때문에, 사방이 미처 물러서지 못한 적으로 가득해 대혼전이었다.

대 혼전 속에 다소 후위에 있었던 노브리크 자신도 백병전에 휘말릴 정도였다.

호위 기사들도 흥분한 상태였는지, 다소 느슨해진 방어진 사이로 충혈된 눈의 적병이 말을 몰아 달려든다.

그 용기는 가상했으나,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망설임 없이 권총을 겨눈다.

타앙!

“그으으윽··· 컥!”

그의 권총에 목숨을 잃은 적병의 몸이 잠시 허공에 떴다가 떨어진다. 주인을 잃고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말의 고삐를 보니 새끼줄로 짠 것이다.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짐말로나 쓸 수 있을까 싶은 말의 등짝을 보니 못 먹은 건지 등뼈가 툭툭 튀어나와 있다.

어리석은 주인이 괜한 욕심으로 무리해서 전장에 나와 자신은 목숨을 잃고, 짐승도 고생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과의 격차가 이렇게까지 나다보니 묘한 동정심이 들었다.

허나 전투는 진짜이고, 아무리 압도적인 승리라도 조금이지만 부하들 중에서도 사상자가 나오고 있으니 조금도 허투르게 부대를 지휘해서는 안된다.

발사로 인해 뜨거워진 권총을 총집에 되돌리고 대신 검을 뽑아 든다.

“자작님! 죄송합니다, 호위들이 실수를···.”

“기사가 전장에서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그보다 적이 도망치고 있는 것 같군.”

“그렇습니다 노브리크 자작님! 적의 후위는 처음부터 등을 돌리고 도망쳤습니다!”

“비겁한 놈들이군.”

실제로, 저 멀리 도망치는 무리는 진작부터 달리기 시작하지 않고서는 떨어지지 못했을 거리까지 물러서고 있었다.

단순히 도망쳤기 때문에 비겁하다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방의 부하들을 수습하지 않고, 후위만 도망친 꼴이다.

기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사가 아니기에 저런 부끄러운 꼴로 도망치는 것이다.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추한 광경이다.

뭐 아무래도 좋다.

전장은 어느정도 진정이 되고 있는지, 격렬했던 전장의 소음이 잦아들고 있었다.

“대장! 시팔, 대장 어디갔어?”

“각자 살아 남아! 대장새낄 왜 찾아?”

“진작에 도망쳤어 개자식!”

가까운 거리에서 적들이 외치는 욕설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제서야 버림 받은 것을 깨달은 건가.

개별적으로 허둥대던 적들은 거의 죽은 모양이고, 그래도 작은 그룹을 이룬 자들이 저항하며 이탈하는 모양이다.

괘씸한 모양새지만 용병들이 전장에서 본능적으로 배운 생존 방식이리라.

아무리 엉터리로 무장한 기병일지라도, 다수에게 둘러싸이는 것은 피해야 한다. 실제로 아직 살아 남은 적 주변에는 낙마한 엘랑키아 기사들의 시체가 여럿 보였다.

“집결 나팔을! 부대별로 집결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알겠습니다, 노브리크 경!”

무리해서 추격하는 대신 부대를 추스리기로 한다. 나팔수들이 집결 신호를 보내자, 릴레이로 멀리까지 신호가 이어진다.

어지러이 싸우던 엘랑키아 중기병들이 다소 전투의 흔적이 있으나 여전히 늠름한 모습으로 능숙하게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노브리크는 대열로 귀환하는 부하들 너머로 보이는 적정을 살핀다.

현재 그들의 위치는 적의 측방. 원래 이 자리를 지켜야 했을 기병대는 방금 산산조각나서 흩어져 도망쳤다.

판단의 자유, 전술의 자유가 생겼다.

심지어 포지션조차도 너무도 유리하다. 현재 적의 보병은 아군 보병과 교전에 들어갔다. 멀어서 어느 쪽이 유리한지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노브리크 경?”

어느새 명령을 받기 위해 각 부대에서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기병대의 생명은 속력이니, 판단은 무엇보다 빨라야 한다.

“이대로 적의 후방을 공격해야 합니다, 자작님. 저희에게 선봉을 맡겨주십시오!”

“적 후방 예비대는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포병에 노려지기 전에 공격하는 게 좋겠습니다!”

본래 위치로 귀환하자는 의견을 내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는 노브리크 자작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기병은 쏘아진 화살과 같아서 한번 발사되면 적의 심장에 꽂히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법이라고 했던가.

꿩 잡는 게 매.

무엇보다도, 서부군 기병 지휘관 노브리크 드 다푸아 자작의 머리속을 가득 채운 말이었다.

이건 자신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앞으로도 언제 주어질지 모르는 중책, 기회이다.

매가 될 수 있는 기회.

가난한 귀족인 그가 천 명 이상의 연대급 기병대를 지휘하는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 지휘력을 인정받으면, 전문 기병 지휘관으로 위촉받아 귀족 기병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다고베르 2세 폐하의 초빙을 받아 왕실군의 연대장이, 친위기병대의 대장이 될 수 있을지도!

“적의 예비 병력을 노린다. 적을 후방에서부터 무너뜨리도록 하고, 아군 보병들이 받을 압박을 줄여주도록 하지!”

“옛!”

“엘랑키아는 기사의 나라다! 잊지 말자!”

“알겠습니다, 자작님!”

“그리고 루젱 백작님 걱정도 덜어드리고 말이지.”

“하하하하하!”

지금 전군의 우측 끝을 지탱하고 있는 루젱 드 마로텍스 백작은 서부 지역 귀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다.

오랫동안 몽파르지에 백작의 막하에서, 때로는 국왕 폐하의 군대에서.

평생을 엘랑키아를 위해 봉사해온 이 노장에 대해서는 누구나 존경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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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하고 기세 좋게 전열을 가다듬고 새로운 적을 찾아 돌진해온 것이 방금 전.

“전령! 전령 도착!”

“메스글랭 경이 부상하셨습니다! 지휘 중에 적탄에 맞으셨습니다!”

“타지에 경에 이어서 메스글랭 경까지 부상당했다면 지금 지휘는 누가 하고 있는가?”

“모, 모르겠습니다!”

우는 표정으로 절망적인 보고를 하는 전령을 닥달해봐야 보고 이상으로 아는 게 있을 리가 없다.

“적 보병대 측면에서 포병이 산탄사격을 하여 희생이 큽니다! 다른 우회로를 찾겠다는 보고입니다!”

“적이 포병까지 끌고 왔단 말인가? 이 난전에?”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방금 전의 전투 상황보다 더더욱 사방이 혼란스럽고 시끄러웠다.

부대를 둘로 나누었다. 방금 전의 전투에서 전위에 있었던 부대가 후위가 되고, 아직 적과 접전하지 않은 부대가 선두가 되었다.

선두 지휘를 맡은 타지에 경은 다시 부대를 여럿으로 나누어 적의 약점을 노리게 했다.

초전은 나쁘지 않았다. 적은 다급해 보였다. 갑자기 측면의 기병대가 무너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분명 창병과 총병 부대 사이에 연락이 제대로 가지 않았으리라. 서너 개의 중대 규모 총병대가 사격 대형을 갖추는 동안, 창병들은 더 후방에서 미적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총병의 사격은 위협적이다. 전장에서 대부분의 공격, 심지어 라솔 경기병들이 던지는 투창마저도 튕겨내는 갑주로 완전 무장한 엘랑키아 기사들이 속수무책인 몇 안되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창병의 호위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오로지 총병만으로 기사의 습격을 막을 수 없다.

특히 동료들이 모두 쓰러져도 돌격을 멈추지 않는 용맹한 엘랑키아의 기사들이라면 말이다.

당연히 선두 기병대는 기세 좋게 돌입했다. 일제사격으로 사상자가 많이 나오더라도, 소수라도 달라 붙으면 결국에는 뚫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져 도망치는 총병들을 양 떼 몰듯 몰아서 창벽에 부딪치게 만들면 적은 분명 자중지란에 빠진다.

그렇다면 위협적인 창벽에 부딪치지 않고도 적 보병 부대를 단숨에 마비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만 한다면 다음 단계는 학살이다. 방금까지 위협적이었던 보병 연대가 한 무리의 불쌍한 패잔병이 되기까지는 한 순간이다.

모범적인 기병 전술이고, 적진으로 달려가는 기사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선두에서 희생자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노브리크 자작님!”

“가르몽 경도 낙마하셨습니다! 생존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전방 지휘관들이 왜 이렇게 많이 다치고 있는가? 선두에서 싸우는 것이 기사의 본분이라 하지만, 지휘관의 임무 또한 중요하거늘!”

“호, 호위대와 함께 계셨습니다만 창병의 측면을 공격하시던 중 총에 맞으셨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지금 빗발치는 참혹한 보고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적 보병은 대열을 유지해 일제사격을 가하는 대신, 기병이 달려오기 시작하자 그대로 뒤를 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대열이고 뭐고 내버리고 도망치는 모습이 상상 이상이었다. 한 번 정도는 사격으로 저항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대로 총병을 몰아 적의 창병 방향으로 도망치게 만든다. 굳이 따라잡거나 추월할 필요도 없다. 엘랑키아 기사들의 가슴이 벌써부터 승리감으로 바쁘게 뛰기 시작했다.

창병의 엄호가 없는 총병은 첫 사격 이후 쓸모 없는 쇠막대기를 들었을 뿐인 무용지물이 된다.

마찬가지로 창병 역시 총병의 지원이 없으면 공격 수단도, 기동성도 없는 존재가 된다.

마치 껍질 속에 머리와 다리를 넣은 거북이처럼, 당장 직면한 위협만 피할 뿐이다. 결국에는 준비된 외부의 타격에 깨질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렇게 적을 몰아가던 기병들은 창병 대열에 직면하자 배운 대로, 경험한 대로 숙련된 대응을 하기 위해 접근했다.

단단히 밀집한 보병 대열의 모서리를 공격하거나, 창벽에서 안전하게 떨어진 거리에서 권총으로 공격하거나.

하지만 예상에서 어긋난 게 있었다.

사격조차 포기하고 무질서하게 도망친다 생각했던 총병들은 창병 동료들의 부근에 도착하자, 갑자기 질서를 되찾았던 것이다.

기병들이 기대했던 대로, 그대로 창벽 사이로 뛰어들어 울부짖으며 아군 대열을 흔들어 놓거나 어떻게든 빈 틈을 찾이 위해 몰려들며 창벽 앞에 ‘완충 지대’를 만들지도 않았다.

창벽 아래로 기어 들어가거나.

측면과 모서리에 바짝 붙어서 총구를 밖으로 향하거나.

계단식으로 층을 두고 배치된 창병과 창병 사이의 공간에 들어가 어설프게나마 사격진을 형성하거나.

급히 뛰어오느라 화승의 불씨가 꺼진 자들이 창병들이 내미는 불씨에서 불을 옮겨 붙이는 것까지 보면서, 상황은 확실해졌다.

적은 상황이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눈으로 본 기사들은 이미 늦었다.

그들의 눈 앞에서 죽음을 양분으로 하는 하얀 연기의 꽃이 피어 올랐으니까.

그것도 수 백 송이나.

일제사격은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서, 각 지점이나 부대에 따라서 명령 없이 개별적으로 사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사격은 매우 정확했으며 가열했다.

많은 동료들을 그렇게 잃었음에도, 이는 오히려 엘랑키아 기사들의 투지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까지 됐는데 동료들의 시체를 뒤에 두고 도망치는 것은 엘랑키아의 기사로서 용납할 수 없다!

어쨌든 적 대열은 마구 뒤섞여 혼란하고, 총병들의 총은 비었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없다 생각한 기사들은 그대로 예정대로 창병 대열의 약한 부분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들의 지휘관인 노브리크 드 다푸아 자작도 마찬가지였다.

“자작님··· 혹시라도 전위를 수습해 후퇴하신다면 지금입니다.”

지금껏 흥분하여 공격만을 외치던 참모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후퇴를 권하는 말이 나온다.

후퇴하면, 병력의 대부분을 살려서 도망칠 수 있다.

질서를 유지하려면 후위가 아직 교전에 들어가지 않은 지금이 기회이다. 분명 전위를 수습하고, 혹시 모를 추격을 견제하면서 물러날 수 있겠지.

다시 본래 위치인 부대 측면으로 돌아가면 된다.

···기병 지휘관으로서의 커리어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꿩을 못 잡았으니 매가 되지는 못할 것이고, 다시는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많은 희생을 지불하며 여기까지 왔다. 적에게 달라붙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후퇴하면, 적은 견고하게 제대로 된 방어선을 만들 것이며 다시는 정면으로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전술적으로도 공세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

결코 일신의 영달을 위한 판단이 아니다.

말 대신, 노브리크 자작은 한 번 검집으로 되돌렸던 검을 뽑아 든다.

무엇보다 명확한 지휘관의 의사 표시이다. 주변 참모들 역시 진지한 표정이 된다.

그들 하나하나 모두 엘랑키아의 군사 귀족이자 기사이니까.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하지 않는다. 후퇴를 권했던 참모도 마찬가지이다.

“적 또한 한계에 도달했을 것이다. 전력을 다해 적의 약점을 찾아 돌파한다! 후위 각 부대에 명령을!”

“알겠습니다 자작님!”

전령이 이리저리 달리고, 지휘부에 와 있던 지휘관들이 명령을 받고 떠나간다.

“이번에는 내가 선두에 선다.”

“자작님··· 위험합니다. 이번에는 저희에게···.”

“어차피 이런 혼전 속에서 연대장이 다시 명령할 일도 없지 않은가. 전장에서 죽고 사는 것은 주신의 의지에 달린 일이니, 적을 섬멸하고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지!”

“알겠습니다, 자작님. 옆에서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좋네, 같이 가지!”

또 한차례, 날카로운 돌격 나팔 소리가 생뢰르반 주변의 초원을 울린다.

“엘랑키아의 영광을 위하여!”

“엘랑키아의 영광을 위하여!”

“돌격!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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