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85화 (285/556)

35-8. 생뢰르반 전투

이 쪽에서도 쐈으니까, 이번엔 우리가 맞을 차례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상황이지만, 평소보다 코 앞까지 몰려와 총을 겨누는 적을 보니 공포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장전해야 하는데,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가고 땀이 차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얀 고티에는 소대장이 되고 처음으로 부하들을 배려할 수 없었다. 그만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무력한 총병 한 명일 수밖에 없다니, 원통스러웠다.

평소보다 거리가 가까운 적의 사격이다. 분명 파멸적일 것이다.

그걸 아는 이유는···.

아군이 몇 번이나 그런 상황에서 적을 분쇄해 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 위력을 잘 알고 있다. 막연하게 언젠가 자신들도 그렇게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서도.

그래도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이다.

제발 총탄이 이번에는 빗나가기를. 자신에게서도, 부하들에게서도.

제발, 제발.

트랑카벨의 성녀님.

당신의 병사들을 지켜주시길.

슈우욱! 콰곽!

퍼퍼퍽!

“끄윽, 아아악!”

“뭐야? 뭐지 어디서 쏜 거야?”

“아으으··· 내 손··· 내 손이!”

그러나 그 직후 벌어진 일은, 적군이 쏟아낸 일제사격이 아니었다.

얀의 소대와 마주한 적진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 튕겨 나간 적들이 서넛씩 뭉쳐서 나뒹굴고 있고, 그들이 남기고 간 혈흔이 흙바닥 위에 쏟아져 있다.

“으어··· 그어어···.”

그리고 장교급으로 보이는 적 하나가 흉갑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비틀거린다. 상황파악이 잘 안되는 듯, 갑자기 비어버린 주변과 적진을 바라본다.

철퍽, 하고 옆구리에서 피가 갑자기 쏟아진다. 힘이 풀린 듯, 무릎부터 자신과 부하들의 피로 질척해진 땅에 쓰러진다.

어안이 벙벙하던 얀은 비로소 깨달았다.

방금의 아주 짧은 시간, 불과 3초 사이에 최소한 두 발 이상의 포탄이 라솔 군의 선두 전열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그 때문에 눈 앞에 있던 적 부대는 난자당했고, 상당히 많은 장전된 화승총들이, 그 품었던 악의를 발산하지조차 못한 채 주인의 손을 떠났다.

얀과 휘하 소대의 구원은 트랑카벨의 성녀에 의해 마련된 포병대의 뜨거운 포탄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 발사!”

“정신 차려! 쏴라!”

타타탕! 타다당!

타타타탕!

“으윽!”

“허어억!”

여전히 남아있는 적의 숫자가 훨씬 많았고, 사격은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그 핵심부를 포탄에 쓸려나간 만큼, 그 위력은 힘이 빠진 상태였다.

이번은 또 살아 남았다.

“씨팔, 정신 차려! 이제 우리 차례다! 장전! 장전해!”

“예엡! 소대장님!”

“손 멈추지 마! 부상자는 뒤로 빠진다!”

“알겠습니다!”

잔뜩 얼어있던 병사들이 다시 손을 바삐 움직이기 시 작했다. 사격을 마친 적들 역시 뒤늦게 장전을 시작한다.

원점으로 돌아갔다.

기동도 회피도 없다. 누가 한 발이라도 빨리 장전에서 적진으로 투사하느냐의 승부이다.

그래도 주도권을 이쪽이 가져왔다. 전장의 다른 쪽은 몰라도, 제10 카르카냑 연대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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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솔 군의 우측을 맡고 있는 사령관, 크루사다 틴토 데 타라트라바 공작은 교전의 양상을 확인하고 크게 놀랐다.

“가오르 경의 보고입니다. 적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해 무리한 전진은 삼가겠다고 합니다!”

“그래 보이는군. 알았다.”

금방이라도 적을 밀어버릴 기세로 나아간 보병 대열은 뜨거운 화염과 납덩이의 벽에 부딪쳐 그대로 멈추었다.

원활환 지휘 계통을 위해 겸손한 척을 했지만, 1만이 넘는 대군을 직접 이끄는 것이 처음일 뿐이다. 전장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우호 관계인 가문의 사령부에 객원 종군하며 전장을 볼 기회는 어릴 때부터 많이 있었다.

때문에 그럭저럭 전장의 흐름을 읽는 눈 정도는 있었다.

게다가 전방 지휘관들이 호언장담했던 ‘말랑말랑한 엘랑키아 출신 용병들은 금새 도망칠 것입니다’라는 예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휘하의 타라트라바 군이 약하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

항구 하나 없는 내륙지에 척박한 산악 지역인 타라트라바는 그나마 발달한 광산 말고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지역이다.

대신 전통적으로 발전한 광업으로 인해 질 좋은 강철 무기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밑천을 마련하려는 가난한 청년들은 그렇게 무장한 채로, 인근 지역 라솔 영주들의 군대에 입대하거나 아예 용병이 되어 이역만리 타향으로 떠나기도 했다.

산등성이 밭을 일구는 농부나, 시장에서 목제품을 파는 점포 주인이나, 젊은 시절에는 무기 좀 썼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무 전통이 강했다.

지금 크루사다 공작의 군대는 그런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역이든 전직이든, 어딘가에서 전투 경험이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출병 이전에, 아니 출병 이후에도 주변에서는 모두 엘랑키아 보병들의 허약함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엘랑키아의 기사들은 확실히 강하다.

그러나 너무 거기 매몰되었기 때문에 보병과 포병에는 투자가 미흡하다.

이건 상식이나 다름 없었다. 실제로 이스키비르 도강 직후에, 훨씬 적은 숫자의 라솔 군 선봉에도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크루사다 공작의 군대가 직면한 적은 전혀 그런 수준이 아니다.

노련한 타라트라바 군의 공세에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맹렬히 저항해온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군대가 근거리 일제사격을 당해 그대로 무너지는 것은 몇 번이나 봤었다.

병사의 기질이 아무리 용맹스럽더라도, 자신이 평소에 보거나 느낀 적 없는 일이 벌어지면 패닉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대로 뇌가 멈추고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맹렬하게 반격해온다.

마치 적도 아군도 수 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아 온 베테랑들 처럼.

아니다. 멋대로 적이 벼락치기 초보 군대일 것으로 착각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적은 결코 총구 앞에서 벌벌 떠는 얼간이들이 아니다.

거기에 흙과 나무를 이용해 저 기묘한 형태로 지어진 포대는 무엇인가.

보병 대열 사이 사이에 불쑥 튀어나온 형상은 위압적이었으나, 아주 약간의 포구를 빼면 막혀있기에 큰 위협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분명 포구가 많지는 않았으나, 적의 사격에서 안전한 상태에서 발사되는 소량의 포탄이 타라트라바 군의 전열을 갈갈이 찢어 놓았기 때문이다.

개개 병사의 자질은 여전히 타라트라바 군이 우위라고 믿는다. 원래 군대의 전통이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

라솔 군이 갑자기 강력한 중기병대를 양성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적 보병이 남달리 격렬하게 저항해오는데, 거기 정확한 포병의 근거리 지원 포격까지 겹치니 전방 연대들이 힘들어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아직은 버틸 수 있지만, 이 기세로 사상자만 늘어 간다면··· 다른 수를 찾아내야만 했다.

변수라면 후속 병력을 추가 투입하거나 기병의 투입인데···.

전자는 분명한 계획이 없다면 효과 없이 예비대만 소모하는 꼴이 될 테고, 기병은 수적 열세인데다 그나마 절반을 라솔의 퀸토 변경백에게 빌려주었다.

이번 공격의 주공은 퀸토의 라솔 군이다. 분한 일이지만, 명백하게도 라솔 하류 주둔군은 타라트라바에서도 유명한 강군이다.

아직 전투는 시작 단계니까, 지금은 너무 초조하게 굴지 않기로 하자.

한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퀸토 변경백의 군대가 직면한 것은 엘랑키아 중앙의 군사 귀족들이 이끄는 정규군이라는 것이다.

용병들조차 이렇게 격렬하게 싸우는데, 엘랑키아 정규 보병들은 더 강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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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전장의 반대편인 라솔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사령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벌써 무너졌나.”

“역시 우노스 연대입니다···.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몰아 붙일 줄은 몰랐습니다.”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휘하의 최정예 연대, 네 검천사의 맏형 우노스의 사정없는 칼부림을 보고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다른 부대와 함께 보조를 맞춘다. 거대한 선형진의 일부가 되어 엘랑키아 군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전진한다.

그러다 연대장의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우노스 연대는 선두에서 빠른 속도로 적과의 거리를 좁혔다.

밀집 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다른 부대와의 연계와 대형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전장에서 그런 튀는 행동은 좋게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우노스 연대에게는 사전에 사령관인 퀸토 변경백과 협의되고 동료 연대들에게도 알린, 허가된 고속 행군이었다.

살짝 고지대인 적진에 포진한 적에게 그대로 다가가자, 당연히 적군은 사격을 시작했다.

나란히 포진되었던 적 부대 가운데 하나만 불쑥 튀어나오자 당황한 나머지, 측면의 적들도 일부 사격하기도 했다.

적 보병들 사이 사이에 분산 배치된 포병 역시 불을 뿜었다.

다만 포격은 포병들의 숙련도가 떨어진 것인지, 혹은 너무 빠르게 접근하는 상대에게 당황한 것인지. 명중률은 형편 없었다.

라솔의 보병 연대는 원래 저돌적인 운영을 중시했다.

상대적으로 교전거리가 짧고 지형이 복잡한 라솔 왕국 특유의 자연 환경 때문일지.

딱히 군대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남성성, 용맹과 과감함을 중시하는 나라의 기풍 때문일지.

‘기왕 다가갈 거 한 걸음 더’를 외치며 유난히 사격 거리가 짧은 편이다.

비슷한 경향의 무리가 서로 반대편에서 상대하게 된다면, 약간 과장이지만 정말 딱 붙어서 사격하는 정신 나간 광경이 벌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창병들의 창대가 엮이기 전에 총병 화력으로 충분히 힘을 빼놓아야 한다는 것이 기조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론 그야 창병과 총병을 혼합한 모든 군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긴 하지만, 유독 그게 심한 게 라솔 군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중에서도 우노스 연대는, 동료 라솔 보병들이 보기에도 도에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다.

분명 처음 보는 자들은 ‘저걸 저렇게까지 한다고?’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들의 사령관인 퀸토 변경백 역시 처음에는 그들의 전투 방식을 알고 격하게 반대 할 정도였다.

실제로 효용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자칫하면 하류 주둔군 최고의 정예 연대를 의미 없이 잃어버릴지도 모 르니까 말이다.

결국 반복되는 탄원과, 우노스 연대의 뛰어난 훈련 평가를 보고 허락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한 ‘쇼’를 보여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앞으로! 멈추지 마라!”

“적을 끝장내!”

우노스 연대의 철칙은 단순하고도 무식한 것이었다.

바로 ‘니가 쏠 적의 표정이 보이기 전 까지는 쏘지 마라’ 였다.

“쏴라!”

타타타타타타탕! 타당!

타타탓, 타다당!

“끄아악!”

“어억, 아!”

“우우욱···.”

그 초 근거리에서 쏟아내는 엄청난 화력.

심지어 철저한 훈련에 따라, 교대로 2회에서 많으면 4회까지 정면을 향해 화력을 퍼붓는다.

우노스 연대와 최초로 교전한 엘랑키아 군 선두 중대들이 찢겨나갔다.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특히 최전방에 있던 2개 중대는, 반수 이상의 병사들이 쓰러지고 생존자들의 마음도 공포로 갈갈이 찢겨나갔다.

거기에 대고 바로 후속하는 창병들이 밀고 들어온다. 사격이 시작된 거리가 매우 짧았던 만큼, 교대하다시피 거의 곧바로 창 끝이 눈 앞까지 다가온다.

대열을 유지하던 장교들의 태반과, 다수의 숙련병들까지 잃어버린 중대가 이어지는 공격에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공포는 패닉을 부르고, 패닉은 무질서한 패주를 부른다.

선두 중대 몇 개가 말 그대로 첫 사격을 맞자마자 뒤를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부대 전체가 뒷걸음질을 친다.

이쪽도 사격을 했지만 적은 끄덕 없이 계속해서 전진해온다.

이쯤이면 멈춰서 반격 하겠지? 이쯤이면? 이쯤··· 어? 안 멈추네? 어디까지 오는 거지?

그 시점에서 이미 엘랑키아 보병들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적이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한다!

거기다 직후 터진 초 근거리 일제사격으로 운 없이 죽어간 동료들의 피와 살점을 뒤집어 썼다.

보다 운 좋은 ‘보통의 엘랑키아 보병’들이 정상적으로 싸우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앞으로! 적을 무너뜨린다!”

“하아! 하아! 하아!”

기합소리에 맞춰 한 걸음씩 전진하는 라솔 창병들은 이미 엘랑키아 진열의 중앙에 깊게 쐐기를 박아 넣고 있었다.

“생각보다 대단치 않았군. 평소의 엘랑키아 군이야.”

“잘하면 정오가 되기 전에 적을 와해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변경백 각하.”

퀸토 변경백과 아드리아니 참모장의 의견은 일치했다. 지금 눈 앞에서 하류 주둔군이 펼치는 맹렬한 공세를 보면 누구나 그리 생각할 것이다.

우노스 연대가 버터를 누르는 뜨거운 칼날처럼, 선두에서 적을 깊게 파고 드는 동안 다른 아군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 힘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엘랑키아 군의 우측을 마구 몰아붙이고 있었다.

“타라트라바 쪽은 어떻지?”

“아직 특별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힘겨운 것일까요?”

“공작님의 첫 경험으로는 이 정도가 딱 알맞지. 그대로 버티고 있으면 곧 우리가 적진을 관통해서 도착할 테니까.”

현재는 동맹군이고, 최대한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 속 깊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타라트라바 멸시는 어쩔 수 없었다.

“할콘 남작도 슬슬 한계인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잘 해주고 있군. 역시 황금만 주면 지옥에라도 다녀올 남자야.”

한편, 좌측에서의 기병 싸움은 반대로 라솔이 철저하게 열세이다. 그럼에도 변경백과 참모장 모두 당황한 모습은 전혀 없다.

마치 계획대로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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