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83화 (283/556)

35-6.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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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사고’였다.

“엘랑키아를 위하여!”

“엘랑키아에 영광을! 가자!”

전장의 상징과도 같은 전사들의 함성과 비명.

간발의 차이로 죽고 죽인다는, 신경이 끊어질 듯 한계까지 날카로워진 긴장감.

“라솔의 침입자들을 처단한다!”

“엘랑키아를 위하여!”

수많은 말과 인간, 그리고 갑옷과 각종 장비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음.

조금이라도 사용자의 생존성을 높이기 위해서 귀를 덮은 투구.

아군과 적군 모두 수 없이 반복되는 총성에 혹사당한 고막.

이런 것들 때문에, 기병대 내부에서는 통상적인 명령 방식, 즉 ‘지휘관의 호령을 통한 명령 전달’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유난히 기병대는 각종 대체 신호들을 발전시켜 사용해 왔다.

깃발의 움직임, 나팔소리, 내려진 명령을 소속원 전체가 복창하는 습관 등등.

그럼에도 ‘사고’는 일어난다.

시작은 기병 대열의 우측 끝, 창기병 부대의 전진이었다.

가벼운 창으로 무장한 라솔 기병들이 희생을 무릅쓰고 바로 근처까지 다가와 투창 공격을 가했다.

총기가 부족한 창기병들의 전진이 잠시 소극적이 되었다가, 투창을 던진 적들이 물러가자 흐트러진 대열을 복구시켰다.

본대와 수평을 맞춘다는 것이, 장교의 실수로 조금 앞으로 튀어 나가 버렸다.

갑자기 우측이 전진하자, 본대 기병의 일부도 자신들이 뒤처진 줄 알고 대열을 전진시켰다.

그리고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후열 기병들은 이를 돌격 신호로 받아들였다.

“주신이시여, 당신의 장병들을 가호하소서! 신호가 왔다, 돌격!”

“엘랑키아! 엘랑키아!”

어느새 함성소리가 대열의 절반을 뒤덮고 있었다.

노브리크 드 다푸아 자작은 찰나의 순간 생각했다. 상황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났다.

어째서인지, 그의 지휘를 받아야 할 자랑스러운 엘랑키아 기사들이 돌격하고 있었다.

문제는 노브리크는 돌격 명령을 내린적 없다는 사실이다.

돌격은 아직 이르다라고 판단했었고, 이미 전술적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이게 어째서? 지금 곧바로 멈추도록 하겠...."

"잠깐!"

대열의 우측 끝에서부터 시작된 돌격의 행렬을 막으려는 부관을 제지한다.

몇가지 고민이 노브리크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막으려 한다면 막을 수는 있을 것인가.

일부는 돌격하고 일부는 멈춘다면 부대의 통제가 가능할까.

...자신이 언제 이런 대부대를 지휘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인가.

'꿩 잡는 게 매'

불명예스럽게 경질당한 선임자, 세미에르 드 벨브레이 백작의 표현이 생각났다.

허나 이 격언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겉보기에 매라 하더라도, 꿩을 잡지 못한다면 매의 자격이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겉보기에 매가 아니라 하더라도, 꿩을 잡으면 그것은 매라는 뜻도 된다.

결론을 내렸다.

이건 자신이 매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다.

노브리크 자작은 검을 뽑아들어 높이 치켜들며 외친다.

"파도에 거스르면 빠져 죽는 법이지, 돌격 신호를 보내게!"

"알겠습니다! 돌격 나팔을!"

날카로운 나팔 소리가 퍼져 나가며 돌격을 알리고, 입에서 입으로 중견 지휘관들의 외침이 전해졌다.

"돌격! 돌격!"

"돌겨억!"

이미 불분명한 돌격 신호를 잘못 알아듣고 달리기 시작한 동료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엘랑키아 기병대 전체가 속도를 올린다.

"엘랑키아에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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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벌어졌구나.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예상했던 일은 아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은 했다.

"아앗! 콘도티에레의 명령도 없이!"

옆에서 첼레스티나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포병대를 훌륭하기 지휘한 후, 방금 사령부로 귀환했다.

"차암, 콘도티에레의 명령만 들으면 이길 수 있는데... 어째서 저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한 걸까요오...."

"아마도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어떤 전황을 봤을지도...."

"하지만 콘도티에레의 말만 들으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데요!"

"꼭 그럼 좋겠습니다."

말을 주고받던 아인멜츠는 그래도 기병 지휘관의 판단을 신뢰하고 싶은 모양이다.

첼레스티나의 미안할 정도의 무한 신뢰는 참 고맙지만, 이 경우에는 아인멜츠의 말도 일리가 있다.

보병과 달리 기병 지휘관의 재량권을 폭 넓게 인정하는 이유가 있다.

출격 시점을 정하는 것이면 몰라도, 일단 원래 위치에서 떠나 사령부에서 멀어진 이후에는 세세한 컨트롤이 전혀 불가능하니까.

적 화망의 코 앞에서 단 몇 초 망설인 것 만으로 부대가 전멸할 수 있는 게 화약 시대의 기병 운용이다.

아니 물론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고.

현재 서부군 기병의 폭주 이유는 짐작도 할 수가 없다.

적과 아군이 섞인 상황도 아니었고. 평범하게 전진해 적의 측익 기병과 교전, 밀어내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적 보병도 평범하게 교전을 위한 전진을 시작했을 뿐, 승부를 서둘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 해도... 전군의 참모장으로서 책임이 없지 않다. 일단 저 기병대를 이끌고 있는 측익 지휘관의 이름조차 모르는 상황이니까.

루젱 드 마로텍스 백작을 비롯해 소수의 장교와 귀족들이 아니면 지휘관급을 거의 파악하지 못했다.

분명 내 팔인데,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답답한 느낌.

"그래도 이기고는 있습니다. 숫자도 많고 무장도 잘 되어 있으니 당연한 것일까요...."

그나마 긍정적인 장면인가. 엘랑키아 기사들은 그 돌파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경기병 중심인 적은 허를 찔린 것일지, 아군의 공세에 제 때 병력을 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더 신경써도 소용 없다. 적 본대인 보병의 대군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이미 적군의 선두는 넓게 배치된 포병 대열을 지나려 하고 있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잘 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첼레스티나, 포병대 배치는 마무리 됐어?"

"네에, 콘도티에레! 아까 포대에서 오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하고 왔어요!"

"그래, 수고했어!"

"네에, 헤헤헤! 언제라도 포격 개시 가능합니다!"

타타타탕! 타타탕!

타타탕! 퍼엉! 펑!

적 보병은 거대한 사선 형태로 진격해오고 있었기에 우익 쪽에서는 벌써 교전이 시작되었다. 방어선을 전개하고 있던 서부군 보병들이 화력을 뿜어냈다.

내가 보기에는 살짝 너무 멀리서 쏘기 시작한 것 같기도 하지만....

"모두 일어서, 우리 차례다!"

"그 동안 잘 쉬었지?"

"화승 점검해! 빈 총으로 싸울 거야?"

슬슬 엎드려서 포격을 피하고 있던 드 레뮤즈와 트랑카벨 병사들도 대열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를 피하고 무기가 겹치게 엎드려 있느라 살짝 어긋났던 대열이 빠른 속도로 회복된다.

다행히 장교들이나 병사들이나 훈련에서 했던 대로 잘 해나가고 있다. 이 단계에서 내가 더 신경쓸 것은 없다.

"명령 전에 쏘는 일은 없다, 알겠나?"

"예엣!"

"방아쇠에서 손 떼!"

드 레뮤즈 영지군 보병들은 대부분이 신병이다. 바짝 든 군기가 뒤편에 있는 나에게까지 느껴진다. 너무 긴장해서 실수까지 하면 안 될 텐데.

특히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 편성된 신생 연대들이라, 전투 경험이 있는 병사들이라 해도 처음 겪는 전장이리라.

"적이 알아서 와 줄 테니 느긋하게 기다려!"

"그럼 잠깐 좀 누워 있어도 됩니까?"

"어, 그래 너 임마 전투 동안 쭉 누워있게 해줄게. 이리 와!"

그에 비해서 어쩐지 트랑카벨 영지군의 대열에서는 왁자하게 웃음이 터지고 있다.

가장 우측이니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인가. 과연 일부러 트랑카벨 영지군에서 가려 뽑아온 베테랑들이다.

내가 트랑카벨 가문의 군사 고문이 된 후에 처음으로 뽑은 병사들이 근간을 이루는, 말 그대로 영지군의 최고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항상 이겼다! 이번에도 이겨 무사히 카르카냑으로 돌아가자!"

"알겠습니다!"

연대장의 외침과 병사들의 진심어린 대답을 들으니 왠지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는 오랫동안 연대장이 공석이었다.

정확히는 영지군의 최선임 연대이자 상징적인 부대였기에, 공식적인 연대장은 다름 아닌 아실 트랑카벨이다.

다만 아실은 연대 지휘에만 신경을 쓸 수는 없었기에 꽤 오랫동안 슈토르히 연대의 모리츠가 대리 연대장을 맡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랜 드 누아 파견 근무에서 돌아온 기즈 드 콜롬브가 맡고 있다.

원래 진작에 연대장이 되어야 했을 사람이지만, 드 누아에 교관으로 파견되었었다.

많은 드 누아 군을 키워냈고 그 후에는 남부 연대의 연대장으로 오래 동맹 가문의 군대를 이끌어왔지.

생각해보니 이번에 신생 드 레뮤즈 보병 연대들 역시 이 사람이 책임지고 훈련시켰다. 병력 양성 전문가라고 해야 하려나.

적은 강대하지만, 아군도 약하지는 않다.

이렇게나 준비했는데 약할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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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우, 후우...."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 소속의 총병 소대장, 얀 고티에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물론 답답함에 한숨을 쉬는 것은 아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화승 끝의 불꽃이 빨갛게 타올랐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는 남달리 길고 무거운 중화승총을 조준 보조용 받침대에 걸쳤다.

중화승총 사수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다... 라고 하기에 총과 받침대가 너무나도 무겁다.

그래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트랑카벨 전군에 중화승총 사수는 몇 중대 없었으니까, 사수로서 누구보다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이다.

꽈광! 꽈과광!

타타타타탕! 타타탕!

뻐엉!

멀리 우측에서 사격소리가 울린다. 동맹 가문인 드 레뮤즈의 포병과 보병들이 사격하는 소리였다.

"적은 어째서 저렇게 계단식으로 온대요? 정신 사납게?"

"우리 정신 사나우라고 하는 거겠지."

"아! 효과 있네요.!"

얀의 옆에는 그의 오랜 후배이자 부하, 드레소 비타가 마찬가지로 받침대 위에 중화승총을 올리고 깐죽거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사격 빼고 다 잘한다'라는 소리를 듣던 드레소는 이제는 사격 실력도 제법 궤도에 올랐다.

역시 실전 경험만큼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없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문득 첫 출전이 생각난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화승총이라는 무기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하물며 그걸 자신이 직접 다루게 될줄은 몰랐고.

심지어 전장에 나서 적을 조준해서 쏘게 될 줄은 당연히 몰랐지.

그런 무지렁이 농부였다. 그런데 사격 실력을 인정받아 더 크고 좋은 총을 받고, 감히 소대장이라는 지위가 되어 스무 명 가까운 부하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겨우 일 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말이다.

엄지손가락 끝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까만 점 같은 흉터가 있다.

다름 아닌, 첫 전투에서 불 붙은 화승 끝을 손으로 만지는 실수 때문에 생겼던 흉터이다.

당시에 콘도티에레가 챙겨준 화상 연고라며 발라주던 용병 출신 소대장이 기억난다.

어느새 자신이 그런 입장이 되었다. 뭐, 이미 수 차례나 전투 경험을 쌓은 부하들은 그런 초보적인 실수는 하지 않겠지만.

이제 더 이상 화승 불에 화상을 입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탄약포를 뜯다가 실수해서 혀 끝으로 화약을 찍어 맛보는 실수도 하지 않는다.

장전한 탄환을 세지 않아서, 총알 한 벌이 어디 갔지 하면서 혼란에 빠지는 바보짓도 하지 않는다.

그저 콘도티에레가 시키는대로 적을 쏘고, 대열을 지킬 뿐이다.

"적이 온다! 마지막 점검!"

"준비! 준비이!"

후우우, 이번에는 긴장을 풀기 위한 한숨이 맞다.

질서정연하게 다가오는 적이 보인다. 머리에 머리가, 어깨에 머리가 포개어 진 것이 구분가기 시작했다.

이제 30초, 아니 25초 정도만 지나면 총격이 시작될 것이다.

"후우우...."

"하아...."

주변의 동료들도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었다. 호흡은 조준선을 흐트러뜨린다. 긴장으로 호흡이 거칠어지면 안되지.

피가 차가워지는 느낌이다. 총알이 귓가를 스치던 순간의 공포가 떠오른다.

그러나 의외로 떨리지는 않는다.

경험에서 온 것일지, 이번에도 이기고 살아남는다는 묘한 확신이 있었으니까.

"사격 준비!"

"사격 준비이!"

총기를 수직으로 세우는 일반 사수와 다르게, 받침대가 있는 중화승총 사수는 허리를 숙이고 눈 높이를 사선에 맞춘다.

라솔 보병들은 상당한 강군이라지. 어딜 가든 그런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지난 전쟁에서 엘랑키아 임금님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 들었다.

알 게 뭔가, 그까짓 거.

임금님의 군대도, 법황님의 군대도 이긴 적 있었다. 트랑카벨의 군대가 말이다.

"조준!"

수백 정의 총기가 일제히 전방을 향한다.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반드시 이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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