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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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서 다녀오시게!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라도 내 연대를 믿고 퇴각하라고!”
“걱정 마세요, 루젱 백작님!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겠습니다.”
엘랑키아 서부군 소속의 노브리크 드 다푸아 자작은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내리면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기병 지휘관으로 커리어를 쌓고 있는 그는 보병 지휘관인 루젱 드 마로텍스 백작과 몇 차례 인연이 있었다.
전투도 훈련도, 서부 출신 귀족들의 큰 어른인 루젱 백작은 든든한 아군이었다.
특히 북방 전쟁에서, 얄밉기 짝이 없는 나우데사 유격병들을 협력해서 상대할 때가 생각났다.
이번에도 부대 외곽을 지나 전방으로 출격하는 노브리크 자작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무사히 다녀오라고! 무운을!”
“라솔 놈들 끝장내버려!”
전군의 가장 오른쪽을 지키고 있던 보병대가 응원의 함성을 지른다.
병사들은 엎드려있고, 일부 장교들은 쪼그려 앉아있다보니 평소와 좀 다른 함성이었지만, 그 응원이 진심이 아니라 생각하는 자들은 없었다.
“속보로 전진!”
“속보!”
“속보! 속보로 움직여!”
몇 개의 작은 대열로 나뉜 기병 종대들이 질서 정연하게 우측 전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랜 전우인 루젱 백작에게는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으나, 노브리크 자작의 혀는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기다림에서 벗어나 드디어 내려온 출격 명령이지만. 그래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중기병과 경기병을 합쳐서 3000명이 넘는 상당한 병력.
소수의 후방 예비대와, 지금 전방에 나서 적 포병대를 견제하고 있는 경기병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전력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직접 지휘했던 가장 큰 부대의 네 배에 가까운 많은 숫자의 부대이다.
어느 전장에 가더라도 전장의 승패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전력이다.
그룬발트의 기사단이든, 라솔의 정예 보병이든 같은 수로 이루어진 어느 부대일지라도 엘랑키아 기병 3000명을 마주하고 여유롭지는 못하리라.
다만 원래 이 자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원래 이 부대의 지휘관은 노련한 기병대장, 세미에르 드 벨브레이 백작이 되었어야 했다.
경험이든 실적이든, 작위로 보든 그게 당연했고 불만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분의 부장으로 복무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현재 세미에르 백작은 ‘부상 치료를 위해 후송’된 상태이다.
물론 거짓말이다. 노브리크가 알기로 그의 상관은 육체적인 부상을 입은 점은 전혀 없다.
사실은 얼마 전 경질당했다.
사령관인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에게 상의 없이 멋대로 병력을 이끌고 출격했고, 다른 아군에게 지원 요청까지 보낸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후위 부대 주둔지에 있던 부장인 노브리크 자신도 전혀 모르던 사이에 벌어진 일이엇다.
존경하는 상관임을 감안하고 노브리크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잘못은 맞다.
선을 넘은 행위였다. 지휘 계통상 질서에도 어긋나고.
하물며 이는 적의 유인책이었으며, 매복에 걸려 혼비백산하며 달아나는 추태를 보였으니까 말이다.
블랑독 군이 때 맞춰 나타나지 않았다면 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책임을 지고, 세미에르 백작은 지휘권을 내놓고 근신에 들어갔다. 백작의 명예를 위해 대외적으로 공표를 하지 않았을 뿐.
“적의 접근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자작님.”
“적은 제대로 된 갑옷도 입지 않은 경기병이 아닌가? 주변에 다른 지원 병력이 있나?”
“적 보병의 후방에 적 기병대의 모습이 보이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외에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흐음, 이대로 우리를 유인할 생각인가.”
적이 다소 화력을 갖추었다 가정하더라도, 백병전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적이 원하는 것은 조금씩 유인하면서 전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겠지.
자신보다 강한 적을 유인해 전장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남은 전장 상황에서는 두 부대가 모두 전멸한 것이나 다름없는 형국이 되니까.
근접 전투가 벌어지면 반드시 유리하다.
무리하게 적을 추격해 전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피한다.
두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며, 노브리크는 부대의 전진을 유지했다. 어떤 형태로든 적의 반응을 이끌어낸다면 그건 이득이라 생각하면서.
원래 상관이었던 세미에르 백작의 경질은 부장이었던 노브리크 자신에게는 기회이기는 했다.
다만 같은 기병 지휘관으로서는 어딘가 찜찜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독립된 기병 제대를 지휘하는 자에게 그 정도의 재량권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별 반응이 없던 앙비토 공작이 갑자기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처벌할 줄은 몰랐기도 했고.
세미에르 백작과 노브리크 자작은 상관과 부하이면서도 서로의 영지가 멀지 않은 동료 영주이기도 했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결국 지휘관의 자리를 내놓고 ‘부상 치료를 위해’ 후방으로 떠나던 세미에르 백작은 이렇게 말했었다.
‘결국 꿩 잡는 게 매지. 꿩을 못 잡아서야 매라고 할 수 없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잘못한 게 맞네. 부대를 잘 부탁하겠네.’
자신이 보기에 세미에르는 결코 무모하거나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소 저돌적이고, 전과에 대한 욕심이 있는 인물이기는 했지만 뛰어난 기사였고 엘랑키아의 충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꿩 잡는 게 매. 아무리 멋지고 용맹하더라도 꿩을 잡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다.
다소 불만이기는 했으나, 본인이 그렇게 납득하고 물러나는 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자신은 그 후임으로서, 평생 언제 또 맡을지 모를 대규모 기병대의 지휘를 완수하면 될 일이다.
“적 접근! 적이 습격해옵니다!”
“미친 놈들, 이 병력 차이에 선공을 해온다고?”
잠시 머리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상, 적의 경기병들이 접근해오고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작님?”
“선두 연대는 접근하는 적을 요격하고, 후위는 정지! 하지만 너무 깊게 추격하지는 말고, 아군의 숫자와 화력을 이용해 상대한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선두 대열이 단단한 직사각형 대열을 이루어 속도를 높인다.
적군이 접근하자 기병대가 만드는 흙먼지 너머로 그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
예상대로, 금속 갑주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잘 무장된 정예 병력은 평소에도 갑주 관리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멀리서 반사광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도 예상보다도 적의 무장은 형편 없었다. 아마 엘랑키아의 기사라면 저런 복장으로 전장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조금 단단하게 굳힌 가죽옷이나, 투구 정도만 갖춰도 생존성은 크게 올라간다. 최소한 스쳐 지나가며 부딪치듯 오가는 공격에 허무하게 낙마할 위험도 줄어든다.
하지만 적 대부분은 그냥 천으로 된 일상복에, 간단한 두건 정도만 걸치고 있었다. 총기의 숫자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해서 자신의 병력은 어떤가.
전군의 선두는 서부의 각 가문이 선발해서 보낸 중장기병 일색이다.
정면에서 보이는 신체의 대부분을 갑옷과 투구로 덮었으며, 다소 간소하게 무장한 경우에도 흉갑에 투구, 가죽 코트 정도는 꼭 챙기고 있다.
기병에게 중무장은 절대로 재력의 과시나 겁쟁이의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싸움에서 전투력을 보존하는 의무에 가까웠다.
이대로 돌격 명령을 내릴까.
적이 마주오고 있는 상황이라면 돌격이 통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단숨에 적을 따라잡아, 이 우측면 전장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참는다.
적이 무언가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굳이 돌격을 하지 않더라도, 그의 부하들은 적과 교전에 들어가고 있었다.
타타탕! 타탕!
“대열 유지해! 적이 접근하게 내버려 둬!”
“쏴라!”
타타타타타탕! 타타탕!
“으윽!”
“전진! 멈추지 마!”
“온다! 쏴버려!”
넓게 벌려 선 교전 대형의 기병들이 가까워졌다가 떨어진다.
양측이 가까워지자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사격이 오간다. 뿜어져 나오는 연기의 숫자로만 봐도 아군이 압도적이다.
적은 근거리까지 다가와 반전하면서 투창을 던져보려 하지만 화력 차이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양군이 서로 마주쳤다가 물러설 때마다, 운 없는 기병 다수가 말에서 떨어진다.
하지만 언듯 눈으로만 보아도, 그 숫자는 적이 압도적으로 많다. 기세 좋게 달려왔다가 짧은 교전 후 물러갈 때, 그 대열에 군데군데 뚫린 구멍이 그 증거였다.
아직 선두만이 접적한 전투의 시작에 불과했으나, 사상자가 늘어나는 속도는 적이 압도적으로 빨랐다.
“적은 무엇을 노리는 것이지!”
“아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것이 분명합니다 자작님!”
“그 정도로 머저리들인가, 라솔 놈들은?”
“땅이 척박해서 기병을 키우기 어려운 곳이라 하지 않습니까? 자신들처럼 초라한 마적떼와 같은 무리 밖에 상대해본 적이 없는 것이겠죠.”
부관의 말은 너무 희망적으로 들리기는 했으나, 전혀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무모하게 달려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대로 시원하게 돌격해서 밀어 버리고 싶었다. 제대로 돌입한다면 적은 잠시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엘랑키아 기사의 본분이다.
노브리크 자작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는 엘랑키아 군사 귀족의 한 명이었으다.
그러나 수천의 기병을 지휘하고 있다는 책임감, 그리고 뭔지 모를 불안감이 그의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
아직 적이 모든 카드를 드러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결론은 지금도 이기고 있었다. 이 정도 교전 비율로 전투가 이어진다면 적은 곧 산산조각난다.
적이 뭔가 마지막 수단을 꺼낸 이후에야 움직여도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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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걱정했지만, 우측면이 적을 요격하러 나선 서부군 기병대는 침착하게 잘 싸우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전장에서 몇 번 부정적인 경험을 해서인지, 엘랑키아 기사는 무모하게 돌진하다 매를 번다는 선입견이 생겨버렸는데···.
사실 무서운 기세로 전장을 달리는 엘랑키아 기사단은 어딜 가나 인정받는 최강의 기병대다.
샹다메리에서도 결과적으로 이겨서 그렇지, 제압하기 전까지는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나.
현재 우측면에서, 수천 기의 서부군 기병대는 착실하게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공격력도 방어력도 이쪽이 우세하다는 점을 십분 이용, 전술적 우세를 유지하며 적을 차근차근 줄이는 모습은 모범적인 기병전이다.
이번에는 믿어볼 만 한 것 같다.
그러고보니 항상 기병 전력은 열세인 경우가 많았고, 적 기병을 어떻게든 먼저 제압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썼었는데 말이다.
아군이 되고 보니 이렇게나 든든하다.
“적 보병이 전진을 시작했습니다, 에트 참모장!”
“오는구나···.”
올 때가 됐지.
적은 먼저 좌측의 기병을 보내 보았으나 엘랑키아 기사들의 높은 벽에 부딪쳐 밀리는 상태이다.
이대로 두어서는 현상 유지도 급급하다. 피해가 계속 누적된다면 서서히 도망칠 것이다.
최소한 저 든든하지 못한 복장의 용병 기마대는 피해를 감수하며 마지막까지 측면을 지켜주지 못할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 다음 대응을 하는 것은 전술적으로 당연했다.
지금까지 포병의 뒤에 멀찍이 숨어서 전장을 관망하고만 있던 라솔 보병대가 천천히 접근한다.
엘랑키아 기사들이 명망 높은 만큼, 라솔의 보병 또한 유명하다.
급조된 드 레뮤즈의 보병 연대들이 맞서 싸울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여기서는 해내는 수밖에 없다.
“적이 사선형으로 진격해오고 있군요.”
아인멜츠의 말대로였다. 적은 우리가 보기에 좌측 끝, 적이 보기에 우측 끝의 연대부터 차례대로 전진해오고 있었다.
좌측 끝의 연대가 30보 정도 전진하면, 바로 우측의 연대가 전진을 시작하고, 다시 그 연대가 30보 정도 전진하면 다음 우측 연대가 전진을 시작.
전군이 그렇게 계단 형태로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온다.
최전선이 비스듬히 사선 형태를 만드는 것으로, 이는 의외로 상당한 고등 전술이다.
우선 저렇게 따라하기가 쉽지 않다. 전군이 철저하게 통제가 되며, 어떤 상황에서도 대열과 보속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한편 그 와중에 변주를 넣어, 상대와의 교전 시점을 다소 조절할 수도 있다.
이번은 아닌 것 같지만, 때로는 부대간에 이격된 공간을 통해 기병대나 빠른 유격대가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적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완벽한 훈련도를 과시한다는 것만 해도 솔직히 조금 압박감이 느껴진다.
아마 대부분의 아군 보병 연대는 저런 흉내를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일제히 움직이고 일제히 물러서는 게 서로가 서로의 기준점이 되어 거리를 조절하기 좋으니까.
···물론 연대가 합심해서 천 명짜리 줄넘기도 할 수 있을법한 기막히는 호흡을 보여주는 슈토르히 같은 녀석들은 예외겠지만 그런 걸로 경쟁해도 소용 없겠지.
“엎드린 보병들을 일어서게 할까요?”
“적 대열이 포병을 지나칠 때 까지 기다려서 일어나도록 합시다. 혹시라도 적이 마지막 포격을 노릴 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우리는 지키는 쪽이고, 충분히 방어 준비를 마쳤다. 대륙의 표준적인 수준의 전력은 충분히 된다!
또한 교전이 시작된 직후에는 적절한 위치에 배치된 아군 포병이 화력 우위를 보여줄 것이다.
물론 그러는 동안 적 포병도 사격각이 나오도록 재배치는 하겠지만 그 격차는 의미가 있겠지.
벌써 아군 대열 여기저기에서는 서로를 격려하고, 전투를 준비하는 외침소리가 메아리친다.
전방 지휘관들은 내가 신경쓰지 않아도 침착하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슬슬 첼레스티나를 본대로 부르려 하던 찰나, 또 다른 보고가 귀를 때렸다.
“우측 기병대가 돌격을 시작했습니다, 콘도티에레!”
“뭐? 서부군 기병? 이미 교전중이 아니었나?”
왠지 아까도 이런 보고를 받은 것 같은데. 그때는 나름 침착하게 적을 잘 상대하고 있지 않았던가.
아···.
이번은 아니었다.
실제로, 적당히 대열을 유지하며 적을 상대하던 엘랑키아 기사들이 적을 향해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