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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화약의 용병대장-281화 (281/556)

35-4.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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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들리는 둔한 포성과, 가까이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포성이 뒤섞여 들려온다.

방금 전부터 아군의 우측, 적군의 좌측에서 움직임이 시작됐다.

아직 서로의 본군은 대치만 하고 있다. 비효율적인 포격이 오가는 가운데, 서부군의 경기병들이 나가 최전방에 배치된 라솔 포병들을 기습했다.

이에 대한 라솔의 대응은 느슨한 대형을 갖춘 소수의 총병들을 내보내는 것이다.

물론 평지에서 기병 상대로 산개 대형의 총병들은 순식간에 쓸릴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그렇게 쉽게 덮치기는 어렵다.

바로 후방에 라솔의 주력 보병 연대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직 첫 사격을 하지 않은 쌩쌩한 부대이다.

보병도 마찬가지이지만, 상대적으로 노려지는 면적이 크고 ‘값비싼’ 기병 지휘관은 이 첫 사격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총병이 전장에 배치된 이후, 처음으로 발사되는 사격은 아주 특별하다.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말이다.

적과 대치하지 않은 안전한 후방에서 충분한 시간과 여 유를 가지고 꼼꼼하게 장전한 탄약이다.

격발시의 열로 총열이 팽창하거나 변형되지도 않았으며, 연소시에 발생한 탄약 찌꺼기가 덕지덕지 달라붙지도 않았다.

총기를 사용하는 병사가 체력적 정신적으로 소모되지도 않은 상태이다.

이는 사격의 질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실제로 위력도, 사거리도, 명중률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난다.

다만 이것까지 고려하자면 병력 운용이 너무 복잡해지고 병사 개개인에게도 부담이 가서 없는 셈 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정예 병력의 경우에는 실제로 15퍼센트 정도 사거리를 늘려 잡는 경우도 실제로 있고.

이러니 작은 이득 보겠다고 들어갔다가 예상보다 막강한 화력에 직면해 뼈도 못 추리는 수가 생기는 것이다.

다만 그런 점에서, 현재 서부군 경기병들은 아주 훌륭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기병 견제의 핵심인 거리 조절이 예술이다.

이를 노리는 총병 입장에서는 ‘지금 쏘면 맞출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총이 비면 맞아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라고 해야 하나.

만약 지금 보병 사각대형 전체가 진출한 상황이라면, 창병의 보호를 받으니 큰 부담감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창병은 100미터 이상 후방에 남아있다. 만약에 총이 비면 곧바로 도움을 받기는 어려운 거리.

엘랑키아 기병이 위험을 감수하고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가는, 창병의 보호 범위 안에 들어가기 전에 잡혀 죽을 수도 있다.

그게 전술적으로 아군에게 이득이 되건 어쩌건, 내가 죽을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하니까.

내가 보기에, 지금 포대를 견제하고 있는 엘랑키아 경기병들은 그 미묘한 균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반대로 경기병들 입장에서도 적이 확신을 가지고 방아쇠를 당기면 죽는 것은 이쪽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 어정쩡한 거리 안쪽이라는 것은, 장전된 총구를 마주보고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맞는 건 아니라 할지라도 거기서 대담하게 움직이는 것은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니, 경험 있는 지휘관들이 분명하겠지.

확실히, 아군이 기병 전력에서 우위에 있기에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다.

걱정했던 서부군의 우측 대열은 생각 이상으로 잘 싸워주고 있다. 내가 과소평가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최근 사고를 좀 많이 쳤었어야지··· 그래도 여건이 되자 진면목을 보이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뭐 엘랑키아 선대 국왕이 전쟁에서 크게 패해서 이스키비르 강 너머의 영토들을 빼앗겼던 것 이후로 큰 패배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대등하게 싸워 왔다는 것이니까.

당장은 우측에서 크게 신경쓸만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다.

비슷하게 중앙의 드 레뮤즈 군도, 좌측의 트랑카벨 파견군도 아직 큰 문제는 없다.

대신 나는 시야를 적진으로 돌렸다.

사령관··· 이 아니라 참모장으로서 현재 힘껏 싸우고 있는 장병들에게 미안한 점이 하나 있다.

아직 일관된 승리 플랜이 없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데 ‘목표’가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니까. 특히 매 순간 죽음과 직면하는 스트레스를 버티고 있는 전방의 병사들은 더더욱 그렇지.

당장은 ‘기다려라’고 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빨리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첼레스티나 부관님이 또 하나 날리셨네요!”

아인멜츠의 말대로, 3문 째의 라솔 군 포대가 박살났다.

이번에는 포 주변에 배치했던 예비 화약에 유폭됐는지 작은 불기둥이 일어났다.

엎드린 채로 고개만 들어 구경하고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억눌린 듯한 환호가 터져나온다.

첼레스티나가 새벽부터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놓은 포대는 밥값을 훌륭하게 하고 있었다.

어차피 거리가 멀어서 상호간의 대포병 사격이 큰 효과를 못 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단단한 흙벽으로 보호받는 아군 포병들이 더 잘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자잘한 이득을 모아서 결국 승리까지 이르게 되는 거니까··· 참 첼레스티나가 성격도 꼼꼼하고 잘 배웠다.

기쁘기는 하지만··· 나는 병사들처럼 기뻐하고만 있을 틈이 없다. 전과는 전과일 뿐이고 적진을 분석해야 한다.

이번 전투는 끌려들어가듯 시작되었기에, 적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

“아인멜츠 경, 타라트라바 군에 대해서 뭔가 알고 계십니까?”

내가 타라트라바에 대해서 아는 건 라솔 서부에 있는 내륙 국가라는 것, 그리고 라솔 국왕의 봉신이지만 사이는 나쁜 관계라는 정도이다.

용병들과 함께 지낼 때도 라솔 출신과 타라트라바 출신을 굳이 구분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에트 참모장. 저도 타라트라바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인멜츠도 그룬발트 출신이었지··· 드 레뮤즈를 섬기기 시작한지도 얼마 안됐으니.

“다만, 현재 타라트라바 공작은··· 분명 크루사다 공작이라는 이름이었죠. 정치적 입지가 불안한 상태라고 알고있습니다.”

“정치적 입지요?”

“타라트라바 공작위 적통이 끊겨서 후보자들 사이에 알력이 있었는데··· 현 공작은 라솔 국왕의 조카 사위라서라솔과의 험악해진 관계를 개선한다는 이유로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나라 입장에서는, 타국 왕가의 입김이 닿는 인간이 좋을리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전쟁이 벌어지는 것도 큰일이니, 대책용으로 낙점 된 공작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그 라솔 왕가와의 연결 고리가 얼마전에 헐거워졌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화형의 밤에··· 드 레뮤즈 백작님 손에 그 연결 고리가 죽었습니다. 라솔 국왕의 동생이었던 에드메르 공작이 죽었지 않습니까.”

“아···.”

이런, 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

확실히 왕의 조카는 중요한 혈연 관계이기는 하지만, 왕자나 공주에 비하면 분명 격이 떨어지기는 한다.

필요에 따라 희생 시킬수도 있는···.

그나마 왕의 동생인 장인이 유력한 인물로서 살아있는 동안은 또 달랐겠지만··· 자신의 장점 중 하나를 잃어버린 것은 확실하겠네.

“중요한 것을 상기시켜 주셨네요, 어쩌면 적의 움직임을 예상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좋겠습니다, 에트 참모장.”

아마 내가 그렇듯 아인멜츠도 나름 머리속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 있겠지.

트랑카벨 파견군과 마주보고 있는 적의 우익 지휘관, 크루사다 공작은 오로지 이 전투의 승리에만 신경쓰지는 못할 가능성이 있다.

전투에서, 전쟁에서 승리해서 입지를 굳혀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겠지.

그리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모은 병력이다. 내부에서 불협화음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전과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병력은 아껴야 한다.

그 병력이 향후 권력투쟁이 이어졌을 때 자신을 지켜줘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남에게 빌려왔기 때문에, 가능한 무사히 돌려보내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과도한 압박감은 ‘무리한 행동’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리고 보통 무리한 행동은 주변에서 거부감을 일으키게 마련이고.

그렇다고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되겠지만, 인지하고 있으면 실제로 발생할 때 캐치할 수 있으리라.

적군은 명확하게 전선을 절반씩 나누어 배치되어 있었다.

우측이 타라트라바 공작의 병력일 테니, 좌측이 라솔 국왕의 군대겠지.

아직 양측은 수평하게 배치되어 있지만, 서로 다른 입장에서 전투를 계속하게 되면 중앙부의 결속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있다.

그럴 경우, 드 레뮤즈의 신생 연대들이 중앙 돌파를 할 수 있을까?

아직 아무것도 명확한 것은 없지만 일단 염두에 두기로 했다.

“기병! 기병이 달리고 있습니다!”

“기병이?”

“우익 쪽, 서부군 방향입니다!”

나는 서둘러 우측이 잘 보이는 위치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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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사다 틴토 데 타라트라바 공작은 다소 불안함을 느끼며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공작님, 위험합니다! 조금만 뒤로 물러서 주십시오!”

호위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자꾸 전방으로, 또 좌측으로 말을 몰게 되는 모양이다.

“이 정도 거리에서 겁을 먹어서야 감히 용담공 펠리테스의 후예라고 할 수 없지! 타라트라바의 공작은 언제나 형제들과 함께한다!”

“하, 하지만···.”

크루사다 공작이 호기를 부리자 호위대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용담공’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대담했던 펠리테스 기에모 데 타라트라바가 활약했던 시절은 화약이 전장을 지배하기 이전 시대였으니까.

“우오오오오오!”

“공작 전하 만세!”

“빨리 엘랑키아 놈들 목을 따러 보내주십쇼!”

호위대장의 속이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주군의 퍼포먼스를 본 주변의 보병들은 함성을 지르고 무기를 두드리며 크루사다를 칭송한다.

기세는 정말 대단하다. 명령만 내리면, 이들은 기꺼이 화약의 비가 쏟아지는 전방으로 기운차게 나아가리라.

다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첫 공세 타이밍은 하류 주둔군의 퀸토 변경백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크루사다 공작은 방금 호기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자신의 한계는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군인으로서, 또 20대 젊은 군주로서 아주 훌륭한 자질이다.

때문에 자신이 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전략의 천재는 아닐까? 따위의 환상은 가지지 않았다.

군 사령관으로서 자신은 어디까지나 초보였으며, 이미 경력과 실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는 퀸토 변경백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

게다가 전투 직전, 그는 자신의 금쪽같은 기병대의 거의 절반까지 빌려주었다.

일부러 변경백 자신이 찾아와 간곡하게 부탁했다.

어떤 목적으로 쓸 것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결정적인 승리의 순간에 적을 치는 검으로서 활약할 것임도 약속했다.

그래서 빌려주기는 했으나··· 그만큼 전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특히 이번에 빌려준 중기병들은 대부분 타라트라바와 그 주변 출신의 기사들이다. 자신을 지지하는 충성파의 자식들이 많았다.

이들이 세운 전공은 크루사다 공작 자신의 힘이 될 것이었으나, 이들이 입은 희생은 또한 크루사다 공작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희생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전투가 시작되면 당장 뭔가 하려는 건가 싶었으나, 포격전이 한 시간이 지났는데 어떤 움직임도 안보인다.

오히려 소수지만 기병을 파견한 것은 적군 쪽이었고.

그렇다고 매 순간 상황을 보러 가거나, 보고를 요청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기왕 맡겼으니 지금은 지켜보는 수밖에.

일단 공세가 시작되면 자신들과 맞서 싸울 정면의 적을 살펴본다.

이번 전쟁의 당사자인 레뮤즈의 백작과, 엘랑키아 서부의 명문 군사 귀족인 드 몽파르지에 가문과 달리 타 지역에서 온 용병들이라고 한다.

제법 구색은 갖추었으나, 특별히 인상깊은 점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보병 대열의 깊이가 상당히 얕아 보인다. 도무지 적장의 의도가 이해가지 않았다.

아마도 무리해서 적은 숫자로 넓은 면적을 커버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앙과 우익의 주력군을 지키기 위해 가혹한 임무를 맡은 용병들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 대열에도 타라트라바 출신의 젊은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척박한 지역이라, 외국에 용병일을 찾아 떠나는 경우가 많으니까.

군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일군의 사령관이 된 몸으로서는 모두를 챙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타라트라바의 군대는 맹렬하다. 라솔 본군에 비해 전문성은 떨어질지 몰라도, 그 난폭함과 완강함은 한 수 위로 평가받는다.

이번 전투에서도 그 힘은 분명하게 발휘될 것이다.

그 때, 전령의 보고가 그의 귀를 때렸다.

“공작 전하! 시작됐습니다! 라솔의 기병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인가! 우리 타라트라바의 기사들도 전장을 달리고 있는가?”

“그, 그것이··· 아직인 것으로 보이옵니다···.”

크루사다 공작은 멀리서 모래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기병 무리를 바라본다.

확실히,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으나 흑색과 갈색이 많은 무채색의 무리이다. 분명 퀸토 변경백이 고용했다는 기마 용병대의 모습 같다.

“으음, 변경백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부하를 선봉에 세우지 않았다며 따질 일은 아니니까. 공작의 눈이 크게 우회하는 기마 용병들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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