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생뢰르반 전투
펑! 콰앙! 콰과광!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가벼운 진동이 느껴진다.
퍼펑, 쾅!
적이 발사한 포탄이 낙하한다.
적이 순차적으로 발사한 포탄은 대부분 명중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
때문에 대체로 아군의 머리 위로 넘어가거나, 대열에 미치지 못하고 흙에 파묻혀 버린다. 초탄인데다가 거리가 꽤 멀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평지가 아니라, 적 편에서 이쪽으로 올수록 살짝 지대가 올라간다는 점도 낮은 명중률에 영향을 미쳤겠지.
하지만 근처에 떨어진 포탄은 다음 번에는 좀 더 정확하고 위력적인 포탄이 날아온다는 신호와도 같다.
“포격에 대비! 모두 엎드린다!”
“모두 엎드려! 엎드린다!”
병사들이 조심조심 무기를 내려놓고 엎드린다.
장창이나 화승총이나, 제법 길고 부피가 큰 무기이기 때문에 차곡차곡 포개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숙이기 어려워진다.
당연히 여러 차례 훈련한 결과이다. 드 레뮤즈 보병대는 문제없이 엎드렸고, 전부 1회 이상 전투를 경험한 트랑카벨의 숙련병들도 말할 필요도 없다.
부대 단위 훈련이 부족했는지, 서부군 보병들은 다소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이지만 다소 엉성하게나마 엎드리는데 성공했다.
만약에 포격과 병행해서 적이 접근해오고 있었다면 이렇게 포탄을 피할 수 없지만, 이렇게 한다면 대부분은 아군 병사들의 머리 위로 지나갈 것이다.
포탄이 대열 안으로 떨어져 정말 불운한 병사들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는 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처럼 여러 명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것은 피할 수 있다.
아군 대부분이 포격에서 피하는 것을 확인한 후, 적진을 살핀다.
적 보병은 한 줄로 방열한 포병의 100여미터 후방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포격 외에는 공격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으아아악!”
아니나다를까, 정말 운 없는 병사 하나가 굴러가던 포탄에 치였다. 뻘건 핏덩이가 몇 개 허공으로 흩날리고 피투성이가 된 인간의 몸이 축 늘어진다.
끔찍한 모습이지만, 엎드려 피하는 자세가 아니었으면 최소한 3명에서 5명 정도가 꼬챙이에 꿰이듯 참혹한 상처를 입었으리라.
“콘도티에레! 위험해요, 좀 더 물러나야 해요오!”
“음, 알았어.”
첼레스티나가 내 소매를 잡아끌며 외쳤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무의미하게 적 포격 범위 안에서 얼쩡거릴 필요는 없지. 눈 먼 포탄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곤 하니까.
“저는 포대로 가도 될까요, 콘도티에레!”
“그래, 첼레스티나가 한 방 날려 줘!”
“네에, 기꺼이 그럴게요!”
내가 좀 더 후방으로 물러서는 사이, 첼레스티나는 전투 전에 미리 축성해둔 포대로 달려간다.
쿠쿵, 쿵! 뻐엉!
보병 사이사이에 배치되었던 드 레뮤즈 군과 서부군 소속의 포병들이 반격의 포문을 열었다.
한 줄로 늘어선 적 포병대 주변에도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다만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쪽은 엎드려 있다고는 해도 보병들이 다닥다닥 붙은 넓은 면이 표적이라는 점.
반대로 적은 점이나 다름없는 대포와 거기 달라붙은 포수들을 노려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더 후방에 배치된 적 보병을 노릴 수는 있겠으나 이미 사거리가 간당간당한 수준이다. 노린다고 해도 유효타를 노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적 보병의 선두는 산개대형의 총병들로, 우리가 소수 병력만 보내 포대를 무력화시키려는 것을 막으려는 모습이다.
포병에게 있어 더 먹음직한 표적인 밀집 대형은 더 후방, 안전한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나마 우리에게 멀다는 것은 적에게도 멀다는 것이다.
적도 사거리의 한계 정도에 배치했기 때문에 명중률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았다.
이 점과 아군이 엎드려 포탄을 회피하면, 한 발의 포격으로 여러 명의 사상자를 내기 어렵다는 점을 조합하면 이번 포격은 견딜 만 했다.
포탄을 뒤집어 써야하는 병사들에게는 냉혹한 말이지만 말이다.
또한 저렇게 산개하여, 통일된 지휘 없이 포술장들의 판단에 따라 제멋대로 사격을 가하면 집중 운용에 비해서 위력이 떨어진다.
첼레스티나가 장기로 하는, 포의 집중 운용에 따른 일제 사격과 같은 화끈한 위력은 없다는 말이다.
또한 전투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확실치 않지만, 보병이 전진하고 서로의 병력이 섞이면 포각이 심하게 제한된다.
또한 사격이든 백병전이든 전투에 휘말려 포병의 일부가 무력화 되는 일도 자주 일어날테니, 장기적으로 그다지 좋은 운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적장은 아마도 이런 점들을 모르진 않겠지. 그것 까지 고려하여 이런 방식으로 개전했다 생각된다.
어디서 기인한 자신감일지. 나는 찬찬히 적진을 살피며 적의 수를 짐작하기 위해 노력해본다.
퍼엉!
“오오? 우와아아!”
“적이 날아가 버렸어!”
적 대포 하나가 조각조각이 나서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아군이 발사한 포탄에 맞은 것이다.
박살난 포가에서 떨어져 나온 바퀴가 수십 미터나 굴러가다가 흙먼지가 잦아들 때 쯤 힘을 잃고 나동그라진다.
포가를 잃은 거대한 금속 포신이 기능을 잃고 흙바닥을 굴렀으며, 주변에는 적 포병들이 부상을 입었는지 엎드려서 끙끙대고 있었다.
멀리서 외상이 보이지는 않는 것을 보면, 포가가 부서질 때 비산하는 날카로운 나무 조각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주변 적 포병들이 놀라서 손이 멈춘 것을, 포술장들이 닥달해 재장전으로 되돌린다.
설마 방금 저격은 첼레스티나의 솜씨인가. 하지만 아무리 첼레스티나도 백발 백중은 불가능하다.
이 정도 거리에서 적의 포신 자체를 명중시키는 것은 멀리서 바늘을 던져 또 다른 바늘을 맞추는 정도의 난이도니까.
그래도 계속 한다보면 몇 번 쯤은 맞을 것이다.
첼레스티나의 포대는 미리 전방에 흙더미와 나무 통으로 엄폐물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좀 더 안전한 상황에서 주의 깊게 조준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대포병 사격이 당장 큰 손해를 입히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주변에 포탄이 계속 떨어지면 적에게 방해는 될 것이다.
게다가 무력하게 맞기만 하는 경험보다는 뭐라도 반격하는 것이 사기 관리에도 당연히 좋다.
적이 이런식으로 포격을 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후의 교전에서 의미가 있을 정도의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은 서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더라도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히려는 것인가? 사기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일까?
“에트 참모장! 우측에서 전령입니다!”
아인멜츠의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서부군의 기병대가 출격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적 포병에 대한 공격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출격은 금지입니다. 아직 적이 아무런 카드도 꺼내지 않은 상황에서 벌써부터 주력을 사용할 수는 없으니까요.”
내 말에 아인멜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아차스러운 점이 없지는 않았다.
비교적 폭이 얕고 사격전에 대비한 선형진을 형성한 드 레뮤즈 군과 트랑카벨 군과 달리, 서부군은 종심이 깊은 전통적인 사각 대형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니 똑같이 엎드렸더라도, 포격에 노출되어 입는 피해는 좀 더 많을 것이다.
나는 약간 고민하다가, 단서를 하나 붙이기로 했다.
“중기병은 적의 주력을 상대하기 전에는 절대로 출격 금지. 단, 상황에 따라 소수의 경기병을 견제용으로 출격시키는 것은 허락합니다.”
“옛, 참모장.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우익 방향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우위에 있는 것은 기병 전력이다. 완전히 묶어 두느니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주는 편이 낫겠지.
경기병이라고 해도 엘랑키아 서부의 귀족과 그 가신들일테니 쉽게 당하지는 않을테고.
또한 자신들이 경장이라는 것을 알면서 무모하게 적 보병에게 공격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경기병이 큰 피해를 입어 전투력을 상실하더라도 주력인 귀족 기사대가 남아있다면 대열 유지는 걱정 없겠지.
작은 교전이 벌어지면 적도 반응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 숨겨둔 카드를 슬쩍 보일지도 모른다.
속절없이 피해만 쌓여 가는 것은 적도 마찬가지이다. 하루 종일 포격을 할 화약은 아마 없을 테니까.
아군은 충분히 버티면서 기다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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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전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라솔 왕국군,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참모장 아드리아니 루코 데 가르자는 망원경으로 저긴을 살피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적 반응이 침착합니다. 도발 당해서 달려오는 기색도 없습니다.”
“불 맞은 멧돼지처럼 달려들 줄 알았더니 통제가 생각보다 잘 되는군.”
하류 주둔군의 사령관,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자신의 첫 수가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자인해야 했다.
그의 경험도 그랬고, 역사를 살펴보면 라솔과 엘랑키아의 전쟁은 기병이 우세한 엘랑키아의 선공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인 작전과 반격이 성공하면 라솔이 이기지만, 엘랑키아 기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돌파력으로 패배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일부러 도발적인 포병 운용을 통해 적의 공세를 유도했으나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았다.
현재 퀸토 변경백의 군대는 라솔군의 좌측에 위치해 엘랑키아 서부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의 수하 중, 적 측익 한가운데의 커다란 사령기에 그려진 문장을 기억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드 몽파르지에 공작가는 무문의 명가이다. 최근 20여년 동안, 양측의 국경에서 벌어졌던 크고 작은 전투에 항상 참여해왔다.
그런 명문 군사 귀족이 중앙이 아니라 측면에 사령부를 두었다는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아마도 저 우익을 축으로 공세를 이끌려는 것이겠지.
때문에 퀸토는 자신이 좌측을 맡기로 했다. 작위상으로 더 높은, 크루사다 공작은 고맙게도 자신의 군사적 조언을 존중해주고 있었고.
적은 자신의 가장 강한 카드를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최강의 검천사들로 맞서 싸워 줄 뿐이다.
그의 자랑스러운 부하들, 하류 주둔군의 정예는 충분히 훈련과 장비로 대비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일제히 쏟아져 나오는 수천 기의 엘랑키아 기사단은 공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경기병들이 나왔습니다. 포병을 기습하려는 것 같습니다.”
“흠··· 생각대로 잘 되진 않는군.”
엎드려서 포격을 피하고 있는 적 보병의 측면에서 수십 명 정도로 나눠진 경기병 몇 부대가 비스듬한 각도로 포병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가까운 포병들이 서둘러 포를 돌리거나, 포 뒤편으로 숨고, 뒤편에서 호위하고 있던 총병들이 앞으로 나선다.
탕! 타당!
타타타탕!
경기병들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포병 주변을 맴돌았다. 산개된 아군 총병들이 사격을 가했으나 생각만큼 위력은 없었다.
여기저기서 총격전과 백병전이 벌어졌지만 무엇 하나 결정적이지는 못했다.
서로 무의미하게 소수의 희생자가 발생할 뿐, 어느 쪽도 함부로 나서기 어려운 국면이 된다.
뻐엉!
“오오, 화끈하군.”
뒤에서 다가온 총병들이 호위해주는 사이, 대포 하나가 산탄을 장전해 발사한 모양이다.
운 없게도 전방에 있던 기병 몇 명이 그대로 산산조각나 초원에 흩뿌려진다.
위력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화약을 꽉꽉 채우고 십수발의 산탄을 채워 발사한 것을 생각하면 화약 낭비나 다름 없다.
오히려 나머지 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바람에 포병과 총병들은 근처에서 쫓겨나듯 도망쳐야 했다.
언듯 보면 무의미한 교전이 이어질 뿐이지만, 그 시간 동안 적진을 흔들어 놓아야 할 포격은 멈춘 상태이다.
혹시나했지만 적의 주력은 결코 먼저 나서지 않는다. 적은 결코 무모하지 않다. 차분한데다 교활하기까지 하다.
기병을 끌어내서 전멸은 못시키더라도,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힌다면 다음 단계가 수월하리라 생각했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아드리아니, 부하들에게 전령을 보내게. 휴식 시간은 끝났다고.”
“전진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아니, 출격 준비만 하도록. 타라트라바 군의 상황을 확인하고 출격 시점을 정하겠다.”
“알겠습니다, 변경백 각하.”
마지막으로 휘하 병력을 파악해본다. 아직은 여유있게 후방에 배치되어 있기에, 배치를 바꿀 기회는 남아있었다.
우노스, 도레, 테라얀, 코루냐.
검천사 네 명의 이름을 딴 그의 정예들은 어디에 나서도 훌륭히 활약하리라.
거기에 그들의 활약을 도울 보조 병력도 있었다.
“할콘 남작을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할콘 남작의 기마 용병대는 영 못미덥지만, 나름의 독특한 포지션을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상황만 잘 맞으면, 이들이 적 기병을 유인하는 동안 적 방어선을 그대로 부숴버릴 수 있으리라.
도강 직후 벌어졌던 소규모 교전들에서, 엘랑키아 보병들이 얼마나 얼빠진 놈들인지는 확인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