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명예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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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카벨 가문의 거성, 카르카냑의 병원 별채에는 전부터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주 특별한 환자, 마르사코르 언덕에서 포로로 잡힌 법황청의 성녀가 포로로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이 평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 별채 건물은 대단히 엄중한 호위 병력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드나드는 사람은 미리 선별된 소수의 간호사들, 그리고 가문의 장녀이자 뛰어난 의사인 아쥬흐 트랑카벨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온갖 소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딱히 법황청의 성녀를 포로로 잡았다거나, 의식을 잃은 성녀를 치료하고 있다는 것이 비밀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밀이 있으면 있는대로 소문이 붙고, 없으면 없는대로 소문이 붙는 법.
특히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기에, 의식을 잃은 인간이 몇 주가 지나도록 살 수는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랑시아, 통칭 ‘검은 성녀’는 증오와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연히 성녀는 이미 죽었으며, 영주님네는 이를 몰래 숨기고 있으니 우리도 모른 척을 해야 한다는 소문.
사실 성녀는 이미 깨어났으며, 트랑카벨 가문에 협력했기에 외부에는 비공개 상태라는 소문.
심지어는 이미 깨어난 성녀는 트랑카벨과 블랑독에 매우 큰 죄를 저질렀기에, 매일 고문당하며 죄를 갚고 있다는 소문까지도 돌았다.
하지만 물론 이는 전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포로로 잡힌 성녀, 랑시아 아스트로메다는 살아있었고, 또한 의식이 없었다.
특별히 교육 받은 간호사들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주의깊게 영양 섭취를 도왔고, 몸을 닦아주고 마사지를 해 건강을 유지시켰다.
의식이 없을 뿐, 신체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 2주를 넘어가자, 아쥬흐 트랑카벨은 가망이 없다 생각했다.
아무리 입을 통해 최소한의 수분과 영양을 공급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 15일이나 지난 이상, 곧 사망할 것으로 생각했다.
건강한 몸도 아니고, 치명상은 아니고 경과가 좋다고는 해도 상처를 많이 입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랑시아는 2주가 아니라 3주에 가까워지도록 살아있었다. 이 또한 신의 섭리라 해야 할지.
이제 아쥬흐는 자신이 오히려 랑시아를 억지로 살려두고 괴롭히는 중은 아닌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고향을 괴롭힌 교단은 미웠고, 그 선두에 섰던 랑시아도 미웠다. 그녀의 막말에 분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몇 주간 제대로 먹지 못해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니,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쯤에서 연명을 멈추는 것이 자비로움일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할 무렵에.
성녀 랑시아는 깨어났다.
표독함이 가득했던 눈에는 지성이 보이지 않았으며.
직접 무장 수도사들의 선두에서 말을 몰고 무기를 휘두르던 팔은 나뭇가지처럼 가늘었다.
하지만 그몸은 분명, 교단에서 임명한 유일한 성녀 랑시아 아스트로메다가 맞았다.
성녀가 꿀을 섞은 미지근한 물을 허겁지겁 마시는 것을 보면서, 아쥬흐는 다시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더 이상은 동정하지 않기로 말이다.
바로 지금도, 그녀의 소중한 백성들이, 충성스러운 용병들이 라솔의 침략자들과 싸우며 목숨을 잃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쥬흐의 짐작은 대체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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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주신의 영광 있으라!”
“왕국에 주신의 영광 있으라!”
라솔 왕국군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장병들이 외치는 함성이 엘랑키아의 초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 앞에는 매복에 당해서 어지럽게 도망치는 엘랑키아의 기사 무리가 있었다.
“저 자식들 무기까지 버리고 도망친다!”
“파하하하! 머저리들, 저러고 싸우겠다고?”
“와서 무기 가져가!”
오랫동안 강을 사이에 두고 엘랑키아와 대치하고 있던 병사들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이들이 그 이름 높던 엘랑키아의 기사가 맞는가?
우리가 고생고생하며 훈련한 이유는 ‘막강한 엘랑키아 기사단’을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전투의 경과는 이렇다.
강행 정찰을 위해 전방을 들쑤시고 다니던 라솔 기병대가 훨씬 많은 수의 엘랑키아 군 기병대와 조우했다.
첫 교전에서 곧바로 무너져 도망치는 라솔 군을 엘랑키아 군이 맹렬하게도 추격해왔다.
그리고 거의 눈 감고 돌진해오다 시피하는 엘랑키아 기병대를, 언덕 그늘에 숨어있던 하류 주둔군 보병들이 덮치는 순간, 승패는 이미 난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무모한 돌격이었다.
곧바로 방향을 반전한 라솔 기병대가 추격했다면, 공포에 질려 질서까지 잃어버린 기사들은 끔찍한 꼴을 당했으리라.
“추격을 명령할까요?”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류 주둔군 참모장, 아드리아니 루코 데 가르자가 사령관인 퀸토 변경백에게 묻는다.
“아니, 좀 지켜보도록 하지. 지금 저 언덕 너머오는 기병 보이나?”
“음··· 숫자가 심상치 않군요.”
“그렇지? 이거, 우리가 똑바로 찾아온 것 같군.”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추격해서 엘랑키아 기사들을 추가로 잡는 것은 분명 탐나는 전공이지만, 지금 거기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마치 ‘우리가 구하러 왔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먼지 구름과 함께 언덕 너머에서 나타난 적 기병대는 여지껏 보지 못한 많은 숫자이다.
거리와 방향으로 볼 때, 분명 둘로 나뉜 적 본대 중 큰 쪽에 속한 병력이리라.
그렇다면 보병 본대 역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겠지.
“이거 내가 틀리고 공작 전하께서 옳으셨군. 감도 다 떨어졌네.”
퀸토 변경백이 자조적으로 말한다.
분명 얼마 전의 논의에서, 자신은 ‘어차피 적이 단기간에 싸워주지 않을 테니 동쪽으로 진격하자’고 했었다.
하지만 크루사다 공작의 말대로, 적을 도발하기 무섭게 덤벼왔다.
미묘하게 거리를 재느니, 코 앞에서 합류해 자신감을 키워 주느니 하는 잔기술을 쓸 필요도 없었다.
정말 감사했다. 천 명이 훨씬 넘는 엘랑키아 기사와 더 많은 경기병들을 이끌고 함정에 빠진 적장에게 말이다.
지원군이 온 속도를 보면 본대도 하루 거리 안쪽이다.
이 정도 거리라면, 자신의 네 검천사들이라면 얼마든지 따라잡아서 끝장을 낼 수 있다.
적이 무리해서 행군 속도를 올린다면, 익숙하지 못한 병력들부터 낙오하고 그대로 부대를 공중분해 시킬 정도로, 하류 주둔군의 행군 속도는 빨랐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결코 놓칠 생각은 없다.
“빨리 크루사다 전하께 소식을 전하게. 직접 보셔야 할 것 같다고.”
“이미 전령을 보냈습니다, 변경백 각하. 정찰병의 말에 따르면 ‘멀리 있는 쪽’의 적 본대 역시 빠른 행군으로 하루 반 정도 거리라고 합니다.”
“오, 그런가? 그럼 그것도 논의해야겠군.”
오늘이 생일인가 싶을 정도로 좋은 소식이다.
적은 분산되어 있다.
그 중 삼 분의 이 정도는 북동쪽으로 대략 하루 거리.
나머지 삼 분의 일 정도는 북서쪽으로 하루 반 거리.
분산하여 포진한 적의 중간을 찌르듯 행군해온 것은 의도한 바였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한 포지션에 위치하게 될줄은 몰랐다.
이대로 행군을 계속해 가까운 적을 공격할까?
아니다, 퀸토 변경백의 부하들은 이 유리한 포지션에 위치하기 위해 다소 무리해서 행군해왔다.
게다가 전방 경계를 위한 행군 대형은 곧바로 전투에 돌입하기에는 불리한 상황이다.
적 본대가 놀라 도망치면 모르되, 아마 벗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한 적은 곧바로 병력을 좌우로 벌려 포진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믿음직한 강병이라 해도 종대로 나아가는 것은 불필요한 희생이 수반될 수 있다.
그럼 이대로 병력을 재배치해 적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오늘 내로 교전을 시작할까.
설마 적이 선공을 걸어오지는 않겠지? 그러면 그대로 뭉개버리면 그만이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다만 크루사다 공작이라면···.
이쪽도 만반의 준비를 취하는 한편, 적이 합류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하류 주둔군의 다소 무리한 행군 속도를 쫓아오느라 타라트라바 군 보병들이 지친 상태이기도 했고.
애초에 크루사다 공작이 바라는 것은 적의 궤멸이다.
엘랑키아 남부의 군사력을 제로로 만들어 마음껏 휩쓸며 군비를 조달하고 싶은 욕심이 있을 테니까.
물론 이는 자기 입장에서도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다. 드 레뮤즈로의 진격이 늦어지긴 하겠지만, 대신 충분한 금화를 가지고 갈 수 있을 테니.
이번에는 나름 정확한 통찰을 보여주었던 공작님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자.
“할콘 남작의 부대를 북서쪽의 적에게 보내게. 적당히 적의 합류를 ‘방해하는 척’은 해줘야지.”
“정말로 방해하는 ‘척’하라고 명령합니까?”
“음··· 아니, 그건 아니지. 어차피 그 정도 무리에게 합류를 방해받을 정도면 적은 이미 끝장 난 수준이고. 실제로 방해하라고 명령하도록.”
“알겠습니다, 변경백.”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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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와 씨···.”
야트막한 언덕에 말을 타고 오른 나는 나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려다가 간신히 끊었다.
어지럽게 대열이 무너져 도망치는 엘랑키아의 기병대.
그 뒤를 추격 할듯 말듯 하다가 돌아가는 라솔의 기병대.
그 뒤에서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오는 라솔의 보병대.
그 앞에 점점이 모자이크처럼 수놓여 있는 엘랑키아 기사들의 시체.
보자마자 무슨 상황인지 감이 왔다.
“세미에르 드 벨브레이 백작은 괜찮은 기병 지휘관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분명··· 선대 드 몽파르지에 공작의 맹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내 물음에 함께 따라온 세샤르 드 레도쿠르 경이 면목이 없다는 듯 대답했다.
“누가 목줄을 잡아주지 않으면 그냥 맹견인 모양이네요오.”
첼레스티나가 작은 목소리로 독설을 퍼붓는다.
휴우, 또 이렇게 불필요한 희생이 늘어났고, 적에게는 기세를 올려주는 꼴이 되었다.
“왕국에 주신의 영광 있으라!”
꽤 멀리 떨어졌음에도, 적군이 외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적이 병력을 전개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러나야죠.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다소 속도가 느려지기는 했으나, 자연스럽게 전진해오면서 좌우로 대열을 벌리고 있었다.
이대로 놔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한 사각 대형을 갖출 수 있겠지.
이것만 봐도 얼마나 숙련된 병력인지 알 수 있었다.
“첼레스티나, 앙비토 공작님에게 전령!”
“네에, 전령!”
“적이 가까이에 있으니 서둘러 합류해야 하니 지정된 위치에 최대한 빨리 집결할 것!”
“적이 가까우니 서두리 합류 필요! 지정된 위치에 최대한 빨리 집결할 것!”
“좋아, 지정 위치는 첼레스티나가 정해 줘. 서로가 최대한 빨리, 안전하게 모일 수 있는 지점으로.”
“네에, 콘도티에레!”
싸우기 전에 더 이상 불리해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젠장, 보고를 들어 보면 현재 서부군은 하나로 집결하지도 못한 상태인 모양이고.
최악의 경우, 서부군을 내버려 두고 드 레뮤즈 본대와 트랑카벨 파견군만 데리고 싸울 생각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그런데 에트 참모장! 적은 당장은 추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세샤르 자작의 말대로였다. 적은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었으나 급격히 거리를 좁히지는 않는다.
분명 아군이 적군을 파악하고 있는 만큼, 적도 아군을 파악하고 있을 텐데.
그런데 젠장, 아직도 분명 아군인 서부군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확한 병력 숫자도 모른다고!
당장 내일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속이 터진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차피 적도 길게 늘어진 행군 대형이라는 점이다.
적도 제대로 된 전투 준비를 하려면 못해도 한나절은 충분히 걸리리라.
그 움직임에서는 전투를 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알겠다. 서두르지 않는 여유로움은 분명 느껴진다.
여기서 전투를 해야 하나? 후퇴해야 하나?
여기서 전투를 하자니, 왠지 적의 의도대로 따라가는 것 같아서 뒷맛이 썩 좋지 않다.
후퇴를 하자니, 적이 보내줄지가 문제다. 그리고 분명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어할 일단의 귀족 나으리들이 난리를 피우겠지···.
“콘도티에레!”
“응?”
“이길 거예요! 이번에도 반드시요!”
“으음··· 그래야지.”
언덕 위를 이리저리 이동하며 적정을 살피고 있는 나에게, 전령을 보내고 온 첼레스티나가 다가와 신뢰로 가득한 응원을 해준다.
온갖 귀족들과 괴상한 음모에 치이느니, 전장에서 내가 이끌 수 있는 병력과 함께하는 상황이 어쩌면 나에게는 ‘유리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내가 잘 하는 일을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