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76화 (276/556)

34-5. 명예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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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남서부, 라솔 왕국군 사령부에는 이 강대한 원정군을 이끄는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타라트라바의 군주, 크루사다 틴토 데 타라트라바 공작.

하류 주둔군 사령관,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

두 사람은 앞으로의 전쟁 전개 방식을 두고 의논하고 있었다. 치열한 격론과는 거리가 먼, 침착하고도 평범한 논의였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을 택하고자 하는 치열한 논리는 존재할지 몰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분위기는 없다.

오히려 서로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상대의 이유가 합당하다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는 스탠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양보 과정에서 그만큼의 보상은 받아야겠지만. 그렇게 상호간의 이득을 위한 탐색전은 계속된다.

결국 크루사다 공작 측의 주장은 ‘선전투 후진격’.

최대한 빨리 엘랑키아 측의 주력군을 찾아 결전을 벌여 격멸하고 내륙으로 진격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퀸토 변경백 측의 주장은 ‘선진격 후전투’.

우선 목표인 드 레뮤즈 영지를 향해 진격하고, 엘랑키아 측이 영격을 가해온다면 굳이 전투를 피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양측의 주장은 나름대로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먼저 선전투 후진격은, 어차피 진격하다 교전할 적이라면 원정군의 전력이 최고조에 오른 침공 초기에 싸우자는 것이었다.

일찍부터 철저하게 적을 격멸하고, 엘랑키아 남부의 방어력을 공백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남의 땅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원정군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 힘이 빠지는 것은 필연이다.

크루사다 공작은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설명했고, 퀸토 변경백은 나름의 논리에 납득은 했다.

한편 선진격 후전투는, 이번 전쟁의 가장 큰 목적은 ‘드 레뮤즈 백작령 제압’을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어차피 적은 싸울 수 밖에 없고, 이쪽에서 나서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주도권을 이쪽이 가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결전의 장소는 레뮤즈 성의 성문 앞이 되어도 상관 없다고 보는 쪽이었다.

공성전도, 진지를 마련해 굳히기에 들어가 공격을 유도당한 적을 치는 요격전도 라솔 군의 장기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오랜 시간 힘과 전술을 갈고 닦아온 하류 주둔군은 이런 방식의 전투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설령 적 숫자가 배에 이르더라도 승리의 확신이 있었고.

퀸토 변경백 역시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전달했으며, 크루사다 공작은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기서 양측이 아직 언급하지 않은 이면의 이유가 또 있었다.

크루사다 공작 측은,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인 장인의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가 있기는 했으나 결국은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컸다.

우선 엘랑키아의 방어력을 무력화한 후 엘랑키아 남부와 서부의 부유한 도시들을 약탈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산악지대에 자리잡은 소국인 타라트라바 공국으로서는 이번 대군 동원은 무리한 감이 없지 않았다.

특히 상당한 병력에 이르는 귀족 기병대는 전리품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면 다수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 분명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외상으로 편성한 대군’이었기 때문이다.

장인의 복수도 중요하나, 자신의 군대를 만족시킬 전리품이 없다면 전쟁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이는 퀸토 변경백 측도 일부 용병 기마대에 한해서만 같은 조건이다. 비슷한 조건이라도 무게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드 레뮤즈 영지나, 그 너머 이단들이 득실거리는 블랑독에 대한 약탈만 해도 충분하다 생각한 것이고.

또한 결과적으로 이번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냈을 때, 배분 대상이 되는 드 레뮤즈 백작령에 대한 권리가 강한지 약한지에 대한 점도 방침의 차이를 낳았다.

당연히 타라트라바 역시 어느 정도의 보상은 받겠지만, 이는 금전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영토에 대한 권리 대부분은 라솔이 가져가게 될 것이고.

이런 점이 서로가 서로를 설득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공작님. 아군이 결전을 원하면 엘랑키아 군이 장단을 맞춰주겠습니까?”

퀸토 변경백이 묻는다. 결전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양측이 함께 결전을 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원하는 쪽과 회피하는 쪽 사이에 지루한 추격전이 벌어질 뿐이다.

퀸토 입장에서는 질질 끌려다니느니 상대를 무시하고 행군하며 주도권을 챙겼으면 하는 것이고.

“변경백, 거기에 대해서는 아군이 최근에 수집한 정보가 있소이다.”

크루사다 공작이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부하가 넘겨주는 꾸러미를 펼친다.

가죽으로 된 엘랑키아 남부 지도가 펼쳐지자, 안에서 색칠된 작은 나무토막 몇 개가 나왔다.

“여기를 보시오, 현재 적군은 크게 두 부대로 나뉘어 있소이다. 이곳과··· 이곳.”

먼저 큼직한 붉은 나무토막 두 개를 나란히 놓은 후, 다음으로 푸른 나무토막을 집어든다.

“그리고 이건 우리 위치요.”

푸른 나무토막은 붉은 나무토막의 가운데 쯤에 놓인다. 정확히는 우측에 놓은 나무토막에 훨씬 더 가깝긴 하지만.

“이걸 보니 어떤 생각이 드시오?”

“흐음···. 아군이 적의 중간 쯤··· 무리해서 행군한다면 이틀 후에는 적의 합류를 차단할 수 있겠군요.”

“바로 그렇소이다.”

하지만 퀸토 변경백은 오히려 왜 공작이 그런 설명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만약에 거리가 더 가깝거나, 아군이 완전히 적의 두 군세의 가운데 낀 상태였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좀 애매했다. 분명 적의 합류를 막을 수야 있겠지. 하지만 적 또한 이쪽의 의도를 알아챌 것이다.

그렇다면 합류를 늦추고 불리한 전투로부터 멀어지면 그만이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과 별도로, 어떻게 적의 상세한 위치를 알아냈는지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생겼다.

북진을 하면 할수록, 적의 정찰 견제가 극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남쪽에서 무기력하게 당했던 엘랑키아 군과, 지금의 엘랑키아 군이 같은 군대가 맞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가까운 쪽의 적군은 퀸토 역시 파악하고 있었지만, 먼 쪽의 적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여기서 한가지 제안을 하겠소이다, 변경백. 나는 적이 합류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오. 아슬아슬하게, 우리 방해가 ‘실패’했다고 적이 믿도록 할 생각이란 말이오.”

“허어···.”

바로 이해했다. 이는 심리전이다.

‘라솔 군은 우리 합류를 막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우리는 적의 코 앞에서 합류하는데 성공했다!’

엘랑키아 군은 분명 이렇게 착각하면서 기분이 고양되겠지.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마치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고.

아마 라솔 군과 싸워보고 싶어하게 되리라.

“이 주변의 지형은··· 거의 완전한 평야지대군요.”

“바로 그렇소. 나도 먼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적이 유리한 지형에서 버티고 있는 걸 공격하고 싶어하는 멍청이는 아니오.”

“그야 당연하시겠지요, 공작님.”

완전한 평지에서 벌어지는 결전.

당연히 이쪽이 유리한 진지를 건설한 상태에서, 적이 공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게 상책.

반대로 적이 마련한 진지를 향해 어쩔 수 없이 공격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하책.

서로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게, 어느쪽도 미리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채로 개활지에서 싸우는 것을 중책이라 하겠다.

하지만 퀸토 변경백은 자신의 네 검천사들을 믿는다. 평야에서 엘랑키아 기병이든 보병이든 싸워 이길 자신이 있었다.

마음 속에 담아만 놓았던, 엘랑키아의 정복자가 되는 어린 시절의 꿈이 스멀스멀 어른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어떻소, 변경백? 한 번 싸워볼 만 하지 않소?”

“좋습니다 공작님. 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적이 전투를 거부하고 철퇴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파하하하, 그건 어쩔 수 없지 않겠소. 그때는 변경백님의 계획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겠소이다. 그 전에는 내 말대로 하자는 것이 내 제안이오.”

크루사다 공작의 방법을 먼저 적용해 보고, 적이 결전을 받아들인다면 그대로 속행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쪽도 물러서 퀸토 변경백의 방법대로 드 레뮤즈 영지로 진격한다.

어느 쪽이 되어도 나쁘지 않다··· 라고 퀸토는 결론 내렸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성공적인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공작님.”

“감사하오. 이쪽 역시, 만약 적이 결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귀공의 계획에 최대한 협력하도록 하겠소.”

뜻을 맞춘 두 라솔의 유력자는 굳은 악수를 나눈다.

둘은 각자의 병영으로 돌아가 작전 준비를 시작한다.

아슬아슬함을 연기해야 하므로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쳐도,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원거리 강행 정찰을 통해서라도 명확한 적의 규모와 위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지로 들어와 적을 코앞에 두고도, 다소 지루함이 감돌고 있었던 라솔 군 진영이 갑자기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다만 두 사람이 간과한 점이 있었다.

그들 생각만큼, 엘랑키아 군이 약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엘랑키아 군은 결전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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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임하는 부하 루트비히에게 트랑카벨로부터 데리고 온 병력을 맡기고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사령부에 합류했다.

부관인 첼레스티나와 소수의 정보 참모 및 연락 장교들만 데리고 합류했다.

라몽 백작은 아직 ‘사고’에서 회복되지 못했는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다만 걱정한 것과 달리, 사령부의 장교들은 나에게 우호적이다.

특히 루트비히의 사촌이라는 아인멜츠는 사실상 내가 자신의 포지션을 빼앗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긍정적이다. 조금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보병대장인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은 딱 봐도 상위 군주인 라몽 백작의 인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닌것 같고.

다만 기병대장 소베트르 드 랑두제는 왠지 나를 자꾸 피하는 모습이다.

전에 이에 대해 아인멜츠에게 물었더니 여울목에서 벌어졋던 전투에서 귀족군의 맹주가 소베트르 경이었다는 답변을 받았다!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켰으며, 또한 패배까지 한 점에 대해 크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흠, 용병들 끼리는 지난 전쟁에서 싸웠던 상대가 다음 전쟁에선 아군인 경우가 흔치는 않은데. 배신 행위를 한 것만 아니면 굳이 마음속에 담아 둘 필요가 있나 싶긴 하지만.

아인멜츠의 말에 의하면 남다르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그렇다는 것 같으니... 갑자기 친한 척을 해서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

라몽 백작의 휘하 지휘관들과 인사를 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병력을 파악하는 것이다. 사실 기존에 훈련도 시키고 보고도 받으면서 알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병력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건 흔한 일이다.

물론 부대 전체가 가지는 전투력이 크게 오르거나 줄지 않는 한 구성원 숫자 하나하나까지 내가 파악할 필요는 없긴 하다.

그래도 나는 가급적 자세히 파악해두려고 하는 편이다. 그게 직접 전장에 나서는 부하들에 대한 예의이다... 라는 거창한 이유까진 아니지만.

내가 이끌고 온 트랑카벨 파견군과, 훈련에 관여한 드 레뮤즈 영지군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앙비토 공작이 이끄는 서부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기병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말은 들었는데 말이지.

"그런데 앙비토 공작 측에서는 파견 무관이 오지 않았나요?"

"그게... 올리앙 드 브레겔 남작이 파견 무관이었습니다. 인수인계가 잘 되지 않은 것인지...."

하아, 갑자기 한숨이 나온다. 주먹구구식으로 대충 '얼마 이상의 대군' 정도로 파악하는 아마추어 사령관들이 많긴 하지.

얼마 전 만나 의미불명의 대화를 나누었던 앙비토 공작이 생각난다.... 드레피니 집사장의 표현대로 '백지'와 같은 남자.

에휴, 그래도 우리 편인데 욕해서 뭐 하겠나. 아쉬운 게 있으면 가르쳐주고, 살살 달래서 이끌어 가야 할 사람인데.

어차피 며칠 지나면 합류한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지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제 부대를 하나로 모았고, 적이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콘도티에레, 서부군에서 온 전령이에요!"

"전령이라고? 누가 보낸 전령이야?"

"수신인은 라몽 백작님, 보낸 사람은... 세미에르 드 벨브레이 백작이라는 사람이네요오?"

벨브레이는 또 누구야...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라몽 백작이 부재한 상황이기에 현 결정권자는 나니까, 서둘러 편지를 뜯어본다.

'전초전에서 승리, 드 벨브레이는 퇴각중인 적을 추격할 예정이니 귀군의 참전을 요청한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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