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 명예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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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트랑카벨 파견군의 연대장급 지휘관들을 소집해놓고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바로 내가 연합군 사령부에 참모장으로 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는데, 우리 지휘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콘도티에레. 저희는 항상 콘도티에레의 지휘 아래에서 싸우는 것 말고는···.”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장 쥐그 드 푸로니가 격앙되어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다.
항상 진지하고 침착하며, 신생 영지군 초창기부터 함께 싸워온 청년 연대장인 그가 이처럼 당황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옆에 선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장 로베르 드 나뵈프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또 그 옆의 지빌링엔 연대장 에르만 슈피리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씀은 전투 중 저희를 지휘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까?”
이번 질문은 슈토르히 연대의 연대장 대리를 맡고 있는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의 말이다.
언제나 침착하고 믿음직하게 슈토르히를 이끌고 있는 그 답게 감정을 표출하진 않았으나, 역시 좀 당황한 모양이다.
이해는 한다. 우리는 하나의 조직이고, 그것도 제법 잘 짜여진 조직이다.
거기서 함께하던 누군가가 빠져나가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특히 그 조직이 잘 돌아가던 조직일수록 더 그런 법이고.
“장소와 역할이 조금 바뀔 뿐이지, 지휘 계통에서 벗어나는 건 아닙니다. 제가 귀관들의, 트랑카벨 가문의 대리 사령관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구요.”
나는 가능한 느긋한 말투로 말하려 노력했다.
왜냐하면 나도 장난 아니게 동요하고 있었거든. 불안하기로 따지면 정말 나도 말로 다 못할 지경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어쩌겠냐는 말이다.
“뭐 너무들 걱정하시는 것 같소. 여기 콘도티에레는 더 높은 곳의 말 안듣는 귀족님들이랑 씨름하러 가시는 거고, 우리는 평소처럼 내려오는 지시를 얌전히 따르면 되는 게 아니겠소?”
다음으로 발언한 것은 프리스마라 기마 용병단장인 코바르 리메니에디였다. 역시 이 초로의 용병은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다.
“참고로 우리 프리스마라는 에트 경의 지휘 아래에서 싸운다는 조건으로 싸인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콘도티에레가 약속을 어기는 일은 없겠지요. 허허헛!”
···다만 바로 이어진 말은 한편으로는 나에 대한 경고로 들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야 당연하지요. 총사령관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께도 확인한 사항입니다. 참모장이라는 역할을 하나 더 하게 되는 것이지, 기존의 임무를 그만 두는 것은 아닙니다.”
프리스마라의 코바르 역시, 말은 저렇게 해도 블랑독 전역에서 군소리 없이 명령을 따라주었으니까.
당장 이번 출병에도, 제35, 36, 37의 총 3개로 나눈 프리스마라 연대 중 두 개만 데리고 왔으니 말이다.
“제가 다른 사령부에서 지휘할 뿐이지, 여러분이 받는 지시와 명령은 여전히 제가 전하는 지시와 명령입니다.”
여기까지 설명하자, 다소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조금 풀리는 것 같다.
차라리 처음부터 ‘여러분, 제가 승진하여 총사령관의 참모장으로 갑니다!’ 식으로 장난스럽게 갈 걸 그랬나.
아니다, 그건 내 명령 한 마디에 목숨을 거는 이들에게 예의도 아니고. 가볍게 시작했다가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우면 그건 수습도 못한다.
“그렇다니 다행이긴 합니다···.”
걱정이 많아 보였던 제15 연대장 쥐그 드 푸로니는 다소 안심이 된 듯 하다. 여전히 불안해하는 모습은 보였지만서도 말이다.
“다만 제가 직접 살피고 결정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고, 각 지휘관들도 모든 일을 제게 보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전장에서 지휘권이 꼬이는 온갖 행태를 본 적이 있다. 아군에게도, 적군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최악은 사소한 임무까지도 모두 자신이 확인하고 결재하기를 원하는 소인배 타입 지휘관이다.
비용이란 단순히 금전이나 물자를 소모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크고도 위험한 비용이다.
보고 자체가 하나의 '업무'가 되는 것도 문제고. 쌓여가는 결재 처리하는 것도 '업무'가 되는데... 심지어 보고가 사령관에게 닿을 즈음에는 전혀 의미없는 정보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전방 지휘관이 무능해서, 혹은 믿을 수 없어서라면 사람을 바꿔야지 뒤에서 일일이 코치하는 식으로는 개선할 수 없다 이거지. 나란히 앉아서 하는 사무 업무라면 모를까.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중견 지휘관'이면서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와 아래에서 올라오는 보고가 모일 정보 집합점에 가깝겠다.
"부재시 명령 전달 담당자는 슈토르히 연대의 루트비히로 정하겠습니다. 제가 부재하는 동안은 루트비히를 통해 명령을 내릴 것이며, 여러분은 루트비히를 통해 보고해 주시면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약간 반발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다행히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전혀 나쁘지 않았다.
루트비히가 의외로 주변 인맥 작업을 잘 해두었나? 슈토르히 연대를 훌륭하게 이끈 배후 효과인가?
아마 후자겠지만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음은 분명했다.
"루트비히 경, 잘 부탁드립니다."
"뒤를 믿고 싸울 수 있겠네요."
"콘도티에레? 역시 저한테는 무거운 임무 같습니다...."
"저희도 슈토르히 연대처럼 싸울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
"아니 잠깐, 콘도티에레, 잠시 제 말을 좀...."
"출세 했구먼 루트비히, 주디칼리에서처럼 잘 부탁하겠네!"
루트비히는 사실상 슈토르히 연대장 역할을 한지가 오래 됐지만 공식적으로는 연대장이 아니니까, 주변에서는 얼마든지 불만을 가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연대장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지금 블랑독에서 아실을 보좌하고 있는 모리츠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모리츠는 아실의 참모장으로 '트랑카벨 주력군'을 이끌고 있으니.
정말 슈토르히도 지휘 체계가 더럽게 꼬여버렸구나. 전부 내 책임이지만.
출중한 고인물들이 워낙 뛰어나고 서로간의 신뢰가 쌓인 덕에 별 문제 없이 돌아가다보니 신경을 안 쓰게 된 결과이다.
당사자인 루트비히는 정작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벼락을 본 듯한 표정이지만... 뭐 평소처럼 잘 할거다.
암, 잘 하고 말구.
미안하지만, 루트비히는 지금부터 많이 바빠질 것이다. 빨리 인수인계를 해주고 적절한 포진 위치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적의 주력으로 생각되는 병력이 이스키비르 강 유역에서 집결하여 북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아군은 집결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서부군의 여러분들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살짝 두려운 생각이 든다.
에이, 그래도 전투 준비 들어가기 전까지는 집결할 수 있겠지.
사이좋게 일 폭탄을 맞겠구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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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남부의 대초원을 바라보자 가슴이 웅장해진다.
단검을 꺼내 땅에 박아 퍼내자, 기름진 검은 흙과 들풀의 뿌리가 딸려 나온다. 분명 무엇을 심어도 잘 자랄 것이다.
게다가 탁 트인 평지는 밭을 만들겠다고 계단식으로 개간하며 용을 쓸 필요도, 물을 대겠다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물통을 이고 나를 필요도 없으리라.
게다가 그 땅이 사방으로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라솔의 변경백이며 이스키비르 강 하류 주둔군의 사령관인 그는 손과 단검에 묻은 검은 흙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이 사라지자, 음습한 감정이 피어 오른다. '왜 너희들만' 이라는 질투심에 가까운 감정.
그래도 드디어 여기까지는 왔다.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된다.
다만 애석하게도, 무작정 점령한다고 전부 라솔 왕국의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전쟁은 드 레뮤즈 가문의 폭거를 벌하고 엘랑키아 남부의 이단자들을 토벌하는 전쟁이므로, 전쟁터는 속히 동쪽으로 옮겨져야 했다.
이번 전쟁이 퀸토 변경백에게 매우 각별한 이유는, 전쟁에서 승리해 영토를 할양 받으면, 그 일부가 하류 주둔군의 주둔 영지로 주어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리오고 국왕 폐하께서 직접 약속하셨다.
당연하지만 하류 주둔군 사령관의 자리는 세습이 아니다. 페니베라다 변경백 가문의 영지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퀸토가 이를 기대하는 이유는, 주둔군이 자체적으로 비용을 쓸 수 있는 영지가 생기면 모순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지금 하류 주둔군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비용이 소모된다. 정예군을 유지하는 방식은 별 것 없다.
명예? 자부심?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만 있어서는 사기만 높은 얼치기 군대밖에 만들지 못한다.
다른 부대보다 더 높은 봉급과 안정적인 보급.
더 빈도 높고 치밀한, 사격을 포함한 훈련.
결국 이게 없으면 강한 군대는 꿈이며 신기루이다.
이 막대한 비용은 주변 귀족들이 병력 징집 대신 납부하는 세금, 방패세로 충당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귀족 출신 기병을 소집할 수 없다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다른 지역의 영주들이나, 타국의 군주들이 군대를 소집할 때 수백 수천이나 되는 귀족 기사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분명 부러운 일이었다.
물론 하류 주둔군의 보병들, 네 검천사의 이름을 빌린 4개 연대는 최강이다. 어디에 내놔도 이만한 규모의 정예 군단은 쉽게 찾아볼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부러운 건 부러운 거다. 아무리 보병이 주력이라 한들, 어느 정도의 보조 기병대는 필수 불가결이고.
이 때문에 전리품 배분 우선권과 약탈 기회를 미끼로 용병들을 긁어 모으기는 했다만 도무지 신뢰하기 어려운 자들이었다.
하지만 하류 주둔군 자체적으로 군자금을 충당할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세금 납부 대신 병역을 원하는 귀족들을 소집해 귀족 기사대를 양성할 수도 있겠다.
혹은 자체적으로 병력을 모집해 임시 방편의 경기병이 아니라 제대로 된 중기병대를 양성해도 좋을 것이다.
보병은 이미 엘랑키아의 근성 없는 녀석들을 압도한다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엘랑키아의 중기병대는 역시 두려운 존재이다.
물론 대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열 번 싸우면 아홉 번은 이길 자신이 있다.
엘랑키아의 기병대가 하류 주둔군의 검천사들과 싸워 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엘랑키아의 기사들 역시 멍청이는 아닌지라, 라솔의 창벽에 무모하게 들이받아 쉬운 승리를 헌납해주지는 않는 게 문제지.
때문에 라솔과 엘랑키아의 전쟁은 답답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전개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병이 필요했다. 믿을 만한 기병이.
심지어 엘랑키아 기병을 압도할 필요도 없다.
그저 호각을 이룰 수 있는 정도의 기병대가 함께한다면 하류 주둔군의 전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다.
"사령관 각하, 타라트라바의 크루사다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곧 가겠네."
현재, 라솔 원정군의 핵심 세력들의 수장인 퀸토 변경백과 크루사다 공작은 괜찮은 협력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부족한 물자는 서로 빌려주고, 기동성이 있는 부대를 위해 도로를 양보하면서 최적의 루트를 따라 진격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다만 진격의 우선 순위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갈리고 있다.
양측의 우정이나 협조에 금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서로가 보고있는 전황이 다르고 중요시하는 우선순위가 다르니까.
전장에서 흔히 있는 정도의 의견 충돌이다... 라고 믿고 싶었다.
크루사다 공작 측의 의견도 영 이치에서 벗어난 행동은 아니니, 필요하다면 양보할 수도 있었고.
...그건 그렇고 알시라스 왕국에서 보낸 군대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예정보다 많이 늦어 강을 건넌 것 같기는 한데....
뭐 지원군을 소집하느라 시간이 걸렸다고는 하는데 전력으로 계산하지는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국가간 전쟁에서 연합군으로서 이웃 군주의 도움을 받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거기 집착하느라 때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