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명예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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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빌링엔 연대장 에르만 슈피리는 다소 지루함을 느꼈다.
콘도티에레의 명령이라면 지옥에라도 선봉으로 떨어질 각오로 달려왔건만, 하는 일 없는 대기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유일하게 외진 곳에서 콘도티에레의 곁을 지킨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트랑카벨 파견군의 대표가 된 것 같고, 콘도티에레의 근위대라도 된 것 같아서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대기만 하다보니 지치는 게 사실이었다.
참여한 전투라고는 얼마 전, 과하게 북쪽까지 올라온 멍청한 적 소부대를 쫓아낸 게 전부였다.
아군 정찰대를 추격해 주변도 살피지 않고 무모하게 몰려온 적을 매복 기습했고, 그게 끝이었다.
전투 행위라고는 딱 한 번 기습적인 일제사격을 했을 뿐, 백병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적은 기겁하여 도망쳤다. 전과는 6명 사살 포로 20명 정도.
승리라면 승리였으나··· 이걸 어디가서 전투라고 자랑하기는 민망한 일이다. 오히려 긴장하고 기대했던 전투의 끝이 흐지부지 끝나 더 지루해졌다고 할지.
포로로 잡은 적들에게서도 별달리 얻을 게 없었다. 자신이 부상당했거나, 말이 총에 맞았거나, 기습에 놀라 말에서 떨어질 정도의 머저리들 뿐이었으니까.
콘도티에레는 ‘적이 정예 부대를 아끼고 있다’라 말하며 고민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에르만이 함께 고민할 영역 밖의 문제였다.
그가 잘 하는 건 그 정예 부대가 전장에 나왔을 때 그걸 깨 부수는 것이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지루함에 정신이 나갈 지경인 부하들이 간혹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소란의 원인은 다름 아닌, 최근 주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결투 재판이다. 에르만의 심복, 알골 딘다르트 중대장이 했던 결투 말이다.
물론 알골이 결투에서 호가호위하며 역겹게 행동하던 남작 나부랭이를 꺾어버린 것은 기쁜 일이었다.
덕분에 알골 자신의 명예는 물론, 지빌링엔 연대의 명예, 더 나아가 그들이 섬기는 아쥬흐 트랑카벨 영주따님의 명예도 지킬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걸 보고 몸이 후끈 달았는지 지빌링엔 연대의 청년들이 ‘결투 놀이’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니 뭐 비번 시간에 자기들끼리 무예를 겨루며 절차탁마하는 것은 권장해야 할 일이었으나···.
이게 과도하게 결투 재판의 예식을 따라하거나 도박판화 되는 것은 주의해야 할 점이었다.
어쨌든 훈련용 무기를 사용할 것과, 도박을 금지하는 것으로 허용해주기는 했다. 사고를 치더라도 보이는 장소에서 치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 였으니까.
그래도 너무 격화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지는 않다. 하나의 연대로 묶이기는 했어도, 각 중대를 이루는 이웃 지방 끼리는 사이가 썩 좋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비교적 ‘건전하게’ 정말로 무용을 겨루고 있었다.
“에르만 형님!
반갑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니 에르만의 친동생이자 종자인 스테펜, 아니 스테페네트 슈피리의 앳된 얼굴이 보인다.
마르사코르 언덕에서의 승리 이후, 소녀는 아쥬흐 영주따님과 첼레스티나 부관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제 ‘소년 스테펜’이 아니라 ‘소녀 스테페네트’라는 것을 모르는 주변인은 아무도 없기도 했고.
오빠로서는 이제서야 머리를 기르는 동생이 귀여웠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어쨌든 여전히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는 스테페네트의 뒤에는, 날씨가 제법 더운데 괜찮나 싶을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은 멀끔한 차림의 귀족이 서 있다.
동생의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 앉자,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전해준다.
“이 분이··· 여기 귀족님이 ‘네 주인은 어디 있느냐’라고 했어요, 형님.”
“누구시라고 물어는 봤고?”
“아뇨··· 못 물어봤어요.”
“그래 수고했어. 내가 이야기를 해 볼게.”
“네, 형님.”
뒤를 힐끔 거리며 스테페네트가 자리를 떠나고, 에르만은 반듯한 자세로 예를 취한다. 그리고 상대가 불쾌해 하지 않을 정도로 슬그머니 복장을 살핀다.
비록 에르만이 비싼 옷을 입어본 적은 없지만, 번들번들한 비단 특유의 광택은 물론 알아볼 수 있다.
목 주변과 소매로 나와있는 새하얀 셔츠의 깃은 이것만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하인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검과 같은 근접 무기든, 화약 무기든 잠깐만 다루어도 더러움이 타니까. 허리에 멋지게 장식된 검을 차고는 있지만 당장 뽑을 생각은 없는 것 같고.
“저는 트랑카벨 가문을 모시고 있는 연대장 에르만 슈피리라고 합니다. 어떻게 오셨···.”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상대 귀족이 갑자기 성큼 다가선다. 에르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그대로 지나쳐 버린다.
아니 이 인간은 뭐지? 에르만이 기가 막혀서 돌아보자, 귀족은 뭔가에 홀린 듯,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뒤에 걸린 깃발 앞에 선다.
피 흘리는 흑곰. 지빌링엔 연대의 상징인 연대기이다.
“저··· 각하?”
에르만은 혼란에 빠졌다. 잠시 상대를 가로막아야 하나 싶었지만, 괜히 귀족에게 함부로 대했다가 일이 귀찮아질까 하는 걱정도 된다.
게다가 특이하게 행동했을 뿐, 아직 뭐 적대적인 행위를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용병 따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귀족 나부랭이 따위 얼마든지 봤으니까. 이번에도 그냥 괴짜 귀족을 잘못 만났다고···.
“이건 뭐지?”
“어··· 그건···.”
설명도 허락도 할 틈도 없이, 귀족이 연대 깃발로 손을 뻗었다.
솔직히 에르만은 발끈했다. 이건 분명히 화가 날 일이다. 화를 내야 할 일이다.
단순히 귀족으로서 개인을 무시했다면 세상이 원래 이렇지··· 하면서 넘길 일이다. 말 그대로 ‘세상이 원래 그러니까’.
하지만 이건 선을 넘었다. 연대의 깃발이란 단순히 화려한 피아 구분용 천조각이 아니다.
연대 그 자체의 상징이며, 정신이고, 역사이다.
하물며 이 깃발은 많은 신세를 진 트랑카벨 가문의 하사품이다. 아쥬흐 영주따님에게 받았을 때 다 같이 눈물을 흘렸던 게 기억난다.
전장에서 이 깃발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유는 깃발이 값진 천조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름답군.”
힘을 써서라도 연대 깃발에서 떨어지게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사이, 귀족이 중얼거리는 말이 에르만의 행동을 멈추게 한다.
귀족이 조금이라도 깃발을 함부로 대하거나 거친 손짓을 했으면, 귀족이고 나발이고 무슨 뒷감당이든 생각 않고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깃발의 표면을 쓰다듬는다. 어지간한 남자의 상체보다도 넓은 깃발을 부분 부분 펴서 살피고, 읽는다.
“이 깃발은, 연대장인 그대가 만든 것인가?”
“어, 그건 아닙니다. 저희 연대가 섬기는 아쥬흐 트랑카벨 영주따님께서 만드셔서 하사하신 물건입니다.”
“호오, 여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깃발인가? 하지만 이 아름다움은 여인들이 좋아하는 아름다움은 다른 것인데. 마치···.”
귀족의 말투도, 표정도 진지하다.
그 진지함에 밀려, 에르만은 자신도 모르게 깍듯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 뿐 만은 아니다. 상대가 귀족이란 점도 있겠지만, 역시 연대 깃발은 상징이며, 정신이며, 역사이다.
따라서 깃발을 존중한다는 것은 연대를 존중한다는 것이고, 연대장인 에르만 자신도 존중받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물론 자신의 연대, 부하들, 그리고 자신의 주군 가문을 존중한다면 이는 적은 아니지 않을까?
다소 단순하다고 할 수도 있는 에르만의 사고 회로는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그대는 베르마유의 대성당에 가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각하. 저는 엘랑키아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렇군. 베르마유 대성당의 천장에는 주디칼리의 천재 화가, 에스테모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있다네. 검의 대리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불살라, 그림자의 군세를 무찌르는 그림이라네.”
“그렇습니까···.”
눈 앞의 귀족은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자신은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일까.
귀족은 이어서 그 유명하다는 ‘대성당의 천장화’에 대한 간단한 묘사를 해주었다.
그 설명은 간결하면서도 진심이 담겨 있었기에, 어느새 에르만은 본 적도 없는 그림을 눈 앞에서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지금 이 깃발을 보고 마치 그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네. 어째서일까? 분명 아름답기는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인데.”
“그··· 글쎄요···.”
“아마 그대와, 그대의 수하들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네에···.”
너무 감상적이라 팔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으나, 귀족의 하얗고 단정한 얼굴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귀경, 에르만이라 했나? 그대는 이 깃발을 수여 받을 때 기뻤던가?”
“물론, 물론입니다! 기뻤고, 또한 주군 가문에 감사했습니다.”
“그렇군.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을 정도로?”
“네, 그것도 물론입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변함 없습니다.”
“그렇군···. 용병이라 해도 그저 돈에 팔리는 자들은 아니라는 말인가.”
또 듣는 용병 발끈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허나 신기하게 악의가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정말로 스스로는 그렇게 납득한 모양이었다.
“귀경의 군대는 혹시 주군의 근위군인가?”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계약을 맺은 여러 용병 연대의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아름다운 깃발을 수여받았는가. 필시 크나큰 전공을 세웠겠지.”
“적의 대열을 돌파해 포대를 점거하고, 적장의 기병대를 측면에서 요격했습니다.”
자부심을 가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기병대가 엘랑키아 귀족들이긴 했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용병의 전공 자랑은 그게 사실이 아닐 때만 문제가 된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고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니까.
“그렇군. 나는 왜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 또한 수하들에게 보상이 되는 아름다운 깃발을 수여했으면··· 지금보다 나았을지도 모르는 것을.”
지금까지 계속 호기심과 놀라움만 떠오르던 귀족의 단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슬픔이 보인다.
그 변화는 너무도 극적이라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설마 놀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라고 에르만이 스스로 반문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또 그건 아닌 것 같다. 잠시 망설이던 에르만은 입을 연다.
“저, 각하 그건 조금 다르다 생각합니다.”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보는가?”
자신의 의견을 반박당했음에도, 귀족은 조금도 불쾌한 모습이 아니다. 에르만은 가능한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다.
“깃발은 이미 서로간에 쌓이며 형성되어 있던 친애와 신뢰를 형상화 하는 마지막 단계에 불과하다 생각합니다."
"흐음, 무슨 의미지?"
"이 연대기가 저나 저희 연대에게 소중한 물건이 된 이유는 이게 없어도 이미 그런 관계였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흐음···."
에르만은 상대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을 보자, 망설이다가 마지막 말을 잇는다.
"가령, 각하께서 저에게 같은 깃발을 내려주신다고 해도, 각하나 저에게 그 깃발이 여기 이 깃발 만큼의 의미를 가지지는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오! 그런 말이군."
어린아이처럼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귀족은 처음으로 미소를 보인다.
"그대는 매우 박식하군, 에르만 경."
"아뇨 저는 그저···."
"최근 만났던 어떤 교사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네. 비로소 조금 알 것 같아."
과도한 칭찬에 에르만은 얼굴에 불이 나는 것 같다. 하지만 아까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상적인 표현을 했을 때처럼, 이 또한 진심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이 정체불명의 귀족은 원래 이런 사람인 것이리라.
정체불명이라니···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직 누군지도 모른다. 각하라고 부르곤 있지만··· 당신 대체 누구지?
"아이고! 여기 계셨습니까!"
호들갑떠는 목소리. 얼마 뒤에 귀족치고는 수수하지만, 역시나 화려하게 치장한 남자 여럿이 땀을 줄줄 흘리며 허겁지겁 달려온다.
"잠시 기다리시라고 하였는데요··· 천한 자들 사이에서 혹시라도 험한 꼴을 당하시면 어떡합니까!"
"아니, 이 자는 천하지 않네. 오히려 매우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군인이었어."
"네에? 저··· 전하···."
전하라니? 갑자기 에르만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전하라니? 이 근방에서 전하라는 존칭을 들을 사람이란···.
"미안하군 에르만 경. 잠시 아름다운 깃발과 재미있는 이야기에 홀려 소개를 하지 못했군."
귀족 청년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팔을 옆으로 드는 고풍스러운 인사를 한다.
"나는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이라네. 그대의 주인에게 안내해주기를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