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쿠앙트뢰 조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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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앙트뢰 마을 근처에서 보낸 다음 날은 일찍 일어났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아 주변이 어둑어둑하다.
작은 마을 주변으로 실개천이 몇 개 흐른다. 개천이 굽이지는 곳에서 나는 진흙이 좋은 재료가 되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트랑카벨 가문에서도 상업용으로 쓰기 위해서 엘랑키아 남부에서 항아리를 대량으로 발주하는 것을 본 것 같기도 하고.
평화로웠다면 지금도 부지런히 그릇과 단지를 구워내고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주민들은 대부분 피난 갔고, 다른 지역에서 온 병사들만 주변에 바글거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일찍 일어난 루바르와 면담을 한다. 소년 종자들로 이루어진 기마대를 지휘하는 이 젊은 기사는 제대로 쉬지 못했는지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아, 트랑카벨의 에트 경! 밤은 잘 보내셨습니까?”
“전쟁터 치고는 잘 쉬었습니다. 간밤에 뭔가 소식이 있었나요?”
“아직 전혀 없습니다. 저녁에 몇 시간 정도 정찰을 나갔던 자들도 귀환했지만, 근처에서 다른 부대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흐음, 그런가요.”
“어쩌면 마로텍스 백작님과 길이 엇갈렸을지도···.”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천 명 이라는 인간이 모여있으면 상상 이상으로 소음이 크고 흔적도 많이 남는다.
숲이라면 야생동물이 도망치고 새가 날아오르는 법이니, 길이 엇갈렸다면 아무리 초보 정찰병들이라도 그 흔적은 찾았겠지.
이거 참··· 슬슬 불길하던 생각이 구체화가 되어간다.
“곧바로 준비해서 정찰을 내보낼 생각입니다. 아니, 이번에는 제가 나가보려 합니다.”
“저도 같이 가야겠네요. 저도 이번에는 적을 찾으러 온 것이니··· 함께 찾으면 더 낫겠지요.”
“그러습니까! 그거 감사드립니다.”
나도 정찰을 함께 나가보려 했는데, 사소한 다툼이 생겼다.
어제 있었던 일을 이유로,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장 로베르 드 나뵈프가 내가 가볍게 정찰에 나가려는 것을 말리기 시작한 것이다.
“근처까지 적이 다가왔을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1개 중대는 데리고 가셔야 안전합니다, 콘도티에레.”
“아니 로베르 경, 1개 중대나 데리고 가서 무슨 정찰을 한단 말입니까···. 병력 낭비입니다. 주변이 개활지고 하니까 갑자기 적과 마주치지는 않을 겁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세심한 인원들을 호위로 뽑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쥬흐 영주따님께서 따로 부르셔서 콘도티에레를 안전히 모셔달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첫 날부터 그런 일이 있어서 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으으,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어쩐지 평소에는 약간 거리를 두는 느낌이고, 조용히 명령만 따르던 로베르가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더라 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1개 중대나 데리고 갈거면 그냥 그 인원 정찰 내보내고 보고를 받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형이든 병력이든 전황이든, 직접 눈으로 봐야 확인이 가능한 게 많다. 내 몇 안되는 장점이기도 하니까, 이 부분에서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시간 지휘는 영상 통신 기술이 충분히 가능한 후에야 가능하니까.
그것도 아니면 이세계 트립 특전 미니맵 어디 갔냐 미니맵. ‘나는 너희가 신이라 부르는 존재’ 어디 감?
“어제는 갑자기 해가 져서 잠시 안일하게 행동했고,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 약속할게요.”
“그럼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아니, 로베르 경은 출전 준비를 하고 여기서 대기해야 합니다! 평소 제31 정찰 연대는 군단의 눈이엇지만, 이번에는 적을 부수는 창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로베르 경은 더 고집부리지는 않았다. 뭔가 내가 말한 표현이 마음에 든 것 같기도 했고.
결국 서로 타협하여, 평소대로 소수의 호위병만 이끌고 가되, 선두에서 먼저 전방을 살피는 6명의 기병을 추가로 참여시키기로 했다.
그 정도면 괜찮겠지 뭐. 적을 습격하러 가는 것은 아니니까 적당한 정도는 보는 눈이 많은 것도 좋을 듯 싶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직 뭐가 있는지 모를 엘랑키아 남부 탐험을 시작했다.
블랑독도 여러가지로 좋은 지역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직접 말을 타고 달려보니 엘랑키아는 정말 혜택받은 지역이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
이전에 드 레뮤즈 영지에서 현지 조사를 할 때도 느꼈지만, 말 그대로 꿀땅이다.
아직 개간되지 않은 개활지가 지천으로 널려있는데 그게 또 손으로만 뒤집어 파도 기름진 새카만 흙이 딸려 나올 정도였다.
촘촘하게 초록으로 뒤덮인 초원을 달리다 보면, 정말 여기가 하늘의 혜택을 받은 천국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기후도 적당하고 말이지.
전쟁만 아니었다면, 그래서 여기가 국경 지대만 아니었다면 좀 더 활발하게 개발되지 않았을까?
무슨 종교니 이단 척결이니, 친촉의 복수니 정의 집행이니, 이래저래 말은 많지만 결국 이 땅을 차지하고 싶다는 것이 속마음이 아닐까.
하여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지. 오만 실수를 반복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한참 주변을 훑듯이 정찰하다가, 루바르와 다시 만났다.
표정만 보아도 특별히 발견한 것은 없는 모양이다. 좀 더 대담하게 원거리 정찰을 시도해 봐야 하나···.
거르고 나온 아침을 비상식으로 말 위에서 대충 떼울까 고민하던 때에 저 멀리서 루바르의 정찰병이 뭐라 외치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숲 너머까지 원거리 정찰을 나갔던 소년을 태운 비쩍 마른 하얀 말은 무척 힘들어 보였지만 용케도 무사히 도착했다.
“숲 뒤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전투? 누구와 누가?”
“적은 모르겠고··· 마로텍스 백작님이십니다!”
드디어 찾았다. 아직 싸우고 있다면, 최악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는 서둘러 숲의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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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고함소리가 섞인 전투의 소음이 들려온다.
“뒷걸음 치지 마! 외곽을 유지해라!”
“대열을 갖추고 있으면 적도 접근 못한다!”
타타탕! 탕! 타탕!
“머저리들아 명령 없이 쏘지 말라고!”
“어서 장전하고 대기해!”
“으, 으아아! 온다아!”
명백하게 경험이 부족해 보이는 보병들의 대열이 있었다.
어설프게나마 창병과 총병이 조합 된 대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나, 생각대로 잘 안 되는 전형적인 어그러진 대형이다.
창병이 확고한 외곽 선을 그어주고, 총병이 이를 보조해주는 모습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둘 다 잘 안 되고 있는 모양이다.
숲을 등지고, 똘똘 뭉쳐서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병력이 마로텍스 백작의 군대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먹이를 노리는 상어처럼 배회하는 자들은 라솔의 기병대겠지.
“여기까지 대열을 연장··· 커헉!”
우리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나와있던 보병 장교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그의 흉갑 위쪽의 노출된 목에는 부러진 창이 박혀있다.
“빌어먹을 새끼들!”
“쏴! 쏴버려!”
타탕! 따다당!
“명령 없이 쏘지 말라고!”
···개판이다.
가볍게 무장한 라솔 경기병들은 농락하듯 자유롭게 거리를 유지하며 엘랑키아 보병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견디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튀어 나오거나, 지휘를 위해 대열에서 떨어지면 사정없이 습격해왔다.
라솔에도 무게와 방어력, 돌파력을 중시하는 중장기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형 특성상 가볍게 행동하는 경기병 전술이 크게 발달했다고 한다.
갑옷은 입지 않거나 작은 방패 등 최소한의 방어구만 갖추고, 찌를 수도 던질 수도 있는 가볍고 짧은 전통적인 창을 쓴다고 했다.
물론 이런 무기가 요즘엔 기병에게 보편화 된 권총에 비해 밀리는 것은 분명하겠으나, 어지간한 양산품 갑옷 가격보다도 비싼 치륜식 권총에 비해 손쉽게 다수를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은 중요했다.
뭉쳐서 저항하는 보병들은 자꾸 물러서려 하고, 그 바람에 밀집도가 점점 늘어난다.
적에게 대포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밀집도가 이렇게 높아져서는 오히려 불리하다.
총병들은 제대로 장전이나 조준을 하기 어렵고, 전열과 후열을 교대하기 어렵다. 부대간의 유기적인 협력은 꿈도 꿀 수 없고 말이다.
지휘관으로서 바로 날벼락이 떨어질 일이지만··· 주변에 숱하게 널린 전사자들의 시체를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다.
본래 마로텍스 백작의 부대가 차지하고 있었던 공간은 훨씬 넓었겠으나, 차츰 차츰 물러서 이렇게 된 것이겠지.
흔한 일이다.
보병 부대가 퇴각하다가 꼬리 자르기 당하듯 피해가 누적되고, 간신히 숲을 등지고 대열을 갖춘다.
하지만 이제는 고개만 내밀면 찔리는 식으로, 주변을 꽁꽁 싸매고 차근차근 괴롭혀 자멸하게 만드는 전술이다.
주변에 널린 시체들은 당연하지만 오 대 일 정도로 엘랑키아 보병의 숫자가 많다.
아직은 그나마 대열 비슷한 것을 유지하고는 있어서 이 정도로 그쳤지만, 한계에 도달해 대열을 포기하고 달아나게 되면 사상자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타탕! 타타탕!
또 어중간한 거리에서 사격이 낭비되면, 그 틈을 타 몇 명이 달려가 권총이나 투창으로 공격한다.
그 때 마다 어김없이 몇 명인가는 죽거나 부상을 당하고, 대열은 더더욱 위축되는 악순환인 것이다.
이거 큰 일이다. 이대로 두면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무너질 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도와줘야 할 텐데···.
“배, 백작님··· 저희는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에트 경!”
“지금 우리 다 합쳐도 겨우 20기도 안 되는데 당장은 두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루바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기사가 기사답게 충성이며 명예에 목숨을 거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목숨을 내다 버리는 것은 안된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본대의 로베르 경에게 전령을 보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올 겁니다. 그 후에는 한 방 먹여주자고요.”
루바르는 납득했는지 조용히 전장을 지켜본다. 우리는 최대한 지평선에서 실루엣이 들키지 않도록, 언덕 비탈에 엎드려서 너머를 보고 있었다.
먼저 발견한 어드밴티지를 얻었다. 개활지에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안 써먹으면 손해지.
그나저나 투창이라니··· 문득 고개를 돌려 소년 종자들이 들고있는 조잡한 기병 창을 바라본다.
어제부터 뭔가 시대착오적인 무기를 많이 본다.
원래 라솔은 보병이나 기병이나 투창을 많이 썼다고 한다. 타 지역의 전사들이 ‘전후좌우’를 고민할 때 라솔 전사는 ‘높이’를 고민해야 했다던가.
시대가 흐르고 화기가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하며, 차츰 군대가 거대화 되면서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경기병들이 저렴한 보조 무기로 쓰기는 하는 모양이다.
하긴 아군으로 고용한 프리스마라 용병들도 더러 투창으로 쓸 수 있는 가벼운 기병창을 들고 있기도 했지. 기벼운 마상궁은 오히려 흔한 편이고.
그나저나 프리스마라를 데려왔으면 좋을 뻔 했다.
중기병과 경기병의 특징을 절묘하게 절반 쯤 섞은 프리스마라 기병들은 저런 경기병들을 귀신같이 잘 잡는다.
물론 이번에 함께 데리고 온 제31 정찰 연대의 기병들 역시 잘 싸워주리라 확신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원군이 도착할 때 까지 잠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마로텍스 백작, 얼굴도 모르지만 제발 조금만 더 버텨주길. 문자 그대로 기병대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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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젱 드 마로텍스 백작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으며 나무 둥치에 앉았다.
방금까지 그는 부대의 외곽을 오가며 지휘하고 있었으나, 방금 자신의 말이 적의 총에 맞았다.
다행히 말이 그대로 주저 앉은 덕분에 내동댕이치는 최악의 결과는 피했지만, 그래도 떨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린 것 같다.
부러진 것은 아니겠지만 서있기에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일어서기 위해 힘을 줘 보지만,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온다.
“괜찮으십니까, 백작님?”
“나는 괜찮네. 잠시만··· 잠시만 쉬면 괜찮아 지겠지.”
아픈 발목 만큼이나, 그의 자존심도 찢어지도록 아팠다.
그는 전장이 처음이 아니다. 적어도 서부 영주들 사이에서는 전쟁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고, 선대 몽파르지에 공작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국왕의 소집에 응해 북방 전쟁에서는 보병 연대 하나를 이끌기도 했다.
전쟁에서 특별히 빛나는 전공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루한 진지전과 공성전의 연속이던 나우데사에서 견실하게 자기 임무를 수행한 것을 인정받고 포상도 많이 받았다.
그런 자신이··· 잠시 방심한 사이에 라솔 기병들이 꼬리에 달라 붙었고, 강행군으로 지쳐 있었던 병사들이 낙오되며 서서히 부대가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그나마 숲을 발견해서 의지할 수 있었던 게 천운이었다.
아아,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병력을 무사히 후방까지 데리고 갈 수 있을까.
자신이 알기로 이 지역에 지원군은 없다. 자신이 책임자이기에 잘 알았다.
지원군이 될 수 있었던 기동 전력은··· 강변에서 적의 함정에 빠져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다.
어떻게든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버텨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끄으으읏!”
“백작님! 조금 더 휴식을···.”
“전투 중이다! 말을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고통을 참고 일어선다. 부대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데 발목 아프다고 앉아만 있을 수는 없지.
그의 휘하 장교들은 제법 베테랑들이 많았지만, 병사들은 신병이 많았다.
그래도 훈련을 마쳤으니 제법 잘 싸워 줄 것으로 예상했지만 단기간에 쌓인 피로와 변칙적인 경기병 전술에 휘말려 이런 꼴이 되었다.
“사각 대형을 유지해라! 서쪽! 서쪽에 지원을 보내!”
“아, 알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합류한 패잔병들을 재편성해서 예비대를 만들도록 하게!”
“옛, 백작님!”
등자에 힘이 실릴 때마다 발목이 끊어지는 것 같았지만 걷는 것 보다는 나으니 방법이 없었다. 소수의 예비대를 지휘해 전방으로 향한다.
고통과 절망으로 찌푸려진 루젱 백작의 눈에, 의외의 장면이 보인다.
몇 천은 되어보이는 적 건너편에서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기병대가 일으키는 것이 분명했다.
설마 적이 더 몰려오는 것인가? 아니면 설마···.
꽈과광!
다음 순간, 귀를 찢는 포성이 들려왔다.
순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지금 그의 연대는 위태로울 정도로 밀집대형이었다. 여기 포탄이 떨어진다면···.
안된다. 피하지도 못하고 끔찍한 시체 더미가 될 뿐이다. 이걸 놔 두어서는···.
퍽, 퍼억! 콱!
그리고 분명하게도 적진 사이에 혼란이 일어나며, 까뒤집어진 흙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멍청한 적 포병의 오인사격이 아니라면···.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도착했다!”
적정 확인을 맡겼던 장교의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