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쿠앙트뢰 조우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여기가 지도의 어디쯤인가 보려고 어둠 속에서 언덕을 올랐다가, 난장판의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
“콘도티에레!”
“위험합니다! 이쪽으로!”
호위병들이 재빨리 나선다. 두 명이 말을 전진시켜 내 앞을 가리고, 한 명이 다시 내 비스듬한 측면으로 나란히 선다.
양쪽을 가리지 않는 것은, 그럴 경우 말을 돌려 퇴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도 대단히 기민한 움직임이다.
“후방에 적이다! 적이다아!”
“모두 일어나! 말에 올라!”
금속으로 된 뭔가를 두드리는 땡땡땡땡 소리가 요란하고, 고함소리가 점점 커진다.
당황한 와중에도, 전방에서 불빛이 보이지 않는 점 부터 확인한 것은 직업병이라 해야 할지.
화승총이란 간단한 기계장치를 이용해서, 총 외부에서 타고 있는 불을 총 내부로 밀어 넣어 점화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사격 준비가 된 화승총을 밤에 보면 빨갛게 점이 되어 타오르는 화승의 끝이 보인다.
이게 밤에는 꽤 멀리서도 보이다 보니, 야간 매복용으로는 영 맞지 않는 무기라고도 하겠다. 나 여기 있소, 하고 알려주는 격이다.
물론 베테랑들은 재주껏 숨기지만, 잠깐이라도 보이면 눈치 빠른 적은 금방 알아차리고 방향을 바꾸거나, 오히려 역습을 해올 테니.
물론 화승 방식이 아닌, 다른 점화 방식을 가진 총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 파멸적인 근거리 일제사격의 위험에 처해있지는 않다는 것에 살짝 안심했다.
“총 집어 넣어! 절대 먼저 쏘지 마!”
왠지 모를 어설픈 반응, 제대로 된 군인의 반응은 아니다. 이들은 아군, 혹은 아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엘랑키아의 병사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군인으로서는 덜 떨어진 이런 아마추어들을 최전방 경비로 배치하진 않을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호위병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래도 위험합니다, 콘도티에레!”
“뒤로! 뒤로 모시겠습니다!”
어설픈 아군이 쏘는 총이라고, 내지르는 창이라고 치명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호위병들이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아무튼 절대로 교전을 먼저 시작해서는 안된다. 놀라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와중에 황급히 주위를 살핀다. 과거에서 비슷했던 경우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엘랑키아 만세! 엘랑키아 만세에!”
갑자기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호들갑을 떨던 호위병들은 물론, 흥분해서 푸르륵거리던 말들도 조용해진다.
건너편에서 시끄럽던 ‘누군가’도 마찬가지.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마치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헛생각이 잠깐 든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엘랑키아 분들인가요?”
한참 지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잠깐 밖에 흐르지 않았겠지. 어둠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동맹, 트랑카벨 가문의 가신들이오. 그쪽의 이름과 신분을 밝혀주시오.”
“레뮤즈? 그 쪽 백작님네 기사들이세요?”
“그건 좀 다르지만··· 뭐 지금 섬기고 있긴 하지요.”
“들었지? 레뮤즈에서 온 분들이래! 지원군이야!”
“어, 어떻게 알고 오셨지?”
“기사님한테 전해! 지원군이다!”
아니 이 사람들이··· 뭔가 목소리도 어리게 들리고,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질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이지?
다음 순간, 앞에서 횃불이 나타난다. 횃불은 두 개, 네 개, 얼마 지나지 않아 열 개 이상으로 확 늘어난다.
“미안해, 부싯깃에 불이 잘 붙지 않아서··· 무슨 일이야?”
“네가 늦는 바람에 큰 일 날뻔 했어. 지원군이 오셨는데, 적인 줄 알았거든.”
“우와, 정말?”
주변이 밝아지니, 내 의아함의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눈 앞에는 시대착오적인 복장을 한 소년들이 횃불을 들고 있었다.
사슬갑옷에 장식 없는 반구형 투구, 짧은 창이나 마름모 꼴 방패까지 몇 개 보인다. 내가 그 사이에 또 이세계 전생을 했나? 한 몇 백 년은 과거로 간 것 같은데.
열 다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년들이 열 명 넘게 모여서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우리를 올려다 본다.
“아! 저희는 마로텍스 백작님의 종자들입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소년 중 하나가 가슴 앞에 창을 곧게 세우며 예를 갖춘다. 그들 중에 키는 가장 컸지만, 비쩍 말라서 사슬 갑옷이 그대로 흘러 내릴 것 같은 몸이다.
“마로텍스 백작? 어떤 임무를 받았지?”
“백작님께서는 남쪽에서 병력을 이끌고 이리 이동 중이십니다. 저희는 머리 마을을 점령하고 퇴로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갑자기 어둠속에서 마주치게 된 이유는, 그들 역시 이 곳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둠이 내리자 불을 피우려 했으나, 그게 잘 안 되어서 계속 시도하는 와중, 어둠속을 어정어정 걸어서 우리가 도착한 것이지.
하··· 생각해보니 이들이 적이었거나, 운이 좀 더 나빴다면 큰 일이 날 뻔 했다. 적이라도 문제지만 아군 끼리의 오인 전투는 정말 악몽이다.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해놓고, 물 뜨러 가던 슈토르히 병사들에게 잡혔던 적 장교같은 머저리 짓을 할 뻔 했지 뭐야.
실제로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던 지휘관이 전혀 예상치 못한 조우전에 휘말려 잘못되는 일은 가끔 생기는 일이다.
아무래도 남의 보고만 들어서는 제대로 된 지휘가 불가능하니 허를 찔리는 것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내가 너무 큰 실수를 할 뻔 했다.
그리고 이 명백하게 군인이라기엔 어린 병사들은 가문의 종자들로, 정찰대 역할을 맡은 모양이다.
과거와 같이 기사가 종자를 데리고 전쟁터를 나서는 시대가 아니고, 기사라고 해서 반드시 말을 타는 것도 아니다 보니 생긴 과도기적인 특이 편성이다.
아마 마로텍스라는 백작이나 그 지휘관도 이 소년들이 전투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해서 후방 경비 업무를 시켰을 것이고.
그러니, 이들은 나름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와아, 멋진 말이네요! 레뮤즈의 백작님이 부자라더니!”
“아니 우린 드 레뮤즈는 아니고, 더 동쪽 블랑독에서 왔어.”
소년들은 나와 호위병들이 말에서 내리자, 감탄하는 모습으로 총기병들의 멋진 갑옷과 혈통 좋은 말들을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종자 소년들은 언젠가 기사가 되기를 소망할 테니까 이해 되는 일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여긴 마을의 외곽이었다. 바닥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깨진 도자기 파편이 잔뜩 밟혔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쿠앙트뢰라고 하는데, 원래 질그릇을 굽는 마을이었다 합니다. 외곽에 깨진 그릇들을 버린 모양입니다.”
그러고보니 둥그런 가마가 여럿 보인다. 전쟁 통에 주민들은 피난하고, 대신 소년 정찰병들이 들어온 것인가.
건물 뒤편으로 이들이 타고 온 말들이 보인다.
조랑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덩치가 작거나, 나이 들어서 그런지 비쩍 말라 힘이 없어보이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지구력이 필요한 장기전도, 순발력과 완력이 필요한 적진 돌파도 불가능해 보이는 말들이다. 기껏해야 전령이나 감시 정도나 가능할까.
마구 역시, 노끈을 꼬아 만든 조잡한 모습이다. 전혀 전쟁 준비가 되지 않은 소년들이 영주의 소집에 모인 것이겠지.
시대가 시대인 만큼 10대 중반부터 커리어를 시작하는 용병이나 기사들이 꽤 많기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 소년들은 너무 어리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일찍부터 경험을 쌓으며 전장을 익히고 성장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장에 비전투 업무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언젠가 실전도 경험하게 된다면 분명 좋은 기사가 될 것이다. 그래도 내 감성으로는 어딘가 씁쓸함을 참기 어려웠다.
잠시 기다리고 있었더니, 언덕 아래쪽에서 기사 한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 소년 종자들을 지휘하는 책임자일까.
“루바르 드 카스부드입니다. 마로텍스 백작님을 모시는 기사입니다.”
“트랑카벨의 에트입니다. 트랑카벨 가문의 대리 사령관이고,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의 요청을 받아 오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몽 백작께서는 어떻게 알고 지원군을···.”
“지원군으로 온 것은 아니고, 이 지역의 상황을 알아보러 온 상황입니다. 아, 든든한 기병대와 함께 왔으니 도울 일이 생기면 돕겠습니다.”
역시나 스무 살은 넘었나 싶을 정도로 젊은 기사 루바르는, 내가 ‘아니고’라고 할 때 세상이 다 무너진 표정을 짓다가, ‘돕겠습니다’라고 할때 다시 얼굴이 활짝 펴졌다.
뭐 소년 종자들의 지휘를 맡은 소년 기사라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게다가 이렇게 아무나 잘 믿는 것을 보면 매우 절박하거나, 경험이 적거나 둘 중 하나겠지.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아! 그게··· 마로텍스 백작님이 다른 여러 귀족님들의 부대를 통솔해 이 지역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라솔 놈들이 강을 건너서 공격해왔습니다!”
“....”
“...?”
“조, 조금 자세히 설명을 부탁드릴게요.”
“아! 죄송합니다 멀리서 오셨으니 궁금하셨을 텐데···.”
성실하고 선량하지만 어딘가 좀 둔해 보이는 루바르는 다행히 조곤조곤 설명은 잘 해 주었다.
최초의 방어 계획대로, 마르텍스 백작은 이스키비르 강 하류의 방어 책임자였다.
작은 부대로 쪼개 강변에 숙영지를 만들었으며, 언제라도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연기를 내기 위해 장작더미도 쌓아 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경비를 서고, 마르텍스 백작 자신은 직속 부대를 이끌고 마찬가지로 강변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갑자기 적이 기습해왔다.
무서운 점은, 강 건너의 적을 발견한 시점에, 이미 상당수의 적이 북안에 상륙해 있었던 것이다.
아마 마로텍스 백작의 주력부대가 알아차린 시점에서 최소한 하루 전에는 적의 공세가 시작됐을 것이다.
상급 부대에 보고도 못할 정도로 철저한 기습이었겠지.
나는 혀를 찼다. 적이 이렇게나 교묘한 방식으로 강을 건널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병력을 분산하여 적을 감시한다는 말에, 상대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 동의를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나왔다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것이나 다름 없다.
서부에서 징집된 귀족군들은 나름의 전투 훈련은 받았겠지만, 낮에는 행군하다 싸우고, 밤에는 잔다는 단순한 사고로 전쟁을 생각할 것이다.
‘라솔의 정예군은 밀집 대형 싸움에도 능숙하지만, 소규모든 대규모든 산개 대형 싸움에도 아주 익숙합니다. 지형 때문에, 대열을 풀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라솔 하류 주둔군에 대해 조언을 해 주었던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 연대장의 말이 생각난다.
기습까지 잘 한 다는 말은 없었지만, 산병 전투에 익숙한 숙련병들이 작정하고 어둠에 숨어들었다면 어수룩한 징집 군대로는 막을 방법이 없었겠지.
···이래서 강가에서 병력을 빼고 미리 적을 발견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루바르 경, 귀경의 병력은 얼마이고 어떤 임무를 받았죠?”
“저는 60명의 경기병을 지휘합니다! 이 쿠앙트뢰 마을은 북쪽의 집결지로 향하는 도중입니다. 그래서 마로텍스 백작께서 미리 확보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랬구나. 괜찮은 판단이다. 아마 강을 건넌 직후에는 적도 취약하고 할 일이 많으니까, 그대로 깊이 진격하지는 못 하겠지.
그러니 이미 패배한 전투는 어쩔 수 없더라도 나머지 병력을 잘 보존해서 북쪽으로 퇴각하는 것이 방법이다.
그 사이, 나머지 병력도 귀환 시켜 집결하면 빠듯하지만 시간을 맞출 수 있으리라.
갑자기 짜증이 났다. 거짓 정보에 낚여서 서쪽 바닷가에 나가 있을 앙비토 공작의 주력군을 또 언제 불러 모은다는 말인지.
그래도 아직은 상황이 컨트롤 가능한 수준이다. 동맹군을 욕하느니 최대한 협력할 생각을 하자. 긍정적 생각을 해야지. 세상에 나쁜 동맹은 없다···.
“마로텍스 백작님은 언제, 이 쿠앙트뢰 마을에 도착하실 예정인가요?”
“그게··· 예정대로면 이미 오늘 저녁에 도착하셨어야 합니다.”
“흐음···. 그렇군요.”
벌써부터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하루 행군 속도는 대충 예상할 수 있으니까, 행군이 지연되었다면 다른 일이 있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십중팔구 안 좋은 일이겠지.
“마로텍스 영지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요?”
“현재 천 오백 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계십니다. 다른 영주님들도 함께 하고 계시고요···.”
“루바르 경이 보기에, 영지군은 강합니까?”
“물론입니다! 저, 저는 이제 견습을 벗어난 반편이지만··· 백작님의 가신 중에는 저 북방 전쟁에서 전공을 세우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화약 무기는 충분한가요?”
“백작님께서 부지런히 확충하셨습니다! 저희 카스부드 가문도 힘을 합쳤습니다.”
주변 병력 포함하면 2천 명 정도 되려나. 일단 북방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면 영 엉망진창은 아닐 테니까.
병력 규모는 중요하다. 단지 다수가 똘똘뭉쳐서 버티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적은 접근하기 곤란해지고, 그 자체로 일제사격이나 기병의 충격에 대한 내성이 생긴다.
2천 정도라면 일단은 안심할 수 있는 숫자다. 적 또한 단시간 안에 무너뜨리기는 힘들 테니까··· 무리해서 공격하진 않으리라 봐도 되겠지.
이대로 안심해버리면 곤란하지만, 그래도 무작정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돌릴 필요도 없다.
하루 정도 행군이 늦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전투 위험성이 있으면 주변을 경계하느라 행군 일정을 일부러 여유 있게 잡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머물고, 내일 일찍 찾아보도록 합시다.”
“예, 에트 경!”
마침 내가 한참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됐는지, 로베르 드 나뵈프 연대장이 보낸 기병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도 이 근처에서 야영하고, 내일은 적을 찾아봐야겠다. 본대에 전령을 보내는 것도 잊으면 안되고.
“오늘은 여기, 그리고 여기에 나누어 숙영한다. 쿠앙트뢰 마을까지 합치면 언덕이 세 개 니까, 번갈아가면서 경비를 선다.”
“옛, 콘도티에레!”
마음 속의 불안감이, 제발 근거 없는 망상이길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