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쿠앙트뢰 조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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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보고가 쏟아지네.”
“네에! 혹시 다른 사령부로 간 보고도 있지 않을까요, 콘도티에레?”
“그것도 걱정이구나··· 혹시 모르니 그 쪽도 부탁할게, 첼레스티나.”
“네에, 콘도티에레!”
잠시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나 싶더니, 동시다발적으로 적 발견 소식이 전해졌다. 갑자기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설마, 라몽 백작네 참모들이 진작에 받은 정보를 뭉개다가 이제서야 공유해 주는 것은 아니겠지?”
“네에, 그건 아닌데요! 도착 날짜를 보면 전부 이틀 내로 도착한 보고들이네요.”
나는 지도를 펼쳐 보고소에서 언급 된 지명들을 짚어본다.
전부 엘랑키아 남서부.
작은 표식들을 놓아 지명들을 표시하자 느슨한 띠 형태의 모양이 나타났다.
설마, 적 단일 부대가 빠른 속도로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고 있을까? 그래서 그 지역에서 보고가 연달아 올라오고 있을까?
아니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루 차이 정도로 고르게 보고가 올라올 리가 없으니까. 보고의 발신일을 살펴보면 이 역시 동시다발적이다.
결론은, 최소 서너 군데에서 적이 동시에 나타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머리속에서 비상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는 느낌이다. 이번 보고들은 강변에서 올라오던 작은 다툼 보고가 아니다. 심상치 않다.
물론 적이 조만간 쳐들어 올 것이라는 사실이야 알았지만 언제 어디로 어떻게 오느냐는 중요 문제니까.
침착하자.
남들이 죄다 당황해도 나는 침착해야 한다. 자꾸 가슴이 빠르게 뛰고, 불길한 생각이 뇌 속을 뒤집어 놓아 상식적인 판단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강변 지키겠다며 기세도 좋게 본대에서 떨어져 출정했던 서부의 귀족들은 뭘 한거지?
이러니 차라리 광역 정찰만 꾸준히 하고 강변만 감시하면서, 주력군은 후방에 대기하자고 했던 것인데···.
이러면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머리속으로나마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자, 분통이 터지면서도 음슴한 안심감에 판단력이 일부 돌아온다.
일단 결투 재판 이전에 회의에서 결정된 대로, 해안지역을 포함한 엘랑키아 서남부 방위는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이 맡기로 했었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남의 사령부 일에 기웃거릴 수는 없으니 완전히 맡기고 있었지만.
듣기로는 자원한 소영주들의 군대를 강변에 점점이 뿌려 놓았다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별 효용 없는 병력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만 뭐.
그걸 알고 나니 불안함이 증폭되는 것이다. 이미 내륙으로 진입한 적군으로 의심되는 보고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그런데 강변을 지키기 위해 분산 배치되었던 부대들에서 전혀 보고가 올라오지 않는 게 말이 되는가.
그게 가능할 두 가지 가설이 있다.
먼저, 적이 귀신같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기습적으로 도강해 내륙으로 진격해왔다.
어쩌면 해로를 이용해 단거리 수송으로 감시 지역을 벗어나 몰래 병력을 내려 놓았을 수도 있겠고.
혹은, 터무니없이 철저한 기습 공격에 의해서 최전방 병력들이 섬멸당한 것이다.
말 그대로 ‘철저한 기습’이어야 하겠지. 전령 조차 못 보내고, 미리 준비해둔 봉화에 불도 못 붙일 정도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 가능했다면 적은 분명 대단히 치밀한 지휘관과, 숙련도 높은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이거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지금 산발적으로 날아오는 보고를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아 답답했다.
적은 최소한 서너 군데 이상으로 분산되어 행동하고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그 관측된 적군은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다.
보고자들이 당황해서 헷갈렸다 해도, 보통 공포에 질린 정찰병들이 적의 숫자를 과장해서 말하지 줄여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거든.
그러니, 아직 적 주력은 찾지 못했다고 봐야지. 아직 강 건너편에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이거 안 되겠네, 첼레스티나, 내가 직접 가서 봐야겠어.”
“네에? 위험해요오!”
“이대로 있는 게 더 위험해. 산발적인 보고로는 한계가 있네.”
지금 우리 연합군은 상당한 대군이고, 동등한 조건에서 적과 싸운다 했을 때 승리 확률은 절반 이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정쩡한 방어 계획 탓으로 완전히 분산된 상황이다.
특히 앙비토 공작은 서쪽에, 라몽 백작은 동쪽에서 주력을 이끌고 있다.
그 긴 간극인 중앙을 커버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자칫하다가는 단독으로 적 주력을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으··· 가뜩이나 중요 지점 점거한다고 병사들 불필요하게 이리저리 행군시켜서 미안하고 답답해 죽겠구만.
“호위를 데려가셔야죠, 콘도티에레! 1개 연대 정도는 데려가시지 않으면 위험해요.”
“아니 가서 잠깐 보고만 올 건데 뭐··· 너무 요란하게 많이 가면 볼 수 있는 것도 못 볼 지도 몰라.”
“그래도 안 돼요 콘도티에레. 지금 서부의 정찰병들은 믿을 수 없어요! 이미 적군의 소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요?”
“흠··· 설마 그렇게까지···.”
나는 망설였다. 첼레스티나의 말은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길잡이가 있다고 해도, 갑자기 ‘지형’이 바뀐다거나 하면 큰 일 날 수 있다.
여기서 지형이란, 어제까지 별 문제 없이 지나쳤던 지역에 갑작스럽게 적의 주둔지가 생겨있거나 하는 경우를 말한다.
실제로 슈토르히 연대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건 이득을 본 경우라 해야 할 텐데, 저녁을 준비하던 중대가 갑자기 비밀 문서를 지닌 적 고위 장교를 끌고 온 적이 있었다.
도망치려다 얻어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부은 장교에게 술을 한 잔 주며 물었더니, 명령서 받으러 왔다가 돌아 가는 길이 갑자기 아군 주둔지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아직 경계선을 치기 전이었기에, 어처구니없게도 밥 하러 물 뜨러 가던 병사들이 적 장교를 사로잡아 포상금을 받았다.
나중에 그 병사들이 말하기를, 적 장교의 복장이 화려하지 않았다면 아군 전령이겠거니 하고 그냥 지나쳤을 거라 할 정도였으니.
“어쩔 수 없네. 현지에서 곧바로 정찰을 진행할 지도 모르니까, 기병 연대와 함께 가기로 하자.”
“네에, 콘도티에레! 잘 생각하셨어요.”
“지금 주둔지에 있는 기병 부대가 누가 있지?”
“어제 귀환한 제31 정찰 연대가 있어요오.”
“그럼 첼레스티나가 출발 준비를 전달해 줘. 아, 그리고 네그라타 연대의 미카토 연대장도 불러 줘.”
“네에!”
그러고보니 네그라타는 라솔 출신 용병단이었지.
나도 용병 생활을 하면서 별 특이한 지역 출신들을 다 만나보았다. 특히 용병은 출신지를 거의 따지지 않으니까.
주디칼리나 그룬발트에도 라솔 출신 용병은 얼마든지 있었다. 분명 슈토르히 연대 단원들 중에도 찾자면 여럿 있을 것이다.
다만 주 활동처가 주디칼리와 그룬발트였기에 ‘라솔 출신’ 용병이나 용병단을 만나본 거지, 라솔 왕국의 정규 연대를 상대한 경험은 없는 것이다.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합류하기 전에는 라솔에서 활동했었다던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 연대장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라솔은 내전이 많은 나라이다.
엘랑키아도 라몽 백작이니 트랑카벨 가문이니, 변경의 강자들이 숱하게 각자도생을 하는 분위기지만 ‘하나의 왕국’이라는 소속까지 부정하진 않는다.
국왕을 정점으로 한 거대한 피라미드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는 말이다.
때문에 다소 비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정보와 힘, 그리고 세금 등은 결국 한 데 모이고 그게 엘랑키아 국왕의 권위의 원천이다.
하지만 라솔은 애초에 복잡한 지형 탓인지 지역 색이 너무 강하다.
많은 지방 영주들이 ‘국왕의 가신’이라기 보다는 ‘국왕이 임명한 총독’에 가까운 느낌의 지방관들에게 억눌려 있는 느낌이랄까.
실제로 많은 지역들이 ‘같은 왕을 섬기기는 하지만 저 자식들과 같은 나라가 되지는 않겠다’ 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래서 국왕은 한 명이고 나라도 하나인데, 권위를 부여하는 왕관은 여러 개라는 독특한 정치 구도를 만들었다니 말이다.
심지어 타라트라바 같은 사실상 독립국까지 국내에 존재하니 크고 작은 지방 분쟁이 없을 수가 없었다.
최근에도 새로 작위를 계승한 타라트라바 공작이 라솔 국왕과 대립각을 세워 내전이 벌어질 뻔 했다던가.
네그라타 용병단은 드 누아와 싸움질을 하다가 트랑카벨 가문에게 고용되기 전에는 주로 라솔 왕국의 영주들과 계약을 맺었다 들었다.
그러니 잘 알고 있겠지. 한 번 들어봐야겠다.
휴, 오늘 저녁도 많이 바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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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결정이 된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나는 결심한 다음 날 아침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와 함께 본대를 떠났다.
연합군끼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은 위험하니 느긋하게 움직일 수도 없는 일이었고.
자연스럽게 급작스러운 강행군이 되어 병사들에게 미안했다.
“저희 연대는 명령을 하시면 따를 뿐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장거리 행군에 익숙합니다.”
왠지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 로베르 드 나뵈프 연대장은 평소처럼 무뚝뚝하지만 정중한 말투로 대답했지만 말이다.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늦은 저녁까지 행군하다보니, 어느새 주변에 어둠이 내렸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갑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올게요.”
“이 어둠 속에서 말입니까? 위험합니다, 호위를 이끌고 함께 하겠습니다.”
로베르 연대장은 크게 걱정이 되는지 나를 만류하거나 따라 나서려고 했지만, 어서 부대를 쉬게 하는게 우선이다.
나도 어둠 속에서 말을 모는 위험함은 안다. 어둠 속에서 말이 발목을 접질릴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깜짝 놀라면 갑자기 멈출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기수에게는 목이 부러질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이 앞에 언덕만 올라가서 주변을 살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콘도티에레.”
나는 소수의 호위병만 이끌고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희미하게 빛이 남아있으니, 운이 좋으면 주변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역시 사람 사는 곳에서 피운 불을 볼 수 있겠지.
타박 타박. 어둑어둑한 가운데, 갑옷과 무기, 마구의 금속 부분이 부딪치는 소리와 말발굽이 흙을 딛는 소리만 들려온다.
‘라솔 국왕군 중에는 몇 개 정도의 상비군 군단이 있습니다. 각 군단은 3개에서 6개의 연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전통있는 강호들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서두르지 않고 말을 몰고 있으려니, 네그라타 연대장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가 해주었던 말이 생각난다.
네그라타 연대는 샹다메리 전투에서 아군의 우측 끝을 맡아, 격전을 거치며 끝까지 전선을 지켜냈었다.
이 전투로 그들이 입은 피해는 막대했고, 미카토 연대장 자신도 상처를 입을 정도였다.
그 이후 후방 수비군으로 편입되어 병력 보충 및 재편성을 마치고 돌아온 미카토는 힘이 넘쳐 보였다. 하지만 라솔 국왕군에 대해 언급할 때는 또한 조심스러워 보였다.
‘아시다시피 라솔은 대영주들의 독립성이 매우 강한 편입니다. 엘랑키아요? 어휴, 엘랑키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네요. 그런 와중에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지키는 정예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부는 국왕의 비용으로, 일부는 주둔지 인근 영주들의 비용으로 유지된다. 지휘관은 국왕이 임명했다.
그렇다 보니, 막대한 유지비를 지출해야 하는 주변 영주들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이건 지방 주둔군과 주변 영주들이 합심한 반란 모의를 막는 효과 아닌 효과도 있단다.
이 주변의 지방 주둔군이라면, 이스키비르 강을 지키는 ‘하류 주둔군’이 있다고 한다.
라솔 왕국의 숙적, 엘랑키아 왕국과의 국경 수비군이라 할 수 있으니 정예 부대가 아닐리 없다.
지위 보장이나 봉급 등 대우도 좋은 편이라, 귀족 기사와 용병을 막론하고 지원자가 많다고 한다.
역시 용병은 정예 부대에서 복무한 커리어가 있어야 인생이 핀다는 말이지. 그만큼 위험하고 사상자가 많아 물갈이도 많이 되는 부대라는 이야기지만.
‘라솔 출신인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조금 그렇기는 합니다만···. 다만, 만약 이 부대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면 단순히 전력의 약화 뿐 아니라, 라솔 국왕의 권위에도 타격이 가게 됩니다.’
그만큼 국왕에게는 중요한 손발이나 다름 없는 존재들이라는 이야기겠지.
그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면 손발 간수를 제대로 못 해서 잘려나간 꼴이 될 테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주변 영주들 입장에서는 ‘비싼 돈 들여서 유지시켰더니 밥 값도 못 해?’ 하면서 본전 생각이 날지도 모르고.
‘어떤 적을 상대로도 두렵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류 주둔군의 각 연대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건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용병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단순한 호적수 이상이라는 거지. 이해는 한다.
잘그락 잘그락.
음, 갑자기 말발굽에 뭔가가 닿는 소리가 난다.
갑자기 돌 바닥이 된 건 아니고··· 자갈인가? 언덕 위에 자갈?
아니, 이건 자갈보다는 차라리··· 설마 질그릇? 깨진 벽돌?
“여기가 대체 어디지···.”
지도를 펼쳐 희미한 등불이 비춰본다. 대충 여기 어딘가로 생각되긴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겠다.
마침 들어올린 등불에 얼기설기 쌓은 돌담이 비친다. 마을이라면 잘 됐다. 여기가 어딘지 물어보면···.
“누구··· 어? 뭐야!”
“기습이다! 기습이야!”
순간, 갑자기 눈 앞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찢어지는 고함소리와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
“남쪽에 기사님들에게 알려! 북쪽으로 돌아왔다고!”
어? 기습? 누가? 우리가?
“전투 준비이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