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인사 정보 작전 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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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상석 중 하나에 앉아서 결투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투장이 제법 널찍하다고는 하지만, 총기가 사용되는 결투이다. 얼마든지 주변의 구경꾼이 맞을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런데도 울타리에 다닥다닥 붙어서 구경하는 모습이 위태로워보인다.
눈을 슬쩍 돌려 이 자리를 만들어낸 ‘재판장’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얼굴을 살핀다.
햇빛을 보지 못해 하얗지만 윤기가 없어 어쩐지 탁하게 느껴지는 백작의 얼굴은 평소처럼 슬쩍 찌푸린 채이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결투장으로 눈을 돌린다.
퍽, 쾅, 카가각!
갑옷으로 무장한 두 결투자가 치고 받는 소음이 여기까지도 들려온다.
첫 충돌 직후, 잠시 서로 얽혀서 제대로 무기를 쓰지 못하는 상태로 나뒹굴다가 떨어진 후, 둘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나는 몸을 쓰는 싸움에 능숙한 편은 아니다. 사격술만은 살아남기 위해서 연습했기에 어떻게든 보통 이상은 하는 편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구른 경험이 있어 양측의 움직임을 분석해본다.
당연히 내가 응원하고 있는 ‘우리 쪽 챔피언’인 알골 딘다르트는 노련함을 알 수 있었다.
두꺼운 쇠장갑을 낀 왼 팔을 방패 대용으로 내밀고, 거리를 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러는 도중 오른 손에 든 검은 어깨에 걸치거나, 흉갑의 겨드랑이 쪽에 바짝 붙여서 앞을 겨누는 등 견제 용도로만 쓰고 있다.
그리고 꼴 보기 싫은 귀족 놈이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죽는 꼴을 보고 싶냐면 그건 또 애매한 ‘상대 쪽 챔피언’, 올리앙 드 브레겔 남작도 보기보다 괜찮은 기량이다.
장검의 긴 손잡이를 충분히 이용해서, 양 손으로 검을 쥐고 상단 공격과 찌르기를 번갈아 사용하며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 기세와 연계는 상당한 수준이다. 알골의 노련한 회피와 스탭이 아니었다면 단번에 밀렸을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부담감을 느끼고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이들은 자꾸 뒤로 피하고, 거리를 두고자 한다.
아마도 상대로부터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겠다.
그런데 뒷걸음질은 위험한 일이다. 눈이 앞에 달린 만큼,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물러서는 것은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아무리 결투장의 환경을 숙지하고 있다 해도 그렇다.
미처 치우지 못해 흙에 반쯤 묻혀있던 돌부리, 포장 판석의 깨져 벌어진 부분은 부주의한 결투자의 목숨을 언제든 빼앗을 수 있다.
거기 더해서 장소가 좁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구석에 몰릴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하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알골의 회피는 왼쪽 혹은 오른쪽이다. 한쪽으로 빙빙 도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간발의 차이로 반대로 피한다.
피하기 애매한 공격은 방패 대용인 왼 팔이나, 혹은 자신의 검날을 통해 흘려 보낸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한 걸음 바짝 다가서며 까다로운 공격을 날리곤 한다.
축구 경기로 치자면, 총 슈팅 수는 비슷하지만 유효 슈팅만 따지자면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까.
공격과 수비의 비율은 삼 대 일 정도로 올리앙이 압도적이니, 밀어 붙인다고 보이지만 말이다.
“대체 총은 뒀다 뭐 하려는 것인지···.”
“어차피 전방에 서는 하급 용병이 아니겠습니까. 권총 사용에는 자신이 없는 게지요.”
“값비싼 물건이라 일개 보병이 쓰긴 쉽지 않지요.”
“그러니 권총도 기사의 무기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앉은 상석 주변, 그러니까 준 상석 정도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있던 귀족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내 신경을 건드렸다.
차라리 안 들리면 좋겠지만, 엄숙한 ‘재판’이라 검투 경기를 보는 듯한 함성은 금지되어 있어 쓸데없이 잘 들린다.
용병이라고 얕보여서 화가 나는 것은 아니다. 군사 귀족으로서의 몰상식함에 화가 나는 것이다.
아군이니 전장에서 함께 싸울 기사들인데 말이다. 어찌 저리 보는 눈이 없지.
지금 알골은 분명 총을 가슴 앞 권총집에 고이 보관하고만 있다. 쏘려면 진작에 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내가 빌려준 이 권총은 자기 역할을 분명하게 하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아직 사용하지 않았기에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고, 지금도 마치 사용되는 것처럼 효과를 발휘한다고 할까.
부적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저쪽은 장전된 총알을 써버렸고, 이쪽은 보유하고 있다는 우위가 유형무형의 이득을 가지고 온다는 말이다.
그 간접적인 증거가, 끊이지 않는 올리앙 남작의 공세이다.
물론 당사자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이 선택한 공세이며, 승리를 위한 판단일 수도 물론 있지.
그렇지만 공격을 멈추는 선택지를 가지기 어렵다.
거리를 두고 잠시 숨을 고르기도 힘들다.
언제라도 상대가 권총을 뽑아서 쏠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상당할 것이다.
과연 올리앙 드 브레겔 남작이 어떤 삶을 살아온 청년인지는 모른다. 관심도 없고.
하지만 아마 장전된 총구 앞에 서 본 경험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바짝 붙어서 ‘자신이 두려워하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일 테고.
아 물론 엄청나게 공포스러운 상황이 맞다. 온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고, 내 생명줄이 통째로 상대에게 붙잡힌 듯한 느낌이지.
그런데 나는 대응할 무기가 없다? 이건 뭐 답이 없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승부의 향방은 차츰 알골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간다.
올리앙이 경험해본 격투란 대부분이 시합일 테고, 짧고 격렬했을 것이다. 체력을 소모하고 나면 이를 회복할 휴식이 반드시 찾아온다.
하지만 알골이 경험해보았을, 실전은 그렇지 않다. 심판도 없고 규정도 없다. 때로는 전투가 하루 종일 계속될 가능성도 있으니까.
카칵! 쾅!
“오··· 오오···.”
“반격입니까?”
알골이 다가서며 처음으로 큰 공격을 날렸다. 잠시 원 패턴으로 진행 되던 결투에 지루해진 것 같았던 구경꾼들이 술렁댄다.
칼 끝이 판금 갑옷의 어깨 부위를 긁어대며 불꽃이 튀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올리앙의 자세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상단 자세도, 찌르기 자세도 둘 다 평소에 쓰지 않는 근육을 많이 쓰는 힘든 자세이다. 훈련을 통해 단련을 할 수는 있으나 체력 소모가 심한 것이다.
물론, 거기서 나오는 공격은 위력적일 것이다. 한 대만 잘못 맞아도 치명상을 입겠지.
하지만 어쨌든 그 한 대를 맞추지 못하고, 시간만 끌렸다. 자신이 무리한다 생각도 못했건만, 어느새 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팔은 점점 아래로 떨어진다. 안정성이나 위력이 아닌, 체력 보존을 위한 준비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팍! 까앙! 태앵!
한 번 공격을 시작한 알골은 공세를 늦추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훨씬 빠른 템포로 연달아 무기를 휘두른다.
오히려 쫓기는 쪽이 된 올리앙은 상대의 공격을 튕겨내기에도 급급해 보였다.
지금까지 상대가 공격해오는 동안, 알골은 칼날을 어깨에 걸치거나 흉갑에 기대어 체력 소모를 최소화 시켰다.
그렇게 장전된 권총의 유무로 공격을 쉴 수 없었던 올리앙과의 비축 체력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고.
그래, 이게 바로 전략이고 작전이다.
이제서야 그걸 한 번에 폭발시켰다.
“으아아압!”
고함은 올리앙의 것이었다. 무기끼리 부딪쳐서 튕겨나간 칼 끝이 힘을 잃고 흔들려 ‘이제 곧 끝나겠구나’ 생각했을 무렵, 그대로 달려들었다.
터엉, 하고 양측의 흉갑이 거세게 충돌하며 북소리 비슷한 소리가 울린다.
아마 올리앙 역시 이대로 시간만 끌다가는 체력이 빠진 자신이 질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판단한 것 같다.
그대로 어깨로 알골을 밀어붙이며 한쪽 허벅지를 붙잡는다. 멋은 없지만, 효율적인 판단이었다.
알골은 역으로 팔뚝으로 올리앙의 어깨를 휘어 감았다. 그대로 상대를 메칠 수도 있었겠지만 중심이 흔들린 상태라 실패한다.
서로 중심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함께 바닥으로 쓰러진다.
콰당탕!
“으아아악!”
“커헉!”
올리앙의 어깨와 등이 땅에 먼저 닿기는 했지만, 알골 역시 곧바로 쓰러졌다. 옆에 나뒹구는 칼이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난투극에서 상대만 무기를 잡거나, 마운트 포지션을 빼앗기면 매우 불리하다.
그래서 둘은 서로 일어서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얽혀 나뒹군다.
“끄아아아악!”
젠장할, 알골의 비명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덜컥, 덜그럭!
쾅, 콰창! 콰쾅!
두 중갑병이 몇 바퀴 굴러 서로 떨어진 자리에는 명백하게 핏자국이 낭자했다. 뭐지? 누구의 피야?
“이야아아아아!”
올리앙의 우렁찬 고함이 울린다. 엉거주춤 일어선 그가 상대를 덮치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손잡이와의 길이 비율이 거의 일 대 일에 가까울 정도로 짧은 단검 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설마 무기를 하나 더 들고 온 건가? 분명 권총과 검을 제외한 무기는 도끼였고, 아직도 준비대인 탁자 위에 놓여있었다.
타앙!
다음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하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철퍼덕.
“으으읏, 카아아악!”
옆구리를 감싼 올리앙이 끔찍한 비명을 지른다. 손에서 떨어져 나온 단검이 결투장의 부드러운 흙 위를 굴렀다.
결국 마지막까지 아꼈던 총알이 자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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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무슨 어리석은 짓인지!”
“네에··· 그래도 이겨서 다행이네요오··· 콘도티에레.”
방금 야전 병원에서 알골을 위문하고 온 내가 분통을 터뜨리자 첼레스티나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알골은 단검이 허벅지 뒤편을 찔렸다. 엉덩이 가까운 쪽의 근육에 큰 상처를 입었다. 피는 많이 났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혈관이나 관절을 다치지는 않았다.
그래도 바지를 벗은 채 엎드린 자세로 사타구니에 피에 젖은 붕대를 감은 모습을 보니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당사자인 알골은 그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치욕스러움과, 결투에서 이겼다는 기쁨이 뒤섞인 표정이었고.
‘이는 재판이지 구경거리가 아니다’라는 상황 때문에 조용하던 구경꾼들은 승리자가 비척대며 일어서자 열화와도 같은 함성을 터뜨렸다.
드 레뮤즈 가문의 종사들이 달려가 옆구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몸부림치는 패배자를 실어갔고, 승리자가 비틀거리자 부축하려 했지만 알골이 거부했다.
집사 드레피니의 다소 미사여구가 붙은 승리 선언과, 라몽 백작의 마지막 판결이 있었다. 결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랜만의 진짜 결투를 본 구경꾼들의 흥분과 갑론을박은 그 때 부터 시작이었겠지만 말이다.
“무기를 네 개 들고 온 것은 맞지만, 도끼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니 세 개만 사용한 것이다! 라니 엘랑키아 결투법은 이상해요, 콘도티에레.”
“그러니까···.”
내가 화 나는 부분이기도 했다. 쓰지도 않을 도끼를 회장에 들고오고, 단검은 몰래 숨겨서 가지고 있었다니 이건 속일 생각이 가득했던 게 아닌가?
심판을 맡았던 드 레뮤즈의 집사 드레피니에게 항의했더니 그런 대답이 왔다.
“그 집사 할아버지, 상대 편을 든 건 아닌가요, 콘도티에레?”
“으으으··· 나도 무척 화가 나긴 하지만 그건 아닌가 봐. 과거에 실제로 그런 결투가 있었고, 그게 ‘판례’처럼 내려오고 있다고 하니.”
“엘랑키아는 이상하네요!”
내가 미리 알고, 알골에게 주의시키지 못한 것은 실책이었다. 당사자도 나도 엘랑키아 출신이 아니다보니···.
아니 이건 지엽적인 일이고 어쨌든 이겼으니 넘어간다 치자. 내가 정말 화나는 것은 전투를 앞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거다.
알골은 이제 규모가 제법 커져서 정규 연대의 모습을 갖추게 된 피 흘리는 흑곰 연대의 수석 중대장이다. 소중한 중견 장교라는 말이다.
올리앙 남작도 뭐 하는 인간인지는 몰라도 나름의 중요한 역할이 있겠지.
그런 둘이 제법 큰 부상을 입었다. 그 동안은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이는 우리 연합군의 직접적인 전력 약화를 말한다.
지금까지 용병 밥을 먹으면서 전투를 앞두고 저지른 최악의 머저리 짓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콘도티에레, 손님이 오셨어요.”
분을 삭히는 나를 방문한 사람은 다름 아닌 드레피니, 라몽 백작의 노인 집사장이자 결투장의 진행을 맡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먼저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수고는 우리 알골 중대장이 했지요.”
내 말투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이번 전쟁은 레뮤즈 영지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허헛,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라몽 백작님께서 이걸 보내셨습니다.”
드레피니가 수행원으로부터 상자를 받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나무와 놋쇠로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상자를 열자 꼼꼼하게 담은 상당한 양의 금화가 나온다.
전투에 투입된 용병 중대장 기준으로··· 거의 반년 치 연봉 정도랄까?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다.
“오늘의 승리자 분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니··· 네··· 뭐 전해주면 기뻐 할 것입니다.”
금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냐고 원론적으로 말하기에, 이 친구들은 원래 목숨 걸고 돈 버는 용병들이기도 하고.
“라몽 백작님께서 무척 기뻐하고 계십니다.”
“...전혀 그런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요.”
“하하하, 백작님 표정을 읽기가 다소 어렵기는 합니다.”
다소는 무슨.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그래도 위로한다며 금화 더미를 가져온 사람이니.
“올리앙 남작에 대해서는 에트 경께 따로 말씀을 드려야 겠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말입니까? 저는 귀족 사이의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전쟁 준비하기에도 바쁩니다.”
진심이다. 뭐 귀족들 사이의 알력 같은 문제였겠지. 제발 그런 문제는 전쟁 중에는 불거지지 말았으면 하는 일이다.
“실은 그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답니다. 연합군의 지휘권에 대해서요.”
“네에?”
드레피니가 상체를 슬쩍 숙이며 목소리를 낮추자, 나도 덩달아 가까이 붙어 앉을 수밖에 없었다.
“올리앙 드 브레겔 남작은 지휘권 문제에 있어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