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인사 정보 작전 군수
적과 아군이 접하는 모든 면을 막는 선형 방어는 원래 효율이 좋지 않다.
만리장성이나 참호전처럼 ‘외형상 성공은 했던’ 경우도 드물게 있지만, 대체로 제대로 시도도 못하고 실패한다.
하물며 만리장성도 참호전도 무지막지한 부작용을 감수한 방어 전략이었고, 장기적으로 방어에 이득이었냐고 물으면 이 또한 의문을 표할 수 있다.
결국은 핵심 지점들을 선정해 철저하게 지키는 거점 방어와, 적을 격퇴할 수 있는 야전군을 이용하는 기동 방어를 선택하게 된다.
모범적이고 반영구적인 방어선이라면, 고대 로마의 라인 강 방어선이나 GP, GOP를 활용한 자연지물과 정보 집함점을 이용한 방어선이겠으나 현실적으로 그런 건 불가능할 테고.
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반응은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생각도 못한 반발이 일었다.
“우리 가문의 영토는 서남부에 있소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을 적의 손에 내 주란 말이오?”
“변경 영주들을 총알 받이로 하겠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소!”
“고향을 버리라는 말이오?”
격앙된 귀족들이 고함을 질러댄다. 자신들의 영지가 전쟁터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영주들의 분노였다.
그들로서는 자신의 영지가, 그것도 안전하다 생각한 곳이 공격당할 가능성이 생기자 그러는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전쟁터는 드 레뮤즈 영지이며, 자신들은 조력자 정도로 생각했을 테니까.
몇몇 엘랑키아 서남부의 영주들로서는 ‘예방 전쟁’을 한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자신들도 전쟁의 당사자가 된 느낌이겠지.
“영주님들, 걱정하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평야지대라서, 자연지물에 의존해 지키는 것은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성채에 들어가 며칠만 버티면 지원이 올 겁니다.”
물론 다소 경제적인 손실이 있을 것이며, 갑자기 삶의 터전을 버리고 피난가야 하는 백성들 또한 불필요하게 고통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 주력군의 침공을 못 막거나, 최악의 경우 각개격파라도 당하면 영지가 송두리째 불길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서로 주변에 대규모 야전군이 있다는 것을 서로 아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함부로 공성전에 나서거나 약탈, 파괴에 나서기는 힘들다. 자잘한 약탈물 따위에 신경쓰다가 가장 중요한 결전에서 패배할 수 없는 것은 적도 마찬가지니까.
나는 성심성의껏 설명했지만 여전히 불만은 많은 것 같다.
이런 저런 의견들이 오가고, 각종 제안과 조율, 그리고 의견 수정이 있었다. 몇 번 답답하다 느낀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당장 강을 건너 라솔을 공격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적지 않은 숫자가 찬동하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주류 의견은 아니었다. 만약에라도 그런 방침이 결정되었다면··· 나는 깊은 절망에 빠졌겠지.
최악의 상황까지 빠지지는 않은 상태로, 비교적 빠르게 의견이 정리된다.
최악의 상황만 아니면,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대응한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내가 옳은지 완전히 확신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반드시 옳다 생각하는 게, 실제로는 옳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여러 인물들이 의견을 내고, 지도를 두고 밀고 당기고 한 끝에 확정안이 정리되었다.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이 이끄는 서부군 주력은 엘랑키아 남서부 해안에 가깝게 주둔하며 해안을 지킨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이끄는 영지군은 동쪽, 드 레뮤즈 영지에 주둔하며 남쪽을 지킨다.
내가 이끄는 블랑독 연맹군은 그 후방에 예비대로 주둔한다. 양 군 사이의 거리를 조율하며, 정보와 연락의 중심 역할을 한다.
나머지 서부 영주들은, 분산하여 남서부 강가와 해안을 지킨다. 전령을 통한 정기 연락과, 비상시 불을 피우는 봉화 양쪽을 모두 충분히 활용한다.
솔직히 제대로 조직화되지 않은 소영주들의 부대를 경계선을 따라 어지럽게 흩뿌려 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많아야 수백 명, 적으면 수십 명 수준인 소부대들은 본질적으로 정찰병 이상의 역할은 못 할 것이다.
지키고 있는 눈 앞에서 어느 정도 규모의 대군이 대놓고 강을 건너도 전혀 막지 못한다는 말이다. 어디로 건널 지 알고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러니 소수의 정찰 인원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집결해서 대기하는 것이 답이겠으나, 이렇게 하지 않고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데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나대로 내 역할을 다 하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이들을 최대한 이용하고, 나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할 수밖에.
“그럼 방금 결정된 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소. 각 군의 주장들은 휘하 병력의 위치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방어선 유지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시오.”
나를 포함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에 방어 전략은 결정되었다.
우리 블랑독 연맹군은 후위이기는 하지만··· 왠지 죽어라 고생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라몽 백작이나 앙비토 공작의 주력군이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거기 맞춰서 움직여줘야 한다.
게다가 보나마나 어마어마한 양의 쭉정이 정보가 산처럼 쏟아질 게 분명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서부군의 감시병들은 어스름 내린 산속의 고목을 매복한 적병으로 볼 것이며, 새벽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을 나룻배의 대군으로 볼 것이다.
정보 업무의 핵심은 쓰레기 정보를 걸러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고생이 예상된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그 정도 수고야 얼마든지 감수해주마.
사실 우리 트랑카벨 군 지휘부가 아니면 그 역할을 마땅히 하기도 힘들고 말이지.
“다른 의견은 없으시오?”
상세 결정 사항을 실무자들에게 전달한 후, 라몽 백작이 묻는다. 새삼 다시 봤지만, 그는 제법 귀족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본인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논의가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불필요한 충돌을 할 때는 개입하고 나선다.
확실히 주변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고 백성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대영주는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의 말에 의하면, 비합리적인 일을 원수처럼 싫어한다고 한다. 그런 성격이 원만한 진행에 도움이 된 것일지도.
만약에 라몽의 적절한 개입이 없었다면 논의는 2~3배는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제가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백작님.”
“음··· 말해보시오.”
이제야 끝나나 싶던 차,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올리앙 드 브레겔 남작이었다.
저 밉살스러운 인간은 또 무슨 일인 거지?
“최근, 저희 군의 일원이 억울한 일을 당한 바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개인적으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 결과, 결정적인 증인을 찾아 억울한 일을 당한 자의 사연이 진실임을 달았습니다.”
뭐라고? 라몽 백작이 중재해줘서 적당히 마무리하고 넘어간 게 아니었나?
문자 그대로야 두고 보자는 것이었지만, 적당히 넘어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마침 많은 분들이 모여주신 자리, 연합군의 맹주이신 라몽 드 레뮤즈 백작 각하께 정의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이전에 똑바로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던 것을 생각하면, 같은 사람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유려한 언변이었다.
나름 자기에게 유리한 근거를 찾아왔다 이건가? 아니면 외워서 이야기를 하는 타입인가?
견디기 힘든 짜증이 났다. 대체 이런 중요하고도 급박한 상황에서, 어째서 저리 집착하는 것인지.
당사자들의 눈치를 본다.
올리앙 남작은 세상을 다 가진 듯,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눈을 빛내며, 일부러 내 쪽을 도발적으로 바라본다.
라몽 백작은 평소처럼 찌푸린 표정으로, 항상 근처에 있는 늙은 집사장에게 뭔가를 시키더니 다시 올리앙 쪽을 바라본다.
앙비토 공작은 의외로, 살짝 놀란 모습이다. 뭐지, 저 자가 시킨 것은 아닌가?
“좋소, 정의는 중요하지. 증인은 바로 증언할 수 있소?”
“예, 백작님.”
“들어오라 하시오.”
잠시 후, 불안하고도 비루한 행색의 여인 하나가 막사로 들어온다.
엘랑키아 남부의 실세들이 다 모인 막사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차림의 여인이다. 그녀는 라몽의 얼굴을 보자마자 거의 절을 하다시피 고개를 깊이 조아린다.
“고발이 이루어진 이상, 이 곳은 재판의 장이다. 나는 굽어보시는 주신을 대신해 정의를 실현하려 한다. 진실만을 말하겠는가?”
“네, 네. 네!”
“좋다 말해보거라.”
초라한 행색의 여인은 주춤주춤 설명을 시작했다. 중간 중간 말이 끊겨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땀만 뻘뻘 흘릴 때는 내가 다 안타까울 정도였다.
자신은 세피라는 이름을 가진 임시 주점의 직원으로, 사건 당일 주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며, 바로 옆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문장이 없는 간소한 가죽옷을 입은 분들이 테이블에 앉아 술을 드시고 계셨어요. 그리고 여기 파랗고 붉은 색 옷을 입은 병사분이 그 테이블에 다가갔다가, 갑자기 주먹에 맞았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주먹질을 날렸다고?”
“그래서 양측 동료 분들까지 얽혀서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치신 분은, 문장이 없는 옷을 입은 분들이 바닥에 눕혀놓고 팔을 뒤로 당겨 굉장한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양쪽의 숫자는 얼마나 되었느냐?”
갑자기 라몽 백작이 묻는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팔이 부러진 것은 갑자기 칼을 뽑는 바람에 이걸 억지로 제압하는 과정에서였다···. 고 들었다.
“파랗고 붉은 색 분들이 숫자는 더 많았어요··· 두 배 정도.”
“하지만 완전히 제압당하고 팔까지 꺾었다 이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요.”
한숨이 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증언이다. 그러나 그건 내 입장이고, 이걸 듣는 사람들이 인정하면, 아무리 거짓일지라도 권위가 생긴다.
나 역시 그 사이에 정보를 수집했어야 하는 걸까.
“...이상하군. 내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르다.”
“예? 예, 예에? 배, 백작님?”
“본인 또한 다소 의구심이 들어 따로 정보를 수집한 바가 있다. 드레피니, 들어오게 해라.”
늙은 집사가 신호하자,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또 다른 여인이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초라한 복장을 하고 있으나, 최소한 좀 더 청결해 보이는 옷이다.
“이름과 직업을 말해라.”
“저는 디제라, 임시 주점의 직원 우두머리입니다.”
“방금 증언한 세피라는 자는 그대의 동료인가?”
“맞아요, 맞는데요··· 세피! 너는 그 날 중간에 빠졌잖아? 또 남자 만나러 갔었지?”
“묻지 않은 말은 하지 말거라.”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이게 무슨 일이지? 왜 반대 증인을 백작이 데리고 있는 거야?
사실 우리 쪽도 증인을 안 찾아본 것은 아니다. 다만 일이 터지고 불안했는지 임시 주점은 폐업하고 자리를 옮겨 버렸기에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이게 홈 어드밴티지라고 해야 하나···.
“세피의 증언에서 거짓된 게 있느냐?”
“먼저 알록달록한 옷 입은 분이 먼저 욕을 했어요. 무슨 높으신 여자분이 야한 일을 했다고요! 거기 화가 난 분이 주먹질을 한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있느냐?”
“팔이 부러진 것은, 그 알록달록한 분이 갑자기 칼을 뽑았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팔을 꺾어서 칼을 떨어뜨리려다가 부러진 것 같았어요.”
갑자기 실내가 시끄러워진다.
나는 처음 증언했던 세피라는 이름의 여인과, 올리앙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본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특히 올리앙은 얼굴이 너무 시퍼렇게 변해서 마치 원래 그런 색의 돌로 깎은 석상처럼 변해버렸다.
“그, 그게··· 그그그 그게!”
세피는 뭔가 말을 할는 것 같았으나, 와들와들 떨리는 팔이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아마 지금 ‘진실을 말하면 용서해주겠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입에서 진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겠지 싶었다.
과연 라몽 백작은···.
“흐음, 서로 증언이 엇갈리며, 뒷받침할 수 있는 물증이 없군.”
어이가 없게도 한 걸음 물러선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지금은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니, 인간의 재판으로는 쉽사리 판결 내리기가 어렵다고 판단했소.”
그렇게 다른 귀족들을 향해 말한다. 대부분 어이 없다는 표정이다. 아마 다들 명백한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말이겠지.
“때문에, 이 판결을 주신께 맡기고자 하오. 신께서는 옳은 자의 편에 서시게 마련이니, 양측은 결투를 통해서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도록 정하겠소이다.”
회의실은 오늘 최고로 시끄러워졌다. 아까 방어책을 논의하던 때 보다도 시끄럽다.
결투재판은 서로의 주장이 대립하는 경우, 말 그대로 결투를 시행하고, 승리한 쪽이 옳다고 판결하는 것이다.
단순히 더 강한 자가 정의라는 것이 아니다. 신은 옳은 자의 팔을 빌어 거짓된 자를 칠 것이라는 믿음 하에 이루어지는 신명재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광신도가 날뛰는 시대라지만, 그 정도의 이성은 있는 시절이니까.
하물며 합리성을 중시하는 라몽 백작이 결투재판이라니···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하다.
“본래 결투재판이 선포된 경우, 15일의 준비 기간을 가지게 되지만 이번에는 특별한 상황이고 양측이 모두 숙련된 군인들이오. 그러니, 일주일 후, 정오에 재판을 시행하도록 하겠소.”
역시 사문화되다시피 한 옛 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과거지사를 잘 아는 것과, 이를 시행하는 것은 분명 다를 텐데.
“배, 백작님! 외람되지만 지금 당사자는 팔이 부러진 상태이옵니다! 정상적인 결투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올리앙이 절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지, 팔이 부러진 지 며칠 안 지났지. 제대로 싸울 수 있을리가 없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더라···. 공정도록 멀쩡한 쪽에 핸디캡을 주거나 혹은···.
“오오, 그 생각을 못했소이다. 좋소, 그럼 올리앙 드 브레겔 남작, 재판을 주도하신 귀경께서 대리하여 나서 정의를 실천해 주시기를 바라오.”
나는 보았다.
선언하는 라몽 백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으며, 올리앙 남작의 눈에는 절망이 내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