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전장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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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다만 이번 경우는 기존과는 좀 달랐다. 내가 사령관도 아니고, 아직 지휘 체계가 통합되지 않은 군대가 인근에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첼레스티나는 분명 ‘작전 협의를 위해 모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전령을 파견했다. 전령들 신분도 기사계급 이상의 기병으로 보냈고.
솔직히 정말 싫은 쌩 쇼지만, 챙겨줄 것은 챙겨주고 받을 것도 받는 게 낫다는 것이 내 지론이니까.
지휘관에게 브리핑할 때, 그냥 평범한 지도에 손으로 여기 저기 표시해가며 해도 정확한 의사 전달에는 지장이 없다.
진짜 아무것도 준비하기 어려운 전장이라면, 막대기로 바닥에 죽죽 선 그어가면서 해도 충분하지.
아니 그래야만 한다 생각한다. 상급 지휘관을 찾아가 보고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부담되는 일일 텐데, 거기 허들을 하나 더 만들어서 보고를 꺼리게 만들어서 어쩔 건데.
경험과 실적의 벽이 사회적 신분의 높고 낮음보다 중요하게 평가받는 용병대 내부에서는 아주 당연한 상식이다.
용병단 내부에서야 유능한 동료는 내 목숨줄을 붙여줄 훌륭한 동료니까. 높은 신분이 총알 막아 주지는 않지 않겠는가.
물론 용병단 구성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긴 하겠다. 다만 평범하게 단장을 중심으로 지원자들을 모아 구성된 토상적인 용병단은 규율을 지키는 한 자유로운 편이다.
물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직 자신을 증명하지 못한 신병들을 괴롭히는 등의 문제도 흔히 있어서 단속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상하관계가 애매한 지금과 같은 상황은 좀 곤혹스럽게 느껴진다.
트랑카벨에서 콘도티에레··· 가 아니라 대리 사령관 업무를 한 이후로는, 정말로 전권을 맡았다.
때문에 가주인 아롱드 영감님을 비롯해서 아무도 내 의견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반대로 그 이전의 용병 생활에는, 명백한 고용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까짓 거, 돈 주는 사람 말 들으면 되는 거니까.
눈치나 그간의 관계를 봐서, 상대가 내 말을 들어줄 것 같다면 성의껏 제안도 하고 조언도 해보겠지만,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그걸 싫어했었다.
뭐 어때, 그게 그 사람들이 바라는 돈 값 이니까 그렇게 하면 되지.
그런데 지금은··· 나름 예의를 갖춰서 불렀음에도 이 인간들이 회의장에 나타나지를 않고 있었다. 벌써 10분은 지난 것 같은데.
“...안 오시네요.”
드 레뮤즈 영지군 측에서 참여한, 아인멜츠 피노르 폰 자이트리츠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정된 시간에서, 넉넉잡아 30분 정도는 지났으니까, 꽤 참을성이 있었다고 봐야겠지.
그 옆에는 화강암처럼 단단하게 생긴 장년의 기사,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이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모습이다.
듣기로는, 드 레뮤즈 영지군 중에서 보병은 세샤르 경이, 기병은 소베트르 드 랑두제 경이 지휘한다고 한다. 아인멜츠는 이들을 보좌하는 참모 역할이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꽤 단단해 보이는 포진이다.
아인멜츠야 박식하고 뛰어난 참모로 내가 보장한다. 당장 어느 군에 넣어도 쓸만할 인물이니까.
그리고 세샤르 자작은 전형적인 측익 지휘관의 상이다. 저렇게 생긴 아저씨 기사들은 군대 전체를 맡기지는 못해도 한쪽 측면을 맡기면 아주 잘하더라고.
물론··· 사람을 생긴 것으로 판단하면 안되겠지만 평생을 귀족으로 교육받고, 어울리게 살아온 기사들 사이에서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없는 소베트르 경은··· 가장 나이가 많은 노기사였다.
그런데 왠지 나만 보면 눈을 피하고 굽실거려서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는 못했다. 소극적인 사람인 것 같지만, 지시나 제안 사항은 분명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오히려 용병이라고 경멸하며 대화를 피하는 귀족이야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이렇게 오히려 저자세로 나오는 귀족은 처음이네.
듣기로는 원래 남작으로 라몽 백작의 봉신이었으나, 기병대장 직위를 명령 받고 가문을 아들에게 계승해주었다 한다.
그리고 혈혈단신으로 레뮤즈 성으로 와서 기병대장 직위를 받았다니, 책임감 하나는 대단한 사람 같다.
언제 전장에서 죽어도 괜찮도록, 영지는 믿을 만한 자손에게 맡기고 떠난다··· 인가. 이 쪽도 굉장히 전형적인 노장의 스테레오 타입인데.
라몽 백작이 확실히 사람 보는 눈은 있는 것 같다.
실제 전장에서의 능력이야 함께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최소한 이 세 사람은 ‘내가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게··· 전장에서는 그걸 명확하게 알아주기만 해도 고마운 일이라고.
물론 총사령관은 라몽 드 레뮤즈 백작 자신이고, 이 세 사람이 실무를 보좌하는 형태이다. 하지만 백작은 아직 레뮤즈 성에 머물고 있었다.
전쟁 전에 끝내야 하는 정치적인 문제들도 있고, 건강상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
라몽 백작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이 완곡하게 설명해줬었다. 그를 괴롭히는 질병은 평범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한다.
것’들’ 이라니, 젊은 사람이 고생이 많네. 확실히 그 허연 얼굴을 보면 건강해 보이지 않기는 한데.
아무튼 드 레뮤즈의 가신들과 비교적 협력적인 관계를 맺게 되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다른 쪽’이 문제다.
이번 연합군은 크게 세 분류의 군대가 모인 형태이다.
연합군의 맹주이자 핵심이 되는 드 레뮤즈 영지군.
그리고 내가 속한 블랑독 연맹군. 함께 파견된 드 누아 영지군도 이번에는 우리 지휘 체계를 유지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지금 결석한···.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님께서 대리인을 보내셨습니다!”
약속 시간 한참 지나서, 이제서야 연락이 닿은 모양이다.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는 전령이 들어와 말했다.
“대리인? 공작 각하 본인은 아니란 말인가?”
한 마디도 않고 기다리던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이 분노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나도 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러분, 늦어서 죄송합니다.”
임시 회의실로 들어온 것은 잘 생기고 싹싹하게 보이는 젊은 귀족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맵시있게 묶고, 척 봐도 값비싼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그···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소개 받은 것 같은데 아직 익히지를 못했다. 나도 문장관을 데리고 다녀야 하나.
으음··· 그런데 아무리 봐도 군복이 아니라 사냥복인데. 사냥복과 전투복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냐고 하면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저는 올리앙 드 브레겔 남작입니다. 지금 숙부님, 앙비토 공작께서는 사적인 일로 바쁘셔서 저를 대신 보내셨습니다.”
“주군을 대리해서 군을 이끄는 사령관에게 군사 회의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은근한 분노를 담고서, 그러나 예의 바르게 세샤르 자작이 항의한다.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모름지기 군 사령관이라면, 어? 자빠져 자가다고 어? 일 생기면 바로 튀어 와야지.
“하하, 남부 지방의 기후나 식생이 매 사냥에 적합하다 보니, 잠시 흠뻑 빠지신 모양입니다. 격무를 하려면 약간의 휴식도 필요한 법이지요.”
격무는 빌어먹을, 아직 제대로 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설마 엘랑키아 서부의 자기 영지에서 여기까지 행군해 온 일 가지고 격무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내가 생각만 했던 말을 입 밖으로 차마 낼 수는 없었지만, 따끔하게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럼요, 그럼요. 충분히 쉬어주지 않으면 여차할 때 힘을 낼 수 없지요. 그럼 앙비토 공작께서는 이제 오시는 겁니까?”
“오오, 용병님, 제가 오해할 수 있게 말씀을 드렸군요. 오늘은 제 직권으로 보고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한창 사냥에 빠져 계신데 방해하기 죄송해서요.”
이런 시발 돌아버린 새끼 아냐? 직권? 지익궈언? 사령관에 대한 보고를 지 맘대로 중간에 끊어 먹는 직권이 어딨어?
“아니 그러면··· 후우, 좋습니다. 그럼 올리앙 남작님이 대신 참여하시는 겁니까?”
“아하,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급히 숙부님께 돌아가 봐야 해서요. 회의는 저희가 적절한 날을 정해서 다시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쾅!
회의장이 폭발하는 소리 같아서 움찔했다. 돌아보니 다행히 그건 아니고, 그냥 세샤르 경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친 소리였다.
이해는 간다. 나도 내려치고 싶었으니까. 가능하면 이 밉살스러운 남작놈의 낯짝을 말이지만.
“올리앙 남작님, 아직 전투 상황은 아니지만, 언제 작전 행동을 시작해야 할지 모릅니다. 한가롭게 취미생활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그냥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숙부님께서는 휘하 제장님들과 친목을 도모하며 손발을 맞추고 있는 과정인 게 아니겠습니까?
“하아··· 그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죠.”
나도 내가 느낄 정도로,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이건 좋은 건 아닌데. 어쨌든 어르고 달래서 데리고 가야 하는 상대니까.
하··· 이런 걸로 스트레스를 또 받게 되네. 그렇다고 함부로 대하다가 상대가 ‘나 안해’ 하고 던져버리면 곤란하고.
“용병님께서 뭘 좀 아시는군요. 그러니 조만간 자리를 마련해 통보드리겠습니다.”
“...가능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오늘 저녁에도 괜찮습니다.”
“하하, 사냥 행사 다음에는 으레 연회가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밉살스러운 놈, 아니 올리앙 드 브레겔 남작은 고풍스러운 허리를 숙이고 한쪽 팔을 벌리는 인사를 하더니 회의장을 나가버린다.
남겨진 우리는 한참 말이 없었다. 모두가 입을 열지 않고, 한숨만 푹푹 쉬는 소리가 가득하다. 입을 열면 욕이 나올 게 뻔하니까, 모두가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콘도티에레··· 저 인간 없애버리고 싶어요오···.”
“참아, 첼레스티나.”
항상 맑고 높은 첼레스티나의 목소리가 이렇게 낮게 깔리는 건 또 처음인데.
“네에, 그래도 밤에 몰래 덮치면··· 절대로 안 들킬 자신 있다구요.”
“아 아무튼 안 돼.”
“저 인간, 콘도티에레를 ‘용병님’이라 불렀다고요. 경도 공도 아니고 이름도 아니고.”
“그래도 참아.”
그건 나도 느꼈다. 이 문화권 예법 상, 일정 지위 이상의 군인을 이따구로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오히려 ‘존칭을 가장한 멸칭’이라고 하겠다.
백성들이 ‘기사님, 병사님’ 하고 부르는 거는 정말 몰라서, 또 격의 차이가 있으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고.
내가 블랑독 연맹이나 트랑카벨 가문을 대리한 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런 것이니 걸고 넘어지자면 얼마든지 걸고 넘어질 수 있었지만, 지금 아군끼리 싸우자고 덤벼서는 안 되지.
열 받는다 정말.
그래도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을 함부로 없애버리면 안 되지.
“...다소 불쾌한 일이 있었네요. 지금은 저쪽에서 말한 대로, 저쪽 일정에 맞춰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인멜츠 역시 마음이 상했던 모양이지만, 최대한 이성적으로 말한다. 세샤르 경도 이를 갈기는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번은 참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나도 대답했다.
반대로 말하면, 다음에는 안 참겠다는 말이다. 빌어먹을 귀족 녀석.
내가 열 받는 것도 있지만, 지휘부가 이렇게, 그것도 젊은 귀족 한 놈의 기싸움으로 콩가루가 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일단 돌아가자. 시간이 생겼으니 안건을 좀 더 살펴볼 기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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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빌링엔 연대의 장교, 알골 딘다르트는 병영 인근의 임시 주점에 방문했다.
원래 있던 주점은 물론 아니고, 군대가 모인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귀신같이 돈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인들이 차린 곳이다. 그래서 ‘임시 주점’이다.
이번에 드 레뮤즈 영지로 소집된 블랑독 연맹군 중에서, 지빌링엔 연대가 가장 빨리 도착했다.
마르사코르 언덕 전투에서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부대들이 먼저 출발했는데, 다른 부대처럼 카르카냑에 들르지 않고 직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 산악 민족 특유의 자부심, ‘우리보다 잘 걷는 평지 놈들은 없다’가 발동했는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강행군을 거듭해서 누구보다 빨리 도착했다.
고된 강행군 끝에 도착한 ‘기특한 지빌링엔 연대’를, 콘도티에레는 고마워하며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교대로 하루 2시간씩 자유시간을 주었다.
알골은 지금 동료 몇 명과 함께, 고된 행군 끝의 금쪽같은 휴식시간을 즐기고자 주점을 방문한 것이다.
“그러고보니, 언덕 꼭대기에서 법황네 성녀 잡은 애들 포상금 나왔다는 이야기 들었냐?”
“아쥬흐 영주따님이 크게 챙겨주셨다고 하던데!”
“정말이냐, 역시 통이 크시네.”
“걔들 중대장이 카르카냑 돌아가면 주점 통으로 빌려서 떡이 될 때 까지 마시기로 했다네!”
일단 술이 들어가자, 용병다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골 중대장, 우린 뭐 없습니까?”
“뭐 임마? 그럼 니들도 적장 모가지 따 오든가!”
“그럼 주점 빌려주는겁니까?”
“하 이 놈들, 주점만 빌려주겠냐 내가?”
“와하하하하하!”
지금은 중대장과 휘하 병사들이지만, 대부분 본래 고향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이웃들이다. 모두 같은 고향, 뮈다켄 출신이니까.
“와, 얘들 용병이네? 니들 블랑독에서 왔냐?”
시끄럽던 주점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모두가 폭풍의 전조를 느낀 모양이다.
“우리가 어디서 오건 무슨 상관이야?”
“상대하지 마.”
한명이 발끈해서 일어나자, 알골이 그의 팔을 붙잡아 앉힌다. 콘도티에레도 자유 시간을 주면서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었으니까.
“어이구··· 댁이 대장이슈?”
처음보는 가문의 문장이 들어간 조끼를 입은 남자가 낄낄거리며 다가와서는 알골을 툭 건드린다.
“아 우리야 님들 이야기가 좀 들어보고 싶어서 그렇지. 동쪽에서 대단했다며?”
남자가 알골의 뺨을 툭툭 건드린다. 여전히 반응하지 않는다. 부하들의 표정이 굳어가지만, 알골은 오히려 피식 웃는다.
“이봐 뭐 말좀 해보라고? 말똥냄새 나는 용병님들아?”
“우리는 그냥 술만 마시러 온 거요. 뭐가 궁금하시오?”
“술먠 먜시럐 온 걔얘? 못 알아듣겠네!”
왁자하게 웃음이 터진다. 지빌링엔 용병들만 빼고.
그래도 참는다.
“아니 블랑독 사람들한테 전부터 궁금한게 있었어.”
“말 해 보시오.”
“당신네 병영에서 매일 시끄럽다는게 사실이야?”
“뭐가 말이오.”
“트랑카벨의 탕녀가 악마랑 떡치는 소리가 시끌···.”
알골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