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54화 (254/556)

31-4. 전장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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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소.”

“여기 폐하께서 보내신 명령서입니다.”

오렌시아 기사단의 젊은 재무관, 위그나시오 올리메 데 트라가제토는 라솔 군 병영을 찾아가 명령서를 내밀었다.

두툼한 가죽으로 두루마리를 감싸 비단 끈으로 감싼 다음, 붉은 밀랍으로 봉인한 고풍스럽고도 위엄있는 서신이었다.

하지만 명령서를 받아 든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당황한 표정으로 위그나시오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먼저 국왕의 서신을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문장이 그려진 복장을 입은 종교 기사가 가져왔다는 점에 놀랐다.

추가적으로 그 서신을 가져온 기사의 얼굴에 더더욱 놀랐다.

“여기까지 가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그런데··· 괜찮으시오? 오시다 어디 다치신 것은 아니고?”

아직 마흔이 되지 않았지만,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오며 수 많은 아군과 적군의 죽음을 보았다.

저런 시퍼런 면상도 여러 번 봤다.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상자의 얼굴이었다.

“괜찮습니다. 임무를 무사히 수행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건 알았으니. 좀 쉬다 가시오. 식사를 준비하도록 시킬 테니.”

“아닙니다, 변경백 각하. 폐하께 명령이 무사히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그건 우리 쪽에서 사람을 보내면 되지 않겠소. 내 말대로 하시오.”

“정말 괜찮습니다, 각하. 저는 부족한 힘을 다 해 국가의 중대한 일을 도울 수 있어서 그저 기쁠 뿐입니다.”

“어쨌든 살아 있어야 계속 도울 수 있지 않겠소!”

퀸토 변경백은 거의 윽박지르듯 강제하여 위그나시오를 휴식용 천막으로 보내버렸다.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국왕 폐하는 왜 저런 사람을 전령으로 보낸 건지 모르겠군.”

얼굴이 시체처럼 시퍼렇게 질린 데다가, 해골처럼 비쩍 말랐다. 저러다가는 왕성에 돌아가 보고를 하기 전에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혼잣말을 하는 변경백을 보고, 옆에서 참모 아드리아니 루코 데 가르자가 생각난 것이 있는듯 말을 건다.

“복장을 보아하니, 오렌시아 기사단의 기사 같습니다.”

“오렌시아 기사단?”

“얼마 전, 엘랑키아에 갔다가 전멸한 기사단 말입니다. 왕명의 내용이 아마 그것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요?”

“아··· 아니 그런데 전멸했다고 하면서, 저 남자는 무덤에서 나온 복수귀라도 되는 것인가.”

“어떻게 아비규환 와중에 살아서 나온 모양입니다. 얼굴을 보니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 같고요.”

“그래도 저 지경으로 변한단 말인가. 며칠은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은 몰골이던데···.”

안 된 일이라 생각하며 퀸토 변경백은 혀를 찼다. 심한 패배를 겪거나, 친한 동료들을 한꺼번에 잃고 정신병에 걸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교단에서야 정신병은 신의 저주로 간주하여 이단심문의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군인들은 서로의 사정을 아는 동병상련 때문인지 그런 이들을 숨기고 챙겨주는 것이다.

“폐하께서 보내신 명령을 즉시 확인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겠네.”

곧바로 봉인을 부수고 포장을 벗겨낸다. 꼼꼼한 방수 포장 안쪽에서는 짧은 문구가 적혀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이스키비르 도강을 준비할 것. 타라트라바 공작의 지휘를 받을 것. 여타 필요한 물자는 타라트라바 공작과 의논할 것.]

“결국 ‘물주는 타라트라바 공작이다’ 라는 내용인가.”

“물주가 아니라 사령관 아니겠습니까, 각하.”

“그게 그거지. 휴가가 끝났구나. 각 연대에 소집령을 내려라. 이틀 내로 준비를 마치도록.”

“옛, 그렇게 하겠습니다.”

참모 아드리아니가 방을 나서자, 퀸토는 지도를 폈다.

지금 그가 이끄는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은 말 그대로 강의 하류, 해안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머물고 있다.

강만 건너면, 바로 엘랑키아 땅이다.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왔다. 와 버렸다. 복잡한 마음이다.

머리속으로 몇 번이나 망상을 했던가.

아직 변경백 가문을 물려받기 이전, 하급 지휘관으로 소부대를 이끌던 시절부터의 유서 깊은 망상이다.

처음에는, 강을 건너는 자신은 대군의 우두머리였다. 왕명을 받고, 무제한의 자원과 무제한의 병력으로 엘랑키아를 남에서 북으로 완전히 밀어버린다.

엘랑키아 왕국의 국왕과 8대귀족이 모두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그리고 망상의 끝도 항상 정해져 있었다.

자신의 활약에 감복한 라솔의 국왕이 그에게 엘랑키아의 절반을 영지로 내리지만, 겸손한 자신은 기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거절한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여쁜 아내를 맞이하고 아버지의 변경백 작위를 물려받는다, 라는 해피 엔딩이다.

그러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젊은 나이에 연대장이 된 다음에도, 망상은 여전히 이어졌다.

물론 연대장이 된 것에는 아버지의 작위와 재산, 가문의 동원 능력 등이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영 재주가 없지는 않다는 자부심은 있었다.

조금 머리가 굳고 세상을 보는 눈이 생겨서 그런지, 이 시기의 망상은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 되어있었다.

무제한의 병력, 무제한의 자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진작에 알았다. 끔찍한 산악과 계곡을 넘나들며 산적들을 잡으러 다닐 때도 보급이 끊겨 쫄쫄 굶어 보았으니까.

엘랑키아를 남에서 북으로 싹 밀어버리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 비슷한 입장의 친구들과, 밤새 지도를 보고 토론하며, 어디로 병력을 투입하고 어디를 지키며, 어디에서 결전을 할지 생각을 나누었다.

이 망상의 끝은 항상 엘랑키아의 수도, 베르마유의 함락이었다.

당시에 가장 현실적이라 생각했던 결과는, 최대한 빨리 병력을 북상시켜 베르마유를 포위하는 것이었다.

공방전을 주고받으며, 외부에서 구원하러 오는 지방군을 격퇴하여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머쥔다는 계획이었고.

물론 당시에야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린애의 치기 어린 상상보다야 상대적으로 구체적일 뿐이지, 현실에서 구현 가능성이 있냐면 그건 전혀 아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작위를 계승받고, 어느새 하나의 군을 이끄는 사령관이 되었다.

그렇다고 망상을 멈추느냐? 그건 물론 아니다. 지금도 한다. 틈만 나면 수시로 한다.

이제는 평생 자신이 수만 대군을 이끌고 엘랑키아와 자웅을 겨루는 전쟁을 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거라는 것을 이해할 만큼은 자랐다.

설령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베르마유 함락 따위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때문에 최근의 망상은, 1만명 남짓한 자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강을 건넜을 때 최선의 결과는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이다.

엘랑키아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는 ‘완벽한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협상을 통해 땅과 각종 이권,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는 ‘부분적인 승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망상의 배경은 엘랑키아 전체라는 광대한 전장에서, 이스키비르 북안 일부의 좁은 땅덩이가 되었다.

또한 망상 속의 수만 대군은 2만명이 좀 안되는, 부근에서 동원 가능할 현실적인 병력이 되었다.

대신에 이제는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숫자를 나열해 실질적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 작전 계획 단계에 이른 것이다.

타라트라바 공작을 주장으로서 섬겨야 한다는 것은 조금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1만에 이르는 군단이 있다. 부장으로서 얼마든지 활약할 수 있겠지.

자신보다도 젊은 공작이 부디 뛰어난 지휘관임을 바라게 된다. 그러면, 부분적으로라도 자신이 평생 해온 망상의 일부 정도는 현실화 시킬 수 있겠지.

“다녀왔습니다, 변경백 각하. 명령을 전달했고, 오렌시아 기사단의 기사 위그나시오 경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퀸토의 명령을 받아 전달하러 나갔던 참모, 아드리아니가 돌아왔다.

“이름이 위그나시오랬나? 어때 보이던가?”

“대체 어떤 일을 당한 건지··· 다소 불안해 보였습니다. 저라면 그런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허어, 자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무슨 일이길래?”

아드리아니의 손이 창 밖, 교수대를 가리킨다.

모두 여섯 구의 시체가 밧줄에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규정에 따라서, 일정 기간 동안 본보기로서 시체를 방치하고 있었다.

“저 시체들이 왜 저기 있냐, 혹시 이단 혐의자들이냐고 묻더라고요.”

“군 부대에서 이단 혐의자를 왜 교수형 시키겠나?”

“그렇지요. 악질 탈영병과 횡령범들이라 말하니, 매우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엘랑키아로 넘어가 이단들을 처벌하는 것을 무척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뭔··· 미친 놈이구만. 자기도 시체처럼 생겼으면서, 시체를 더 만들어서 어쩌려고.”

변경백의 거친 언사에, 참모 아드리아니는 자신도 그리 생각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군인은 결국에는 사람을 죽이는 게 일이다.

그걸 잘 하는 사람도, 못 하는 사람도 있다. 기꺼이 하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목적을 위해 사람을 죽인다’라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이라면, 바로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다.

실제로 주변에서도 그런 인간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끝이 좋지 않았다.

종교적 세계관의 신벌이나, 사필귀정과 같은 세상의 법칙을 믿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품은 복수심이 훨씬 무서운 법이다.

세상에 정당한 죽음 따위가 어디 있겠냐만은, 과도하게 부당한 죽음은 피하는 게 좋겠지.

내심 종교를 이유로 출병하는 것이 썩 기분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할 일이니까 완벽하게 해야 한다.

“아드리아니, 현재 우리 사령부 병력이 총 몇명인가?”

“어제 기준으로, 모두 10306명 입니다.”

“그렇군. 좋아, 천천히 갈고 닦으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지.”

최근, 적어도 최근 10년 동안은 엘랑키아와의 직접적인 충돌이 없었다. 흔해 빠진 국경 분쟁조차 없었으니까.

이스키비르 강이 자연 국경으로 확실하게 자리잡혔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퀸토는 변경백이자 사령관으로서, 주적을 엘랑키아로 상정하고 병사들을 길러왔다.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그의 부하들, 4개 연대의 최정예 라솔 연대는 기사 잡는 전문가들이었다. 구름처럼 몰려들 엘랑키아 기사들을 어떻게 털어 버릴 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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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티에레! 콘도티에레!”

“뭐? 무슨 일이야?”

첼레스티나의 째진 목소리가 울리는 장소는 블랑독이 아니라 레뮤즈 성 서쪽의 임시 주둔지이다.

“가스텔 백작님이 소식을 보내셨어요! 타라트라바를 비롯해서 라솔 각지에 동원령이 내려졌다고 해요!”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은 최근 들어 이스키비르 강 건너의 라솔 계열 영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쪽에서 들어온 정보겠지.

동원령의 초기는 사실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지방에서도 각종 명목으로 병력을 소집하고는 하니까. 이는 변경의 도적들을 토벌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특수한 훈련을 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영주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열병식을 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 경우도 뜬금없이 대귀족끼리의 결혼식 날, 보여주기 명목으로 부하들을 무장시켜서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을 도운 적이 있었다.

뭐, 밥도 맛있었고 돈도 틀림없이 받았으니까, 나쁜 의뢰는 아니었지. 마침 한가했고.

그래서 폭 넓은 정보망을 통해서만 더 구체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건 아쥬흐가 참 잘하는데··· 외국인 라솔에 그만큼의 정보망이 있지는 않을 테니, 가스텔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보자··· 어? 집결지가 이스키비르 강 하류라고?”

“네에, 이상하신가요?”

“으음··· 그 쪽은 라몽 백작의 영지가 아닌데···.”

게다가 강 폭이 넓으면 자연적으로 강을 건너기가 힘들어진다. 물론 유속이 느리기야 하겠지만, 하류로 갈수록 강물이 모여서 유량도 많아지거든.

폭이 좁은 곳에 다리를 놓거나, 배를 타고 건너는 게 기본일 텐데···.

“첼레스티나, 지휘관들을 소집해 줄래?”

“네에, 콘도티에레! 그런데··· 새로 온 공작님들도 부를까요?”

“어··· 불러야지 당연히. 내가 부른다고 싫어할 수도 있겠다.”

으으, 최근 아군에는 영 껄끄러운 사람들이 조금 추가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물론 ‘총사령관’을 하실 라몽 백작님이 고심할 일이겠지. 나는 보고나 잘 하면 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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