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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화약의 용병대장-253화 (253/556)

31-3. 전장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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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독의 토질은 바위와 돌이 많고, 푸석푸석한 편이다.

불모의 황무지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억센 풀이나 상품 가치가 전혀 없는 덤불 나무 등이 무성하게 자란 날 것 그대로의 야생이란 느낌이다.

보통 그런 웃자란 야생 식생들은 농지로 개간할 때 방해만 될 뿐이다. 흙에 섞인 잡석만큼이나, 억세게 얽힌 나무 뿌리는 골칫덩이니까.

그나마 선대 트랑카벨의 영주들을 비롯해서, 블랑독의 주민들이 대대로 개간하고 물을 대는 등 노력을 해서 지금의 ‘나름 풍요로운’ 블랑독이 만들어 진 것이다.

사실 오래 지내다 보니, 카르카냑이나 델레망드 인근 등은 꽤 괜찮은 농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변 농민들이 자급자족할 수준은 충분히 되지만, 역시 많이 키우는 것은 포도이다.

농민 출신 장교들에게 들어보니, 포도는 원래 어느 정도 척박한 토양에서 자란 것이 질이 좋다고 한다. 비옥한 땅에서 자란 포도는 맛이 없다나 뭐라나.

고향의 포도밭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진 장교의 말이니 전부 믿을 수야 없겠지만, 일부로 표층에 자갈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하니 포도주 산업이 활성화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토양이 다른 북부 포도는 종이 다르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포도주도 꽤 맛이 다르다고.

그렇다면 엘랑키아 다른 지역의 토질은 어떨까?

문득 궁금해진 나는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고 손으로 풀이 고르게 자란 땅바닥에 찔러 넣었다.

손 끝이 쑤욱 하고 땅속으로 파고 들고, 축축하고도 끈끈한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느껴진다.

손을 들어 올리자, 새까맣게 기름진 흙이 한 움큼 쥐어진다. 농사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뭐든 심으면 잘 자랄 것 같은 비옥한 흙이다.

그런 농사에 적합한 옥토가 개발도 되지 않은 채, 몇 킬로미터나 넓게 펼쳐져 있었다.

“와··· 이게 진짜 꿀땅이구나.”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넓은 풀밭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기는 드 레뮤즈 영지의 서쪽 끝 부분이다. 이런 미개발 토지가 아직도 있을 정도이다.

척박한 토지를 어떻게든 개간해서 먹고 살고 있는 블랑독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

이러니 수백 년 전, 드 레뮤즈의 조상들이 별다른 가치가 없이 관리만 어려운 블랑독 지방을 방치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특별히 관리 안해도 되는 꿀땅이 이만큼이나 있는데, 지금보다 훨씬 황무지나 다름 없었던 블랑독 따위 눈에 차지 않았겠지.

엘랑키아 남부가 이렇게나 풍요로우니,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소집령을 내리자마자 1만명에 가까운 병력이 곧바로 모인 것도 이해가 간다.

트랑카벨 역시 넘치는 재원을 아낌 없이 써서 강한 군대를 양성하긴 했지만, 인력 동원을 위해서 다소 무리한 면이 없지 않다.

그에 비해서, 드 레뮤즈 가문은 오로지 봉건 관계의 의무에 의해서 배정된 병력만 그 정도에 이른다는 것이니 규모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 근처가 가장 인구도 적고 넓은 평야 지대입니다. 다른 후보지도 몇 군데 있긴 합니다만, 보러 가시겠습니까?”

“거기도 지형은 여기와 비슷한가요?”

“그렇습니다. 여기서부터 서쪽 지형은 다 비슷하다고 합니다.”

오늘은 가이드를 맡은 드 레뮤즈의 젊은 가신, 라마엘 드 레도쿠르와 함께이다. 자작 가문의 후계자라는 그는 유난히 힘이 넘치는 듯한 씩씩한 청년 기사였다.

드넓은 초원 지대는 봄과 가을에는 목초지로 사용되므로, 동물들을 가두기 위한 울타리 정도 외에는 어떤 인간의 흔적이 없었다.

모처럼 전장이 될 수 있는 장소들을 살피러 수레도 끌고 왔는데, 이래서야 지형적 변수는 없어 보인다.

그야 완전한 평지는 아니고 적당히 고저차가 있기야 하지만, 경사가 완만해 마치 잔잔히 파도치는 수면을 보는 느낌이다.

이래서는 보병 밀집대형은 물론, 대규모 기병대의 기동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포병대를 이동시키고 방렬하는데도 아주 적합한 지형이다.

땅의 평평하고 단단함도 적절해서, 포병이 크게 활약하기 좋은 지형이기도 하다.

분명 양측의 포병은 완벽하게 시야가 트인 개활지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화력을 뿜어 내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진다. 원거리 화력이라는 것이 내가 쓸 때는 좋은데, 적이 쓰면 까다롭거든.

특히 포화에 노출된 경험이 적은 신병 연대가 집중 포화에 노출되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그대로 붕괴될 수도 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겠는데.

최근 싸웠던 전장들을 생각해보니··· 새삼 블랑독와 드 레뮤즈 영지 사이의 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진다.

마르사코르 언덕의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던 비탈길.

델레망드 삼각주의 침략자의 혼을 빼 놓는 녹색의 미로까지. 참고로 도와주러 갔던 우리 병사들도 길을 많이 잃었다. 첼레스티나도 그랬고···.

어째 지형을 이용한 온갖 꼼수가 내 전문이 된 것 같은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주로 활동했던 그룬발트에는 엘랑키아로부터 이어지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고, 주디칼리 북부 역시 비옥한 평야 지역이니까.

아넥시 인근에서의 전투나 샹다메리 전투처럼 서로 마주보는 개활지에서의 기동전도 여러 차례 겪었으니까, 우리 병사들도 어느정도 익숙하다.

어라, 생각해보니 지형이 거지 같기로 유명한 것이 바로 라솔 왕국이 아니던가?

아군에 종군하고 있는 네그라타 연대가 샹다메리에서 멋진 참호 방어선 축성을 보여주었듯 말이다. 평소에 그런 싸움을 많이 해봤으니 그랬겠지.

라솔 출신 용병들은 고향에서 이웃 마을을 가려면 강, 산, 늪 셋 중 하나는 지나야 한다고 농담을 하던데.

이거 의외로 ‘아군에 유리한 지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평소 싸워보지 못한 지형에서 승패를 겨루게 되면 말이다.

음··· 생각해보니 반대라면 몰라도, 산악에 익숙하다고 평지를 걷지 못하는 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뭐 거리감이라거나 이런 건 좀 부족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차이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부질없는 희망은 그냥 가슴 속에 담아두자.

아직 인종차별이 당연하던 시절에, 동양인들은 눈이 작아서 시야가 좁다, 따라서 기동전에 소질이 없을 것이라는 헛소리가 진지하게 논의되었었다지 않는가.

그런 이상한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오히려 해가 된다. 평소에 익숙하고 잘 하던 것만 갈고 닦아도 부족할 판에 얼어죽을···.

나는 헛생각을 하는 사이, 갑자기 땅을 파더니, 이리저리 돌아보고, 뜬금없이 왜 끌고왔나 싶을 수레에 올라가 사방을 돌아보았다.

헛생각을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자, 라마엘과 다른 호위 기사들이 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건 미리 전장을 살펴보는 겁니다. 제 정신머리는 멀쩡합니다.”

“앗, 그런 의도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형지물이라는 것이 지도로 보는 것,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것, 실제로 내 발로 밟아 보는 것은 꽤 차이가 크거든요. 내가 잘 모르는 지형에 병력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나는 마치 켕기는 짓을 한 사람처럼, 괜히 줄줄이 설명을 이어 붙인다. 나를 잘 모르는 동맹 가문의 사람이니까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하지.

까놓고 말해서 동맹군 지휘관에 대해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가 ‘이해할 수 없는 기행’에 대한 것이라면 첫 인상이 어떻게 되겠냐는 말이다.

“그러시군요··· 혹시 수레는 왜 가져오라 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아, 최근, 전장에서 포병을 떼어 놓고는 전술도 작전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수레가 지나갈 수 있는 장소는 포대도 지나갈 수 있습니다.”

“허어··· 상상도 못했습니다. 레뮤즈 성에서 그 대형 화기들을 본 적은 있습니다만···.”

“이제는 군인이라면 익숙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발포시의 반동을 견딜 만큼 땅이 단단한지 확인하기 위해 방방 뛰기도 한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런 짓이 필요할 정도로 땅이 무르지는 않았지만.

“저희 레도쿠르 자작가는 크게 부유하거나 규모가 큰 가문은 아니지만··· 저희도 포병을 갖추는 게 좋겠습니까?”

“글쎄요, 효율 자체를 따지기 전에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대포를 자주 곁에서 보고, 발사음도 실제로 들어보는 것은 중요한 경험이라 생각하긴 합니다.”

어쩌다 적진을 점령해서, 노획한 적의 포로 적을 쏠 기회가 생길 수도 있고 말이다.

샹다메리 전투에서 적의 포대를 점령한 지빌링엔의 포격은 발 수가 많지 않았지만 꽤 큰 효과를 발휘했다. 아무래도 ‘아군의 포대에 공격당했다’는 심리적 효과가 꽤 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처럼 좋은 기회를 잡았는데 부대가 아무도 포를 쏠줄 모른다! 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심지어 방기할 수 밖에 없는 포를 부수거나 무력화 시킬 때도 지식이 있어야 한다. 점화구에 못을 박든, 포신을 굴려버리든 말이다.

내 설명을 들은 레도쿠르 자작가의 젊은 후계자는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젊은이에게 고민은 좋은 거지, 많이 고민해서 많이 성장하거라.

“에트 경, 한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오늘 일은 대충 마무리 된 것 같으니까요.”

“라솔 군은 어떻습니까?”

“흐음, 라솔 말입니까.”

다소 포괄적인 질문을 받았구나. 어떤 식으로 대답해주는 게 좋을까.

잠시 머리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다가, 조금 놀랐다. 라마엘과 호위 기사들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감과 적개심 때문이었다.

“엘랑키아 기사들 중에 라솔 왕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여러분들은 유난히 심해 보이네요. 혹시 어떤 이유인지 알아도 될까요?”

바로 한 세대 전에, 엘랑키아가 자랑하는 왕실 기사단의 절반이 라솔의 늪지대에서 십자포화에 갈려나갔으니까.

이웃끼리는 원래 사이가 안 좋기도 하지만, 이들은 좀 특별해 보였다.

“...라솔 인들이 라몽 백작님을 위협하기 위해 국경 마을 몇 개를 잔혹하게 파괴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저희가 그걸 가장 먼저 발견했습니다.”

“아···.”

역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이단자들을 왜 저럴까 싶을 정도로 잔혹하게 처벌하는 것은 교단의 특성이다. 그 중에서도 ‘불에 의한 정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라솔 계열 이단심문소의 특징이고.

주민들을 모아서 불로 태워 죽이다니··· 이 무슨 잔혹한 행동인가.

물론 그만큼, 경고나 도발로는 더 할 나위 없겠지.

원래 처형 과정이 아무리 잔혹해봤자, 그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시체가 전시되면, 훨씬 많은 사람이 교단과 교리의 엄혹함을 알게 된다는 논리이다.

역겨운 놈들.

당시의 일이 생각나는지, 호위병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몇명은 눈물까지 나는지 손등으로 거칠게 눈가를 닦기도 했다.

아마도 지금 여기 따라온 젊은 기사들은 레도쿠르 가문의 가신들인 모양이다. 그러니 당시에도 함께 행동했던 모양이고.

라몽 백작이 처음, 이웃 나라 군대를 자기 영토에 끌어들여, 그것도 무려 5천 명이나 태워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이 놀랐다.

그 놀란 이유 중 하나는, ‘그 라몽 백작이 그렇게 귀찮아질 일을 저질렀다고?’ 였다.

···그런데 들어 보니 그럴 만 했었구만. 백성을 생각했던 마음의 발로일지, 자기 권익을 침해받는 일은 죽어도 못 참는 성격 때문일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라솔 왕국군은 보병이 강합니다. 전장의 중심이 보병 밀집대형이 된지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기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장의 중심을 보병이 잡고 기병이 이를 보조하는 방식입니다.”

“그렇습니까? 엘랑키아와는 정 반대군요.”

“맞습니다. 보병들이 상대적으로 중무장을 한 경우가 많고, 기병들은 엘랑키아 기사들보다 훨씬 가볍게 무장합니다. 이 것도 차이가 나는 부분이죠.”

라솔에서는 질 좋은 말을 많이 키우는 게 어려우니까. 목초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릉지대에서 자라는 말은 몽세나의 산악마와 비슷한 특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 라솔 특유의 끈질기고 재빠른 경기병들의 전투력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정면 충돌에서야 엘랑키아 기사들의 상대가 되진 못하겠지만, 그 정면 충돌을 받아주느냐가 문제니까.

“그렇군요. 앞으로 싸울 상대이고 이웃 나라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자책하는 라마엘을 보면서 나는 미소지었다. 사실 대부분의 엘랑키아 귀족들이 그럴 것이다. 그렇게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아마 이 다음은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이 올 것 같다. 그러면 확신을 심어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희는 꼭 이기고 싶습니다, 에트 경. 뭐든 시키셔도 좋습니다. 저희가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아···.”

“그렇습니다!”

“저희도 한 마음입니다!”

음··· 레도쿠르 가문의 젊은 기사들은 생각보다 열정적이었고, 하나로 똘똘뭉쳐있었다.

이건 좀 기쁜 일이다. 트랑카벨에서도 그랬지만, 원래 교육을 잘 받은 좋은 집안 출신들이 열정적으로 배우려 들면 빠르게 결과가 나오니까.

나로서도 이런 훌륭한 재원들을 헛되이 잃고 싶지는 않기도 하고.

힘을 내야겠다.

전투가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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