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전장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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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고티에는 잠에서 깨어났다.
기상나팔 소리 없이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보고 깬 것은 오랜만이었다.
요란한 기상나팔 소리도, 먼저 일어나 시끌시끌 떠드는 동료들의 소리도, 분주하게 갑주와 무기를 챙기느라 금속 부딪치는 신경 긁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절대로 전장에서 빠지지 않는 화약 냄새도, 가죽과 쇠를 손질하는 기름 냄새도 나지 않는다.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총병 소대장, 얀은 눈을 뜨고서도 한참 동안 좁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이제는 낯설기만 한 ‘과거의 일상’의 기억을 다시 새기기라도 하려는 듯.
밖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속한 연대는 갑자기 명령을 받았다. 얼마 전 전투가 끝난 마르사코르 언덕에서 카르카냑까지 강행군을 해서 남하했다.
이웃의 드 레뮤즈 백작이 군대를 모으고 있다거나, 라솔 놈들과 밀약을 맺어 블랑독을 공격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르카냑으로의 귀환 명령이다. 그것도 평소보다 쉬는 시간을 줄여 움직이는 강행군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라고 얀도 동료들도 생각했다. 새로운 전선, 새로운 적이다.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지금까지 항상 이겨왔다. 경험과 실적은 일년 사이 어느새 베테랑이 되어버린 이 화승총 사수의 가슴 속에 자신감으로 남았다.
그는 이제 베테랑이었다.
연대에서도 그걸 높이 평가해, 남달리 구경이 크고 사거리도 긴 중화승총을 지급하고 그 소대장으로 삼았지 않은가.
이제 약간은 전투에 자신감이 생긴 상태였다.
게다가 제10 보병 연대는 마르사코르 언덕에서 한 게 없었다. 뒤늦게 전장에 도착해, 아군이 적군을 밀어내는 동안 후방에서 기다릴 뿐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야, 전장을 정리하거나 완전히 타버린 숲을 가로지르며 남은 적이 있나 수색하는 임무를 받았었다.
며칠 코가 막힐 정도였던 매운 탄내, 그리고 불이 꺼졌는데도 여전히 발바닥이 뜨겁던 후끈한 열기가 지금도 생각난다.
그래서 전력도 온전하니, 다음 전장에 선봉으로 나서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일어났어?”
하지만 강행군 끝에 카르카냑에 도착한 제10 연대 병사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휴가였다. 그것도 무려 나흘 동안.
강행군이 끝난 직후라 몹시 지쳐 있었지만, 얀은 또 다시 몇 시간 넘게 집을 향해 걸었다. 모처럼의 휴가를 헛되게 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밤 늦게 집에 도착한 얀은 제대로 인사를 할 틈도 없이 곯아떨어졌었다.
“엄마가 밥 먹으래.”
“알았어 나갈게.”
평범한 농가의 방이라고 해도 구획이 나누어져 있을 뿐, 따로 방 문이 달려있지는 않다. 오랜만에 보는 가족에게 어색해하며, 얀은 탁자에 앉았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둘러 앉는다. 평범하지만 그리웠던 식사.
시간이 늦은 데다가 바빠서 선물을 살 시간이 없어, 그대로 들고 온 은화 주머니를 내려 놓는다.
“새로 닭이라도 몇 마리 사세요. 동생들 신발도 제대로 된 걸로 하나 사주시고요.”
“그런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무사히 돌아오기나 해라.”
“아 어머니, 우리 콘도티에레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전쟁의 신이라고요 신! 그 분이 계시면 절대로 질 일이 없어요.”
“나도 훌륭하신 분이라고 이야기는 들었다만, 이기더라도 죽는 사람은 나오는 게 아니겠니···.”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말을 듣자, 얀 고티에는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생각할 때나, 동료들과 있을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부끄럽게 살지는 않겠다, 살아서 지느니 죽어서 이기는 게 낫다는 그런 이야기들.
전투의 승리는 본질적으로 병사의 목숨을 대가로 한다.
위대한 사령관인 콘도티에레가 그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기는 하지만, 이기는 전투라도 희생자는 꾸준히 생긴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고, 자기 차례가 오면 어쩔 수 없다는 운명론적인 생각도 있었다. 최전열에서 적 총구를 마주하고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일제사격의 폭풍이 아군 대열을 휩쓸고 지나가면, 매캐한 화약 연기 사이로 갑자기 비릿한 피냄새가 훅 풍기기 시작한다.
잘 무장한 건장한 청년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쓰러질 때는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난다. 갑옷과 각종 장구류들이 부딪치면서 내는 소음은 물론이고.
운 없는 동료들의 핏방울과 뼛조각이 투구와 갑옷에 부딪쳐 후두둑 소리를 낸다. 운 없으면 손가락이 날아 들 때도 있다.
직후에, 나는 안 맞았다는 짧은 안도가 온다. 하지만 피어오르는 강렬한 공포와 분노에 희석되어 버린다.
어서 적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또 얻어 맞는다. 그 생각에 서둘러 손을 움직여 총알을 장전한다.
그걸 몇 번이나 견디면서 오늘까지 살아남았다.
그래도 막연하게 언젠가 내 차례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다들 하고 있었겠지만.
“...걱정 마세요.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올게요.”
“에휴, 하나마나한 이야기 해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얀은 왠지 감정이 벅차올라서 빵덩어리를 마구 씹어 넘겼다. 마치 그러면 목구멍을 넘어간 빵조각이 감정을 눌러 주기라도 한다는 듯.
“헤헤! 오빠, 나 정말 새 신발 사도 돼?”
“어 그래. 꼭 사달라 해···.”
여동생의 순진하고도 신난 목소리에 대답해주려던 그는, 갑자기 숨을 멈췄다.
잠시 그의 눈이 헛 것을 보았다.
빠진 앞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여동생이 얼굴에 총을 맞고 사망한 동료와 겹쳐 보였던 것이다.
비쩍 말라서는 큰 눈만 보이는 동생의 얼굴에서, 상처의 압력 때문에 충혈된 두 눈이 튀어나와 있던 동료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인지.
다행히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헛 것은 사라졌다. 코와 귀에서 흘러나오던 피도, 기이하게 뒤틀린 입술도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길어서 말상이라고 놀림받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이는 여동생의 얼굴이 있을 뿐이다.
“오빠? 왜 그래?”
“아, 아냐. 신발 같이 사러 가면 좋을 텐데, 모레는 복귀해야 하니 어렵겠네.”
“에에, 뭐야? 벌써 가?”
문득, 불에 탄 마르사코르 숲에서 발견했던 생존자가 기억난다.
이름이 디라드 실뱅 이었나.
그의 집은 약탈당했고, 아버지는 살해당했으며, 본인은 강제로 끌려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원수의 짐을 날라야 했다.
약탈당하던 화전민 마을을 구하는 길에 그의 어머니를 만나 보호했고, 불에 탄 숲을 수색하다 아들을 만나 역시 보호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묘한 인연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이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아들이 큰 공을 세웠으니 상도 받을 테고···.
만약에 자신도 집이 북쪽이었다면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별 건 없지만 소중한 재산이 약탈당하고, 초라하지만 아늑한 이 집이 불타고, 부모님이 살해당하고, 동생들이 끌려나가고···.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침범해온 적은 카르카냑에 이르기 전에 모두 격퇴당했다. 그의 집은 안전했다.
그가 싸우는 동안은 안전했다.
“생각해보니까 괜찮겠네. 내일 일찍 장에 나가볼까?”
“진짜? 오빠가 신발 사주게?”
안전한 집에서, 짝짝이 나막신을 신은 여동생이 활짝 웃는다. 이제는 새 신발을 사줄 수도 있겠다.
그것만으로도 싸울 이유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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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 교회 소속의 젊은 수도사, 아르옌 그로반은 오랜만에 아넥시로 돌아왔다.
그다지 오랜 시간을 보낸 장소도 아니지만, 지금은 마치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진다.
불과 몇 주. 하지만 그 대부분은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자신도 많은 상처를 입어, 치명상은 없다지만, 정말 온 몸에 흉터가 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방어 교회의 성직자는 수성전만을 한다’는 원칙을 어기고, 블랑독 연맹군의 일원이 되어 법황의 군대와 싸웠다.
언덕 위 적의 포병대를 기습, 포격을 하지 못하도록 견제한다는 임무를 띄고 벼랑을 기어올랐으나, 적은 산불로 이미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화약이 유폭되며 엄청난 화염이 피어 오르는 것도 보았고, 자포자기가 된 적이 방어를 포기하고 언덕 아래로 진격하는 것도 보았다.
그 후에는 적 포병이 재집결해 화포를 옮겨가려는 것을 방해했다. 겨우 15명의 특공대는 바위를 엄폐물로 이용하며 상당수의 적을 묶어 놓았던 것이다.
계속 중요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주목받지 못하는 전장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전공으로 인정 받았다.
적이 포를 옮겨가 활용했다면 많거나 적거나 아군 희생자가 나왔을 테니, 기쁜 일이었다.
전투가 끝난 직후에는 부상자에 대한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총을 여러 발 맞아 피투성이가 된 수녀복의 여자가 실려왔을 때는 정말 놀랐다.
알고 보니, 법황군에 함께하던 랑시아라는 이름의 성녀였다. 시체처럼 축 늘어져서는, 피에 젖어 달라붙은 옷에서 피가 울컥울컥 나오는 것을 보고 죽은 줄 알았는데.
그걸 또 ‘비공식 성녀’ 아쥬흐 트랑카벨은 어떻게든 숨통을 붙여 놓았던 모양이었다. 총상 외에도 말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모양이지만.
비록 보잘것 없는 하급 수도사긴 해도, 성직자 대 성직자로 이야기를 한 번 해보고 싶었지만 아르옌이 마르사코르를 떠나는 순간까지도 깨어나진 못했다.
아무튼, 아르옌 수사는 아넥시로 돌아왔다.
그는 블랑독 연맹군 조직의 사람이 아니므로 모든 포상을 거절했다.
다만 전투에서 노획한 짐말과 예비용 탄약은 감사히 받기로 했다. 휴대했던 탄약은 치열한 전투 중에 전부 써버렸기 때문이다.
전투가 더 길어졌으면, 아넥시에 정착한 용병 바트로가 줬던 단검을 들고 싸웠을지도 모르겠다.
약간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은 스승을 만나, 그의 뜻에 어긋나는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오, 이게 누구야! 수도사님!”
“아이고, 우리 수도사님 오셨네? 북쪽에서 크게 싸웠다고 들었는데 어디 다친 데는 없소?”
“어서와요!”
양측 합쳐 수 만에 이르는 대군이 격돌했던 아넥시 주변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미리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면 바로 얼마 전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역시 대군이 머물던 흔적이 없을 수는 없다. 특히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이 대규모의 의식을 진행했던 거대한 단은 기둥만이 흉물스럽게 남아있었다.
치열했던 전투는 아넥시 성곽 자체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집중포격을 받아 일부분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지점 외에도, 여기저기 깨지고 빠져버린 흔적이 명확하다.
그 때문에, 성벽 안팎에 성벽 수리를 위해 주민들이 세워놓은 구조물들이 여럿 보인다.
단순히 망가진 벽돌만 바꾸면 되는 게 아니라, 내부에 채워진 돌더미가 쏟아져 나온 경우도 보강해야 하기에 성벽 전체를 손보는 것이다.
고된 일을 하는 와중에도, 아르옌이 도착하자 모두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런데 그 중에는 그의 스승인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 사제도 있었다.
“오오,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쁘네! 아르옌 수사.”
“스승님도···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물론이네! 이토록 빠르게 상처가 나았음은 실로 주신의 가호가 아니겠는가. 아니지, 오히려 당신을 위해 어서 다음 과업을 수행하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네.”
아직 옷 사이로 붕대가 보이는 것을 보면 역시 완전히 낫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시뻘건 속살이 보일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던 점을 생각하면 빠르게 회복한 것은 분명했다.
“땀이 나면 곤란하니까, 제대로 된 일은 못하고 간단한 잡일만 돕고 있다네.”
“그래도 완전히 아물기 전에는···.”
“하하핫, 주신께서 살펴 주셨는지 덧나지 않고 잘 회복되고 있다네. 오히려 사람이 쉬기만 하면 병이 생기는 법이라니.”
그의 스승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무언가를 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주변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는 일이다.
“저 스승님, 오늘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허락하겠네. 좋을 대로 하시게나.”
“예? 아직 아무 것도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하핫, 자네가 하려는 부탁은 뻔한 것 아니겠나. 무엇이든 해 보고, 무엇이든 생각해도 좋네. 그 책임은 오롯이 스승인 내가 질 터이니.”
“저는··· 블랑독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좀 더 종군하고 싶습니다. 방어 교회의 수칙에는 어긋나지만···.”
스승이 허락했음에도, 아르옌은 굳이 설명을 한다. 스스로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확신이 필요한 것인지.
“전에도 말했지? 방어 교회는 애초에 교단의 수칙을 안 지키는 말썽꾸러기들이라고. 아직 정식으로 사제가 되기 전이니, 자신의 양심을 따라 행동해보시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꼭 돌아오고!”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승님.”
스승과 제자는 그렇게 한참동안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생전 모르는 사람들의 고향을 대신 지키려다 중상을 입었던 사제의 진심 어린 말에는 특별한 무게감이 있었다.
“그런데 스승님, 혹시 생활비가 부족하시지는 않으십니까?”
“하핫, 다행히 밥은 얻어먹고 있다네.”
“그래도 불편하실 때가 있지 않으신가요?”
“부족한 게 있으면 도박으로 따서 사면 된다네! 전쟁 중이지만 트랑카벨에서 물자가 들어와서 나름 풍요롭기도 하고 말일세.”
요한 사제는 당당하게도 말한다.
“...너무 당당하셔서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게나. 만약 주신께서 이 몸이 삿된 짓을 하고 있다면, 알량한 재산일랑 모조리 회수해가시지 않겠나? 아직은 따고 있으니 주신의 바운더리 안쪽인 것일세.”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스승님. 그래도 주신께서 테이블 맞은편 사람의 주먹을 통해 징벌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르옌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랬지, 그의 스승은 이런 사람이겠지. 주민들에게 사랑 받고, 앞으로도 그들을 위해 살 것이다.
그 방향이란 점에서 다소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럼 어디로 갈 생각인가?”
“레뮤즈 성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집결지라고 하더군요.”
“알았네. 오늘은 쌓인 이야기를 좀 해 보지. 주민들이 모두 전투가 어떻게 벌어졌는지 궁금해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