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전장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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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몽 드 레뮤즈 백작과의 밀약이 맺어졌다. 밀약이라 표현한 이유는 역시 병력이 실제로 집결할 때 까지는 공표되지 않기 때문이니까.
정확히는 세 가문의 밀약이다.
트랑카벨 자작가, 드 레뮤즈 백작가, 드 누아 백작가.
이 세 가문은 아직 손발을 제대로 맞춰 본 적이 없다.
트랑카벨과 드 누아는 이번 정순파 토벌 전쟁을 이겨내면서 짧지만 굵은 끈끈한 동맹 관계를 확인했다.
드 누아와 드 레뮤즈는 꽤 오랫동안 이웃으로 협력해왔다고 한다. 블랑독에 인접한 몇 안되는 대귀족 가문이기도 하고, 특히 선대 백작끼리는 아주 친했다고 한다.
문제는 역시 트랑카벨과 드 레뮤즈겠지···.
두 가문은 몇백 년 앙숙이었고, 아롱드 영감님의 세대까지는 블랑독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했던 관계니까.
아직도 라몽 백작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니까···. 그래도 나야 가문이 정한 정책을 따르는 고용인일 뿐이니 정해진 일을 성실히 할 수 밖에.
‘가능한 한 빨리’ 레뮤즈 성 서쪽의 초원지대에 집결하기로 한 트랑카벨 가문의 파병 목록도 완전히 정해졌다.
[트랑카벨 영지군 보병] 2300
-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 1200
-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 1100
[트랑카벨 영지군 기병] 650
-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 650
[트랑카벨 영지군 용병] 보병 3750, 기병 2160
- 슈토르히 연대 1100
- 네그라타 연대 1700(보병) + 160(기병)
- 지빌링엔 연대 950
- 제35 프리즈마라 중기병 연대 800
- 제36 프리즈마라 경기병 연대 1200
집결 시점에 다소 결원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보수적으로 잡았으나, 보병은 6천 이상, 기병은 2700 이상으로 실제로 1만을 조금 넘을 것으로 추측한다.
트랑카벨 가문으로서는 실로 전군의 절반 가까이를 파견하는 것이다.
병력을 좀 더 남겨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 그런 신중론도 이해는 한다.
그래도 드 레뮤즈에 진심을 보여주어야 했고, 설령 다른 적이 오더라도 블랑독 본토는 충분히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목록이 정해졌다.
그리고 내 생각에도, 라솔의 침공 규모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충분한 병력 동원이 중요하다 판단됐다.
만약 라솔의 침공이 보잘것 없다면, 압도적인 병력으로 단숨에 이길 수 있다. 만약 적이 기에 눌린다면 싸우지도 않고 전쟁을 방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라솔이 생각보다 강력한 군대로 공격해 온다면 맞대응할 만한 전력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만약 전투에서 패배하고, 드 레뮤즈 영지가 초토화된다면 다음은 블랑독이 될 것이라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표시하지 않았으니까.
말하자면 어차피 우리가 겪어야 할 전쟁을 남의 땅에서 미리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예 안 보내면 모를까, 보낼 거면 충분히 보내자는 것이 우리 선택이었다.
그리고 내 경험상··· 전장에서의 발언권은 결국 보유한 병력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실의 작위? 지위? 전장 들어가기 전 까지는 통할지 몰라도, 진짜 전투를 목전에 두면 결국 휘하 전력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장에서 영향력을 끼치려면 어느 정도의 전력은 반드시 보유해야 한다는 말이지.
아마 이번 전투는 ‘연합군’의 형태로 벌이게 될 것이며,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을 비롯해서 이웃의 엘랑키아 영주들도 많이 포함될 것이다.
어쩌면 왕실 쪽에서도 병력을 파견할지도 모르지.
기라성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바글바글하며 한마디씩 할 테니, 내가 전장을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는 바라지도 않는다.
총지휘관은 라몽 백작이든 다른 사람이든 누군가 따로 있겠지만, 그래도 운신의 여지를 남겨두려면 병력이 필요했다.
“트랑카벨 군은 정말 대단한 병력이네요. 맹세컨데, 전쟁 전에 이만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면, 전쟁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실무 회의에서 나와 함께 편성안을 정리하고 있던 아인멜츠 피노르 폰 자이트리츠가 말한다.
슈토르히 연대의 실질적 지휘관이자 연대장 대리인 루트비히의 친척인 그는 함께 일해보니 역시나 괜찮은 동료였다.
루트비히처럼 번뜩이는 천재성은 보이는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명확하게 아는 타입이다.
전형적인 유능하고 견실한 참모 타입이라고나 할까. 무슨 인연으로 고용했는지는 몰라도, 라몽 백작에게는 사람 보는 눈이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강한 전력임을 알아도 ‘내가 더 강해!’ 혹은 ‘강한 적을 쓰러뜨린 영웅이 되겠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후우··· 그렇네요. 그러니 전쟁이 끊이지를 않겠고요.”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가 꼰대같은 소리로 들릴까봐 무서워했지만, 다행히 아인멜츠는 그렇게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 같다.
강한 군대는 전쟁 억지력의 기본이지만, 그건 객관적으로 양측 전력을 파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은 있다는 가정 하의 문제이다.
제3 자가 보기에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전쟁이라도, 일으키는 당사자는 나름의 승산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리고 아마··· 라솔 왕국 정도라면 병력 차이로 찍어 눌러서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병력 선정은 어떤 방식으로 하셨습니까? 역시 각 부대 단위 전투력입니까?”
“전투력도 1차적으로 고려한 사항이긴 합니다만.”
군사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였으므로, 나는 간단하게 설명한다.
지금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의 3개 연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용병이다.
이는 용병의 전투력이 트랑카벨 정규군보다 강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여러 차례 전투를 거치면서 완숙기에 접어든 정규 연대들의 전투력은 어디 내놓아도 부족할 수준이 아니니까.
하지만 선발 시 고려사항은 각 연대의 구성원이었다.
트랑카벨 영지군은 당연하지만, 트랑카벨 가문에 충성을 바친다.
무기를 포함한 각종 장비를 트랑카벨로부터 지급받으며, 봉급 또한 트랑카벨의 금고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 구성원은 블랑독 타 지역 출신들이 많다.
고향을 잃고 현재 소속이 불분명한 피난민 출신도 있지만, 블랑독 연맹에 속한 타 가문에서 모병한 인원도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을 블랑독 방위가 아닌 외부로의 파병에 동원하는 것이 적절한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마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블랑독 연맹은 현재 잘 유지되고 있으며, 소속원들도 협력적이니까.
게다가 드 레뮤즈로의 파병은 누가 봐도 블랑독 방위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더 멀리 나가서 싸울 뿐이지.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그런 경우는 가급적 피하고자 했고 현재와 같은 리스트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제10, 제15 보병 연대는 가장 먼저 창설된 부대들이기 때문에 ‘순혈 트랑카벨’ 부대이다. 4개 자작령 중 어딘가에서 지원한 병사들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또한 제31 정찰 연대 역시, 몽세나 산악마들을 활용하고자 편성을 시작한 부대이다. 그래서 그 지역 출신 기사와 지주 계급을 중심으로 편성됐다.
나머지 용병들이야 뭐, 애초에 트랑카벨 가문과의 용병 계약이니까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선 자유로웠지. 나도 포함해서.
“저는 집에 있던 시절부터 오로지 전술 말고는 배우지 못해서, 그런 정치적인 고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인멜츠는 내 설명을 듣더니 놀라워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다.
“집이라 하시면 소문으로만 듣던 자이트리츠의 ‘전쟁관’ 입니까?”
“아, 루트비히에게서 들으셨나요? 맞습니다. 저는 방계지만 전쟁관 교육을 이수해서 자이트리츠의 이름을 받을 수 있었네요.”
“루트비히는 그 시절 이야기는 별로 하고싶어 하지 않았거든요.”
“으··· 루트비히는 원래 말 하기를 별로 좋아하는 친구는 아니죠. 그걸 감안해도 별로 기억하고 싶은 시절은 아니네요.”
자이트리츠 가문은 우수한 군인을 교육해 그룬발트 각지의 제후들에게 공급하는 것으로 명망을 얻은 특이한 가문이다.
일종의 사관학교 시스템이라고 할지, 가문의 자손들과 친척, 외부 참여자 등등을 어릴 때 부터 교육한다고만 들었지 실제로 어떤 교육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가주님 생각에는, 어릴 때부터 불필요하게 정치에 대해 고민하면 좋은 지휘관이나 참모가 될 수 없다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군요···.”
이 시대에 군사와 정치를 분리해서 생각하다니.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라는 생각도 들지만 남들 하는 영지 경영이 아니라 군인 키워서 먹고 사는 가문이 하는 말이니 뭐.
“여기, 말씀하신 대로 드 레뮤즈 영지군의 전력을 정리했습니다.”
잠시 나와 잡담을 나누며 뭔가를 적던 아인멜츠가 종이를 내민다. 그는 아까부터 드 레뮤즈 영지군의 보병 전력을 정리하고 있었다.
드 레뮤즈 직속 영지 출신, 가신이 보낸 병력, 협력 가문에서 보내온 병력을 모두 합치면 8천 명이 조금 넘는다. 이를 모두 4개 연대로 나누어 편성하기로 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트랑카벨 영지군처럼 기간 병력부터 천천히 육성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부족해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소 기동성을 포기하더라도 전투력을 확보하기 위해 각 연대의 숫자를 늘리기로 했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부대의 공격력과 방어력, 기동성을 고려할 때 가장 효율적인 숫자는 1000명에서 1500명이다.
하지만 이는 충분한 훈련을 받고, 총병과 포병을 포함한 적절한 화력을 보유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가 모두 부족한 드 레뮤즈 영지군은 피해를 감내하고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병력 규모를 키운 것이다.
‘드 레뮤즈의 용감한 병사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트 경께서 제대로 키워주시지 않으면 모두 용감한 시체가 될 겁니다.’
가문 사이의 밀약이 마무리된 직후, 반쯤 떠넘기듯 일을 받은 내 태도가 썩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시 아인멜츠는 굉장히 절박한 태도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중앙군들은 괜찮았지만, 드 레뮤즈 변경의 소규모 영지 출신 병사들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쓸데없이 면적이 넓은 미늘 갑옷에 널빤지 방패, 똑바로 자라지도 않은 잡목 끝에 쇳조각을 단 창대까지.
트랑카벨 부임 초기에도 그랬지만, 드 레뮤즈 쪽이 더 심각해 보였다.
아마 그들이 속한 영지는 최소한 백 년 이상은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평화란 좋은 것이지만, 방치된 군사력을 어떻게 좀먹는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을 쓸만하게, 아니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야 하니 책임이 막중하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최소한 4주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훈련장에서 전장으로 이동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그것도 빠듯하다.
우선은 2주 단위로 필수적인 훈련부터 진행해야겠다. 총기를 지급해야 하는데 이렇게 벼락치기로 해서야 걱정이다.
총을 쏘는 법 자체야 반복 숙달을 통해서 금방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부대 동료들과 함께 대열을 짜서 전력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달 정도는 필요하다.
거기다 상대가 나를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침착하게 평소 하던 행동을 반복할 수 있도록 배우는 것은 한 달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러니 시간이 충분하다면, 트랑카벨 때 처럼 소수의 기간 부대를 먼저 창설해서, 이들이 경험을 쌓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부대 규모를 키워 나가는 방식이 합당하다.
전문적인 병사 양성 시스템이 없는 이런 시대에는 그게 가장 믿을 만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시간, 없는 여건 생각을 자꾸 해봐서 뭐 하겠나. 가능한 한 있는 것으로 해 봐야지.
다행히 조만간 트랑카벨과 드 누아에서는 ‘숙련된 조교’들이 도착하기로 했으니까.
“참, 에트 경. 엘랑키아 서부와 중부 지역에서도 지원군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지원군이요? 설마 왕실이 보낸 병력입니까?”
“왕실군은 아니지만, 엘랑키아 국왕께서 인근 영주들에게 요청하셔서 파견오는 것 같습니다.”
“아하··· ‘자발적 지원군’입니까.”
“엘랑키아와 라솔, 양국 사이의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왕실이나 주변 영주들도 상황을 좀 다르게 보고 계신 것 같네요.”
병력이야 많으면 좋지. 하지만 지휘부가 복잡해질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진다.
제발 드 레뮤즈의 벼락치기 연대들 보다는 좀 더 나은 병력이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