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회합
회담장에서, 거짓 약점을 보여주고, 상대가 거기 집중하는 사이 원하는 것을 챙긴다는 전술은 실패로 판명났다.
회담의 상대방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유감스럽게도 내가 던진 미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거기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 라는 태도였으니까.
나로서는 약이 오르는 일이지만, 라몽 백작의 판단이 합리성에 기반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됐든, 나는 작전을 포기하고 오늘의 주 목적을 꺼낸다.
오늘을 위해 다 같이 논의하여 준비한 ‘특별 메뉴’이다.
바로 외부 파병이 가능한 트랑카벨 영지군의 리스트이다.
이걸 작성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고려가 필요했다.
먼저, 나는 작년부터 나름 노력해서 트랑카벨 가문의 군사력을 훌륭하게 키워 놓았다고 자부한다.
다만, 내가 키운 병력도, 세운 계획도 모두 철저한 방어전을 위한 것이다.
외부에서 적이 블랑독 지역으로 침공해오면, 이를 맞아 싸워 격퇴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야기겠다.
따라서 블랑독의 외부로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다소 준비가 필요한 일이다.
마치 게임처럼, 원하는 위치를 지정한다고 자동으로 병력이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하면 매우 곤란해진다.
아니, 병력을 움직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움직인 병력이 목표로 한 장소에 무사히 도착할 지, 도착한 이후에 멀쩡히 싸울 수 있는 상태일지가 의문인 게 문제겠지.
까놓고 말해서 트랑카벨 영지군의 병참 조직은 철저하게 거점 중심 보급에 맞춰져 있다.
비교적 안전하거나, 자체적으로 방호력을 가진 주요 지점에 창고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병력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안정적이고 인력도 많이 필요하지 않지만, 보급 거점에서 멀리 떨어져 움직일 수 없다는 치명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리부터 전쟁 준비를 했었고, 우리 안마당에서 싸우는 일이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블랑독이 그렇게 넓은 땅도 아니고 말이다.
뭐 드 누아까지도 잘 갔으니, 조금 먼 정도인 드 레뮤즈까지 별 일은 없겠지. 내가 생각해도 호들갑이지만, 그래도 없던 병참 체계를 새로 만들어야 하긴 하니까.
그리고 두번째 고려 사항은 좀 더 중요한, 블랑독의 방위력에 대한 것이다.
먼저 쳐들어온 국왕군을, 이어서 넘어온 법황군을 완전히 격퇴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망할놈의 성전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안그래도 그룬발트에서 넘어온 얼간이들이 국경 밖에서 얼쩡거리고 있다는 소식이 있는데.
이게 통상적인 전쟁이었다면 진작에 끝났을 것이다. 이정도 승패가 갈렸으면 더 집착하는 놈들이 미친 놈들이지.
어쨌든, 상당한 규모의 추가 성전군이 블랑독을 침공하더라도, 계획에 따라 방어전을 진행하려면 충분한 야전군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가지를 고려하면, 자동으로 리스트가 산출된다. 드 레뮤즈에 보내줄 수 있는 병력의 리스트, ‘오늘의 메뉴’가 말이다.
"먼저 이것을 봐 주십시오, 백작님. 우리 트랑카벨... 블랑독 연맹군이 외부 파병을 준비하고 있는 병력의 리스트입니다."
라몽과 가스텔, 두 백작은 머리를 맞대고 내가 넘긴 리스트를 읽는다. 가스텔 백작에게는 몇 번 봐서 익숙한 리스트일테고, 라몽 백작에게는 처음 보는 리스트이겠지.
"흐음...."
라몽이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리스트를 돌려주며 말한다.
"뭔가 많이 쓰여 있지만, 나는 봐도 잘 모르겠군. 우리 측 군사고문을 불러 조언을 들어보겠네."
"백작님 뜻대로 하십시오."
라몽은 자신의 '군사 고문'을 불러들였다. 당연히 장중하게 수염을 기른 노기사가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 20대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들어왔다.
"아인멜츠 피노르 폰 자이트리츠라고 합니다. 평소부터 존경하던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 에트 경을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청년은 시원시원하고 서글서글한 태도로 인사한다.
어? 그런데 자이트리츠라....
"제 사촌, 슈토르히 연대의 루트비히가 신세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아! 그랬군요. 루트비히가 블랑독에서 합류한 직후에 친척을 만나러 자리를 비웠었는데, 그 때 아인멜츠 경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이제 보니 둘이 많이 닮은 것 같다.
둘 다 말끔하고 훤칠한 청년들인데. 우리 루트비히가 좀 흑막처럼 생겼다면, 아인멜츠는 더 성격 좋은 주인공 타입이라고나 할까.
내가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아인멜츠는 자료를 검토했다.
"트랑카벨 영지군의 베테랑 연대에... 엘랑키아 남부 제일의 포병대네요. 동부 출신의 기마 용병... 아... 거기에 슈토르히까지 있네요."
"슈토르히가 무엇인가?"
"여기 계신 에트 경이 창설하신 그룬발트 출신의 용병단 입니다. 비교적 신생이라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용병들 사이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정예입니다."
"흐음."
"샹다메리에서, 왕실군의 기병대를 완전 격파하고, 근위기병대장을 포로로 잡기도 했던 부대입니다."
"호오...."
아니 뭘 이리 잘 알고 있지?
슈토르히야 친척인 루트비히가 근무하니까 그렇다 쳐도, 트랑카벨 정규 연대들의 번호만 보고 숙련 병력임을 알아채는 정도라면 평소부터 관심을 두었다는 이야기겠지?
허세를 부릴 예정은 없었지만, 어쨌거나 가급적 객관적으로 행동해야겠다.
"단순히 숫자가 많을 뿐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현재 엘랑키아 남부 최고의 병력들입니다. 외람되지만, 이만한 병력을 내놓는다는 것은 트랑카벨 가문이 진심을 보여주고 계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음...."
정말 시원시원하게 말한다. 저 정도의 자신감은 역시 평소에 준비한 지식과 경험이 있기에 가능하겠지.
그의 말대로다. 트랑카벨 가문은 상업으로 흥한 가문, 나도 일단은 신의 성실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시장에 하자 있는 상품을 내놓는 일은 없다.
다만 그 상품에 가격을 책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지. 정신을 차려야 할 부분은 이 쪽이겠다.
"뭐 좋소. 이 만한 전력을, 우리 드 레뮤즈가 빌려 쓰려면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오?"
잠시 생각하던 라몽이 입을 연다.
"저희 측에서는 두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번째는 안전의 보장입니다."
"안전의 보장? 귀 가문, 트랑카벨은 이미 자력으로 안전을 보장받지 않았는가?"
"군사력은 안전 보장에 필수 불가결이지만, 군사력만으로 완전히 보장받을 수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전쟁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구요."
정순파 토벌 성전군은 강군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엘랑키아의 한 지방을 공격한다는 안일한 생각의 덕을 받기도 했다.
만약 엘랑키아든 교단이든 독하게 마음을 먹고, 합리성을 생각하지 않고 블랑독을 멸하겠다 덤빈다면 패배는 자명한 사실이다.
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찾은 결론은 '가문의 위상을 높인다' 였다.
단순히 작위를 높이고, 세력을 키우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순 세력으로만 따진다면야 지금도 충분하다.
다만 지금처럼 '얕보고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도록 하겠다는 이야기이다.
어찌보면 지금 일어난 사태는 트랑카벨의 위상이나 권위가 얕잡혀 보였기 때문이 원인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거기에 추가로 인계철선을 만들려고 한다.
"안전의 보장을 위해서, 백작님의 영토, 권역 내의 정순파 사면령을 내려주십시오."
"허어."
회담을 시작한 내내, 벌레 씹은 표정이던 라몽의 얼굴에 처음으로 어이없다는 듯한 미소가 번진다.
"그 말은, 패배할 경우 함께 지옥으로 떨어진다... 라고 해석해도 되겠나?"
"라솔의 종교기사들을 수천 명이나 태워죽이실 때 각오하신 것 아닙니까? 조만간 파문장이 날아올 겁니다."
여기서 각오란, 물론 교단으로 부터 파문당할 각오이다.
영주가 교단으로부터 파문당하면, 그 영지에는 더 이상 주신의 가호가 머무르지 못한다.
가호가 거두어진 땅에서는 모든 성사가 금지된다.
갓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 축복을 받지 못한다.
새롭게 짝을 이룬 부부의 미래는 수호 받지 못한다.
세상을 떠난 이의 이름 또한 주신의 명부에 전해지지 못한다.
종교를 사회의 기본 규범으로 삼고 있는 이상, 파문은 모든 일상 생활이 멈춰 버린다는 뜻이다.
결국 파문의 원인이 된 영주는 가족과 가문, 가신들과 백성 모두에게 원망을 사게 된다.
파문 당한 자를 치는 것은 종교적으로 맹세를 어긴 것으로 여기지 않기에, 사이가 나쁜 이웃은 물론 불만 가진 동맹과 가신에게조차 공격당하게 된다.
...는 것이 파문의 레퍼토리이고, 파문 때리는 쪽에서 바라는 결과일 텐데.
현실은 다행히도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블랑독 주민들이 유난히 반골 기질이 강하고, 교단에 대적하면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영주들을 배척하는 바보는 아니란 점도 있겠지.
하지만 어지간히 종교에 과몰입한 인간이 아닌 한, 평소의 인간 관계를 칼같이 끊어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파문이라는 게 언젠가 풀릴 것이라는 점 까지 생각하면 더 그렇고.
아니, 까놓고 돈 받을 게 있는데, 상대가 파문 당하면 거래하면 안된다는 교리 때문에 돈 안 받을 거냐? 이 말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인 성사의 경우에도, 교단의 명령을 어기고 편법으로 성사를 진행하는 등, 양심적인 성직자들의 활약으로 어느정도 해소가 된 모양이고.
교단이 이렇게까지 추태를 부렸는데도 굳이 종교에 의존해야 하느냐, 라 생각하는 건 너무 현대적인 감성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런 상황이었으니, 제법 영토에 대한 장악력이 높은 라몽 백작의 경우에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뭐 어차피 파문이야 당하겠지.허나, 드 레뮤즈가 지지해준다 해서 그대들의 상황이 나아질까? 똑같이 버림받은 입장이 될 뿐인데.”
“일정 규모 이상의 세력을 갖추면 건드리기가 힘들어진다. 저희는 그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흐음···.”
또다시 잠시 생각하는 라몽.
충분히 큰 말은 죽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대마불사’ 이론이다.
현재 블랑독에 개입했던 각 세력은 제각각의 계산이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드 레뮤즈가 실질적으로 블랑독을 정악하고 있었고, 정순파에 대한 토벌령이 엘랑키아 남부의 대영주들의 반발을 살 게 분명했다면?
법황도 국왕도, 조금 달리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엘랑키아 왕실은 절대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 자칫하다가 엘랑키아 남부가 통째로 불타버릴 수 있으니까.
게다가 건국 8대귀족을 적으로 돌렸다가는··· 다른 귀족들에게 ‘그럼 혹시 나도?’라는 생각을 하게 할 여지도 있으니까.
인계철선이란 이런 이야기지.
“실로 악마의 속삭임이군.”
“그리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라몽의 얼굴에 처음으로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비웃는 미소이나, 어떤 계산도 느껴지지 않는. 마치 못된 짓을 저지르는 소년과도 같은 미소.
그러나 때로, 못된 아이의 장난은 동물의 목숨을 빼앗기도 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을 다치게 만들기도 하지.
라몽 백작은 그렇게 개구리 대신 라솔의 성전군 5천 명을 태워 죽였다.
“그럼 또 하나의 제안은 뭐지?”
“전쟁이 끝난 후에, 엘랑키아 남부를 관통하는 무역로를 만들고 싶습니다. 물론, 드 레뮤즈 가문 역시 관세와 지분에 의한 이득을 보장합니다.”
“내 영토를 통해 무역을··· 무슨 이유로?”
“트랑카벨 가문의 상업 영역은 그룬발트와 주디칼리, 그리고 나우데사에도 이르는 남북으로 긴 형태입니다. 그 시장을 서쪽으로도 넓히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뭘 팔겠다고? 블랑독 포도주가 서부에서도 팔릴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글쎄요, 거기부터는 상인들의 영역이겠지요.”
솔직히 나도 잘 모르는 분야다. 나는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하나같이 악마의 속삭임이군.”
라몽의 입가에 걸린 비틀린 미소는 점점 더 그 각도가 커지고 있었다. 마치 입이 뒤집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러나 신기하게도 불쾌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만한 병력을 돈을 내지 않고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악마와도 계약하겠다.”
담담히 말하며, 문서를 자기 앞으로 끌어가 확인한다. 하지만 정말 싫은 일이라는 듯, 서명란을 보다 팽개치듯 다시 밀어 버린다.
“허나 한가지 조건을 달겠다. 서명한 안 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이 라몽 드 레뮤즈의 이름으로 맹세하겠다. 허나 그 발표는, 약정된 병력이 모두 내가 지정한 장소에 집결한이후에 하겠다.”
약속의 이행이 되기 전에는 부담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보고하겠습니다. 서둘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요.”
“조건이 하나 더 있다.”
“예, 말씀하십시오.”
아니 뭔 조건이 이렇게 많아. 내가 속으로 투덜대는 동안, 라몽은 자신의 군사 고문인 아인멜츠를 흘끗 바라본다.
“나의 군대를 훈련하라.”
“...뭐라고요?”
까다로운 조건이 여럿 나올거란 생각은 들었다. 거기에 대한 대응책도 미리 준비해 왔지.
음··· 하지만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사람 안 믿는 사람이 자기 군대를 남에게 맡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