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회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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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최근 친하게 지내고 있던 라솔의 종교 기사단을 배신했다. 오렌시아 기사단이라나 뭐라나.
그냥 배신한 것도 아니지. 뭐 욕이나 하고 약속을 어겨서 쫓아낸 것도 아니다.
별의 별 소문이 다 돌고 있었다. 사망자의 숫자는 출처에 따라서 4천에서 1만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몽땅 잡아다 십자가에 못 박아서 불태웠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큰 구덩이에 던져 생매장을 시켰다는 말도 있고, 화약으로 산을 폭발시켜 묻어 버렸다는 말도 있다.
비교적 공신력 있는 정보에 의하면, 미리 화약을 묻어놓은 땅굴 위에 상대를 머물게 한 후, 일제히 터뜨려 생매장시킨 게 아닌가 싶다.
이런 큰 일을 저질러 놓고도, 드 레뮤즈 가문의 공식 입장은 아래와 같았다.
‘불미스러운 사고로 인해 소중한 동맹군인 오렌시아 기사단과 타라트라바 용병이 전원 사망했다. 원인은 화약고의 폭발이며, 자세한 이유에 대해서는 조사 중이지만 생존자가 없고 증거가 모두 폭발로 인해 사라져 어려움을 겪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도 이 정도면 정말 예술의 영역이 아닐까.
내가 장담하건데, 라몽 백작은 이거 해명이라고 한 게 아니다. 상대 열받으라고 알면서도 의뭉을 떠는 것이다.
아마 ‘내가 너희 기사단 태워 죽였다. 싸울 테면 싸워보자’ 하는 것과 비교해서 훨씬 열받을 것이다.
정말 보통 별난 인간이 아니다. 솔직히 이런 인간은 살면서 본 적이 없다. 오늘만 산다··· 이런 것도 아니고 말이지.
아무튼 너무나도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우리 블랑독 연맹군, 그리고 트랑카벨 가문으로서는 절대로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긴급 회의가 결린 것은 당연했다. 아쥬흐와 아실, 트랑카벨 가문의 남매와 내가 서둘러 마주앉은 것은 그 때문이다.
“솔직히, 라몽 백작 양반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라몽이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라는 예측은 언듯 보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완전히 틀렸다.
블랑독을 침공해서, 정순파 토벌전에 숟가락을 얹지 않았다는 것 까지는 예상이 맞았다.
아니 그런데 더 큰 전쟁의 불구덩이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버릴 줄은··· 그 솔직히 말도 좀 이상하게 하고 특이한 인간인 줄은 알았지만 말이지.
보통 어지간히 성격 이상하고 경험 많지 않은, 특히나 젊은 귀족들이 이상한 정책을 지르듯이 내놓을 때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은 보통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경우가 많다.
어떤 면에서는, 신통찮은 삶이지만 가늘고 길게 살면서 알량한 지위와 재산을 적당히 즐기면서 살다가 후대에게 물려주기에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주변 사람들을 적당히, 못 견디지는 않을 정도로 괴롭히기는 하지만 또 극단적으로 반발을 살 지경은 아니고 말이다.
라몽 드 레뮤즈는 여러모로 내가 보았던 ‘전형적인 폐급 영주’에 가까워 보였다.
뭔가 첫 인상도 서로 엄청 안 좋았으니까. 아니 뭐 딱히 트랑카벨 가문에서 부른 것도 아니요, 잡아 둔 것도 아닌데 완전 추하게 도망갔었지?
이런 인간들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약해진다고. 원래 쥐고 있는게 많다보니까 혹시라도 놓아야 할 때를 놓친다고나 할까.
당연히 라몽도 그럴 줄 알았는데···.
여러모로 내 판단은 빗나갔다. 뭐, 내가 딱히 사람 보는 눈이 엄청 뛰어난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하지만 블랑독에서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새로운 전쟁을 시작해버렸네요.”
아쥬흐가 담담하게 말한다. 그녀는 오늘도 아름답지만, 다소 창백하게 보였다. 그녀는 최근 아주 중요한 환자를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한다.
물론, 원론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은 환자는 없다가 맞겠지만, 정치적으로는 남달리 가치가 높은 환자, 몸값이 비싸게 책정되는 환자가 있긴 하니까.
다름아닌 법황이 보낸 ‘공식 성녀’였다. 기병대 선두에서 설치다가 총알을 두 발이나 맞았다나 뭐라나.
아무튼 시시각각 바뀌는 병세에 대응하고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몇몇 간호사들과 함께 중환자 병동 부근에서 쪽잠을 자고 있다고 하니 참···.
이런 때, 도저히 빠질 수 없는 회의기도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라몽 백작님은 소극적이신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실 역시 많이 당황한 모양이다. 이 소년 자작은 나처럼, 드디어 전쟁이 끝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두 분께서 저를 부르셨다는 것은, 제 의견이 들어보고 싶으신 거겠지요?”
다소 무례하게 보일 수 있겠으나, 나는 앞질러서 두 사람에게 물었다.
누가 봐도 남매라고 알아볼 수 있을,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미남미녀인 화사한 금발에 파란 눈의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전제가 필요하겠습니다. 블랑독 연맹··· 아니지, 트랑카벨 가문은, 이스키비르 강 인근에서 벌어질 전쟁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물론 현재 트랑카벨 가문의 큰 어른은 남매의 할아버지, 아롱드 트랑카벨 영감님이지만. 이 세 사람의 의견이 크게 어긋나는 것은 여태 본 적이 없다.
뭐, 많이 어긋나면 나중에 다시 조율하면 될 테고, 나야 고용된 군사 부문 조언자로서 의견을 전할 뿐이니.
“이스키비르 하류는 블랑독의 일부이니 남의 일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아실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하며 아쥬흐를 바라본다.
“그래요. 당장 동맹 가문인, 가스텔 드 누아 백작님의 영토가 있는걸요. 비록 라솔 왕국 소속이지만, 우리 영지군에 지원해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쥬흐는 동생의 말에 긍정하면서도, 좀 더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뭐 예상했던 대답이다.
게다가 객관적으로 봐도, 트랑카벨 가문이 정순파를 비호하고 있는 이상 이미 당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실제로 이번에 폭사당한 기사단은 블랑독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던 무리이기도 하고.
···사실 트랑카벨 남매가 당연히 이런 대답을 할 거라 에상하기도 했다. 오히려 ‘우리랑 상관 없는 일 아닌가요?’ 라고 했으면 놀라서 할 말이 없었겠지.
자, 그러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사실 이번에는 선택지가 딱히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머리속에서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가능한 천천히, 하지만 간결하게 풀어서 말하기 시작한다.
“라몽 백작을 돕는다.”
다만 고민을 한다면, 그 방식의 문제가 되겠다.
전면적으로 군대를 파견해, 연합군의 일익이 되어 드 레뮤즈의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릴 것인가.
혹은 군사적인 면은 철저히 배제하고, 무기와 식량 등, 군수물자만 보내 간접적으로 도울 것인가.
물론 이 경우도 전선의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키비르 상류 부분이 자동으로 지켜지기 때문에 군사적 이득이 없는 것은 아니겟지만.
“라몽 백작님은 트랑카벨 가문을 좋아하시는 분은 아니시지요.”
듣고 있던 아쥬흐가 말한다.
“그건 블랑독에, 아니 전 엘랑키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게, 사적으로 공적으로 라몽 백작이 티를 내는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자기는 트랑카벨이 싫다, 블랑독에 개입하기도 싫다, 지옥에나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보통 어른, 그것도 위정자는 혐오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대단한 인간이다.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싫어하지?
조상 대대로 수백 년 동안 싸워 온 사이라고는 해도 최근에는 별 일은 없었잖은가.
그런데 아쥬흐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조금 의외였다.
“하지만, 솔직히 라몽 백작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아요. 험악한 이웃이었지만, 진정 험악한 짓을 하지는 않았거든요.”
설마, 아쥬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그녀의 말에 짐작이 가는 부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긴 하다.
나는 블랑독에 오래 머물지는 않아서,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니 최근 난리였던 정순파 토벌 성전과 관련해서만 생각해보자.
라몽 백작은 항상 트랑카벨 가문에 험악하게 굴어왔다.
하지만 명백하게도 중립을 지켜주었다.
국왕이 보낸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이 수 차례 권했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법황의 대리인, 추기경의 사절이 수도 없이 들락거렸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라몽 백작이 ‘위협적인 중립’을 지켜주었다는 것은, 엘랑키아 남부와 서부 가문들 중 상당수가 중립을 지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으니까. 아마 병력으로 따지면 최소 몇천 명은 될 잠재적 적군이 줄어들었다 봐도 되겠다.
지리적으로도 드 레뮤즈 영지와 접한 경계 지역은 어떤 면에서 안전 지대가 되었다. 물론 혹시 모르니 항상 경계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마 라몽 백작이 정말로 츤데레라서, ‘딱히 트랑카벨을 위해서 한 것은 아니다’고 하면서도 호의를 가졌을 것이라 믿지는 않는다.
아마 그게 자신에게 최선일 것으로 생각했기에, 나름 신념을 가지고 행동했으리라 추측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치적으로 위험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
결과적으로 블랑독 연맹군이 적군을 격퇴하고 승리해서 다행이지, 국왕군이나 법황군이 이겼어봐라. 드 레뮤즈 가문에 책임을 물겠다 나서도 이상하지 않을 걸.
솔직히 명백히 힘의 차이가 드러나는 강자와 약자가 싸우는데 중립 지키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강자 편에 줄 대면 콩고물을 거저 얻어 먹을 수도 있으니.
아니 뭐 그냥 귀찮거나 반골 기질이라 ‘남이 시키는 일은 죽어도 안 한다’라는 생각으로 그랬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다마는.
으음, 이리 생각하다 보니 괜히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상대의 이쁜 구석을 어거지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이거지. 자칫하면 아군 입장에선 양면 전선이 아니라 삼면 전선이 될 수도 있었고···.
그리고 내 입장에서는, 혼란통에 블랑독에 집적거리지 않았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땅덩어리 조금 떼 가고, 블랑독의 독립 영주들 복속시키려고 했으면 그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명목상 블랑독의 상위 군주니까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로 영토 욕심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라몽 백작에게, ‘동맹을 가장한 외국 군대’ 수천 명을 한꺼번에 불태워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상을 모욕이라도 했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비참하게 죽은 라솔 출신 기사들이 라몽 백작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분명하겠지.
그토록 미워하는 트랑카벨 가문도 직접적으로 해코지 한 적은 없는 사람인데.
“그래서··· 방식은 잘 모르겠지만,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은 드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만약에 라몽 백작님이 패배한다면··· 다음은 우리가 될 것도 같고요.”
아쥬흐가 자기 말을 마친다. 아실도 동의한다. 그렇지, 이 지경이 됐는데, 블랑독과 트랑카벨을 그냥 둘 리가 없겠지.
“제가 드리고 싶은 조언은 이렇습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블랑독의 정세는 복잡기괴해서 한 치 미래도 알기가 힘들구나.
“트랑카벨 가문과, 블랑독 연맹의 힘을 가능한 비싸게 팔아먹어야겠지요.”
‘팔아먹는다’ 라는 적나라한 표현에, 아쥬흐와 아실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진다.
“물론 비싸다는 게, 단순히 돈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형의 금화와 영토 외에도 각종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니까요.”
나는 용병이니까, 당연한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트랑카벨 가문에는 어떨까?
그들은 나와 달리, 전쟁을 대신 해주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훨씬 그럴듯하고 정당한 장사를 통해 돈을 충분히 벌고 있지.
외국의 전쟁에 참여하면, 목숨을 잃는 것은 블랑독의 청년들이다. 내가 훈련시키고, 트랑카벨이 돈을 내서 키운, 내 새끼들이나 다름 없는 병사들.
명백하게, 절대로, 분명히, 의심의 여지 없이.
그리고 무조건!
그들의 값진 희생으로 벌어오는 것이 금화 몇 푼에 그쳐서는 안 된다. 몇몇 통치자들의 이득이 국한되어서도 안된다. 내 고용주, 트랑카벨 가문의 이득도 중요하지만, 병사들의 목숨을 팔아 가문의 안녕만을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진작에 때려치우고 도망쳤다.
내 소중한 병사들이 기꺼이 피를 흘렸다. 사오는 것은 미래와 평화가 아니면 곤란하다. 그들이 핏값이 올려진 천칭 반대편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올라와야만 한다.
라몽 백작, 협상을 시작해보지.
아직 연락은 안 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