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회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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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시 막사에 앉아 마지막으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 막사로 내일이면 철거되어 이동하게 되겠지.
유능한 부관 첼레스티나에 의해 한 번 정리하고 걸러저 올라온 서류들이건만, 분량은 상당하다.
마르사코르 언덕 전투의 전장 정리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마무리 작업이 종료되었다.
아군 사상자는 전투가 격렬했던 점을 고려하면 다행히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천 명이 훌쩍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특히 적의 반격 공세를 정면으로 받아냈던 제11 벨모제 연대, 제16 몽세나 연대의 피해는 막대했다.
공세를 늦추지 않기 위해서, 가장 어려운 전장에서 싸웠던 이들이 곧바로 이어지는 반격 작전의 선봉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사상자가 많이 나온 이들을 부대 재건을 위해 후방으로 돌리고, 교대하여 후방 방어를 맡고 있던 제18, 제19 연대를 야전군으로 돌리기로 한다.
그 와중에, 제16 연대장 아리위스 드랭쿠가 전사했다. 연대장 뿐 아 니라, 우리 트랑카벨 영지군을 통틀어 최고령 군인이었다.
병사들이 빽빽하게 대열을 이루고, 뿌연 화약 연기가 가득해서 시야가 좋지 않은 전장에서 천 명이 넘는 부하들을 책임지는 게 연대장이다.
필연적으로 아군과 적을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전장에서 내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적은 대체로 나를 죽일 수 있다.
그래서 지휘관급 사상자가 많이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오히려, 용맹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일수록 적의 총화에 노출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리위스 연대장은··· 이런 상황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군인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트랑카벨 영지군의 약점을 하나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고급 지휘관급 인재와 참모 장교급 인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트랑카벨 영지군의 장교들은 아주 훌륭하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잘 교육받고, 용맹하며 책임감까지 강하니까.
심지어 병사들과 같은 지역 출신이라 유대까지 강하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도 부족해서 그들의 강점을 충분히 살려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지휘부의 책임이다.
전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술적 식견을 가지며, 전투의 승패를 가를 수 있을 정도의 전술단위인 연대급 부대를 이끄는 것.
직접 부대를 이끌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부대가 완벽하게 동작할 수 있도록 모든 업무를 조율하는 것.
각각 상급 지휘관과 참모의 역할이다.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때로는 하늘이 내린 재능으로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대부분은 전장에서 경험을 통해 익히게 된다.
시간과 여건이 되면 교육을 통해 실전 경험도 있는 트랑카벨 장교들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겠지만···. 의지는 있어도 시간이 없구나.
한숨이 나오는 일이다. 그래도 단기간에 이렇게 대규모의 군대를 형성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만든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실제로 제16 연대장 아리위스가 적탄에 맞아 사망한 후, 외부에서 보면 티가 확 날 정도로 제16 연대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탄탄한 포위망을 유지해야 하는 와중, 중대간 손발이 맞지 않았고 이는 적에 대한 압박이 약해지는 결과가 나왔다.
아주 작은 차이일 수 있었지만··· 이는 적이 전면적인 붕괴를 피하고 부대를 수습해 언덕 위까지 퇴각하는 데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물론 이게 제16 연대의 책임은 아니지···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워 주었고, 전투는 대승으로 끝났으니까.
언덕 비탈에서 8천 명이 넘는 적이 쓰러졌다. 극심한 포격전이 계속됐기 때문에··· 시체가 멀쩡하지 않은 적이 많아 정확한 전과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체가 겹겹이 쌓여 발이 미끄러져 진격이 힘들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대부분의 적은 언덕 중턱에서 끝장났다고 해야하겠다.
그리고 불에 탄 숲 부근에서, 또 그 안쪽에서 또한 수천 구의 시체가 나왔다.
마찬가지로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새카맣게 타서 완전히 숯이 되어버린 시체는 나무 둥치와 언듯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이걸 하나하나 구분해서 숫자를 세는 것도 고문이나 다름 없고.
불이 잦아든 곳을 찾아 빠져 나가던 적이 두번째 화염에 당한 경우도 많았다. 나무의 키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불이 타오르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그래도 기어코 빠져나간 적은 있다고 한다.
이걸 로베르 드 나뵈프 경이 이끄는 정찰 연대가, 사흘에 걸쳐 집요하게 추격해 8백 명 정도를 또 잡아 죽였다.
전과를 대략 추산하자면···.
언덕에서 실제 교전에 의한 사망 : 약 8000
숲 안팎에서 불에 의해 사망 : 약 3000~4000 추산
이후 추 격전에서 사망 : 830명, 더 늘어날 예정
포로 : 1262명(대부분은 우익에서 항복한 용병 연대)
전략, 전술적으로도 그렇지만 물리적으로도 전멸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내가 도망치는 쪽이었다면, 이렇게 끔찍하게 갈려 나간 다음에 절대로 다시 돌아오진 못하겠지.
힘들었지만, 완승이다.
“휴우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내가 한 일이지만, 이건 광기다.
전술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적을 격퇴하기 위한 전투가 아니라, 최후의 한 명까지 죽이고자 하는 살륙전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최소한 종교가 이유가 아닌, 국왕군과의 싸움에서는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다.
적군은 아군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도 않는다.
아군은 적군의 잔학행위를 눈으로 확인해, 적을 살려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알량한 도덕주의가 개입할 구석이 없다.
통치규범이나 도덕규범이 되는 종교의 순기능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 규범이 되는 이치가 광기를 띄게 되는 순간, 이 꼴이 나는 것이다.
법황인지 뭔지 하는 윗대가리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이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를 보여주고 이게 너희가 원하던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나중에 주디칼리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법황청 쪽은 쳐다보기도 싫을 것 같다.
그래도 이걸로 본격적인 전쟁은 일단락이 났다고 해도···.
“콘도티에레!”
내 감상 깊었던 시간은 첼레스티나의 외침으로 끝났다.
첼레스티나는 대체로 텐션이 높은 편이고, 평소에도 긍정적인 호들갑을 떠는 부관이긴 하다. 그래도 그 높은 외침 사이에서도 유난히 ‘특별’한 톤이 있다.
대체로 ‘진짜’ 급한 일일 때 그렇다.
“아쥬흐 양이 바로 와달라고 하셨어요! 가스텔 드 누아 백작님이 전령을 보내셨다고 해요.”
“전령? 무슨 내용이래?”
“네에,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이 드디어 배신했다고 해요!”
“배신? 라몽 백작이! 그··· 원래 우리 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배신을?”
아니 설마, 그래도 엘랑키아의 대귀족이 국왕을 배신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진 않았겠지만. 누가 누굴 배신한거지?
“전쟁 준비한다고 친하게 지내던 라솔 기사단을 배신했다네요!”
“라솔!”
듣기만 해도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서둘러 첼레스티나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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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참, 한 번 귀뜸 정도는 해주었으면 좋지 않았겠나.”
“...죄송하긴 하네요. 하지만 누가 서로 전쟁 중인 와중에 속내를 다 내보인다나요?”
전쟁 준비로 여념이 없는 라몽 백작의 집무실에서, 오랜만에 라몽 드 레뮤즈 백작과 이웃인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이 마주앉아 있었다.
“아이고, 그놈의 전쟁. 그거 이미 끝났네!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 양반이 이번에는 아주 전멸을 시켜 버렸다 이 말이네!”
드 누아 가문은 블랑독 연맹군에 수천 명의 영지군을 파견한 중요한 구성원이다.
당연히 주도권은 트랑카벨 가문에 있지만, 연맹의 최고 어른으로서 모두가 인정하는 가스텔 백작이다. 그러니 연맹군의 승리에 조금쯤 거드럭대도 괜찮을 것이다.
“그놈의 전쟁 소식, 그만 좀 들었으면 좋겠네요. 이건 뭐 듣기 싫어도 보는 사람마다 이야기를 하니, 하여간 트랑카벨은 제 삶에 도움이 되는 게 없어요.”
라몽 백작은 정말로 기분이 나쁜지, 얼굴을 찌푸리며 답답한지 물을 한 잔 들이킨다.
“그나저나, ‘그 라몽 백작님’이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구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고?”
“뭘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 선대 백작께서 하시던 일을 저도 할 때가 되었을 뿐이지요. 무엇을 위해서 군대를 기르고, 이웃 영주들과 잘 지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하하핫, 자네는 정말로 그랬겠군. 그렇네, 이럴 때 써먹을 게 아니라면 꼴도 보기 싫은 귀족 나부랭이들 따위는 전혀 돕고 싶지 않았겠구만!”
“...그렇기는 한데 말씀하시는 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요.”
드 레뮤즈와 드 누아. 엘랑키아 남쪽 변경의 두 백작가는 수백년 간, 조상 대대로 친하게 지내온 가문이다.
특히 최근 힘들었던 시기에, 서로 다른 길을 갈 지언정 두 가문의 유대가 무너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때문에, 가문의 주인인 두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라면, 혹은 다른 장소에서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이야기도 거리낌없이 나누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있는가? 상대는 열 받아서 쳐들어 올 라솔의 대군인데.”
“...오히려 그래 주면 좋겠습니다. 충분히 준비해서 생각보다 많은 병력으로 쳐들어 오면 레뮤즈의 힘으로 감당이 안될 수도 있으니까요.”
“흐으음··· 그렇구만.”
가스텔은 오랜 친구인 선대 드 레뮤즈 백작의 아들인 라몽을 찬찬히 보면서, 그가 확실히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라몽은 빈말로도 성격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다. 오히려 매우 안좋은 편에 속했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기까지 하니까.
그러나 감정을 드러내긴 하지만, 감정에 치우쳐 정말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다소 평균적인 인간과 달라 보이는 기준으로 행동한다는 생각은 계속 들지만, 적어도 일관된 기준으로 행동하는 사람인 것이다!
“드 레뮤즈의 오랜 동맹인 드 누아 가문으로서, 최대한 돕지 않을 수 없겠네. 이스키비르 이쪽 편의 문제는 어느 한 쪽의 문제일 수 없으니.”
“...이미 전력을 다 해서 전쟁 중인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셔도 되겠나요.”
“하핫! 아까 말하지 않았나? 이미 전쟁은 끝났다고 했지 않은가.”
“하아···.”
라몽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절대로 하기 싫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앞둔 꼬마와 같은 태도이다··· 라고 가스텔은 생각했다.
“라솔과의 전쟁이 쉬운 일은 아닐 테니, 도와준신다고 하면 감사히 받긴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네한테 감사하다는 말은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구만.”
“으으음··· 그 말씀은, 제가 감사할 줄 도 모르는 인간이라 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오오, 그건 절대 아니네.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휴.. 이러니까 전쟁 따위는 최대한 하기 싫었습니다만.”
찡그린 얼굴로 이를 드러낸다. 사설이 많은 이유는 싫은 일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로 잡으면 좋겠는가?”
“무얼 말씀이십니까?”
“블랑독 연맹과의 회담 자리 말일세.”
“그건 싫습니다만.”
“싫었으면 라솔 놈들을 5천 명이나 태워 죽이질 말았어야지.”
“크윽···.”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지만, 어쩔 방도가 없다는 것은 그 자신도 알고 있다.
“라몽 백작님. 나도 이번에 전쟁을 해보고 알았지만, 전쟁은 단순히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네. 얼마나 적은 피해로 이기느냐도 중요한 법이야.”
“...그건 저도 압니다.”
“설령 라솔 놈들이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그들의 시체로 산을 쌓은 들 뭐하겠는가. 그 과정에서 드 레뮤즈가 파괴당하고, 영민들이 사망하면 그걸 승리라 할 수 있겠나?”
“....”
“같은 미운 놈이지만, 도와주는 미운 놈도 있는 법일세.”
싫다. 정말 싫지만.
할 수 밖에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날짜를 정해서 말씀해주시지요.”
모기소리만한 말이었지만,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은 똑똑하게 들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잘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