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44화 (244/556)

29-8. 타버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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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끈질긴 새끼들!”

“그냥 뒈져 좀!”

“끄아아아악!”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오렌시아 기사단장 에드메르를 사살한 그 때.

만찬장 밖, 오렌시아 기사단의 주둔지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라몽 백작이 심복들을 이용해 세심하게 준비한 함정은 실로 대단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한 작전이었다.

우선 드 레뮤즈 영지에서 블랑독으로 향하는 요충지를 확인한다. 근처에는 만찬장이 있을 드 레뮤즈 소속의 마을이나 요새가 있으면 좋았다.

평소 인적이 뜸한 이 장소에, 전문 광부들을 파견해 함정을 설치한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작업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대로 작업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 함정의 구조는 지하에서 교차하는 십자 형태가 되었다.

화약을 설치한다. 다행히도 드 레뮤즈에는 샹다메리 전투에서 국왕군의 성전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덤핑된 화약을 싸게 구입해 쌓아둔 것이 있었다.

중앙에서 먼 쪽에서부터 폭발하고, 한 가운데의 폭발력이 가장 높아지도록 했다. 반대로 할 경우 폭발력 때문에 외부에 설치된 화약이 날아가거나 도화선이 끊겨버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서리 부분의 화약은 지하 통로를 바치는 버팀 기둥을 무너뜨릴 정도로, 중앙부는 위에 있는 것들을 거대한 흙더미와 함께 날려 버릴 정도로 조절되었다.

마지막으로, ‘동맹군을 환영’하는 용도로 사용될 대량의 고급 천막들이 동원되었다.

이 천막들은 실로 고급이었기에, ‘기름을 먹인 천’을 겹쳐 만들어져 방수력이 좋았다. 불에는 약할 수 밖에 없었지만.

기름 냄새가 심하게 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으나 완벽하게 가릴 수는 없었다. 때문에 숯불과 대량의 고기를 준비했다. 덤으로 술 역시.

십자 모양의 대로를 만들고 주변에 촘촘하게 막사들을 배치한다.

대로 위에 음식을 배치해 자연스럽게 그 위로 모이도록 했다.

보안이 중요한 데다, 시간이 부족했기에 이 모든 작업은 따로, 라몽 백작의 측근 중의 측근과 백작가 직속 인력들의 손으로 차근차근 완성되었다.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나, 라몽 백작의 지갑이 아낌 없이 열렸음은 물론이다.

그 사이, 백작과 그 충실한 가신들은 유형 무형의 이유를 만들어 출정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래도 겨우 열흘 정도밖에 시간을 끌지 못했고, 오렌시아 기사단이 의심하지 못하도록 적절하게 당근과 채찍을 사용했다.

이 모든 준비의 감독이자 주연인 라몽 백작은 실로 열심히 연기하였다 생각했으나, 주변에서 보기에는 그냥 평소의 까칠한 주군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의 순간, 치밀한 준비를 했으나 점화가 잘 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는 있었다.

하지만 신이 지켜보았는지, 혹은 지켜보지 않았기 때문인지, 계획대로 완벽하게 점화되었다.

연이어지는 폭발에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가장자리 쪽은 지하의 버팀 기둥이 쓰러지자 땅이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 깊이는 2미터가 넘었다.

마침내 한 가운데 불이 이르렀을 때, 엄청난 양의 화약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가장 많은 라솔 병사들이 모여있었던 지름 30미터 정도의 공간이 10미터 이상 치솟아 올랐고 아무도 멀쩡히 지상에 내리지 못했다.

가장 깊은 곳은 5미터가 넘는 구덩이가 파였다. 게다가 그 안쪽은 끝없이 불과 연기가 치솟는 생지옥이었다.

당연히 함정을 파 둔 곳만 무너진 것은 아니다. 당연히 폭발로 생긴 진동이 주변의 지반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토사가 쏟아져 깔때기 꼴로 구멍들이 숭숭 파인다.

그 상당수는 인간이 자력으로 나오기 쉽지 않을 정도의 깊고 가팔랐다.

수많은 인간이 직접, 간접적으로 폭발에 휘말렸다. 폭발이, 화염이, 튀어오르는 자갈더미가, 갑자기 갈라지고 꺼지는 땅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준비된 대규모의 함정이라고 해도 한계는 있었다. 수천 명의 인간을 한꺼번에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이 시점에서는 아직 생존자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역시 마지막에는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가 없다.

폭발이 끝나고 30초도 지나기 전에, 사방에서 이미 이 상황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던 드 레뮤즈 가문의 영지군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망토에 불이 붙은 오렌시아 기사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온다. 얼굴의 절반이 심하게 불에 타 시뻘건 속피부가 들여다 보인다.

허벅지는 창에 찔린 건지, 총에 맞은 건지. 피가 철철 흐르며 다리를 절고 있었다.

“으으··· 사, 살려줘!”

“저리 가 이 새끼야!”

이미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은 기사는 그대로 드 레뮤즈 군 방향으로 다가온다.

긴장한 창병들이 창 끝으로 밀자 뒤로 벌렁 넘어진다. 쉬는 동안이었다고는 하나,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몇몇 근접 요원들이 앞으로 나가 중상자들의 약점에 무기를 꽂는다. 진물이 질질 흐르던 얼굴이 힘없이 옆으로 떨어진다.

드 레뮤즈의 가지런한 창벽이 차츰차츰 포위망을 좁혀온다.

무기는 커녕 정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라솔 병사들은 마치 덫에 갇힌 야생 동물들 처럼 절망적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러나 퇴로는 없다. 절망에 빠진 그들은 때로는 창벽에 뛰어들거나, 때로는 목숨을 구걸한다.

전자는 전혀 소용이 없다. 완전 무장을 했더라도 개인이 이미 준비된 방어선을 돌파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창병이든 총병이든.

후자는 약간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기도 했다.

왜냐하면, 꽤 오랫동안 평화로웠던 드 레뮤즈의 병사들은 살인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 살려줘! 제발 살려줘!”

“우린 아무 짓도 안했다고!”

역시 여기저기 화상을 입은 용병 둘이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자비를 애원한다.

그 모습을 보며, 굳은 마음을 먹고 무기를 들고 나선 드 레뮤즈의 중장병들은 쉽게 무기를 내밀지 못한다.

그들 대부분은 엘랑키아의 귀족과 기사 계급이다. 어릴 때부터 검과 창 등 무기를 다루는 교육을 받았고, 이번 소집에 앞서 군사 훈련도 받은 인재들이다.

어느 전장에 나가도 한 사람 몫을 분명 할 사람이다. 그러나 저항도 하지 않는 패잔병을 인정사정없이 숨통을 끊는 것은 다른 종류의 숙련도가 필요했다.

“주, 죽기 싫은 놈들이 엘랑키아를 침공했냐!”

죽여야 할 상대의 대화를 받아줬다는 시점에서, 숨통을 끊는 일은 배는 어려워졌다. 살인에 익숙한 학살자들이 조롱을 위해 말을 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이고! 우린 그냥 용병입니다요! 높은 분들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갈 뿐이지, 돈에 팔린 불쌍한 놈들입니다요!”

왠지 살 구석이 생겼다 느낀 용병들이 더더욱 비참하게 구걸을 시작한다.

압도적 우위, 그저 무기를 내리치거나, 힘 줘서 찌르기만 하면 상대의 목숨을 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걸 못한다.

“멍청이들!”

“크헉!”

“흐이익! 흐이이익!”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망설이던 중장병들을 밀치고 무기를 내민다. 엎드린 상대의 경추를 내리 찍어 끊는다.

나머지 하나는 공포에 질려 뒤돌아 달아난다. 그러다 운 없게도 누군가의 총알에 맞았는지 그대로 픽 쓰러진다.

“라솔 놈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말라는 말을 듣지 못했나!”

“죄, 죄송합니다, 소베트르 경···.”

화를 내며 젊은 중장병들을 나무라는 것은 영지군의 기병대장, 소베트르 드 랑두제였다.

“기억해 둬라. 저 자들은, 어린애를 줄에 걸어서는 불로 구워 죽인 개자식들이다!”

“예, 옙!”

“명예를 걸고 승부를 나누는 적이 아니다! 명심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소베트르는 혀를 차며 병사들을 보낸다.

그러나 그는 안간힘을 쓰며 떨리는 몸을 누르고 있다. 큰소리를 쳤지만, 목숨을 구걸하는 적을 쓰러뜨리는 것은 그에게도 처음이었다.

평범하게 포로를 잡고, 전과로 삼는 싸움이라면 상관이 없었겠지.

그러나, 이번 포위에서 적은 한명도 살려두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다. 좋든 싫든,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을 섬기는 가신으로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화염과 연기를 피해 도망치는 적들을, 바로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동맹군’이었던 병사들이 추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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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배신했다’

라는 내용의 속보는 엄청난 속도로 엘랑키아 왕실에 전해졌다.

왕성 베르마유에 전해진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것은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 크게 놀란 것은 당연했다.

시간은 새벽이었지만, 뮈르텔은 지체없이 사람을 보내 국왕 다고베르 2세를 깨웠다.

“아니 배신이라니? 누가, 어느 쪽을 배신했다는 말인가요?”

난데없이 자다가 불려나온 다고베르 2세가 말한 첫 마디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라몽 드 레뮤즈 백작에게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폐하, 라몽 백작이 다소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엘랑키아의 신하입니다. 설마 엘랑키아를 배신하고 라솔 쪽에 붙었겠습니까?”

“하지만, 뮈르텔 재상도 아주 약간은 의심하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저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시는 것을 보니,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시기는 하셨군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두 엘랑키아의 최고 권력자들의 평가는 다소 애매했다. 라몽의 평소 행태를 살피자면 그런 평가를 받아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야 어떻든, 라몽 백작은 ‘충실한 엘랑키아의 신하’였다.

“...보고서를 보니 이 복지부동의 백작 각하가 라솔의 뒤통수를 멋지게 후려쳤군요. 항상 자기 보신만 생각하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이런 강단 있는 인간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좀 더 ‘객관적’이고 널리 알려진 특성에 대한 평가가 분명했다. 라몽 백작을 아는 사람들 중 절대다수는 이렇게 생각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재상께서는 생각보다 화를 내지는 않으시는군요.”

“제가 왜 화를 내겠습니까?”

“이건 사실상 라솔과의 전쟁 도발 아닌가요.”

“후우우···.”

왕국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뮈르텔의 표정이 확 구겨진다. 하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는다.

“어차피 해야 할 전쟁이라면··· 그래도 이게 그나마 나은 전쟁의 시작이겠지요.”

항상 국왕 다고베르 2세의 확장정책, 즉 전쟁에 반대하던 뮈르텔 재상으로서는 뜻밖의 이야기를 한다.

그의 말은 모순이면서도 모순이 아니다. 왕국의 흑자 재정을 위해서 평생을 분골쇄신해온 그에게, 그나마 나은 전쟁이라 함은 ‘돈이 덜 드는’ 전쟁이리라.

결국 모든 일에는 돈이 문제이다. 엄밀히 따지면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도 돈 때문이다. 아예 전쟁을 안 하면 모를까, 한 이상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겨야 점령지도 얻고, 배상금도 받고, 포로 석방금도 받지 않겠는가. 기왕 써버린 돈은 빠르게 채워야 하니까.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전쟁 도발 역시, 뮈르텔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본인이 이런 사건을 저지른 이상, 라몽 백작은 앞장서서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지요. 게다가, 그에게 은혜를 느끼고 있는 주변 귀족들 역시 참전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폐하. 이들은 북방 전쟁은 물론, 블랑독 이단 토벌전을 포함한 왕실의 전쟁에 참여한 적 없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아··· 알 것 같군요.”

블랑독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닐지라도, 대체로 엘랑키아 북부와 남부의 문화는 상당히 다른 편이다.

때문에 왕성 베르마유가 있는 북부와 남부는 손발이 잘 안 맞는 경우가 있었다.

“심지어 드 레뮤즈 백작가는 오랫동안 외부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힘을 비축했습니다. 대체 얼마나 강하고 부유한 가문인지 알 수조차 없습니다. 그들이 전력을 기울여 라솔과의 전쟁 최선봉에 서는 것입니다.”

“하긴 아무리 불러도 군자금을 보내면 보냈지 보병 한 명 안 보내던 가문들이니.”

“그간 라몽에게 은혜를 받았던 귀족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들에게는 만약에 드 레뮤즈가 라솔에 무너지면 자신들의 영토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요.”

재상의 의도를 이해한 국왕 역시 흥미진진한 듯, 미소를 짓는다.

“게다가··· 지금 한창 주가가 오른 블랑독의 트랑카벨 가문 역시 참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양반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하지 않았나요? 그건 예상대로 잘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꼭 그렇게 되도록 해야지요. 종교적인 문제도 그렇고, 명목상 상위 군주라는 점도 그렇고, 마냥 서로 방치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곳이라 엮일 일은 얼마든지 있고 말입니다.”

“...엘랑키아 왕국의 골칫덩이들이 엘랑키아 왕국의 방패가 되었군요.”

정말 그렇게 된다면, 작년부터 끊임 없이 뮈르텔 재상의 골머리를 앓게 하던 문제 여러가지가 한꺼번에 해결이 될 것이다.

물론 이웃이자 라이벌 국가인 라솔과의 전쟁 문제가 생기지만··· 이는 훨씬 해결하기 쉬운 문제이리라.

“두 가문을 응원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돈이 최대한 안 드는 방법으로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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