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타버린 후
폭음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폭발하는 소리에 이어서,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까지도 들린다.
꽈과광!
콰앙! 콰과과광!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떠들썩하던 만찬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갑작스러운 폭음과 진동은 엄청난 혼란을 불러왔다. 조금 전까지 고기를 씹고 술을 들이키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여전히 취한 상태로 횡설수설하며 공포에 질려있는가 하면, 정신을 차려서는 부관을 불러 뭔가를 지시하는 자들도 보인다. 어찌됐건, 수 많은 영주들이 제각각 살 길을 찾는 장면은 대단히 추하고 시끄러웠다.
"이, 이건 무슨!"
오렌시아 기사단장 에드메르는 기절할 듯 놀랐다. 만찬장의 창 밖으로, 정확히는 요새의 외곽을 둘러싼 성벽 너머로 거대한 화염이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옥이다! 지옥이야!"
"세상에 주신이시여 저희를 보호하소서...."
너무 멀고 폭발이 거대해서 잠시 원근감이 망가졌었다.
피어오르는 화염 주변에서 작은 천조각처럼 펄럭거리는 것은 찢겨나간 병영의 막사 조각이었다.
그 주변에서 먼지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것은 다름아닌 병사들, 자신의 부하들인 오렌시아의 기사들과 타라트라바 용병들이었다!
에드메르는 서둘러 만찬이 진행되고 있던 장소, 석조 요새의 꼭대기에서 성벽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세상에...."
그의 부하들이 머물고 있던 장소에는 십자가 형태로 거대한 불구덩이가 생겨있다. 대체 무엇을 재료로 타오르고 있는 것인지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
순간, 부하들 사이에서 반신반의한 소문 정도로 퍼져있던 소문이 생각났다. 바로 트랑카벨 가문의 마녀가 제물을 바쳐 지옥에서 불을 다루는 악마를 소환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시덥지않은 헛소문이다. 때때로 무력한 이단자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내기도 하는 소문이었다. 대개의 경우, 그런 이단자들은 자기 몸을 태우는 화염에서조차 자기 몸을 지키지 못하다 잿더미가 되곤 했다.
그래서 신경쓰지 않는다. 소문을 통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종류의 헛소문은 막으려 하면 할수록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법이니까.
그런 에드메르조차도 당황하여 마녀와 지옥에서 온 악마에 대한 소문을 믿어버릴 뻔 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도망다니는 병사들.
하나도 남김없이 불길에 휩싸인 병영의 수많은 막사들.
그 한가운데, 십자가 형태로 파인 거대한 구덩이와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과 연기.
무엇하나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는 왕족이며 성직자이며 군인이었다. 신념을 위해 의무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런 형태는 아니다.
폭발로 인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가 사방으로 흩어져 떨어지는 부하 병사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생판 모르는 남들이 그런 일을 당한다고 해도 도저히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현실을 부정했을 것이란 말이다.
하물며 지금 비명을 지르며 산산조각나고 있는 존재들은 다름 아닌 그의 부하들이다. 목숨처럼 귀한 오렌시아의 기사들과, 사위인 타라트라바의 군주가 보내준 용병들.
"라몽 백작! 도대체 무슨 일이...."
퍽.
둔한 충격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복부에서 느껴진다.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서 힘이 빠져 허리가 낮춰진다. 찌르는 통증은 이제 뜨거움이 되어 아랫배로 퍼져나간다.
"화약 무기가 좋긴 하군. 나 같은 반편이도 백전노장의 기사를 쓰러뜨릴 수가 있으니."
라몽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전부터, 에드메르는 눈으로 받아들인 정보와 귀로 받아들인 정보를 믿을 수가 없었다.
라몽 백작은 입술을 묘하게 일그러뜨린 표정으로 이죽거리듯 말했다. 그의 손에는, 이미 발사가 끝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권총이 들려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에드메르의 아랫배에 퍼져가는 통증의 원인이겠지.
"백작님께서는 결코 반편이가 아니십니다."
옆에 선 집사, 에드메르 역시 얼굴을 익힌 드레피니가 공손히 권총을 받아들고는, 새로운 권총을 주군에게 넘겨준다. 아마도 장전이 된 새로운 권총이겠지.
새 권총을 받아 든 라몽은 무심한 눈으로 흠집하나 없이 잘 손질 된 총열을 바라보며 격철을 누른다.
명백한 발사의 의지 표현.
아마도 목표는 에드메르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겠지.
"이게 무슨 짓이지, 라몽 드 레뮤즈 백작? 배신인가?"
가급적 통증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에드메르가 말한다.
"배신? 배신은 아니오. 처음부터 이렇게 하려 했으니...."
"빵과 소금의 맹약은...."
흔들리기 시작한 에드메르의 눈동자가 백작의 곁에 선 집사, 드레피니의 얼굴을 향한다.
부하들을 이끌고 이스키비르 강을 건넜을 때, 분명 드레피니가 라몽 백작의 선물이라며 상자를 건넸었다.
주인으로서 손님을 환영하며, 그 안전을 보장한다는 고대의 예법.
하지만 라몽 백작은 별다른 감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런 아란 제국 시절에나 통하던 고래의 구닥다리 예법 따위 누가 신경쓴단 말이오. 그리고 애초에 그건 주인과 손님의 예법, 쥐새끼와 같은 침입자를 위한 건 아니지."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에드메르는 그동안 항상 보았던 라몽 백작의 일그러진 표정이 예상과 달리 혐오의 표정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진정한 혐오와 경멸의 표정은 지금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 자는 정말로 자신을 혐오스러운 쥐새끼로밖에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불쾌할 정도의 혐오스러운 표정이다.
"크흑... 쿨럭! 귀족의 명예와 이치는...."
찐득거리는 비릿한 피가 목구멍 너머에서 올라왔다. 에드메르는 비틀거리다 한쪽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상체를 지탱한다.
상처에서 나온 끈적거리는 피가 후두둑 소리와 함께 만찬장 바닥에 뿌려진다.
"귀족의 명예와 이치 말이오? 뭐, 그런게 있기는 하겠지. 백성들은 평생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하고, 그렇게 벌어들인 수확물을 귀족에게 세금으로 바치지. 그리고 귀족들은 거둬들인 세금을 쓰레기 같은 일에 낭비한다. 이게 세상의 이치요."
라몽 백작의 목소리에서는 지독한 혐오가 느껴진다. 에드메르에 대한 혐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무엇보다도, 세상 전체에 대한 혐오가.
"어처구니 없는 이치지만, 굳이 고치려드는 자도 없는 이치요. 하지만 그런 어처구니 없는 세상이더라도, 허리 부러지도록 일하는 백성들이 작은 권리 정도는 가져도 좋겠지."
부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울린다. 천천히 라몽의 총구가 에드메르의 경악한 얼굴을 향한다.
"최소한 자기 집에서 불에 타 죽지는 않을 권리 말이지. 너희 오렌시안지 뭔지의 고결하신 기사님들은 그걸 어겼어. 그러니, 나는 이제 영주의 일을 하려 한다."
"궤, 궤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크흑, 라몽 백작!"
"그래 궤변이지. 하지만 내 거다. 백성들의 목숨도, 부러지기 직전의 허리도, 알량한 권리도 전부 영주인 내 거란 말이다! 오로지 나만이 그들을 다스리고, 착취하고, 목숨을 끊을 수 있다! 염병할 라솔 놈들이나 고결하신 기사님들이 아니라 오직 나만이!"
순간 라몽 백작이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마치 지금까지의 말은 전부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듯, 이것이 내가 속마음이다! 라는 웅변.
속마음을 뱉어내고도 참기 힘들었는지, 튀어나온 배가 가쁜 숨으로 오르락내린다.
"이런 망동을... 라솔의 국왕 폐하께서 그냥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는가...."
"넘어가지 않으려 하겠지."
"라솔의... 대군이 레뮤즈 성을, 엘랑키아를 불태워 복수할 것이다!"
"뭐, 어차피 그러려던 것 아니었나? 길어야 5년? 10년? 어쩌면 1년이나 2년 내로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지."
진실은 그러하다. 때문에 에드메르는 말문이 막혔다. 이르든 늦든, 결국은 그렇게 하려던 것이 진실이었으니까.
"그리 원한다면, 와서 불태워보라 전하든가."
백작의 살집이 좋은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긴다.
탕! 폭음과 함께, 붉은 화염과 하얀 연기를 뿜어낸 총구가 허공을 향해 튀어 오른다.
에드메르의 이마와 뒤통수에서 거의 동시에 피가 튀어 오른다.
수십년 동안, 라솔과 교단의 이름으로 싸워온 기사의 상체가 풀썩 쓰러진다.
"이쪽도 끝났습니다."
에드메르 기사단장의 숨통이 끊어지자, 비슷한 복장을 한 오렌시아의 기사 시체 네 구가 옆에 더해진다.
피투성이가 된 그들은 기사단장을 호위해서 왔던 호위 기사들이다. 이들을 처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는지, 시체들을 끌고 온 병사들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수고했네, 세샤르 경.”
“강한 놈들이었지만, 다행히 피해 없이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건장한 남자는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이다.
“그나저나 드디어 저질러버렸구만.”
“계획대로 침착하게 잘 하셨습니다.”
“어차피 이리 되었을 것, 레도쿠르의 장남에게는 못 할 짓을 했소이다.”
“아들 녀석은 강직한 놈이지만,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녀석이라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합니다.”
“잘 위로해 주시오, 자작님.”
“어리석은 아들놈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리 된 것을 알면 금방 신나서 달려올 것입니다.”
세샤르 자작은 묵묵히 아들을 평가한다. 언젠가, 오렌시아 기사단과 협력하여 트랑카벨을 친다는 결정을 듣고 찾아와서는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리 되었을 것’이란 사실은 라몽 백작과 극소수의 측근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다.
실제로 지금 만찬장에 있던 여러 귀족들의 대부분 역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여러분, 잠시 소란이 있었소이다. 만찬을 계속해서 즐겨주시오··· 라 말하고는 싶지만, 눈치가 없는 나라도 그러기 힘든 분위기라는 것은 알겠군.”
라몽 백작 딴에는 농담이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반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만찬장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요새 벽 아래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총성과 비명소리가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미리 이야기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하오. 하지만 그러지 못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니 너그러이 생각해주시오.”
상관하지 않고, 라몽의 말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소이다. 이 비열한 라솔 국왕의 개들은, 우리 엘랑키아 왕국의 국경을 침탈했소. 그리고 무고한 국왕 폐하의 백성들을 참혹하게 살해했소.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이단으로 몰아 불에 태워 죽였다 이 말이오!”
그 말에, 영주들의 분위기가 술렁인다. 거의 대부분 알지 못하던 일이다. 라몽 백작이 함구령을 내렸었기 때문이다.
이를 현재 고인이 된 에드메르 기사단장은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판단’이라고 좋을 대로 해석했었지만 말이다.
“내부의 이단을 척결한다, 물론 매우 중요한 일이오. 귀경들 역시 이를 위해 우리 가문의 소집령에 응한 것으로 알고 있소.”
라몽의 팔이 성벽 쪽, 여전히 화염이 피어 오르며 비명이 이어지는 방향을 향한다.
“하지만 보시오! 지금 성벽 아래에서 불타고 있는 자들은 라솔의 개자식들이오! 이단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엘랑키아의 땅, 우리의 땅을 넘보려던 자들이란 말이오!”
영주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성벽으로 몰려가 학살의 현장을 구경한다. 불구덩이를 둘러싼 레뮤즈 병사들의 모습을.
“이제, 드 레뮤즈 백작가의 적은 엘랑키아 국내의 이단이 아니라, 라솔 왕국의 음모꾼들이오! 원치 않는다면 병력을 이끌고 돌아가도 좋소이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갑자기 영주들이 시끄러워진다. 상상도 못했던 선언이다.
어쩌지? 이대로 따르나? 라솔과 전쟁? 이길 수 있나?
“지금 떠난다고 해도 어떤 질책도 불이익도 없으리라 약속하오. 허나! 내일 아침, 이 자리에 남아있는 자들은 라솔 왕국과 싸우는 데 찬성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소!”
“따르겠습니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을 위하여! 엘랑키아를 위하여!”
“라몽 백작님을 따르겠소!”
“싸울 거면 라솔이 낫지!”
라몽 백작의 선언을 이어, 폭풍과도 같은 함성소리가 이어진다.
여기서 발을 뺄 귀족은 아무도 없으리라. 라몽은 자신의 도박이 절반은 성공했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