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타버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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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블랑독 서부, 거대한 숙영지에서는 병사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출전을 앞둔 군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풀린 모습이다. 모두가 고기를 잡고 뜯으며, 포도주가 든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들은 라솔 출신인 오렌시아 기사단의 병력과, 그들과 협력하는 타라트라바 용병들이다.
블랑독 이단 토벌전을 위해 급한 행군 끝에 도착한 이들은, 드 레뮤즈 백작가에서 준비한 투박하지만 풍족한 만찬을 즐기고 있는 참이었다.
“출전을 앞두고 술을 마시다니··· 걱정됩니다.”
오렌시아 기사단의 재무관, 위그나시오 올리메 데 트라카제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하며 상관에게 망토를 넘겨준다.
“하핫, 엘랑키아에서는 그런 모양이지. 이미 준비된 것, 어쩔 수 없지 않겠나.”
에드메르 산타로 데 카르도라, 오렌시아 기사단의 단장이며 라솔 국왕의 친동생이 망토를 건네 받아 어깨에 걸치며 대답했다.
이들이 종교 기사단이라는 점도 있지만, 출전을 앞두고는 정신을 고양시킨다는 이유로 검소한 생활을 강요하는 지휘관들이 제법 있다.
행군을 시작하고 야지에 나가 힘든 생활을 하기 위한 사전준비라는 의미도 있었고.
아무래도 배부르게 놀고 먹다가 갑자기 하루종일 걷고 야전식을 먹어야 하면 쉽지 않을 테니까.
에드메르 역시 이런 상황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으나, 강행군 끝에 도착하니 이미 드 레뮤즈 백작가의 종복들이 준비를 다 해놓은 상황이었다.
병사들이 고기 냄새를 맡은 데다가, 술병까지 보았으니, 자정까지라는 단서를 붙여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아무리 해도 라몽 백작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쁜 짓을 했다면 무슨 짓을 했겠나. 설마 고기와 술에 독이라도 탔으려고?”
“그건 아니겠습니다만··· 라몽 백작이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듭니다.”
“꿍꿍이가 없을 리는 없겠지···.”
눈살을 찌푸린 젊은 기사단 재무관의 말에, 에드메르는 긍정하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듯 했다.
어차피 이단 토벌이라는 대의 아래 뭉치기는 했으나, 원래는 조상으로 부터 이어지는 해묵은 원한이 있는 사이였다.
심지어 라몽 백작은 그런 태도를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이해는 한다. 자국 국왕의 요청조차 흘려 넘기던 인간을, 억지로 위협해가며 참전시킨 입장이니까.
그리고 꿍꿍이라면 이쪽도 숨기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분명, 우리 기사단과 라솔 출신 병사들을 위험한 전장에 몰아 넣으려 하겠죠.”
“그렇겠지. 두려운가?”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물론 믿네. 필요하다면 주신의 앞에서도 자네의 용맹함을 증거할 수 있으니. 허나 위험한 전장이란 또한 주신과 국왕께 바칠 전공을 세울 장소이기도 하네.”
라몽 백작은 이 기회에, 라솔 출신 동맹군을 앞세워 블랑독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 자체는 상관 없다. 다만, 백작의 군대 역시 전장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쪽도 여러가지 조건을 붙였을 뿐.
오렌시아 기사단의 군세는 타라트라바에서 지원 온 용병을 포함하면 거의 5천에 이른다. 거기 레뮤즈 영지군이 7천 가량.
눈 앞의 적은 물론이고 어깨를 나란히 한 동맹군까지 감시하며 싸워야 하는 쉽지 않은 전쟁이다.
분명 고생스럽겠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주신 교단과 라솔 왕국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그렇다. 에드메르는 교단과 왕국, 두 권위를 모두 섬기고 있었으며, 양쪽 모두를 위해 싸운다.
이는 언뜻 보면 모순되어 보인다. 엘랑키아는 물론이고, 그룬발트나 주디칼리, 혹은 알디온 같은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모순된다.
당장 이번 정순파 토벌 성전만 보아도, 엘랑키아 국왕군과 법황군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있었다.
대외적으로 같은 목적을 한 연합군이지만 사실상 따로 움직였으며, 결국 제각각 움직이다 각개격파의 제물이 되고 말았으니.
일반적으로 세속 군주와 교단은 서로 대립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통치 및 교세 확장 과정에서는 협력하지만, 영지 문제로 넘어가면 달라진다.
그러나 라솔의 경우에는 아니다.
국왕부터가 교단의 수호자 칭호를 원하는 독실한 신도이며, 복잡한 지리 탓에 자잘하게 쪼개진 영지들은 세속 영주령과 주교령이 적절하게 섞여있다.
라솔의 통치권력과 교단의 행동규범은 모두 주신교의 이치를 따른다.
따라서 라솔 국왕은 교단을 수호하고, 교단 조직은 세속 군주들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관계이다.
그렇기에, 에드메르가 라솔 왕국과 교단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절대로 모순이 아니며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의 이번 군사 행동의 결과로 엘랑키아 남부에서 교단의 적인 이단은 약화할 것이며, 라솔의 영향력은 커지리라.
이번 전쟁에서 엘랑키아 국왕의 군대에 이어, 막강한 법황군마저 철저하게 궤멸당한 것은 솔직히 예상 외였다.
블랑독의 이단자들은 실로 강했다.
그러나 에드메르는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걱정은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중간에 겁을 먹고 발을 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라몽 백작은 의외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적극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도 얼마 전, 상당한 양의 황금을 ‘교무 지원금’이라 부르며 싸들고 온 라솔 왕국의 사절의 덕도 있었겠지.
그러나 이대로 전쟁이 진행된다면 라몽 백작은 그 이상의 돈을 쓰게 될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드디어 출전의 날이다. 힘들게 결성된 이단 토벌군이 말이다.
“그럼 다녀오겠네, 위그나시오 경. 없는 동안 기사단을 부탁하겠네.”
기사단 정복을 차려입은 에드메르가 말했다. 그는 지금 라몽 백작과의 만찬에 초대받아 가는 길이다.
“몸 조심하십시오. 계속··· 걱정됩니다.”
“허허 걱정이 많으면 빨리 늙는다지 않는가. 설마 그 흐물흐물한 백돼지가 나를 암살이라도 하려 들겠나?”
“...그 말씀은 백작의 앞에서는 하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신임하는 부하, 사실상 차기 기사단장으로 점찍어 둔 재무관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에드메르는 평소에는 하지 않던 농담까지 한다.
본래 엘랑키아 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라솔 용병들이 라몽 백작을 백돼지라 부르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암살은 시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적지나 다름 없는 장소에서 에드메르는 살아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복수하면 될 뿐이다.
암만 조상의 원수라 해도, 함께 싸우기로 협정을 맺어놓고 뒤통수 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것도 라솔 국왕의 친동생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라솔 왕국이 엘랑키아 남부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정복할 정당성을 안겨줄 뿐이다.
라몽 백작은 성격은 나빠도 똑똑한 인간이다. 설마 그런 악수를 두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에드메르 기사단장은 소수의 호위기사만 데리고 라몽 백작의 만찬장소로 향했다.
“혼자 만찬장에 가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제 생각에도 지휘관급들은 전부 부대에서 대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설마 갑자기 동맹군이 적군이 되리라는 생각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렇게 결정했다.
“백작이 술을 보냈더군. 자네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겠나. 엘랑키아 포도주는 라솔 산에 비해서 맛이 부드러운 편이라네.”
“저는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사단장을 보낸 후, 위그나시오는 주변을 살핀다.
드 레뮤즈 백작가의 종복들이 미리 준비했다는 숙영지는 위치나 구조가 나쁘지 않았다.
드 레뮤즈 영지군이 주둔하고 있는 작은 요새의 외벽 바로 앞에 위치한 평지였고, 다소 좁기는 했지만 방어하기 나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적이 나타나 드 레뮤즈 영지군에게 배신당해 방치당하더라도 꽤 오래 버티며 싸울 수 있으리라.
“위그나시오 재무관님, 식사 하시겠습니까?”
“그리하겠네.”
“술도 준비할까요? 백작가에서 보낸 포도주가···.”
“아니, 술은 됐네.”
아까부터 고기를 굽는 기름진 냄새가 빈 속을 자극하던 참이었다. 과식할 생각은 없었으나 속을 채워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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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하!”
“이단 토벌 연합군의 승리를 위하여!”
“라솔 형제들의 건강을 위해서!”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준비한 만찬장은 시끄러웠다.
에드메르 산타로 데 카르도라 기사단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 출정하는 군대의 모습은 아니었다.
만찬장에 초대된 것은 드 레뮤즈 백작가의 가신들과, 영향력 하에 있는 동맹 가문의 인물들이다.
오렌시아 기사단의 주요 인사들 역시 초대받았으나, 참여한 것은 단장인 에드메르 혼자였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으니.
“엘랑키아 요리는 입에 맞으십니까, 단장님?”
“아주 맛있군요.”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식탁은 대단히 풍요롭고 맛있었다.
확실히, 엘랑키아의 식사가 라솔의 식사보다 풍요롭다는 생각이 든다. 기사단의 검소한 생활은 물론이고, 형님의 궁정에서 간혹 참여한 만찬과 비교해서도 그렇다 느껴질 정도이니.
그나저나, 라몽 백작은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나 싫은 티를 노골적으로 내는 정치가라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을 속이려면 오히려 겉으로는 친한 척을 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양국은 조상 대대로 사이가 안좋은 앙숙에, 선대 백작은 전쟁에서 패해 많은 영토를 빼앗긴 상태.
거기다가 이번에는 강요당해 강제로 전쟁을 하게 생겼다. 전쟁을 거절했다면 교단에서 파문을 당하고 라솔 왕국에게 침략할 명분을 주었겠지.
하지만 국제 관계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 미안하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에드메르 공.”
한참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식사도 하는 듯 마는 듯 하던 라몽 백작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예, 백작님.”
에드메르는 깍듯한 태도로 대답한다. 어찌됐든 이번 연합군에서 우위는 라몽 백작이다. 명목상으로든 위계상으로든.
“그래서 대체 어떻게 이길 생각입니까? 트랑카벨의 군대는 강합니다.”
“확실히 최근 법황군의 나머지 병력이 전멸당했다는 소식에는 놀랐습니다.”
“그 뿐이 아니지, 엘랑키아 국왕 폐하의 군대조차 패퇴했소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 군은, 나름 세력은 갖추었으나 명백하게 그에 비해 열세가 아닙니까?”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오히려, 지금 와서 물어보는 것이 이상했다.
“이단자들의 무리는 확실히 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강하다면 싸우지 않으면 될 일이지요.”
“무슨···? 우리는 싸우러 가는 게 아닙니까?”
“싸움에도 여러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평지가 많은 엘랑키아 출신 분들은 쉽게 떠올리기 힘든 방식의 싸움도 있지요.”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에드메르는 말 없이 품속에서 미리 준비한 지도를 꺼낸다. 블랑독을 포함한 엘랑키아 남부의 지도이다.
“이단자들이 승리한 주요 전장은 여기, 여기 입니다.”
그의 갈색 손가락이 블랑독의 북서부와 북동부를 가리킨다. 국왕군과 법황군이 패배한 장소였다.
“하지만 우리가 향하는 곳은 이곳··· 입니다.”
에드메르의 손가락이 블랑독 서쪽, 로데브 강의 상류를 가리킨다. 지명으로는 몽세나 산악지대라고 쓰여있다.
“산악지대를 통과하신다고요? 여길 통해서 가다가는 전쟁이 대체 몇 달이 걸릴지···.”
“아닙니다. 통과하지 않습니다.”
라몽 백작이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그로서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물론 에드메르 역시 기습적으로 로데브 강을 건너, 트랑카벨의 거점인 카르카냑을 습격하는 전략을 검토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작전이다. 잘 된다고 쳐도, 적의 주력이 회군하기 전에 함락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가장 예상하지 못할 행위를 한다.
“산악지대는 우리 라솔 왕국의 군대에게 가장 익숙한 전장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역은 이단의 수괴, 트랑카벨 소유의 자작령이 있는 곳이죠? 이곳을 철저하게 파괴하며 적의 주력을 유인합니다.”
에드메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군이 통과하기 어려운 지역은, 적군도 통과하기 어려울 겁니다.”
적지에 들어가 여기저기 점령지를 만든다.
복잡한 지형을 이용해 우세한 적의 군세를 괴롭힌다.
길고 긴 전쟁과 출혈을 견디지 못한 적으로 하여금 점령지를 포기하게 만든다.
라솔에서 벌어지는 진지전의 개요였다. 마침, 몽세나 부근의 지형이 그걸 하기에 딱 좋아보였으니까.
“그거··· 흥미롭구려.”
라솔 백작은 홀린 듯, 지도에 그려진 지형을 바라본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한다.
“이대로 잘 되기만 한다면···.”
콰아아앙!
기이한 폭음이 들린다. 멀었다. 탁자 위의 술잔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진다.
에드메르를 포함해 모든 참가자들의 눈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