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41화 (241/556)

29-5. 타버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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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사코르 전투는 여러모로 변수가 많았던 전투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변수는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한 산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이밍도 완벽했고, 타오르는 기세도 어마어마했다.

산불이 없었어도 이기기야 했겠지. 하지만 서로 대치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을 테고, 피해도 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대체 산불이 왜 났을까. 일단 자연적인 산불일 가능성도 있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혹은 화승총이나 대포 등 불을 다루는 병사의 실수로 일어난 화재일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실제로 불 많이 내기도 하고.

다만 생나무 숲은 불길이 타오르는데 오래 걸린다. 그런데 당일 난 산불은, 처음 관측된 순간부터 엄청난 기세로 타고 있었다.

오죽하면 전투가 끝나고 만나는 사람마다 산불 내는 데 성공한 특수 부대에 포상을 해야 한다느니, 완벽한 전술이었다느니 했을까.

심지어 아실이나 모리츠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진짜로 내가 한 건 아니다.

나도 참 어쩌다 산불이 그렇게 났는지 궁금했다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산불 원인을 딱히 조사할 방법도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산불의 원인은 엉뚱한 곳에서 알게 되었다.

“그 놈들은 마을에서 젊은 남자들을 몽땅 잡아갔습니다. 일을 마치면 돌려 보내준다고 했는데··· 그게 벌써 두 달이 넘게 지났으니까요.”

몸 여기저기에 붕대를 감은 침울한 표정의 이 청년은, 산불이 어느 정도 잦아든 후 잿더미가 된 숲에서 발견되었다.

이름은 디라드 실뱅이라고 한다.

당시 숲을 가로지르며 생존자를 확인하던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보고로는 여전히 후끈한 연기가 올라올 정도로 땅이 달아올라 있었다고 한다.

길을 잘못들어 숯덩이가 된 적병들의 시체만 잔뜩 발견되었는데, 그 잿더미 끄트머리에서 생존자가 발견됐다.

화상이 심한 그 생존자는 다행히 숲 끝자락 벼랑 밑에서 기절해 목숨을 건졌던 모양이다.

“이 놈들은 저희를 잡아와서는 짐을 옮기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돈을 준다고 하더니, 돈은 커녕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네요.”

그래서인지 같이 잡혀왔던 사촌 형이 혹사당하다 죽었다. 자신이 일을 대신 하겠다고 휴식을 부탁했으나, 오히려 얻어 맞았던 모양이다.

결국 잠시 자기가 보지 못하던 사이, 심하게 얻어 맞고 방치된 사촌 형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단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다. 인부로 쓰려고 현지 청년들을 징용했고, 관리자가 인부들에게 갈 급료와 식량을 착복했겠지.

그런 개자식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역겹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내가 타죽는 한이 있어도, 이 빌어먹을 놈들을 태워 죽이고 말겠다 싶어 준비했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엉망진창이 된 코를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일부러 등짐으로 옮기던 화약통 하나를 비탈에서 떨어뜨렸다. 덕분에 코가 부러지도록 얻어맞았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멀리서 들리는 포성으로 알 수 있었단다. 짐을 다 옮기고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청년은 비탈 아래쪽으로 내려가 굴러 떨어진 화약통을 찾아냈다.

원래 화전민이었던 청년과 친구는 불 피우는 데 전문가였다.

다만 위험을 무릅쓰고 후방 가까이 접근해서 불 피우는데 열중했다가 불 속에 갇히게 되었고, 화상을 입고 구사일생했던 모양이다.

이 청년의 활약 덕에 성전군의 운명이 절반 정도 결정되었다.

솔직히 천운이고, 우연이었다. 아군 입장에선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연이지만, 끔찍한 악운이었지. 적군 입장에선 말이다.

하지만 이 악독한 놈들이 조금만 상식적으로 행동했으면 어땠을까.

전투 병력도 부족해서 주변 인력으로 인부를 충당한 것 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강제로 끌고 왔으면 상식선에서 밥을 주고 급료도 줬어야지.

그리고 전투가 시작할 것 같으면 제 때 돌려보내주고.

그랬다면 나는 아직 언덕 꼭대기에서 적을 피해 없이 몰아낼 방법을 궁리하기 위해 머리를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의 언덕 위 진지도 건재했겠지.

그러나 어떤 놈인지 몰라도, 알량한 품삯 몇 푼과 빵조각 몇 개 착복한 행위는 부대 전멸이라는 결과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걸 지 팔자 지가 꼬았다고 해야 하나··· 그러기에는 이미 남은 팔자도 없겠다.

“...정말 어려운 일을 하셨네요. 트랑카벨 가문에서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아쥬흐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행히도, 이 청년에게 즉각적으로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할 수 있었다.

제10 연대 소속, 얀 고티에라는 총병 소대장의 말에 의하면, 약탈당한 마을들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구한 노부인이 이 청년의 어머니였다는 모양이다.

디라드 실뱅이라는 이름을 기억한 소대장 얀 덕분에, 중상을 입은 청년은 어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한 번 청년들 싹 징용해서 끌어간 마을을 다른 놈들이 와서 또 약탈했다는 것 아냐?

진짜 이가 갈리는 놈들이다. 그 놈들이 부디 언덕 위에서 같이 타죽었기를 바란다.

···솔직히 말이지, 뭐 정의라거나 인과응보라거나 하는 말을 별로 믿지는 않는다. 세상이 워낙 거지같은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서 말이야.

하지만 이런 일을 겪으면 역시 착하게··· 아니, 선은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부디 이 어머니와 아들 뿐인 가족에게 이후 행복이 있기를. 트랑카벨 가문에서 적절한 포상과 정착지를 챙겨 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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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중인 부상병들에게, 상관이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면 회복에 도움이 될 리가 없으니, 나는 한 발 먼저 야전 병원에서 나왔다.

격전이 있었던 마르사코르 언덕에서 남서쪽, 가능한 널찍한 곳에 만들어진 야전 병원이다. 초원을 달려온 선선한 바람이 야트막한 비탈을 타고 오르는 쾌적한 장소이다.

지난 전투에서 차례가 없었던 기병들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기에 안전할 것이다. 애초에 주변의 적대적인 놈들은 죄다 도망치기 바빴기도 하고.

물론 지금은 이렇게 여유를 부리지만, 전투가 끝난 직후는 아비규환이었다.

여기저기서 실려온 중상자들의 비명이 생존자들의 심장을 찢어놓았다.

아쥬흐를 비롯한 군의관들은 쉴 틈 없이 부지런히 환자들을 챙겼고, 동료들을 살리기 위한 병사들 역시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 노력 덕에 지금은 환자들의 상태가 안정되었고.

물론 노력에도 불구하고 죽어간 중상자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군인의 애도는 짧고 빠른 편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수시로 주변에서 동료들이 죽어간다.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일은 꾸역 꾸역 해야한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좌절하거나, 역으로 과도하게 분노해 이성을 잃는다면 군인 실격이다.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동료의 자리를 채워야 하는 청년들이 안쓰러웠다.

“...자기 임무를 다 하고 쓰러진 이들을 보니 숙연해집니다.”

회담을 마치고 함께하고 있었던 카렐은 진지한 표정으로 옷깃을 여민다. 거대한 전투의 결과물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겠지.

그는 며칠 정도 우리 사령부와 함께 머물기로 했다. 간단히 말하면 견학인데, 그가 ‘전쟁이 얼마나 무거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고 싶다’란 부탁을 해서 아쥬흐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런 진지한 태도가 아니고, 단순히 호기심이나 무용담 따위로 접근하려 했다면 쫓아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는데 여기 머물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이번에는 아실이 질문한다.

아실이 이끄는 별동대는, 이번 전투에도 남쪽에서 진입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측방의 지키던 적의 용병단 하나를 고스란히 포로로 잡기도 했고.

“이번에는 라몽 백작에게 선수를 양보하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어요.”

아실과 카렐은 내 말을 듣고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정리된 내 생각을 설명한다.

첫째로 가장 큰 이유는, 굳이 지금 근처에 병력을 집결시켜서 적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은, 냉정하게 분석하자면 적의 선택지를 줄인다는 뜻이다. 다른 가능성 있는 선택지를 빼앗고 방어를 강요한다는 말이지.

그만큼 전략적 목표가 가까이 있으면, 적은 그 선택을 강요당하기 쉽다.

잘 하면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굳이 전투로 풀어나간다면, 설령 이긴다고 해도 좋은 결과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라몽 백작은 ‘싸우려고 하는 척’의 달인이 아니었냐 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으니까.

어차피 블랑독 서부의 주요 거점은 방비가 전혀 안된 것은 아니다.

카르카냑?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데.

벨모제? 블랑독 최강의 요새이다.

몽세나? 그 산악 지대로 대군을 기동한다고?

아얘 남쪽으로 우회해서 해안 쪽으로 돌아온다면 그때 가도 늦지 않다.

소강상태인 블랑독 서부 지역을 파괴하고 불태우며 우리를 유인하는 짓거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라몽 백작만은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이전에 국왕군의 순례자 떨거지들이 실수로 라몽의 영토를 약탈 했을 때 무척 격앙했다지 않은가.

그런 짓을 하면, 블랑독을 적법한 권역으로 가지고 있다는 무지막지한 유리한 포지션이 바로 날아가 버린다.

둘째로, 이 주변의 성전군이 완전히 정리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정확히는 적의 침공이 끝난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분명 아군이 대승을 거둔 것은 분명하지만, 적을 완전히 격멸하는 데엔 실패했다. 이미 한 번 불에 타 기세가 잦아든 숲을 뚫고 탈출한 놈들이 있었으니까.

길을 잘못 들어 숲에서 타 죽은 놈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 그 와중에 살아서 나갔다니 어지간히 명줄도 질긴 놈들이다.

추격 및 소탕전을 위해 파견한, 로베르 드 나뵈프의 정찰 연대를 포함한 추격자들이 열심히 낙오병들을 처리했지만 기어코 북쪽 변경으로 탈출한 자들이 있다고 한다.

보통은 이렇게 호되게 당했으면 블랑독 방향은 쳐다도 보기 싫을 것 같지만··· 신념 가진 놈들은 또 미친 짓을 할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변경에 모여 소요사태를 일으킬 수 있고, 그 때 철저하게 밟아버리지 않으면 작은 사건이 토벌군이 필요한 큰 문제로 커질 수도 있다.

게다가 내부에서 호응하는 자들이 있다면, 외부에서 참전을 망설이고 있는 신성한 기사님들이 또 들어올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놈의 법황은 죽지도 않나 진짜.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음, 이건 좀 입을 열어 말하기가 그렇네.

“앗, 이유가 세 가지인 줄 알았는데, 두 가지 뿐이네요.”

아실은 내가 그런 실수를 할 리 없다며 웃었지만, 정말로 입 밖으로 말하기가 좀 그렇다.

왜냐하면 근거가 그냥 추측과 감 이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겠는 세 번째 이유는, 왠지 라몽 백작이 결국에는 안 쳐들어오고 깔아 뭉갤 것 같다는 것이다.

여울목의 전투와, 샹다메리 전투 때 둘 다 그랬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적은 라몽 백작의 군대가 늦게라도 합류 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라몽 백작은 멋지게 뭉개며 전투가 끝난 후에야 도착했지.

그래서 손해를 봤냐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혼란을 수습하며 자기 주가만 올렸다.

이게 그냥 게으르고 소극적인데 운만 좋아서 그런 건지, 치밀한 계획으로 맛있는 부분만 싹 빼먹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다.

어찌됐든, 이번에도 왠지 남들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촉이 왔다.

···그런데 설명해놓고 근거로 ‘촉’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찌됐든, 압도적인 불리한 상황에서 적의 움직임에 허겁지겁 대응하던 아군이, 이제는 적에게 선수를 양보하고 형세를 관망할 만큼 성장했다.

그만큼 상황이 좋아진 것이기도 하지만, 트랑카벨 군대의 성장이 느껴져 어딘가 뿌듯하기도 한다.

큰 벽을 두 번이나 넘었으니, 다음도 어떻게든 되겠지··· 이제 정말 사람 죽어 나가는 꼴은 그만 보고 싶다.

제발 내 촉이여, 맞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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