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40화 (240/556)

29-4. 타버린 후

카렐 드 상포리앙은 잠시 어떤 말을 할지 고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더 신경이 쓰이는데.

자칫하면 서로의 마음이 상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말 아니야?

의도야 어찌됐든 그는 엘랑키아의 왕실과 연줄이 있는 사람이다. 왕명은 아닐지라도, 국왕의 뜻이 어느 정도는 반영된 의도의 질문이겠지.

갑자기 긴장이 된다. ‘향후 트랑카벨 가문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는 그냥 군사권 외에는 아무런 실권도 없는 내 의견이었으니까.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니 허심탄회하게 평소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지. 그렇지만 나에 대해 질문한다?

“사실 몇몇 분들은 저에게 꼭 에트 경을 독대한 자리에서 물어보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군요.”

“허어···.”

“하지만 거부했습니다. 저는 임시 외교 담당자지 첩보원은 아니니까요, 하하.”

시원스럽게 이야기하면서 활짝 웃는다. 카렐의 환한 얼굴을 보면서 이 양반도 나름 냉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객관적으로 보기도 어렵지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게 훨씬 어렵거든.

그나저나 독대하라고 시킨 양반들도 참···. 적대하는 세력에 회담하겠다고 찾아가서 특정 고용인만 찾아서 이야기하면 그걸 고용주가 좋아 하겠느냐 말이지.

지금 눈 앞의 카렐이 계산적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솔직함이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진정 계산할 줄 안다면 자기 이득만 생각해서는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다.

가령 고용주인 트랑카벨 가문에 말도 없이 나만 찾아와서 따로 이야기하자고 한다면··· 아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카렐은 선택을 잘 한 것이겠다.

“이번 전쟁이 끝난 이후에, 에트 경의 거취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를요? 누가 말입니까. 엘랑키아 높으신 분들이 말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저도 어전회의에 참석한 것은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으음, 말하기가 무섭게 분위기가 좀 싸늘해졌는데. 확실히 승전 직후라고 해도 이런 이야기는 좀 그렇지.

누군지는 몰라도 엘랑키아의 높으신 분이 사적인 자리에서 제안하라고 한 이유가 있었네.

“카렐 소백작님께 나쁜 의도가 없을지는 몰라도, 고용주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냥 듣고 넘기기가 조금 어렵네요.”

역시나, 아쥬흐가 불편한 어조로 끼어든다. 조금 전 왠지 기쁨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눈에는 냉혹함이 가득 깃들어있다.

“혹시라도 중간에 영입 제안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전쟁이 끝나고 트랑카벨 가문과 블랑독 전체에 평화가 돌아온 후의 이야기··· 라고 생각합니다.”

아쥬흐가 강하게 반발하자 카렐도 놀랐는지 부연설명을 붙인다.

“그리고 군사 지휘관으로서가 아니라··· 단기간에 트랑카벨의 강한 군대를 양성한 실적을 높이 평가하셨다는 것 같습니다.”

“엘랑키아 군의 재건과 강화를 의도하시는 건가요?”

“그런 것으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트랑카벨에도, 콘도티에레 에트는 반드시 필요한 분이에요.”

카렐이 진땀을 흘리며 설명한다. 역시 이 사람은 절대로 음모 따위는 꾸밀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럴 의도가 없었기에 가볍게 이야기했던 것이겠지.

“설마··· 엘랑키아 왕실에서는 작위나 영토를 대가로 콘도티에레 에트를 내놓아라, 이런 의도인가요?”

“아닙니다, 아쥬흐 양. 저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카렐 소백작님의 진심은 믿어요. 하지만, 흑막 뒤에서 그 말을 시킨 분들도 그랬을까요?”

“...절대로 아니라고는···.”

결국 말을 잊지 못하고 끝을 흐린다. 본인이야 순수하게 임무니까, 호의를 가지고 한 말이겠지만 생각해보니 시커먼 속내가 느껴진 것이겠지.

역시 과하게 솔직한 사람이야. 가문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으니 외교의 얼굴 마담은 몰라도 서로 음모를 주고 받는 실무자 타입은 아니네.

반대로 아쥬흐 역시 오늘은 좀 반응이 격하다. 평소같으면 상대가 멋대로 이야기하게 두고, 함정에 빠지도록 유도한 후 나중에 이용할 것 같은데.

이렇게 즉각적으로, 살짝 감정마자 느껴질 정도로 대응하다니 좀 낯선 모습이다. 그렇게 우리 계약을 소중하게 생각해주다니 고맙기도 하지만.

아마도 카렐 경이나 엘랑키아 왕실에서는 더 먼 미래의 상황을 고려해서 보낸 제안이겠지만···.

아니, 아니아니.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용병에게나, 고용주에게나.

하지만 카렐의 태도를 보면 실례 되는 제안이라는 생각을 못한 것 같다. 엘랑키아는 용병업의 전통이 없어서 그럴지도?

물론 용병 개개인이야 출신지를 가리지 않지. 실제로 그룬발트나 주디칼리에서 엘랑키아 출신 용병들을 여럿 보았으니까.

듣기로는 막내로 태어나서 계승자인 형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용병으로 지냈는데, 형이 급사하는 바람에 졸지에 백작님이 된 용병도 있다던가.

당시 같이 근무하던 용병들 끼리는 축하해 주었지만, 정작 가문으로 돌아가서 형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던가.

하지만 상대적으로 국내의 정치가 안정되어 있고, 풍요로운데다 가문들의 영토가 널찍널찍한 엘랑키아는 용병의 수요는 별로 없는 편이다.

애초에 용병을 고용하는 주된 이유는 봉건제도의 계약과 충성으로 묶인 전통적인 군대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렇다.

적절한 충성과 의무, 그리고 이권이 잘 엮여있다면 모를까.

단순 봉신관계로 엮여있는 신하에게는 상당히 제한된 병력 지원밖에 받을 수 없다.

그나마도 복무 연한 끝나면 집에 가버리는 파트타임 병력이라고나 할까.

그러느니 핵심 병력 조직만 충신들로 채우고, 나머지는 그냥 돈으로 걷어서 용병을 고용하는 편이 이득일 때, 용병업이 성행하게 된다 이것이다.

하지만 엘랑키아는 기본적으로 귀족들의 권리가 강한 편이고, 군사 귀족 출신들이 많다.

군사 귀족은 단순히 전쟁에 익숙해서 군사 귀족이 아니다. 말하자면 작위와 영토를 받을 때 병력 동원에 대한 ‘특약’이 맺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엘랑키아의 국왕이나 대귀족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전통적인 방법으로 의무를 이행하는 병력을 소집할 수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원래 트랑카벨의 가신이었으며 현재는 영지군에서 복무하고 있는 장교들도 그런 케이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한을 두지 않고 정해진 급여를 받는 제도는 용병의 제도에 가깝다.

하지만 주군과 신하간의 은혜와 충성에 기반해 고향을 지키기 위해 복무하는 것은 전통적 봉건 군대에 가깝겠고.

다만 이건 주군이나 가신이나, 혹은 일반 백성이나 큰 위기에 처해 단기간에 방대한 군대가 필요했던 트랑카벨 가문만의 특수한 상황이다.

대부분의 엘랑키아의 영주들은 굳이 이런 제도가 없어도 필요한 만큼의 병력, 특히나 양질의 기병을 소집할 수 있었다.

또한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있다는 것은 지방 귀족끼리의 소모적인 충돌이 최소화 되었다는 것이고, 그러니 용병이 보조적 역할에 그친다.

그래서 용병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고, 의리 따위는 없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어디에나 그런 인식은 있지. ‘돈 받고 사람 죽이는 놈들’이라는 인식일까.

하지만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용병은 계약에 죽고 사는 존재이다.

애초에 의무에 의해 병력을 동원한 귀족과 비교를 해도 말이지.

귀족의 경우는 수백년 전 쯤 조상에게 땅과 작위를 준 누군가의 후손에게 충성을 바친다.

용병의 경우는 바로 지금, 내 지갑에 금화를 채워주는 고용주에게 충성을 바친다.

용병의 고용 관계가 훨씬 이해하기 쉽고 긴밀한 관계가 아닐까? 뭐 충성이니 명예니 하는 게 없어서?

배신을 하지 않는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원래 계약 관계라는 것이 신의성실에 기반해서 그런 것이 크고, 대신 싸우라고 돈 줬더니 배신한 놈을 누가 받아주겠어.

그래서 용병에게 ‘검증할 수 있는 커리어’는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어느 용병이나 각종 증명서나 표창 등을 잘 갈무리해서 소중하게 보관하는 것이라니까.

아무튼 은근히 신의를 지키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는 것이다.

“용병이 고용주에게 지키는 신의 성실은 단순히 고용 관계가 지속되는 기간에 한정하진 않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곧바로 경쟁자의 세력에 합류하는 건 비판받을 일이거든요.”

귀족들 앞에서 용병의 직업 윤리를 떠드는 꼴이 별로 좋지는 않지만, 간단히 설명한다.

“...제가 이토록 어리석은줄은 몰랐습니다. 트랑카벨 가문의 여러분께도, 에트 경께도 사과를 드립니다. 맹세코 나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저희도 다소 감정적으로 대응한 점은 사과드려요.”

“저, 저도요!”

다시 차분함을 되찾은 아쥬흐와, 분위기가 경색되자 안절부절 못하던 아실이 재빨리 대답한다.

양측의 사과가 오가고 다시 분위기가 회복된다.

이건 카렐의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사람이 밝고 타인의 악한 감정에 둔한 젊은이들이 종종 저지르는 실수지.

하지만 정말로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니까.

“휴, 이제 생각해보니 왕실에서는 확실히 에트 경을 포섭해오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듣기로는 트랑카벨과 에트 경 양쪽에 작위를 내리는 이야기도 있었다니까요.”

“하하하··· 높으신 분들이 농담도 심하셨나보네요.”

“정말입니다. 국왕군 원수이신, 백전노장 프레니히 백작님은 에트 경을 손녀 사위로 삼고 싶으시다는 말도 했다고 합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왜 작위 준다는 사람이 이리 많아.

아마도 카렐은 분위기 전환을 위한 주제라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지뢰 중의 지뢰였다. 이 사람 이거 몹쓸 사람이구만.

“그 프레니히 백작이란 분은 누구신가요?”

아니나다를까, 아쥬흐의 목소리가 도로 싸늘해진다.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님은 일개 병사로 시작해서 전공을 거듭, 국왕 직할군의 사령관이 되어 백작위를 받으신 백전노장이십니다.”

“그런데 왜 콘도티에레 에트를 손녀 사위로 들이려 하신다는 걸까요?”

“평생 군문에서 근무하시면서 출세하신 분이라, 동질감을 느끼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이쯤에서 적당히 나서야겠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작위며 포상이며 나누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르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진취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직 잡지도 않은 사냥감 털가죽 팔아서 들어온 돈 쓸 생각만 해서는 문제가 심각하지.

“무엇보다 계위상 질서에 의하면··· 이런 이야기는 상위 군주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계실 때 해야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 말에 트랑카벨 남매와 카렐은 모두 수긍하는듯 했다. 본인들도 이야기가 너무 나갔다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콘도티에레 에트가 맞아요. 우리 사이가 썩 좋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는 게 도리겠지요.”

라몽 백작은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알면 어떤 생각을 할까.

감히 자기 권리를 침해했다고 분노할수도, 혹은 어차피 관리도 안되고 이득도 안되던 짐덩이 영토가 떨어져 나간다고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심지어 최고위 군주인 엘랑키아 국왕조차도, 봉신의 봉신에게는 권리가 없다.

즉, 이런 상황은 봉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비공식 사절이니 그렇다 쳐도, 공식이라면 논의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배권에 대한 도전에 다름 아니다.

과거에 숱하게 서로 전쟁을 했고 현재도 계속 으르렁댈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은게 현실인데, 무슨 지배권이냐··· 할 수도 있겠다만.

원래 봉건 제도의 군신관계라는 것이 그렇다.

트랑카벨 가문 역시 국왕과 간접적으로 전쟁을 했었지만 직접 군신관계로 엮이지 않았기에, 오히려 권위를 침해당한 것은 드 레뮤즈라는 논리고.

설명하라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나 싶을 정도로 어렵지만, 그게 현실이니까.

“그러고보니 카르카냑으로 가던 길에, 병력을 소집한 드 레뮤즈 군을 보았습니다.”

“그랬습니까··· 어떻게 보이시던가요?”

“확실히 규모는 최소 7천 명 이상으로 보였습니다. 레뮤즈의 신하들은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전쟁을 해야 한다면 피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인 것 같았고요.”

“그것도 참···.”

그러고보니 그 백작 양반은 또 무슨 생각인가.

만약에 블랑독 연맹군이 성전군에게 패배해서 와해되었다면 또 모르겠다.

방어력을 상실한 트랑카벨 영지의 배후에 빈집털이를 들어올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었다면 뒤통수를 치는 쪽은 라몽 백작 뿐은 아니었겠지.

“라몽 백작님과··· 전쟁을 하게 될 것으로 보십니까?”

카렐의 질문에, 나는 우선 입을 다물고 아쥬흐 쪽을 바라본다. 나는 일어난 전쟁을 하는 사람이지,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아니기에.

“저도 드 레뮤즈 백작군이 참전할지는 모르겠지만, 대응 방안은 예전에 정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어떤 방안이신지 저도 알아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저도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의 생각은 전혀 모르겠지만요··· 만약 힘으로 블랑독을 침공한다면 더 큰 힘으로 제압할 겁니다.”

“...실력이 동반된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시군요.”

아쥬흐의 자신만만한, 앞뒤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호전적일 수도 있어 보이는 표현에 카렐은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호언장담 이상이다. 우리 트랑카벨 영지군을 주축으로 한 블랑독 연맹군은, 실제로 국왕군에 이어 법황이 보낸 성전군을 격퇴했으니까.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절대로 싸우고 싶지 않아요. 라몽 백작님이 왜 이제와서 그렇게 나오시는지도···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하고 싶은데요.”

아쥬흐는 정말 답답한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푸념하듯 말했다.

그렇게 큰 추가적인 논의 없이, 비공식 회담은 마무리되었다.

어째 이야기를 하 다보니, 정작 카렐이 들고 온 주제보다는 곁다리 이야기를 훨씬 많이 한 느낌이네.

이야기는 큰 문제없이 되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덩어리가 하나 있는 느낌이다.

국왕군과 성전군을 격퇴하면서 전쟁을 마칠 수 있다 생각했는데··· 새로운 전란의 싹이 보인다니. 대체 라몽 백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싸운다면 이길 것이다. 다소 라솔의 종교 기사단에서 지원이 왔다 해도 전력 차이는 이제 비교가 안 된다. 절대는 없다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확신한다.

그래서 답답하다. 내가 보기에 자기네가 반드시 진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닐 텐데.

나는 정치인은 아니니 전쟁이 벌어지면 최대한 잘 수습하기 위해 노력은 할 것이지만···.

속으로 오만 고민을 하며 막사 앞에서 기지개를 펴던 나에게, 아쥬흐가 다가왔다.

“콘도티에레 에트, 카렐 경, 저는 야전 병원에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엇, 저도 가도 됩니까?”

“그럼요, 손님이신데요. 딱히 숨길 것도 없고요. 게다가 이번에는 마르사코르 언덕 전투의 최고 공훈자 중 한 분이 깨어나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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