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39화 (239/556)

29-3. 타버린 후

###

전쟁이라는 것은 정말 하면 할수록 못해먹을 짓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게 된다.

내가 특히 중견 지휘관들에게 설명할 때, 전투도 본질적으로 인간이 하는 다른 조직적인 업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예를 드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전쟁은 무섭고 불길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결국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는 논리이다.

이기는 방법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수 많은 장교와 병사들, 그리고 보병과 기병이 각자 맡은 업무를 체계적으로 실행하면 된다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실제로 이건 상당부분 진실이고, 장교와 지휘관은 물론 일반 병사들의 훈련 과정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되는 논리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단히 편의적이고 이기적인 ‘이쪽이 편한’ 논리에 불과하지.

왜냐하면 다른 인간 세상의 조직적인 업무는 사람의 목숨을 이렇게나 ‘재료’로 써서 돌아가지는 않으니까.

마르사코르 언덕 비탈에서의 전투가 끝났다.

그리고 우리 참모단은, 평소처럼 전투 직후의 ‘마감’ 작업을 한다. 전과를 확인하고, 또한 아군의 피해를 확인해 문서작업을 한다.

아마도 여기서 나온 자료를 바탕으로 이후 전훈 평가를 실시해, 아군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겠지.

무엇 하나 막대한 노력이 들어가지 않는 게 없다. 엄청난 숫자와 목록을 다루는 일이니까.

이 짓 을 하다보면, 대체 왜 이 노력을 다른 데 쓰지 않고 사람을 죽고 죽이는 데 써야 하는지 자괴감이 심하게 든다.

가령 이 자원과 노력을 건축에 담는다면 역사에 남을 어마어마한 불가사의급의 무언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농업이든 상업이든, 다른 산업 분야에 사용해서 인류의 문화와 미래를 윤택하게 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이겼으니까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생각이겠지. 일단 일어난 전쟁은 이겨야 하는 것이니까.

혹자가 보면 전장 정리 업무에 지쳐서 또 정신 빠진 생각을 한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멀리 사령부 천막이 보이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호위병들이 나에게 경례한다. 나는 머리속의 잡생각을 지우고 새로운 일을 위한 공간을 할애한다.

아실이 보내온 전령에 의하면, 엘랑키아에서 전령이 왔다고 한다. 트랑카벨 가문으로 온 전령이지만, 내가 꼭 참여하면 좋겠다고 해서 첼레스티나에게 맡기고 서두르는 길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령부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데, 익숙한 얼굴 셋이 나를 맞이한다. 어라, 왜 익숙한 얼굴이 셋이지?

"오랜만입니다. 에트 경."

"아··· 그··· 오랜만이네요. 카렐 경."

으으, 뭔가 어색하다. 용병으로 먹고 살다 보면, 전장에서 적으로 만났던 상대를 일상에서 만나는 것 자체는 흔한 일이다.

심지어는 새로운 전장에서는 아군으로 만나기도 하니까!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말이 있다지만, 용병은 적도 아군도 고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오히려 고용주가 '유능했던 적'을 고용해 함께 싸울 수 있게 해주면 고마운 일이지. 그 영업능력과 포섭능력을 칭찬해야 한다.

음, 그래서 그런 경우 적당히 얼굴에 철판 깔고 행동하는 일은 익숙하지만···.

내가 직접, 그것도 총을 쏴서 기절시키고, 심장마비가 온 것을 심폐소생술까지 한 상대를 오랜만에 마주하니 좀 어색하네.

와 뭐라고 해야 하나···. 맞은 데는 괜찮으십니까? 멈췄던 심장은 잘 뛰고 있나요?

...이거 완전 극악무도한 악당이 할 법한 대사잖아.

"최근에 연이어 굉장한 위업을 달성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에트 경, 콘도티에레의 소문이 엘랑키아 서부 지역에도 자자합니다."

"과찬이십니다."

"하하, 참고로 멈추었던 심장은 잘 뛰고 있습니다."

"네, 다행이네요··· 아니, 죄송합니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카렐 경이 먼저 호탕하게 웃으며 옛 이야기를 꺼낸다. 아, 그러고보니 이 인간, 잘생기고 성격도 좋은 인간이었지.

괜히 같이 있으면 마음 속의 음침한 무언가를 자극받는 듯한 느낌이다.

일단 명목상 내가 가해자고, 카렐이 피해자인데 이런 구도가 되면 왠지 내가 치졸하게 생각되잖아. 으으, 이러면 안 되는데. 나도 나의 음습함이 싫다니까.

“카렐 드 상포리앙 소백작께서는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님의 부탁을 받아 트랑카벨을 방문하셨다고 해요.”

내가 늦는 동안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었는지, 아쥬흐가 설명해준다.

“그렇습니다, 에트 경. 에티엔 공작이 저를 보낸 의도··· 속마음은 전쟁이 끝난 후의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에티엔 공작님의 속마음 이라면··· 베르마유의 높으신 분들의 속마음도 섞여 있다 보아도 될까요?”

“하하, 굳이 그렇다 말은 하지 않겠지만 분명히 그렇겠지요.”

의외로 카렐은 선선히 동의한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나누었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해준다.

그렇겠지, 공식적인 사절이 아닐 뿐이지 누가 보아도 의도는 명확하다.

다만 공식 사절이었다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좀 더 격식을 차리고 서로의 속마음을 모르는 척 의뭉을 떨었겠지만.

나는 군인이지 정치가나 외교관은 아니다. 다만 국가간의 외교는 사실상 물 밑 교섭을 통해 결론이 내려지고, 그 후에야 공식적인 만남을 가진다는 것은 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높은 분들이 하는 협상은 사실상 요식행위라는 말이지. 이전에 실무자들이 끝내놓은 이야기를 재탕할 뿐이다.

그렇다면 카렐 경은 이 첫 접촉의 사절로서 괜찮은 인선이라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쪽 사람들과 얼굴도 익히고 있고, 최근 엘랑키아의 적대 행위에는 참여하지도 않았고. 한때 서로 싸운적은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원만하게 해결되었다곧 볼 수 있으니까.

내 경우는 좀 미안함마저 느끼고 있었고 말이지.

“그래서, 콘도티에레 에트의 의견이 들어보고 싶었어요.”

“제 의견 말입니까? 저는 그냥 군대 밥 먹는 용병인데요···.”

“그렇지 않아요.”

“콘도티에레의 의견이 듣고 싶어요!”

내가 거절의 의사를 보이자, 아쥬흐와 아실 두 사람은 열심히 고개를 저어 그렇지 않음을 전달한다. 비슷하게 생긴 남매가 나란히 그러니··· 뭔가 설득당하네.

흐음··· 나는 잠시 머리속으로 생각을 정리해본다.

사실 막연하나마 전부터 생각은 해오고 있던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입 밖으로 꺼낼 이야기가 아니라 조심하고는 있었다만.

“제 의견이 참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블랑독은 전쟁 이전의 평화롭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생각합니다.”

“허어···.”

내 말에, 카렐은 상당히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아쥬흐와 아실의 눈치도 슬쩍 보았으나, 둘은 얌전히 미소만 지으며 내 의견을 듣고 있었다.

“저는 잘은 모르지만, 블랑독의 새로운 패자로서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죠, 전쟁 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이미 매우 큰 요구인데요. 많은 주민들이 삶의 터전과 재산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또 전장에서, 성전군의 학살로 부당하게 목숨마저 잃었지요.”

“···합당하신 말씀입니다.”

“전쟁 이전으로 되돌린다 하는 것은, 이렇듯 파괴된 삶과 평화 또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에트 경, 트랑카벨의 자제분들.”

진심으로 미안했는지, 카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다.

그렇지. 전쟁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 최전선의 파괴된 정착지를 눈으로 보지 않은 사람들은 놓치기 쉽다.

평화적으로 지도 위의 국경선을 새로 그을 뿐인 일이라도, 그 지도 위에 사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큰 일인 것이다.

하물며 그 원인이 전쟁과 학살이라면야.

단순히 전쟁 이전의 국경선을 다시 긋고 영주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뻑이 아니라, 애초에 그런 정도는 블랑독 연맹군의 힘으로 자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고.

“부끄럽지만, 제 의도는 트랑카벨 가문이 새롭게 가지게 된 영향력을 바탕으로 엘랑키아 정부에 이권을 요구하실 생각은 없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이권이라면, 작위나 통치권 같은 것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확실히, 현재 트랑카벨 가문은 현재 엘랑키아의 그 어떤 단일 귀족 가문 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힘의 근원이 영지 밖에서 나오는 것이라 계속 유지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때문에 변경 지역의 대형 자작령을 한 가문에서 네 개나 들고있는 트랑카벨 가문의 형세는 정말 변칙적인 상황이라고도 하겠다.

보통은 이런 상황이라면, 계승 과정에서 자식이나 사위 등으로 작위가 흩어지게 마련이니까.

백작등 통상 대귀족으로 칭해지는 높은 위상의 상위 작위가 필요한 때가 이 시점이다. 한 번 가문이 손에 넣은 힘, 즉 작위와 영토를 다시 분산시키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분명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현재 트랑카벨 가문에도 작위가 필요한가··· 라고 하면 400년 동안 없이도 잘 살았는데 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당사자가 높은 신분 상승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야 작위 자체가 큰 보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내부 경쟁이 싫어서 전쟁 대신 장사를 선택했던 아롱드 영감님이?

아마 엘랑키아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이 분명할 아쥬흐가?

아실의 경우는 글쎄,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겪어온 바로는 고위 작위를 손에 넣고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응 역시 아니야.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높은 작위 주고 모양새만 그럴싸한 책임 떠넘긴다고 신나할 사람이 여기 아무도 없어.

“...제가 거기까지나 의견을 내는 게 정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블랑독의 격이 올라가면 드 레뮤즈 백작가와 척을 지게 될텐데요?”

명목상 블랑독 대부분은 드 레뮤즈 백작의 관할지니까 말이다.

문득, 엘랑키아 왕실에서는 일 안하는 드 레뮤즈 가문에 징벌하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그러면 전쟁 이전 상황으로 돌아간다는 취지에도 어긋나는데 말이다.

아롱드 영감님이 젊은 시절, 가문의 영향력을 낮추면서도 피하려고 하던 블랑독 내부의 대립이 다시 생길지도 모르니까.

···요는 현재 트랑카벨 가문은 가문으로서의 격 말고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정부에 딱히 요구할 게 없다는 것이다.

주디칼리 시절에, 농장 운영이나 상업으로 큰 돈을 만지게 된 도시 부호들이 도시국가 정부에서 내리는 귀족위를 거절한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귀족위가 싫었다기 보다는, 작위에 딸려오는 의무가 싫었던 것이다.

때문에 정부의 최후통첩을 거부하고 벌금까지 내면서도 귀족의 반열에 오르지 안흥려고 기를 쓰는 신흥 부자들의 모습은 일종의 코미디였지.

나도 뭐, 도시국가에 고용되고 나서 당면한 군사적 위협을 처리하고 나면 종종 작위니 준귀족위니 주겠다는 제안을 제법 받았었다.

지역에 정착하거나, 향후 계약을 좀 더 유리하게 하고 싶다 그런 의도였겠지.

그런데 그걸 제안한 양반들은 그게 나나 슈토르히 용병단에게 어떤 메리트가 있다 생각한 것인지 의문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스케일은 좀 다르지만, 국가에 원하는 것이라고는 ‘그냥 놔 둬라’ 뿐이라는 점은 좀 비슷하네.

“하하, 이것 참···.”

카렐이 약간 쓰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용병을 고용한 귀족과, 고용된 용병이 똑같은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내가 오기 전에 나눈 이야기 말인가.

내가 살짝 놀라서 아쥬흐의 얼굴을 바라보니, 평소와 크게 다르진 않아 보인다.

앗, 아니다. 유난히 기뻐 보이는데? 파란 눈이 평소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기도 하고.

“위 아래가 이렇게 한가지 생각을 하고 계시니, 외부에서 어설프게 분석하고 틈을 노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겠네요. 이게 정말 말 없이도 마음이 통한다··· 이런 거겠지요?”

흠, 글쎄··· 어떠려나.

굳이 마음이 통한다고 하기 보다는,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한 사람이 같은 상황에 대해 결론을 내리니 그런 게 아닐까.

다행히 아쥬흐가 기분이 좋아 보이니 그냥 넘어가자.

“그럼 이쯤에서 나머지 질문을 하나 더 드려야겠습니다.”

“어떤 질문이죠?”

우리가 궁금해하자, 카렐은 다시 어색하고도 쓴 미소를 짓으며 망설인다.

“트랑카벨 가문의 콘도티에레, 에트 경에 대한 질문입니다.”

응? 나에게 질문이라고?

비공식이지만 사실상 왕국 정부에서 보낸 외교관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