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타버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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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베트르 경, 소베트르 경.”
“무슨 일인가?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소베트르 경.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늦은 밤, 잠을 청하려는 소베트르 드 랑두제 ‘전 남작’의 막사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막사 밖으로 나가보니 젊은 기사들이 주변에 둘러 서 있었다. 못해도 열 명은 되어보인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소베트르 경!”
“아닐세, 말해보게.”
그들은 모두 소베트르의 부하들이다.
여울목 전투에서 패전한 후, 남작위와 영지를 모두 자식에게 물려주고 은퇴하려 했던 그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찾아온 주군, 라몽 드 레뮤즈 백작에게 불려와 팔자에도 없는 백작가의 기병대장 일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체 그 자리에 왜 앉아있는지도 모를 그였으나, 부하들만은 훌륭한 청년들이었다. 열성적으로 훈련에 임하고 매사에 성실한 그들을 보면 백작가의 미래도 밝아보인다.
···그럴 수록 자신이 이런 젊은이들을 지휘한다는 것이 그들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됐지만 말이다.
“소베트르 경, 이번에는 정말로 전쟁 중인 블랑독을 향해 출정한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대표격으로 보이는 젊은 기사가 질문한다. 아직 스물은 되었나 싶은 젊은 기사였다.
“그걸 어째서 묻나?”
“저희는 라몽 백작님의 명령에 따라 무장했고, 고향을 떠나 이곳에 주둔한지 제법 오래 지났습니다! 그래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흐음··· 뭐가 궁금한가.”
“이번 출정은 전투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전처럼 훈련이나 순찰을 위한 것입니까?”
혹시라도 겁을 먹었나 싶었지만, 초롱초롱한 젊은, 아니 어린 기사의 눈에서는 두려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매우, 절대적으로 순수한 열정과 충성.
그리고 젊기에, 그리고 무지하기에 가질 수 있는 빛나는 무언가만이 느껴질 뿐.
이미 열정은 몽땅 타버리고, 스스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라 생각하는 소베트르 까지도 가슴 뛰게 만드는 무언가가 엿보인다.
이해가 가긴 한다. 그들은 최근, 유난히 잦은 훈련에 시달렸었기 때문이다.
기동 훈련과 진형 훈련은 물론, 대기 상태에서 갑자기 소집되는 결진 훈련까지.
아무리 훈련이 기사, 군인의 중요한 본분이라고는 하나,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모를 훈련을 계속하는 것은 이미 어느정도 준비된 젊은 기사들에게는 지겨울 수도 있겠다.
“우리와 같은 기사들은, 오로지 주군의 뜻에 따를 뿐이다. 나아가는 것도 물러서는 것도 주군의 명령에 달린 것이 아니겠나?”
“그, 그렇습니다만··· 저희는 백작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소베트르가 짐짓 엄격한 투로 말하자, 젊은 기사들이 갑자기 주눅이 들며 우물쭈물한다. 물론 그런 의도야 아니었겠지. 선량하고 충성스러운 부하들이다. 괜한 소리를 해서 괴롭혔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번에는 백작님의 결심이 아주 굳어 보였으니, 조만간 다른 소식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 역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드디어! 르다쇠르 후작께서도 우리 드 레뮤즈를 돕기 위해 출발하셨다고 하더니!”
젊은 기사들은 마치 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좋아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장에 이르렀을 때도 이러한 용기를 유지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들 중에서도 결국에는 집에 돌아가지 못할 사망자가 생길 것이라 생각하니 괜히 우울해졌다.
“그런데 르다쇠르 후작이라니··· 그건 무슨 이야기인가?”
“옛, 소베트르 경. 저희 누님이 르다쇠르 후작가의 기사에게 시집갔습니다. 매형 말씀이, 조만간 후작가의 군대가 합류할 예정이라 합니다.”
“...그렇군. 다 백작님께서 생각하신 게 있겠지. 시간이 늦었군, 귀관들도 돌아가서 쉬도록.”
“알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소베트르 경!”
젊은 부하들을 돌려 보낸 후, 소베트르는 막사에 홀로 남아 생각한다.
부하들 앞에서는 당당하고 무심한 척을 했으나, 그는 본질적으로 겁쟁이다. 그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무척 겁이 난다.
여울목의 전투에서 상대했던,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 아무리 때려도 쓰러지지 않고 역으로 반격해오던 트랑카벨의 군대가 생각났다.
당시에도 강적이라 생각은 했으나, 최근에는 법황의 군대까지 뼈도 못추리도록 전멸시켰다 들었다.
막연하나마, 이 정도라면 라몽 백작도 출정을 포기하겠거니 생각했다. 성전군과 양쪽에서 협공을 해야 이길 가능성이 있지, 드 레뮤즈 단독으로 뭘 어쩌자는 말인가.
그런데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의 주군은 상황이야 어떻게 되든 전쟁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드 르다쇠르 후작은 북서쪽에 넓은 영지를 가진 귀족이다. 드 레뮤즈와 우호 관계라는 것은 알고야 있었지만.
그 군대까지 동원한다는 것은 라몽 백작이 보통 결심을 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겠다.
“후우우···.”
다행히 그에게는 이제 챙길 것이 없어 다행이었다. 가문도 영지도 아들에게 물려주었으니.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각오도 못하고 의무를 방기할 정도로 덜 떨어진 사내 또한 아니다.
주군이 명령하면 그렇게 행동하자 결정했을 뿐.
내일은 그의 든든한 동지이자, 가문 전체에서 신뢰 받는 책사인 아인멜츠 군에게 다녀와야겠다. 그 친구라면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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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캐한 탄내가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전해진다.
친구의 부탁을 받아 비공식 사절의 임무를 받고 엘랑키아의 절반을 횡단한 후에야, 비로소 목적지에 도달했다.
카렐 드 상포리앙은 전투가 끝나고 이틀 후, 마르사코르 언덕 부근의 블랑독 연맹군 주둔지에 도착했다.
“세상에··· 언덕 비탈에 저게 다 포탄 자국입니까?”
“언덕이 새까맣게 불에 탔네요···.”
이미 전투가 끝나고 전장 정리도 마무리 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전장에는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미 대포는 철거하고 화약도 치워졌으나, 여전히 화약 냄새가 물씬 풍기는 포대의 곁을 지난다.
그 너머에는 엄청난 양의 투구와 갑옷이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적의 시체로부터 노획한 물건인지, 상당수가 구멍이 뚫리거나 우그러지는 등 망가져있었으며 붉거나 검은 색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붉은 색은 혈흔, 검은 색은 불에 탄 재가 묻은 자국이겠지.
지난 전투에서 대체 얼마나 많은 적을 쓰러뜨렸을까? 5천? 1만?
카렐은 자신이 경험한 처음이자 유일한 전투였던 리니 능선 전투를 생각해본다. 당시만 해도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던 자신이 생각난다.
갑자기 심장 부근이 쿡쿡 쑤셔오지만, 다행히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어설프게 갑주를 단단하게 만드는 기프트를 쓰며 자랑스럽게 출전했던 자신은 결국 심장에 총알을 맞고 꼴사납게 기절했었다.
결국 그가 기절한 사이 전투는 완전히 패했고, 그를 따르던 상포리앙 가문의 가신과 병사들은 수십 명이나 죽거나 다쳤다. 그나마 대다수는 도망치거나 포로로 잡혔다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었지만.
당시로서는 크고 격렬했던 전투로 기억했으나, 여기서 벌어졌을 전투의 규모와 격렬함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경험했던 전투는 소꿉장난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한가롭게 쉬고 있는 비번인 병사들이 지나가는 카렐과 호위 기사들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본다.
그들이 입은 복장은 어딘가 눈에 익다. 전장에서 마주했던 그 복장이기 때문이다.
분명 트랑카벨 가문의 병사들이겠지. 당시에 전장에서 적으로 만났던. 기프트를 쓰고 저들이 만든 창벽을 뚫어보려 안간힘을 쓰던 때가 생각난다.
당시에는 저들이 입은 갑옷도, 무기도 번쩍번쩍 빛나는 새것이었다.
병사들도 동작 하나하나가 어눌하고도 어색한 신병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갑옷과 무기에는 그간의 경험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실전적인 흔적이 역력하다.
여유있어 보이되, 날카로운 눈빛은 이들이 몇 번이나 사선을 넘었음을 보여준다.
갑자기 겁이 덜컥난다. 과거, 그가 적대해서 싸웠던 이들이 이렇게나 커지고 강해졌다. 엘랑키아의 국왕도, 교단의 법황도 싸워 이길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카렐 자신은 무엇을 했던가. 이런 생각을 하니, 괜히 트랑카벨 병사들과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어졌다.
물론 그들이 악의를 가지거나 위협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쪽을 보고 있기는 하나 그저 낯선 방문자를 호기심으로 살피는 정도겠지.
아직 순박한 인상이 남아있는 청년들이다. 그러나 불과 며칠 전, 마르사코르 언덕의 비탈에서 적군을 수천 명이나 쓰러뜨린 청년들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고향을 침범한 적을 상대로 완강하게 싸워, 언제라도 참살해 버릴 준비가 된 용사들이다.
...조금만 더 운이 없었다면, 자신도 그렇게 되었을지 모른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자랑스러운 갑옷도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저 고철 더미 어딘가에서 굴러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전투가 끝나고 만났던 당시의 지휘관, 아실 트랑카벨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심장을 멈추게 만들었던, 용병대장 에트는?
그들도 이렇게나 변했을까.
“카렐 경! 오랜만이네요!”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호위병들에게 안내받은 천막 안에서, 트랑카벨의 계승자 아실은 여전히 활짝 웃는 얼굴로 카렐을 맞이해 주었다.
화사한 금발도, 청년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어려보이는 얼굴도 그대로이다. 다만 키가 조금 자라고 늠름해진 분위기는 확실히 알겠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군의 지휘관이 분명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경험이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콘도티에레... 에트 경께서도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아실은 자신의 누나를 소개한다.
“아쥬흐 트랑카벨이에요. 아롱드 트랑카벨 가주님의 손녀입니다.”
“카렐 드 상포리앙입니다.”
화사한 금발과 파란 눈, 섬세한 눈매를 가진 미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단순히 금발벽안 뿐 아니라, 이목구비도 닮은 부분이 많아 누가 봐도 남매란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둘 다 솜씨 좋은 화가가 일부러 보기 좋게 공들여 그리기라도 한듯, 특출난 미녀와 미남이다. 분명 신에게 축복받은 이들이 있다면 트랑카벨의 남매는 그 중 하나가 분명하겠지.
다만 그 표정이라 해야할지, 기운이라 해야할지.
활짝 웃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카렐은 미묘하게 다른 점을 느꼈다.
아실이 그저 자신에게 호의만을 보여오고 있다면, 아쥬흐는 자신을 평가하고 속마음을 들여다 보는 느낌이라고 하겠다.
“사실 저는 오랜 친구인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궁금한 게 있는 것 같”
“에티엔··· 공작님이요?”
아쥬흐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에티엔 공작은 샹다메리 전투의 패장이면서도, 블랑독 지방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지는 않고 있는 대귀족이다.
개인적으로 아쥬흐 트랑카벨에게 청혼을 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대립하는 관계이니, 아마도 가문 대 가문으로 공식 사절을 보내기에는 다소 껄끄러운 면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카렐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말하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친구인 에티엔과 협의 된 사항이기도 했고.
최소한, 카렐은 남의 눈치를 보고 떠보는 듯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 ‘사절’ 역할을 할 뿐이다.
“사절이시라면, 트랑카벨 가문에 대한 사절이신가요?”
“맞습니다. 다만 카르카냑에서 아롱드 가주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이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셨군요···.”
“손자분들, 그리고 콘도티에레 공과 이야기를 꼭 나누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아실과 아쥬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단순한 문안 인사는 아니겠지.
“그럼, 카렐 경은 어떤 안건을 가지고 오신 건가요? 앗··· 콘도티에레께서 아직 안 오셨는데 이야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누님?”
“흠··· 오고 계시다고 하니까, 우선 어떤 내용인지 들어나 볼까요?”
아실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아쥬흐가 고개를 끄덕인다.
카렐은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다만 제가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현재 제 친구··· 에티엔 공작이 엘랑키아 국왕 폐하의 어전 회의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아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쥬흐는 바로 알아챘고, 아실 역시 금방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 하다.
카렐의 질문은 에티엔의 질문이고, 에티엔의 질문은 국왕의 질문이라는 이야기겠지.
“향후, 블랑독의 패자가 된 트랑카벨은 무엇을 원하실 생각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