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타버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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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독 북부, 마르사코르 언덕에서 거대한 전투의 승패가 갈렸다.
단순 규모 면에서도 양측이 합쳐 3만에 가까운 엄청난 병력이었다.
바로 얼마 전 블랑독에서 연이어서 벌어졌던 샹다메리 전투, 아넥시 전투를 포함해 최근 십수년 동안 엘랑키아 남부와 주디칼리 북부 등 인근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전투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과거의 라솔 침공전이나, 최근 나우데사에서 벌어졌던 북방 전쟁 정도는 되어야 비슷한 규모에 이를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참여 병력이 많았다는 것만으로 ‘거대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전투는 수 많은 목숨을, 군주와 국가의 권력을 끝내버린다.
때로는 하나의 시대를 끝장내기도 한다.
반면에 그만큼, 새로운 시대의 시작점이 되는 경우도 많고.
그것도 전투에 직접 참여한 당사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엘랑키아의 수도, 베르마유의 왕성에서도 전투의 결과가 전해지자마자 비공식적인 어전회의가 열렸다.
“세상에, 또 이겨 버릴 줄이야.”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감탄했다.
게다가 그냥 이긴 게 아니다.
“그것도 아주 박살을 내서 사실상 전멸시켰다고 하지요. 유리한 장소랍시고 언덕을 골랐는데, 정작 거기가 도망 못 갈 올가미였던 겁니다!”
왕국군 원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이 자못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 약간의 흥분이 묻어있었다.
“저도 타비뇽의 소식통을 통해 그렇게 들었습니다. 정말 생존자가 얼마 없을 정도로 전멸 상태라고 합니다. ···남부로 출전했던 우리 군은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정말.”
재상 뮈르텔이 안도하면서 하는 말을 들으며, 다고베르 2세는 갑자기 등 뒤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다.
샹다메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귀환했던, 용병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의 귀족인 도니 드 리모제 백작이 넌지시 했던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적이 더 마음 먹고 포위망을 좁혔다면 훨씬 피가 많이 흘렀을 겁니다. 적의 병력 운용에는 망설임이 느껴졌습니다.’
설마 적은 ‘적절한 시점에서 승패가 갈리도록’ 조율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설마 그렇지는 않았겠지. 다고베르 2세는 애써 불편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거대한 봉건 군대의 패배는, 자칫하면 통치 권력의 불안과 직결된다.
물론 전쟁을 말아먹은 군주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것도 맞지만, 봉건 군대의 지휘 계급이 곧 봉건 사회의 통치 계급이라는 점 때문이다.
어느 권세가의 후계자가 갑자기 죽으면 필연적으로 없어도 될 알력이 생긴다.
가령, 큰 형이 ‘정당한 후계자’인 아무 문제가 없는 집안을 가정하자. 그런데 갑자기 큰 형이 죽고, 둘째 형이 계승자가 되면갑자기 셋째 넷째가 욕심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특히 계승률에 따라 가문 외부로 계승권이 나가버린다면?
이건 반드시 분란이 생긴다. 크나큰 권력과 재력이 묶여있는 귀족 가문의 계승권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니까.
당장 샹다메리에서 가주나 후계자의 전사가 확인된 귀족 가문에 분쟁이 생겨, 왕실이 조정에 나서기도 했으니까.
어쨌든 샹다메리에서의 적장이 사상자 규모도 마음대로 조절할 정도로 엄청난 능력자는 아니라 해도, 확실히 그들의 행보는 엘랑키아 왕실을 가능한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만약에 트랑카벨 가문이 샹다메리에서 사로잡은 백 명이 넘는 대소 귀족들을 포로로 하지 않고 학살했다면?
아니, 더더욱 최악으로 가주나 계승자들을 포로로 잡아두고, 발만 동동구르는 가문을 쥐고 흔들었다면?
엘랑키아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는 일이기에, 왕실로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밖에 없어진다. 지금처럼 종교 핑계를 댄 제한전이 아니라 반역자를 토벌하는 철저한 전쟁이 되겠지.
이게 국가로서의 엘랑키아에도, 왕실에게도, 남부 블랑독에도 도움이 안 되는 건 당연하다.
다행히도 포로들은 계급 고하를 무관하고 안절하고 건강하게 지내다 귀환했다. 몸값을 받기는 했으나, 상식선이었고.
···역시 그들의 진의는 엘랑키아 왕실과 적대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맞기는 한 것 같다.
이번 비공식 어전회의의 참여자는 모두 네 명. 갑자기 남부로부터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소집된 회의였기에, 마침 베르마유에 머물고 있는 중신들만이 모일 수 있었다.
국왕. 다고베르 드 팔라스 2세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
왕국군 원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
외무대신. 장듀 드 퀴슈 후작
블랑독 지방에 대한 대책을 의논했던 이전의 정식 어전회의에 참여했던 핵심 멤버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겨도 정말 너무 크게 이겨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외무대신 장듀 후작의 목소리는 조심스럽다. 타국과의 관계 전문과인 그는 역시 상황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를 단순히 ‘엘랑키아 계열 세력’이 외부 세력을 상대로 크게 이긴, 통쾌한 승리로 생각해도 되느냐 하는 입장이다.
이번 승리로 인해, 법황을 비롯한 외세가 엘랑키아에 미치는 영향력은 현저하게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트랑카벨 가문으로 대표되는 블랑독 지방에 엘랑키아 왕실이 미치는 영향력 또한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남다른 무력과 실적, 그리고 ‘정당성’을 획득한 트랑카벨 가문이 대체 어떻게 나올 것이냐··· 하는 문제도 생겼다.
“국왕 입장에서 이런 말 하기가 민망하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경들의 의견이 듣고 싶군. 과연 엘랑키아 왕국이 블랑독 지방을 무력으로 제압을 할 수는 있다 생각하시오?”
“....”
다고베르 2세의 말에 모두가 침통한 표정이 된다.
단순한 경제력, 군사력, 정통성으로만 따지자면 승부가 되지 않는다.
그야 힘으로 싸운다면 언젠가는 이길 것이다. 이길 수밖에 없다. 다고베르 2세의 질문은 이런 의미는 아닐 것이다.
설령 이긴다고 해도,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상처투성이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귀중한 왕실군의 정예를 소모한 끝에 얻은 무의미한 승리.
일제히 침묵하는 중신들의 태도는 그 자체가 명확한 대답이기도 했다.
“경들의 의견은 잘 들었소.”
다고베르 2세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중신들이 고개를 조아린다. 딱히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국왕 또한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기에.
“전쟁의 승패가··· 너무 빨리 결정되었습니다. 에티엔 공작께서 보낸 사절이 답변을 가져오지도 않았는데···.”
장듀 후작이 말하는 사절이란,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의 부탁을 받아 트랑카벨 가문으로 출발했던 카렐 드 상포리앙을 말한다.
아직 사절이 도착해서 상대 가문과 협의를 했는지도 모르는데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물론 특별한 권한은 없는, 상대의 의도를 떠 보려는 의도이긴 했으나.
당시에도 어느 정도의 양보와 인정은 불가피하다는 판단이었으나, 상대의 입지는 더 굳건해져버렸다.
“이래서는 저들이 어떤 요구를 먼저 해올지 불안해 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려.”
다고베르 2세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하지만 이내 분위기를 바꿔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
“그래도 법황이 보낸 병력이 사실상 궤멸했으니, 그룬발트 놈들은 이제 돌아가지 않겠소?”
국왕이 말하는 그룬발트 놈들이란, 뒤늦게 성전군 대열에 합류하려는 그룬발트 출신의 기사와 순례자들이다.
얼마 전, 그 선두가 엘랑키아 동부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었기 때문이다.
그룬발트가 엘랑키아 남부에서 멀기는 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늦은 합류였다.
얼마 전 전멸당한 성전군의 주력이 드라멜른 기사단이고, 드라멜른 기사단의 영지는 그룬발트 북부라는 점만 따져도 그렇다.
아마도 황제 선출 권한을 가진 그룬발트의 선제후들이 마지막 협의를 하고 있는 도중이기에, 대영주들이 함부로 병력을 동원하기 힘들다는 이유도 있었겠다.
하지만 엘랑키아 국왕군이 1차적으로 패퇴하는 바람에, ‘자기들이 먹을 만한 부분이 늘어났다’라는 생각으로 참여한 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이 엘랑키아 왕실의 신경을 건드리는 점이었다.
“그럴 것으로 생각됩니다. 애초에 병력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니까요.”
이번에는 재상 뮈르텔이 말했다. 성전을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라이벌 국가인 그룬발트의 군대가 엘랑키아 영토에 들어왔으니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라몽 드 레뮤즈 백작과 동맹을 맺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에둘러서 소문이라 표현하긴 했으나, 그게 사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토록 외세를 싫어하는 라몽 백작의 영토에 수천 명에 이르는 라솔 출신 기사단이 들어와 있었으니. 비밀이라고 숨겨질 일도 아니지만.
“트랑카벨에 이어서 드 레뮤즈인가! 벼락 맞을 남부인들! 건국왕 폐하께서는 무슨 수로 이 말도 안 듣는 인간들을 왕실의 권위 아래에 복속시켰을까요.”
다고베르 2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말대로, 명목상 엘랑키아의 영토인 남부의 귀족들은 죽어라고 왕실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대놓고 반역하거나 척을 지는 것도 아니었고.
“라몽 백작 그 사람은 트랑카벨을 칠 거였으면 우리 군에나 합류할 것이지!”
프레니히 백작이 하얀 수염을 떨며 혀를 쯧쯧 찼다. 드 레뮤즈 백작가는 실로 막강한 가문이다. 못해도 수천에 가까운 병력을 소집할 수 있으리라.
비참했던 샹다메리 전투의 승패를 뒤집을 수도 있는 전력임은 분명했다.
“나름의 계산이 있으니 그랬겠지만,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최근 들어 재상 뮈르텔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다름아닌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었다.
다른 세력들, 가령 트랑카벨 가문이라거나, 법황의 성전군 등은 나름의 일관된 상식과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라몽 백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처음에는 그냥 중립을 지키려나 싶었더니, 이제는 또 적극적으로 병력을 소집하고 라솔 계열의 종교 기사단과 손을 잡았다고 한다. 비밀리에 라솔 국왕의 황금이 흘러 들었다는 첩보도 있었다.
국왕과 법황의 여러 사절들의 요구에도 꿈쩍도 않던 그가 갑자기 이리 행동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엘랑키아 남부에서 드 레뮤즈 백작가의 위치는 너무도 거대하기에, 단순히 남부 변경의 이단 토벌 전쟁의 규모를 벗어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엘랑키아와 라솔이 전쟁에 돌입했는데 드 레뮤즈가 라솔의 편을 든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그때는 문제가 정말 심각해진다.
물론 아직 아무런 반역의 징후는 보이지 않고, 단순히 이웃 나라 국왕의 돈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반역의 뜻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지지리도 왕실의 말을 안 드는것과는 다르게 주변 엘랑키아 귀족들과는 사이가 꽤 좋은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드 레뮤즈 백작가는 남부에서는 나름 주변에서 리더로 통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립적인 조정자 역할이라고 합니다.”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고 들었소이다.”
“어이쿠, 프레니히 백작님, 그런 말씀은 실례이옵니다.”
외무대신 장듀 후작의 말은 사실이었다.
힘 있는 가문들 사이에 흔히 생기게 마련인 재산이나 영토, 계승 따위의 분쟁을 주변 귀족들이 나서서 중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데 부유한 편인 드 레뮤즈 백작가는 주변에 낮은 이자로 자금을 융통해주거나, 자연 재해 등으로 부족해진 자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양이라고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라몽 백작을 많이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사람인줄은 몰랐구려···.”
프레니히 백작이 진심으로 감탄한다.
“퉁명스럽지만 귀족적인 사람이다··· 라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서로 대귀족이다보니, 이런 저런 인연이 있어서 서로 얼굴 정도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하지만 공적인 관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일면이다.
간혹 있는 중요한 왕실 행사에서는 대귀족 줄 어딘가에 서서는, 찌푸린 얼굴로 대체 언제 끝나나 하는 표정이나 짓던 라몽 백작의 얼굴을 모두가 기억한다.
“설령, 라몽 백작이 이제와서 성전에 참여하려 마음을 먹었더라도 이번 전투의 소식을 들었으니 마음을 달리 먹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싶습니다. 듣기로는 라몽 백작이 트랑카벨 가문을 증오 수준으로 싫어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름 명석하고 현실적인 사람이니까요.”
어전회의의 참여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상식적인 판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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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출정은 예정대로 진행하겠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단호하게 말했다.
레뮤즈 성 동쪽으로 떨어진 주둔지에서, 막 마르사코르 언덕 전투의 소식을 들은 직후의 말이었다.
“아니, 이미 출정은 시작되어 선봉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라솔의 기사단과 약조한 사항이니 변경은 없다. 그리 알도록.”
“...알겠습니다, 백작님.”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휙 돌려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는 주군을 보면서, 드 레뮤즈의 가신들은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만의 힘으로, 국왕과 법황의 대군을 격파하며 자신을 증명한 트랑카벨의 군대와 맞서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