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36화 (236/556)

28-26. 마르사코르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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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프로니오 연대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삼면을 포위당해 계속 밀리는 와중에 화약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최초 방어선을 지키지 못해 후퇴 하면서 예비 화약을 충분히 챙기지 못한 게 뼈저리게 아픈 결과가 됐다. 이렇게 이틀 내내 전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크윽!”

“뒤로 빠져! 뒤로 빠져!”

“커허억!”

화약이 없는데 다른 의약품이 충분할 리 만무하다. 붕대도 없어서 대충 지저분한 천으로 상대를 감싸고 신음하는 부상자들이 늘어만 간다.

자신의 실수였다.

산악 통행권? 무역로 관세 이권? 법황의 후원과 지지?

엿이나 쳐먹으라지. 그 알량한 욕심이 조상 대대로 지켜온 안프로니오 대공국, 안프로니오 용병 연대를 끝장내게 생겼다.

모두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용병대장으로서, 부대를 편성하고 전투에서 싸우는 것은 익숙했다.

하지만 통치자로서는 엉망진창이었다. 한순간의 멍청한 판단이 자신도 부하들도 파멸하게 만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전투가 있다니. 어지간히 불리하면 후퇴하든지, 항복하든지.

용병의 비율이 많고, 고만고만한 이웃끼리 아웅다웅하는 전쟁이 많은 주디칼리에서는 그런 전쟁이 표준이니까.

안프로니오 연대가 주로 활동했던 그룬발트 선제후 끼리의 내전에서도, 좀 더 과격한 경우가 있지만 승패가 명확히 갈리면 마무리는 신속했다.

주디칼리의 지방 군벌들이나, 그룬발트의 선제후들이나 상대를 파멸시키는 목적으로 싸우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토든 계승이든 금전이든, 권리를 얻어내기 위한 전쟁이기에 피차 불필요한 희생은 피하고자 한다. 어차피 이기더라도 희생이 크다면 다른 이웃, 혹은 라이벌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이 전쟁은 좀 달랐다.

이름은 성스러운 전쟁이란다. 빌어먹을, 이렇게 포장지와 알맹이가 다른 상품은 본 적이 없다.

소년 시절, 선대 안프로니오 대공인 아버지의 막하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이후 겪어본 가장 성스럽지 않은, 오히려 역겨운 전쟁이었다.

민간인 거주지와 재산에 대한 약탈과 강제징발, 때로는 학살까지.

전쟁에서 종종 벌어지곤 하는 일이다. 다만 지역 치안이나 정치적 부담 때문에 가능한 자제할 뿐이다. 피차 끝장내려고 하는 전쟁도 아니기도 하고.

게다가··· 빌어먹게도 심지어 지고 있다. 그것도 처참하게.

역겨운 짓을 했으면 이기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나마 여유가 있을 때 일찌감치 북쪽으로 도망쳤어야 했다. 법황의 지지? 엿이나 먹으라지. 다 뒈져나간 후에야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런데 그 성스러운 법황의 사자라는 치들이 저지른 것은 이단자 색출이라는 이름을 붙인 살인과 약탈이었다.

그렇게 적을 도발한 결과가 지금 상황이다.

본대와의 연락이 끊긴지는 한참 지났다. 전령을 보내려면 보낼 수야 있겠으나, 언덕 위의 본진도 공세에 나섰고 서로 도와줄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혹시나 했던 공격은··· 예상대로 완전히 실패했다.

“대공 전하··· 화약이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됐나.”

정보 장교의 보고를 들으며 참담함을 느낀다. 단순히 보고 내용이 절망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아직 어려보이는 장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기 때문이다.

안프로니오 연대 구성원의 태반은 대공령의 신민들이다. 특히 가신 집안의 자제들은 나이가 차면 자연스럽게 입대해 커리어를 시작한다.

아마 지금 전장에서 숱하게 쓰러진 장병들은 이 어린 장교의 이웃과 친척들일 것이니까.

“후우···.”

아소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할만큼 했다. 지금까지 최소 세 배 이상의 적을 상대로 어떻게든 버텨왔다. 화약을 다 써버릴 정도로.

지금 당장이야 몰라도, 응사가 없다는 것을 적은 곧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면 대담하게 사격 거리를 줄이려 하겠지.

그대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거나. 혹은 다 포기하고 마지막 돌격이나 시도해 보거나.

어느 쪽이든 철저하게 학살당할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용맹한 돌격으로 기울어진 승기를 되돌리는 것은 전설에나 나올 이야기지.

현실은 피폐해진 약졸들의 발작적인 공세에 그칠 것이다. 전장에 안 서본 이들이 오해하기 쉬운 게 하나 있다.

사격 무기라는 게, 가까이에서 쏘면 더 잘 맞는다는 너무나도 뻔한 사실이다.

준비되지 않은 돌격은, 그저 가깝고 손쉬운 표적이 될 뿐이니까.

“백기를 올린다.”

“옛? 대, 대공 전하?”

“항복한다고 했다. 하얀 천이··· 여기 테이블보를 가져가거라.”

“...알겠습니다.”

“전 부대에도 전해라. 적극적인 전투 행위를 자제하라고.”

여기까지다. 용병으로서 할 만큼 했다. 희생이 얼마나 큰지, 보고를 듣기가 두려울 정도니까.

어린 장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예비 창대에 천을 묶어 깃발처럼 만들었다. 분하겠지만, 이것 외에 방법이 없음도 안다.

다만··· 적이 항복을 받아줄지가 걱정이다. 치열한 전투 와중에 적의 누군가가 백기를 확인하고, 결정권을 가진 지휘관에게 전달하는데 얼마나 걸릴까.

전달한다고 한들, 무시하고 몰살하는 쪽을 선택하지는 않을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우는 정신나간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많은 죽음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 ‘성스러운 전쟁’에는 그만큼의 당위성을 느끼지 못한다. 아소모 대공 자신도 그렇겠지만, 그의 부하들도.

하지만 그렇게 암울한 생각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적이 사격을 멈추었습니다! 사격을 멈추는 구령을 들었습니다!”

다행히 몇 분 지나지 않아, 희망적인 보고가 들려온다.

최소한 목숨은 붙여줄 모양이다. 목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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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 벨모제 보병 연대 소속의 중대장, 콜테 다비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욱, 후욱··· 크윽, 퇫!”

침을 뱉자, 걸쭉한 피 섞인 침과 함께 하얀 이빨 조각이 나온다.

턱이 견디기 힘들게 쑤셨다. 하지만 그래도 운이 좋았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왔으면 턱이 통째로 뜯겨 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오 아파라. 빌어먹을 놈.”

바닥에 나뒹구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철퇴를 보며, 욕지거리와 함께 남은 피 섞인 침을 마저 뱉는다.

그에게 철퇴를 휘둘렀던 가면 수도사는 지금 그의 발 밑에 하늘을 보고 누워있었다. 가면이 벗겨진 채, 한쪽 눈에 부러진 창 끝이 꽂힌 채로 말이다.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온 적 기병 돌격을 하필 정면으로 받아버렸던 콜테의 중대는 언덕에 올라와서 그 망할 놈의 가면 수도사들과 2차전을 붙었다.

적군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대열이 무너진 드라멜른 보병의 잔존 병력의 지원을 받으며, 몇 차례나 공격해왔다.

그러나 이미 대열이 붕괴된 데다가, 약기운이 떨어졌는지 어딘가 행동이 어설퍼진 드라멜른의 보병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창벽으로 밀어 붙이고 총병들의 지원을 받자 다리 부러진 의자처럼 비틀거리며 물러설 뿐이었다.

가면 수도사들로 이루어진 기마대는 그에 비해 훨씬 위험한 상대였다. 파도처럼 몇 차례나 오가면서 트랑카벨 군의 대열을 위협했으니까.

그러나 창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거기에 여유가 생긴 총병들이 끊임없이 사격을 퍼붓자 무의미하게 적의 시체만 쌓여갔다.

결국은 이겼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전진한 덕에, 적이 대열을 유지할 공간조차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방의 타오르는 숲으로 뛰어들거나, 창날의 벽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은 후자를 택했고 적의 신성한 시체더미는 높아져만 갔다.

그냥 이긴 것도 아니고, 2차전은 완벽한 승리였다. 그들 발 밑에 있는 수도복을 입은 시체들의 숫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가면 놈들 모가지 따면 카르카냑 오리진 한 잔씩 사기로 했는데, 이래서는 정말 파산할 수밖에 없겠다. 당장 그 자신도 고주망태가 되도록 퍼마셔야 할 판이고.

정말 두려움을 모르는 듯한 악마 같은 놈들이었다.

그래봤자, 좁은 공간에 밀릴대로 밀려 기동성을 상실하고 창병과 마주한 이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호락호락 당해주지는 않았다. 콜테의 중대원 중 셋 중 하나가 죽거나 크게 다쳐 이 자리에 서지 못했다.

작은 쇳조각을 쏘는 괴상한 화약 무기 때문에 크고 작은 부상자가 유난히 많았다. 콜테 자신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전투는 거의 끝났다.

아니 진작에 끝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적 후방의 숲은 아직도 활활타고 있었고, 그 열기는 적을 밀어붙여 언덕 위에 오른 트랑카벨 군 보병들에게도 생생히 느껴진다.

불타는 숲속에는 인간 모양의 숯덩이가 여럿 보인다. 몰릴대로 몰려 절망에 빠진 적들이 무모하게도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아니, 자살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상관 없었다. 항복하지 않아 줘서 오히려 고맙다고나 할까. 별로 살려두고 싶지 않은 놈들이니까.

불이 꺼진 지역을 통해서 빠져나간 자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의 중대가 맡은 지역은 아직 화염이 심하다. 이 거리에서도 이렇게 뜨거운데, 아마 다 타죽었을 것이다.

“아까 그 화상 심한 대머리는 어떻게 됐을까요?”

“누구? 아··· 그 가면 안쓴 덩치?”

“맞습니다. 얼굴이 하도 흉칙해서 그게 가면인줄 알았습니다.”

아까 말에 탄 채로 불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달려간 놈이 있긴 했다. 그놈은 뭔가 당황한 것 같았는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더니 포위망을 피해 달리다가 마지막에 불타는 숲으로 뛰어 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마 얼마 가지 못해 타죽었겠지.

아니, 생긴대로 불지옥에서 온 악마였다면 멀쩡히 살아 돌아갔으려나? 제발, 지옥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안 봤으면 싶은 꼬라지였지만.

“흐윽, 큭!”

“우우우··· 우으으으으···. 억!”

여기저기서 적 중상자의 목숨을 끊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중상자인지, 아닌데 죽은 척 하던 것인지는 모른다. 관심도 없고.

그렇게 좋아하는 신 곁으로 보내주니까, 일종의 봉사라고도 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수도사면 얌전히 수도원 방구석에서 기도나 할 것이지, 왜 남의 땅에 와서는.

정말 손톱만한 동정심도, 자비심도 생기지 않는다. 고통없이 죽여주는 게 충분한 자비지 뭐, 하는 생각만 들 뿐.

“어, 어라? 이거?”

“중대장님!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뭔데 그래?”

주변에 적도 없겠다, 자꾸 쿡쿡 쑤셔오는 얼굴의 상처를 더듬거리던 콜테는 부하의 부름에 발걸음을 옮긴다.

“이··· 이건?”

“그거··· 맞지요?”

유독 상처가 심한 가면 수도사 여럿이 한 군데 뭉치듯이 죽어있었다. 그 시체를 치우니, 아무리봐도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가냘픈 여인의 몸이 드러난 것이다.

원래도 하얀 피부는 죽은 듯 창백했으며, 총에 맞았는지, 흘러내린 피가 검은 수녀복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다름아닌, 증오스러운 쌍년, 아니 성녀였다.

“아직 살아있습니다!”

“이, 이건 살려야 된다! 군의관, 군의관 양반을 불러!”

“...그냥 죽게 두면 안됩니까? 개같은 년인데···.”

“죽여도 우리 영주따님이 죽여야지!”

“아, 그걸 생각 못했네! 제가 군의관 찾아오겠습니다!”

“시팔 여기서 죽으면 안되는데 이거··· 총 맞는 걸 못봤네.”

암, 아암! 절대로 편안하게 죽는 꼴은 못 본다. 혓바닥 놀린 죄값은 받아야지.

아.

그러고보니 이 쌍년을 붙잡으면 부하들에게 술집 빌려준다 했었다.

중대장 콜테는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살짝 땀이 나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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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추격은 불가야. 불 탄 숲 자체가 위험하기도 하고, 밤에는 오인 전투 위험성도 있으니까.”

“네에, 콘도티에레.”

내 단호한 말에, 첼레스티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대장들이 연명으로 올린 추격 건의를 거절한 참이다.

마르사코르 언덕 위의 소탕전이 끝났다. 시간은 이미 저녁이 되어 어둑해져 있었다.

적, 특히 종교 기사단 소속의 병력들이 격렬하게 저항해왔고 죽음이 예정된 전투에서도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집 대형을 풀고 추격전을 명령했다면 좀 더 빠르게 끝났을지도 모르지만, 이긴 줄 알고 추격과 약탈을 위해 밀집 대형을 풀었다가 역습당한 전투를 나는 많이 알고있다.

게다가 그렇지 않더라도 불필요한 희생이 늘어날 수 있었다. 우리 쪽이 압도적인 화력을 보유했는데 굳이 다가갈 이유가 무엇인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창벽을 유지하며, ‘딜러 포지션’인 총병으로 꾸준히 중거리 사격을 가해 완전히 붕괴시킨다.

마지막까지 침착하게 잘 싸워주었고.

소탕전 도중, 적이 불이 잦아든 통로를 찾아 퇴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약간이지만 안도감도 느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완전 섬멸을 못하는 건 아쉽지만.

게다가··· 지금도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숲을 보자면, 어떻게든 탈출한 적의 운명도 썩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어둠 속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만 봐도, 탈출로는 결코 안전하지 않아 보인다. 조금만 길을 잘못 들면 산불의 열기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겠지.

게다가 요행히 적이 빠져나가면 블랑독 북부까지 추격하도록 명령을 내려놓은 책임자가 다름아닌 그 로베르 경이니까.

그는 아주 기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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