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5. 마르사코르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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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에에엑···.”
쇄골 위쪽을 깊게 찔린 드라멜른 기사단 소속 보병이 눈을 까뒤집으며 끔찍한 단말마의 소리를 낸다.
단검을 역수로 잡고 깊이 밀어넣고 있던 트랑카벨 군 보병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다. 오히려 몸부림치는 적병의 상체를 힘껏 붙들며 단검을 더 깊게 찔러 넣는다.
그리고 휘젓는다. 희생자가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자극 때문인지 몸을 부들부들 떤다.
도대체 사람 몸 안쪽에서 나는 것 같지 않은 뿌드득 거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춘다.
막 적병을 살해한 병사는 이제 관심 없다는 듯, 적병의 검은 옷자락에 대충 칼날을 닦고는 시체를 밀친다. 움직임은 없으나 여전히 상처에서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오는 시체가 얼굴부터 언덕 비탈에 처박힌다.
처벅 처벅. 트랑카벨 영지군 보병들의 가죽 군화가 적병의 피로 질척해진 비탈을 밟으며 단호한 소리를 낸다.
그들의 뒤로, 퇴각전의 와중 낙오되어 덧없는 죽음을 당한 성전군 병사들의 시체들이 점점이 이어진다.
오늘의 트랑카벨 병사들은 유난히 무자비하다.
적을 바짝 따라가며, 낙오된 적들은 가차없이 참혹하게 살해한다.
전쟁이고 전투니 적을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여기저기서 훼손된 시체가 자주 보일 정도로 무기 사용이 잔인해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평생 살아온 고향이 짓밟힌, 불합리한 이유로 시작된 전쟁을 견뎌왔기 때문에.
많은 동료가 쓰러져간 힘든 격전의 끝에 마침내 복수의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성전군이 블랑독 북부에서 자행한 범죄 행위를 목도했었기 때문에.
전투가 거듭되면서 과격한 살해 행위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유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도 이유가 될 수 없기도 했다.
그러나 굳이 트랑카벨 가문 소속의 병사 뿐 아니라 블랑독 주민들 전반에서 법황의 성전군에 대한 증오심은 높은 편이다.
샹다메리 전투 때만 해도 가능한 포로로 잡으려 하고, 실제로 승패가 갈린 후에는 상호간의 살륙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양측에서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있고 해서 결국 상당수가 무사히 몸값을 내고 돌아갔고.
하지만 이번에는 명백하게 다르다. 양군 병사들 사이에는 채워지기 어려운 증오의 골이 존재한다.
포로 따위는 잡지 않겠다는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적을 추격해 나간다.
뒤처진 적은 대열에서 벗어난 추적자들의 손에 의해 아주 잔혹하게, 하지만 효율적으로 참살당한다. 마치 숲에 떨어진 장작이라도 줍듯 익숙해 보인다.
무기와 손을 피로 더럽힌 추적자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대열로 돌아간다. 그러면서도 주 대열의 추격은 늦춰서는 안되니까, 살륙에 취해있을 시간은 없었다.
마르사코르 언덕 비탈의 참혹한 유혈극은 아직 조금 더 진행되려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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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은 머리속으로 세우던 모든 계획을 또다시 폐기했다. 실낱과도 같았던 마지막 희망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승부사라는 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계획을 세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유리하면 유리한 대로.
불리하면 불리한 대로.
망했으면 망한 대로.
어떤 상황에서든 계획은 세워볼 법 하다. 누가 요구하지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해버리고야 만다.
마치 평생 나무만 다루어 온 장인 목수가 눈대중으로 완벽한 육각형을 깎아내는 것과 비견될까.
병사 한명, 무기 하나 무의미하게 낭비되는 것을 참고 보지 못하는 인종이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조금이라도 상황을 극복하거나, 적을 불리하게 만들 방도를 생각하게 된다.
라모리는 정확히 그런 케이스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그에게도 낯설었다. 계속해서 상황이 불리해지고, 그 속도는 그가 대응 계획을 세우는 속도보다 빨랐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잘만 하면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승리로의 가능성이 명확하게 보였다.
전투가 한창일 때에도, 완전한 승리는 아니더라도 적에게 대피해를 입히고 전술전략적인 목표를 완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카드를 써버린 직후. 자프론과 울터의 이중 공세가 완전히 실패한 후에도 희망을 가졌다. 최소한 적에게도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히는 것을 목표로.
적이 조금만 소극적으로 나왔다면, 한 번 더 병력을 추슬러 전선을 맞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라모리는 그간 여러차례 전장에서 충돌하면서, 적장의 성향이 상당히 조심스러운 편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약간의 유예를 얻을 수 있으리라 희망적인 관측을 했다.
결국 결과는 이 꼴이다. 적은 마치 아군이 총퇴각 화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병력이 빠지기가 무섭게 질서 정연하게 달라붙어왔다.
밀집 사각 대형은 굳건하지만, 그만큼 둔중하다. 이동 명령을 내려도 부대 구석구석에 명령이 전해지고 대열을 유지한 상태로 이동하려면 시간차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적은 거의 시간차 없이, 거의 동시에 전선을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 후퇴할 때 하나의 목숨이 희생되는 꼴이었다.
이럴 거였으면 그냥 후퇴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일부를 버림말로 놔두고 나머지만 후퇴했거나.
···게다가 그 버림말의 역할을 자인해서 하고 있는 부대가 있었다.
바로 자프론의 부대이다.
후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후퇴 명령도 가장 먼저 내려졌고, 희생이 있었을지라도 몸을 빼는건 분명히 가능했다. 자프론은 유능한 보병 지휘관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적진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퇴각하는 아군 전선의 상당부분에 부담이 경감되고 있었다.
그 대가는 자프론의 연대가 적진에 고립되어 녹아내리는 것이었지만.
전장에서 동료를, 부하를 잃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아무런 작전 행동도 안해도, 적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이 전쟁이다.
그러나 그런 용병에게도, 10년 이상을 함께해온 동료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은 아직 살아있다. 손이 닿는 위치에 있다. 지금이라도 지원 병력을 보내면 꺼내올 수 있을것도 같다.
“슬퍼 보여요, 라모리 경.”
바로 옆에서, 성녀 랑시아 아스트로메다가 말을 건다.
“저 고립된 부대··· 저기에는 소중한 부하가 남아계신 거겠죠? 그것도 다른 아군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서 남은 고결한 분이?”
마치 라모리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하는 것 처럼 말을 건다.
“구하러 가실 건가요?”
“...아군의 파멸을 담보로 할 정도로 소중한 부하는 없습니다.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하는 편이라서요.”
라모리는 안간힘을 짜내서, 감정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대답한다.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제가 들어본 가장 고귀한 거짓말이네요.”
성녀라서 그런 것인지, 그냥 통찰력이 뛰어난 것은지, 혹은 그저 라모리가 거짓말에 서툰 것인지.
그제서야 라모리는 적진을 돌파했다가 무사히 귀환한 성녀의 모습을 직시한다.
여전히 아름답고, 강인하고, 고귀해 보이는 성녀의 모습은 조금 더럽혀져 있었다.
항상 정갈했던 긴 성직자의 옷자락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피와 진흙으로 더럽혀져 있다. 은색으로 빛나는 흉갑에도, 투구 대신 쓴 철판이 덧대진 머리 수건에도 전투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 아수라장에서, 기병대의 절반 이상을 살려서 귀환한 것은 성녀의 공이 절반은 된다 하겠다.
자칫하면 완전히 분절되거나, 최악의 경우 돌파구가 닫힐 뻔 한 것을 억지로 비틀어 열어 병력을 빼냈다. 그렇게 적진에 고립될뻔 한 울터의 기병대가 상처투성이지만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무장 수도사대를 이끌어 묘기와도 같은 기동을 성공시킨 것은 성녀 랑시아의 판단이었다고 한다.
정말 주신이 내려준 남다른 통찰력인지, 어지간한 숙련도나 지식으로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퇴각 과정을 지켜본 라모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녀 랑시아는 전방 지휘관의 역할을 나름대로 해내고 있었다. 단순히 무모한 자살 공격으로 신도들을 내모는 얼간이 ‘신성한 선동꾼’들과는 분명 달랐다.
“라모리 경, 앞으로의 계획을 여쭈어도 될까요?”
“계획은 이미 모두 어그러졌습니다. 다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있습니다, 성녀님.”
“호오, 어떤 일일까요? 제가 도울 일이 있나요?”
자신보다 한참 어린, 그러나 교단의 서열 상 대륙 전체에서 손에 꼽히는 고귀한 존재인 성녀의 올곧은 눈이 피폐해진 라모리의 눈을 빤히 바라본다.
“...이제 이 전장에서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흐음··· 그렇군요.”
그녀는 놀라지도 않는다. 게다가, 라모리의 의도를 이해하고 대답하는 것 같아 오히려 놀랐다. 일부러 불친절하게 말했던 것인데.
누구를 살리고 죽일지를 결정한다.
즉, 누군가는 후위를 지키며 시간을 벌고, 누군가는 그 시간을 이용해 탈출한다.
···배후에는 화염이, 정면에는 적이 가득한 이런 상황에서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불가능하다면 라모리가 입에 올리지도 않았으리라.
“어디로 탈출하실 생각이신가요?”
“배후의 숲을 통해서입니다.”
“숲··· 산불이 난 숲을 말씀하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미 정찰병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불이 일찍 시작된 부분은 서서히 불이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에, 랑시아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손바닥을 치며 감탄했다.
“역시··· 주신께서는 언제나 길을 보여 주시네요.”
“하지만 아직 뜨겁고 불씨가 남아있습니다. 무사히 반대까지 길이 이어진다고 장담도 못하기도 합니다.”
나무는 높이에 따라 타는 속도가 다르다. 높은 나무가 먼저 타기 때문에, 자칫하면 숲의 구조에 따라 사람에게 더 위험할 수도 있다.
게다가 달아오른 열기와 떠도는 불씨는 기름 먹인 종이에 싸인 화약을 폭발시킬 수도 있었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식더라도 화약은 버리고 가야겠지.
거치적거리는 긴 무기도 물론이다. 대체 얼마나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정말 제가 보지 못한 점까지 꼼꼼하게 생각하시네요, 역시 법황께서 고르신 대장님 답습니다.”
“완전히 패배하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발버둥 칠 뿐입니다. 성녀님도 무사히 탈출해 주십시오. 저희 최후가 헛되지 않도록.”
갑자기 성녀 랑시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선다. 얼굴을 찡그린 상태로.
처음에는 이마에 손을 얹고 마지막 안수기도라도 하려는 것인가 했으나, 다음에 들려온 성녀의 말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인다라고 하셨지요?”
“예.”
“라모리 경은 살아서 돌아가야 합니다. 후위는 저희, 교단의 종복들이 맡을 거예요.”
“네··· 네?”
뜻밖의 소리에 라모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성녀는 잠시 자세를 바로하더니, 손바닥이 보이도록 자신에게 내밀고는 말하기 시작한다.
“신실한 신도이자 뛰어난 군인, 라모리 스텐던은 법황 성하께서 선택하신 그분의 대리자이니, 성녀 랑시아 아스트로메다를 포함한 우리 교단의 아이들은 그에게 무사히 법황 성하의 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다. 주와 영, 그리고 검의 대리자의 이름으로.”
약식이지만, 교단의 맹세이다. 또한, 교단과 관계된 이에 대한 ‘명령’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는.
“...무슨 뜻입니까, 성녀님.”
“간단합니다. 향후 우리 교단에 더욱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따져보았거든요.”
“성녀님만큼 필요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가요? 하핫···.”
성녀는 마치 예의를 전혀 배우지 못한 어린 아이처럼 웃었다. 그것이 성녀의 원래 모습인지, 아니면 이런 상황이기에 나오는 특별한 모습인지.
“라모리 경, 법황 성하와 독대하셨을 때 저에 대해서는 들으셨을텐데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라모리는 깜짝 놀랐다. 법황이 자신을 성전군 용병 지휘관으로 임명했을 때 해 주었던 말이 있다. 그런데 설마 성녀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그런 겁니다. ‘성녀’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랑시아 아스트로메다’는 아니어도 상관 없지요.”
“하지만 성녀의 자질이란···.”
말을 이어가려하자, 성녀가 고개를 저으며 막는다.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겠지. 사실 여기서 이렇게 입씨름을 할 틈이 없기는 하다.
“저희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그 사이에 라모리 경은 누구를 더 살릴지 생각을 해 주세요.”
“성녀님··· 성녀님?”
그러나 성녀는 말을 타고 휑하니 가버렸다.
어처구니 없는 숙제를 남긴 채.
성녀의 의도를 잘은 모르겠으나, 준비를 하긴 해야한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탈출을 위해 전령들이 다시 바쁘게 달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