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4. 마르사코르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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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티에레, 콘도티에레! 적이 후퇴하려 하고 있어요!”
아까부터 언덕의 적 병력 흐름이 심상치 않았는지, 유심히 보고 있던 첼레스티나가 고함을 빽 지른다.
아직 적 본대가 움직이고 있지는 않지만, 후퇴할것 같다는 징후를 느끼기는 했다.
그래서 첼레스티나에게 적정을 살펴주기를 부탁했던 참이다.
남달리 시력도 좋고 눈치도 빠른데다가 은근히 전쟁터가 돌아가는 생리도 잘 아는 첼레스티나니까. 믿고 맡겼고 누구보다도 빨리 눈치챘다.
아직 나나 다른 전방 지휘관, 참모들이 보지 못한 작은 차이를 첼레스티나가 먼저 확인한 것이겠지.
이제와서 보니 나도 보인다. 적의 형세를 굳이 설명하자면, 공격의 날개를 접고 몸의 약점을 가리며 수그리는 듯한 기세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됐다.
“주 전선 모든 전방 연대에 전령!”
“네에, 전령!”
“적이 후퇴하면 맞춰서 전진! 밀집 대열은 유지한다!!”
“적이 후퇴하면 맞춰서 전진, 밀집 대열 유지!”
“좋아, 부탁할게.”
“네에!”
적은 한번 물러서서 언덕 위에 새롭게 전선을 형성, 싸움을 한 번 더 해보려고 하겠지.
나라면 그럴 테니까. 사령관으로서 너무 앞서 판단하면 안되겠으나, 이미 승패는 기울었다.
그렇다면 패배한 군대의 지휘관이 거기서 뭘 더 할 수 있느냐는 것이겠지.
지금 언덕 위, 적의 후배지인 숲은 불바다였다. 애초에 후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패배에 직면한 지휘관이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당연히 증원 병력이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주신이 그놈의 신통력으로 언덕 위에 하늘의 군대라도 보내주지 않는 한은 말이다.
우리 쪽 성녀님이 무한한 지갑의 은혜로 실제로 병력을 먹이고 입혀서 보내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무튼 증원 병력은 절대 절대 불가능하고, 아직 휘하 병력이 남아 있다면 다음으로 절박한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을 다시 말하자면 ‘여유’라 하겠다. 패배하고 전멸에 몰린 부하 병력을 최대한 살려서 전투가 지속 가능하도록 재편성할 여유.
감히 내 다음 달 봉급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지금 적장은 간절하게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모든 연대에 전달할 내용은 동일해요. 적이 후퇴하면 맞춰서 전진! 밀집 대형 유지!”
“알겠습니다, 부관님!”
마침 첼레스티나가 전령들을 불러 모아 내 명령을 전달하고 있었다.
적장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줄 수는 없지.
전술 전략의 기본은 적이 싫어할 법한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 쪽에 제법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말과 선물로 상대의 호감을 사는 데엔 영 재능이 없다. 하지만 상대 열받게 만들고 욕먹을 하는 건 꽤 잘한다.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적장에게는 욕을 죽도록 먹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에 오기 전, 현대에서도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게임 뭣같이 하네’는 극찬이다.
적이 제발 추격해오지 않기를 바랐겠지만, 우리 전방 연대는 적이 물러선 만큼 따라가며 창날을 들이 댈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밀집 대형을 풀고 도망쳐야 하는데, 활로도 없고 기껏 도망쳐봐야 좁아 터진 언덕 꼭대기 평지다.
여기서 한 번 대형을 풀면 절대로 재결집이 불가능하니 그건 선택지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오늘 끝내자.
이 망할 놈의 신성한 전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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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의 직속 연대장, 기직스 미슈람 알메르타트는 욕설을 내뱉는다.
“빌어먹을, 벌어먹을! 뭐 하는 자식들이야!”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
어차피 목숨을 내놓고 용병 일을 하는 것,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긴 하다.
특히 기직스는 무서운 줄 모르고 최전방까지 자주 돌아다니는 편이다.
걱정이 많은 동료 연대장, 자프론 푸코데모스는 ‘전방에서 오갈 것이라면 그 눈에 띄는 비단 허리띠는 버려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나 죽으면 죽는 거고, 최소한 그 죽음이 쪽팔리는 죽음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 신념이다.
덕분에 바로 귀 옆을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적도 많고, 중상은 아닐지라도 부상을 입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방금처럼 진정한 죽음의 공포를 느꼇던 것은 처음이다.
전방의 적 연대는 겉으로 보기에 후줄근해 보였다. 자프론의 창병들이 밀어 붙이고, 기직스의 돌격대가 측면을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적 창병들의 기량은 정말 대단했다. 힘차게 공세를 취했던 자프론의 부하들이 자리 보전에 급급할 정도였다.
그러던 와중, 검과 방패로 무장한 적군의 소수 부대가 아군 대열에 난입했다. 요즘 세상에 검방 돌격대라니··· 적장의 머리는 대체 어디까지 고리타분한 것인지.
이들을 격퇴하는 것이야말로, 기직스가 이끄는 급조 돌격대가 맡을 최적의 임무였다. 아군 대열을 흔드는 이들을 제압하면, 위협요소를 제거하고 공격을 계속 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적으로 이쪽이 세 배 이상 많다.
절대로 질 리는 없다···.
라고 믿고 정면 충돌한 순간.
완전히 박살났다.
기직스의 휘하 병력의 선두가, 자신감이, 그리고 보병 전술은 나름 가닥이 있다는 자존심이.
적이 지금껏 지지부진했던 것은, 빽빽한 창벽에 끼어 좀처럼 전진할 수 없었다고 말이라도 하듯, 짧은 무기로 무장한 기직스의 부하들을 마구 쓸어버렸다.
2분도 안되는 시간 동안, 시대착오적인 큼직한 원형 방패를 들고 쇄도해온 적은 마치 제철 곡물을 수확이라도 하듯 성전군을 쓰러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함을 유지하며 전투의 주역이 되겠다던 베테랑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처음으로 전공을 세워 장사 밑천으로 삼겠다던 신병이 두 팔을 잃고 도망도 치지 못한 채 울부짖었다.
부하들의 진행 방향을 지휘하느라 선두에 나서있던 기직스 역시 그 때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특히 남들보다 배는 큰 방패를 휘두르며 사방으로 피와 피명을 흩날리던 괴수와도 같은 남자를 보았을 때는 심장이 얼어 붙는 것을 느꼈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방패에는 반쯤 지워진 짐승의 머리가 그려져 있었다.
대체 무엇일까. 인간이기는 한 것일까? 광신자들의 헛소리라 생각했던, 트랑카벨의 탕녀가 지옥에서 불러온 마귀병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연대장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던 호위병의 몸이 순간 허공으로 튕겨 오르더니, 두꺼운 가죽 조끼의 등 부분을 뚫고 뻘건 쇳조각이 튀어 나온다.
마치 꼬챙이형에 처해진 죄인처럼, 베세바의 불법 결투장에서 이름을 날린 검투사 출신이라는 호위병의 몸이 관통당한 것이다.
척추와 함께 숨통이 끊어진 그의 몸을, 그 마귀병은 망가진 인형을 버리듯 옆으로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솔직히 지려 버리는 줄 알았다.
그 상황에서도 지리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았던 것은 절반은 개똥같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요, 나머지 절반은 도망도 못할 정도로 공포에 사로잡힌 다리 때문이었다.
검을 어깨에 걸치고 권총을 뽑아 적을 겨누었지만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방패를 권총으로 뚫을 수 있나? 왠지 적의 몸을 맞춰도 한 발에 죽지 않을 거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에 확신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마귀병이 기직스를 덮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대장이 괴물에게 죽게 생기자 악을 쓰며 달려온 자신의 부하들과, 이대로는 안되겠다 생각했는지 다시 창벽으로 적을 견제한 자프론의 부하들 덕분이었다.
더 이상 날뛸 수 없게 된 마귀병은 졸개들과 함께 다시 방패의 벽 사이로 사라졌다. 처음 나타났을 때 처럼.
“시발··· 시바알!”
허리춤에 권총을 되돌리고 보니 장갑 안쪽이 땀으로 흥건한 게 느껴진다. 저딴 새끼한테 쫄았다니! 총까지 들고도 먼저 달려들지 못했다니!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기직스! 기직스 경!”
갑자기 익숙한,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자프론 경!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귀관을 찾았는데, 그 화려한 허리띠가 보이더군.”
“하하···.”
기직스는 허탈함에 쓰게 웃었다. 결국, 어떤 의미로 도움은 됐구나, 이 주디칼리에서 산 귀족 취향의 비싼 장식띠가.
“시간이 없소, 어서 후퇴하시오.”
“후퇴라니! 그럴 순 없습니다.”
“라모리 총대장께서 명령을 내리셨소. 어서 병력을 수습해 연대로 돌아가시오. 내가 후방을 지킬 테니.”
“무슨? 그럴 순 없습니다! 이럴 때일 수록 힘을 합쳐야···.”
“시간이 없다지 않았소. 지금 아군에서 멀쩡한 유일한 부대는 귀관의 연대 뿐이오. 2차 방어선을 만든다면 그 주축이 될 부대니까.”
자프론의 말은 평소보다 약간 빨랐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그 얼굴에는 깊은 고뇌의 주름이 가득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이 동료이자 대선배인 연대장의 표정을 보며 기직스가 느낀 점이다.
“아군은 졌소. 기병의 돌파는 실패했고, 드라멜른의 부대는 한계에 도달했으니. 지금부터 언덕 중턱으로 돌아간다 해도 절반이나 돌아갈 수 있을지.”
“그런···.”
“적이 호락호락 보내줄 기세가 아니니, 내 연대는 이미 늦었소. 부하의 절반을 버리고 후퇴할 수는 없소.”
“자프론 경!”
“자, 가시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단호한 모습으로, 유난히 말을 많이 한 자프론은 언덕 위쪽을 가리킨다.
“가서 총대장을 지키시오. 울터 경의 기병대도 어떻게든 살아 돌아온 모양이니, 둘이 함께라면 좀 더 싸워볼 수 있겠지.”
그리고 몸을 돌린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휘하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들어보니 지연전을 위한 사각 대형을 짜고 적의 추격을 늦추는 내용이다.
지금 상황에서 그 외의 선택지는 없으리라. 기직스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총대장과 울터 경에게 안부를 전해주시게!”
평소 말 없고 침착하던 선배 연대장의 말투가 아니었다. 여전히 높낮이는 거의 없었지만, 강한 의지와 열기가 느껴지는 말.
어쩌면 상관과 동료에 대한 마지막 하직 인사일지도 몰랐다.
“2차 방어선을 만들겠습니다! 남은 아군이 후퇴할 수 있도록!”
“알겠소.”
그 강한 의지를 이어 받은 기직스가 부하들을 수습해 퇴각을 명령한 다음 외쳤다. 자프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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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적 뒤에 딱 달라붙는 거다!”
트랑카벨 영지군, 제16 몽세나 보병 연대장 아리위스 드랭쿠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사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미 그의 부하들은 철저하게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마주하고 있던 적, 드라멜른의 기사단인지 뭔지 하는 약쟁이들은 무너지고 있었다.
우습게도, 조금 전까지 공포도 고통도 못 느끼는 듯 꼭두각시 인형처럼 창대를 맞대고 있던 녀석들이 후퇴가 시작되자 조금씩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황스러움, 두려움, 괴로움 등등.
마치 평생을 뜨거운 사막에서만 살았던 이가 처음으로 눈을 맞으면 저런 표정일까 싶은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다.
“대열을 맞춰 한번에 밀어 붙인다! 적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트랑카벨 영지군 최고령 연대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이유는 그 자신의 마음 속에 고여있는 터질것 같은 흥분을 내뱉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긴다! 우리가 이긴다!
봐라, 이게 내가 키운 병사들이다! 내가 연대장이다! 이 멋진 병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라고!
본심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차마 그렇게 외칠 수는 없었지만.
아리위스는 연대장 중 최고령일 뿐 아니라, 나이로 따지면 벨모제 성주이자 트랑카벨 가신단의 우두머리인 톨마르 마슈레 경과 같은 세대의 인물이다.
아직 젊었던 시절, 아롱드 자작의 명령을 받아 보잘것 없던 당시의 트랑카벨 영지군을 이끌고 종군하기도 했었다.
선대 엘랑키아 국왕의 고집에 따라 라솔까지 출전하기도 했었다.
파멸에 가까웠던 당시의 패전에서 살아남았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트랑카벨 군대가 전력 외 판정을 받아 후방에 머물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경애하는 트랑카벨 가문의 영주님과 그 손주들, 또한 존경하는 콘도티에레의 지휘를 받은 영지군은 최강이다.
얼마 전 국왕의 군대를 격파했고, 이제는 법황의 군대를 격파하기 직전이다.
대륙 최고의 권력자 둘의 군대를 연이어 격파하려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평생을 기사로서 가문을 섬겨온 아리위스로서는 가슴이 끓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측이 처진다!”
퍽!
지휘검을 들어 측면을 향하는데, 갑자기 둔한 충격이 복부에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니, 흉갑의 일부가 부서져 있다.
갑자기 찡 하는 소리와 함께 귀가 들리지 않는다. 참모 장교들이 고함을 질러대며 달려오는데 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왠지 휘청이는 것 같아서 검을 짚고 선다. 갑자기 입에서 비린 맛이 느껴진다.
“승리가 앞이니 멈추지 마라!”
노 연대장이 마지막으로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