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3. 마르사코르 언덕
분기탱천한 성전군 기병대의 ‘기병다운 돌격’은 가로막혔다.
트랑카벨 영지군 제8 벨모제 기병 연대의 '기병답지 않은 방어', 인간과 말로 이루어진 방벽에 말이다.
촘촘하게 늘어선 총기병들의 두 자루 권총 사격, 그리고 뒤에서 긴 총신을 내밀어 그 사이로 발사하는 용기병의 지원사격.
거리를 두고 이어지는 양 측면 용기병들의 측면 공격.
기세 좋고 돌격하던 성전군 기병대는 1분도 안되는 교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선봉을 이끌던 장교단과 베테랑 용병들을 거진 잃어버린 선두 부대는 기세를 잃어버렸다.
많은 상처를 입었으나, 아직 날카로움을 유지하던 창 끝은 이 때 결정적으로 무뎌졌다. 방패인줄 알았던 적군의 역습까지 허용하고 말았으니까.
“돌격!”
“후열은 장전! 장전 후 이동한다!”
“돌격! 적을 단숨에 몰아붙인다! 돌겨억!”
방금전까지 칼 같은 ‘기병 밀집 대형’으로 방어선의 핵심이던 총기병 대열이 갑자기 유동적으로 변하며 적을 밀어 붙인다.
지휘관의 돌격 명령을 복창하며 검을 비스듬한 전방으로 겨누고 성전군 기병을 덮친다.
퍽! 파각!”
까강! 챙!
이미 돌격력을 잃고 소극적으로 움직이던 성전군 선두 기병대가 통제를 되찾기 전에 사나운 기세로 파고든다.
말 자체가 주는 속도와 위치의 힘이 있기에, 기병이 휘두르는 검은, 특히 숙련된 기병의 검은 그 위력이 훨씬 강력하다.
툭툭 부딪치고 지나가는 것 같아도 그 무기에 실린 힘은 보기보다 강력하다.
특히나 트랑카벨 총기병의 주요 출신은 블랑독 남부의 귀족 자제들. 오히려 총기에 미숙하면 모를까, 어릴 때부터 승마와 검술을 배워온 인물들이다.
두 명의 기병이 스쳐 지나가자 퍼억 하고 젖은 천을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났다.
“으윽! 악!”
성전군 기병의 가죽 조끼가 갈라지고 쩌억 벌어진 상처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진다. 승마나 전투는 커녕, 생존조차 불가능할 큰 상처.
단단하게 얼굴과 무릎 아래를 제외한 신체 정면을 거의 다 보호한 블랑독 중기병과, 기본적인 투구와 흉갑을 빼면 가벼운 차림을 한 성전군 경기병 사이의 안정감 차이는 컸다.
서로 비슷하게 부딪쳐도 이쪽의 칼날은 흉갑을 뚫지 못하고 쇠 긁는 소리만 내는데, 저쪽의 검에 잘못 스치기만 해도 뼈에 닿을 정도로 깊은 상처가 난다.
말의 덩치나 높이에서 오는 격차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자칫하면 적의 공격을 막거나 말끼리 충돌해도 이쪽이 입는 피해가 더 큰 것이다.
첫 돌격에서 교환비는 절망적일 정도였다.
요행히 선두의 공격을 막고 일격이탈에 성공했다 해도, 뒤이은 2열, 3열이 강철의 파도처럼 몰려든다.
명백하게도, 개인의 기량만으로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렇게 성전군 기병대 선봉은 완전히 붕괴했다.
“블로켓 경이 전사하셨습니다! 우익이 퇴각하고 있습니다!”
성전군 기병 지휘관 울터 콜린스는 절망감을 느꼈다.
마치 고운 모래를 쥔 것처럼, 그가 쓸 수 있었던 수단이 하나 하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적의 중무장 총기병과의 교전에서 준비와 화력에 밀려 선두가 무너졌다면, 최소한 측면에서라도 이겼어야 했다.
그쪽은 정 반대로 가볍게 무장한 용기병들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화력에서 열세에 처하고 제대로 교전을 시작해보지도 못했다.
그대로 추적했다가는 또 어떤 적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일단 본대와의 연계가 끊기는건 기정사실이다. 때문에 측익 부대들은 아무런 성과 없이 후퇴했다.
그 와중에 노린 것인지, 혹은 유탄에 맞은 것인지 그 지휘관마저 사망했다.
지휘관이 사망했다는 것은 그 참모들도 함께 사망해, 더 이상 울터의 명령이 부대 구석까지 전달되지 않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와아아아아! 돌격! 돌격!”
“도망쳐! 아군이 전멸했다고!”
“크으윽! 싸우라고 머저리들아!”
“사, 살려줘··· 뭐 하는 거야?”
분노의 고함과 비참한 비명. 아비규환의 소음이 점점 가까워진다.
아무리 기병전에서 전선의 흐름이 유동적이라고 해도, 이쪽이 공격했는데 벌써 적이 본대까지 죽죽 밀고 들어왔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자신의 부대 편성 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부대 전체를 하나의 생물처럼, 완벽하게 조직해서 최소한의 시간차로 자신의 판단과 명령을 철저하게 전달한다.
그것이 울터가 평생을 전장에서 기병으로 지내면서 엮어낸 최강의 기병이었다.
더 숫자도 많고, 더 무장도 잘된 적을 기동성으로 제압한다는 것은 너무도 큰 매력이고 유혹이었다.
기병전에서 기동성이란 단순히 속도의 빠르고 느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최소한 적 만큼은 빨라야겠지만, 절대적인 속도보다는 필요에 따라 방향과 진형을 전환하고 대응하는 속도가 훨씬 중요했다.
그렇기에, 울터는 무엇보다도 그 점을 극대화 시켰다. 그를 믿고 따르는 부하들도 그랬기에 항상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의 실패, 한 번의 소모전으로 잃는 게 너무 많았다. 섬세하고 복잡한 구조이기에, 한 번 고장나면 복구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많은 장교와 부관들, 중대와 분견대는 각자 역할이 달랐기에 생긴 일이다.
블랑독에 들어와 크고 작은 패전이 이어지고, 병력을 보충하고 재편성할 여유가 생기지 않아 울터의 연대는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아니, 이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혹시 이번 전쟁에 출전하던 시기의 완편 연대였다면 달랐을까?
애초에 승패의 주요한 원인이 그것이긴 했을까?
적군의 전술은 지극히 단순했고, 부대원의 역할과 능력이 표준화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활용할 수 있는 전술.
선을 그어놓고 어떻게든 지킨다. 물론 말머리를 나란히 유지할 정도의 능숙한 승마술과 불굴의 용기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특별한 조직력이 필요하지는 않다.
평범하고 누구나 수행할 수 있지만.
훌륭한 지휘와 기강이 있기에 강한 전술.
실제로 순식간에 성전군 기병대의 절반이 붕괴 위기이다.
전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그리고 마치 잘 아는 것처럼 오만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연대장님! 적군이 바로 앞까지 왔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우익이 완전히 붕괴되어 도망치고 있습니다!”
묵직한 중갑옷으로 무장한 적군이 휘하 병력을 무너뜨리며 돌진해오고 있었다.
저들을 지나야만 적진을 돌파해온 자프론의 연대와 합류할 수 있는데. 오랜 전우를 당장은 도울 수 없을것 같았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최대한 적의 전력을 분산시키기라도 해야 한다.
우선은 살아남아야, 더 싸울 수 있겠지.
그런데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울터 경!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파랗게 질린 부관의 얼굴 너머로 무섭게 달려오는 적 기병의 모습이 보인다.
그대로 적진을 돌파해왔음을 과시라도 하듯, 점점이 피가 튄 갑주와 찐득한 핏덩이가 달라붙은 장검이 공포스럽다.
본진의 호위대와 참모들이 적 기병을 막기 위해 달려가지만 몇 명은 기어코 그 사이를 뚫고 달려 들어온다.
연대 내에서 가장 화려한 복장을 한 연대장 울터와 고급 장교들이 모여있는 지휘부이니, 전공을 노리는 기사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표적이겠지. 바로 옆에 연대기도 있었고.
울터는 검을 뽑는다. 언제 마지막으로 적과 백병전을 해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지휘관인 자신이 속한 본대가 난전에 휘말린 적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까지 적절하게 잘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번이 끝일지 모른다.
“이야아아아아!”
“피하십시오, 연대장!”
호위대가 밀리고, 적의 파도가 마침내 울터 자신에게도 닿으려고 한다.
이대로 죽을 생각은 없었기에 검을 겨누고 고삐를 당긴다. 막연하게나마 언젠가 전장에서 죽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투과곽! 파각!
백병전도 죽음도 각오한 울터가 마주 달려나가려 했을 때, 갑자기 자신을 노리고 달려오던 적이 기겁하며 멈춰선다.
거대한 철퇴가 휘둘러지고, 부러진 칼날이 허공을 가른다.
“이단자 놈들, 덤벼라아아!”
뒷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남다르게 거대한 덩치와 수도복, 그 위로 보이는 화상 투성이 대머리.
모스탈 수도원장 네부카디 델 카스트로소였다.
그대로 자루가 상당히 긴 철퇴를 마구 휘두르며 적을 몰아세운다. 양측이 마구 뒤섞이고 서로 여러 명이 말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분위기가 급변한다.
“울터 경!”
날카로운 미성이 어리둥절해있던 울터 콜린스의 고막을 때린다.
“서, 성녀!”
놀라서 존칭을 빼먹었다. 그러나 다행히, 난전 속에서 무장 수도사들을 이끌고 그를 구하러 온 성녀 랑시아 아스트로메다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성녀님, 여기는 어떻게···.”
“시간이 없네요, 울터 경. 퇴각해야 합니다.”
“자프론, 반대편에서 돌파를 시도한 아군을 도와야 합니다!”
“그쪽은 벌써 무너져 퇴각하고 있어요. 방금 확인했어요.”
“정말입니까?”
“여기서는 적에게 가려 안 보이지만, 사실이에요. 이 병력이 아군의 기병 전부니까, 어서 후퇴해야 해요.”
성녀의 말은 매우 빨랐지만 알아듣기 쉬웠다. 그녀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자신은 있지도 않은 아군을 돕겠다며 죽음의 길을 갈 뻔 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이다. 최후의 한명까지 싸우네 어쩌네 말은 쉽지만, 사령관인 라모리에게 필요한 것은 앞으로도 자신의 명령을 따라줄 멀쩡한 부대일 테니까.
“아군이 버티고 있는 돌파구가 닫히기 전에 퇴각해야 해요. 저희 모스탈 수도회가 엄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전군 반전! 전군 반전! 여기서 탈출한다! 전령을 보내!”
머리속에서 잠시 멈춰있었던 것 같은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부끄러웠다. 잠깐이지만 정신이 나갔던 것 같았다. 불리한 상황에서는 절망조차도 사치이니까.
또 한번 부끄러웠다. 종교와 얽힌 무장병이라면 전술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후퇴하지 않고 무모하게 싸울 것으로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도 나름의 합리가 있고 전술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와아아아아!”
“막아! 이 새끼 뭐야!”
“전진! 전진해!”
갑자기 나타난 이질적인 기병, 네부카디의 무장 수도사들은 확실히 적의 돌격을 막아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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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했군.”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이 실패를 자인한다. 이번 전투들어 처음으로.
용병으로 평생을 쌓아올려온 인생이다. 그 와중에 물론 백전백승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나 철저하게 실패하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주변의 참모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오랫동안 라모리와 함께해온 베테랑 용병인 그들 역시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이 계획한 함정이었나. 아니, 어쩌면 함정까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어느 쪽이건 적은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과 격의 차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라모리는 그의 마지막 카드를 전부 까발려 공개했다.
적에게 충분한 충격을 줄 수 있는 힘과 속도를 가졌으며, 새로운 전선을 열 체력을 가진.
애지중지하던 직속 용병단의 보석들을 모두 반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모두 금이 갔다. 금방이라도 완전히 깨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패이다. 가장 충실한 직속 부하들을 잃었다. 용병대장으로서, 그의 커리어는 여기서 끝일지도 모른다.
“예비대를 전진시킨다. 실패했어도 돌아오는 아군 받아줄 자리는 있어야겠지.”
“알겠습니다, 총대장!”
마지막 예비대는 기직스가 돌격대로 출전하기 전에 남기고 간 약간의 병력이다. 위태위태한 전선이지만 잠깐은 더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라모리에게는 정말 남은게 거의 없었다. 가진 병력을 정말 다 전선으로 보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슨 일인지 여지껏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언덕 위의 포병대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주요 전력은 다 부하들의 전투 부대에 넘겨줘서 정말 한 줌 밖에 남지 않은 직할 호위대 뿐이다.
예비대가 없는 사령관은 방관자가 될 뿐이다. 하지만 예비대를 남겨두고도 전선을 유지할 만큼 적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라모리 자신이 어리석었을지도 모르고.
“공격 나갔던 병력이 수습되면 다시 언덕 위로 퇴각하도록 한다. 드라멜른의 발란트 경에게도 전령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총대장!”
언덕 위로 퇴각한들, 무슨 수가 있을까. 여전히 배후에는 화염이, 측면에는 서서히 죽어가는 안프로니오 연대가 있겠지.
방금 공세의 실패로, 아주 실낱같지만 남아있던 전술적 승리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적에게 소모전을 강요하여 장기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빼앗는다는 전략적 목표도 달성이 쉽지 않아보인다.
동반 자살도 최소한 상대 허리를 끌어 안을 힘 정도는 남아있어야 가능하니까. 이번 공격으로 너무 많은 전력을 소모했다.
어설프게 투입했다면 애초에 어느 쪽에도 희망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무사히 언덕 위로 퇴각하는 것만 생각하자. 그럴 수 있다면 좀 더 적을 괴롭힐 수 있을 테니까.
전령들이 바쁘게 명령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불리한 전황, 급보를 알리는 전령들의 목소리에서도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