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31화 (231/556)

28-21. 마르사코르 언덕

콰드득!

“커헉!”

폭이 넓은 양날검이 얇은 철판으로 보강된 가죽 조끼와 갈비뼈를 뚫고 지나간다. 상대가 피하기 어려운 비스듬한 위쪽 방향이다.

일격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성전군 용병의 몸이 잠깐 경련을 일으키다 추욱 늘어진다. 방패로 툭 밀치자 그대로 얼굴부터 바닥에 쓰러진다.

“허억, 허억, 허억!”

세 명째의 상대를 쓰러뜨리고 난 고프릭 벨장은 잠시 숨을 돌리며 주변을 살핀다. 이제 달려드는 적은 없다. 거리를 두고 창을 겨누어 올 뿐.

묵직한 검을 손목 스냅으로 한바퀴 돌려 상체에 바짝 붙인 ‘곰돌이 방패’ 위에 올린다.

단순히 멋을 위해서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팔을 쉬게 하고 정면에서의 공격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서이다.

적이 겨누는 창 끝이 방패에 부딪쳐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 날카로운 창 끝과 방패에 씌운 쇠가 긁히는 소리 말이다.

덜컥! 덜컥! 탁!

딱! 뜨드득!

서로 밀고 버티는,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주변을 채운다. 더 이상 고함이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서로 움직이면 손해라 생각한 것인지, 대치상태가 된 것이다.

결국은 첫 돌격 순간의 충격효과가 사라지고 돌격대의 기세가 멈추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적이 택하는 것은 둘 중 하나라 배웠다.

공포에 질려 기회를 찾아 전부 팽개치고 도망치거나, 더욱 전의를 불태우며 덤벼들거나.

전자라면 말 그대로 핫바리. 그대로 도망치게 놔두면 된다. 돌격대의 장비는 꽤 무겁다. 추격전은 다른 아군에게 맡기고 체력을 아끼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후자는 조금 긴장해야 한다. 무리하게 날뛰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지킨다.

이번 적은 후자였다. 썩어도 목숨을 대신 걸어주고 돈을 받는 용병, 불리하고 위험하다고 대열을 팽개치지 않는다.

대열을 더욱 촘촘하게 밀집하고 창대를 내밀어 돌격대를 포위한다.

아무리 괴력을 가진 고프릭이라 해도 창대 십수개가 압박해오면 방법이 없다. 정말로 벽에 부닥친 듯, 간신히 버티는 게 전부였다.

괜히 설치다가 노출된 부위에 상처를 입으면 큰일이다. 게다가, 돌격대는 둥글게 원을 그려 적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한 명이 비면 주변의 동료가 위험에 처한다.

“적이 만만치 않은데···.”

바로 옆에서 방패 측면을 맞대고 있던 선임 중대장, 크레시미르 두브람이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의 말대로, 성공적인 돌격으로 갑자기 측면에서 치고 들어왔는데 대열 내부에서 재빠르게 포위망을 만들다니, 보통 숙련도가 아니다.

“그나저나, 방패가 커져서 압박도 더 큰 것 아냐?”

“아, 아닙니다···.”

“우리랑 같이 방패 높이를 맞추려면 숙여야 하는데 허리 괜찮겠어?”

“앗, 아닙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크레시미르의 농담에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다란 고프릭의 자세는 상당히 불편해 보인다.

아직 농담할 여유가 있다는 것.

그건 돌격대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이다.

“으아악! 밀리면 안 돼!”

“크윽!”

“버텨라!”

그 ‘믿는 구석’이 힘차게 적의 비명소리로 화답해온다. 적의 정면 방향, 아군이 있는 쪽이다.

애초에 창벽 싸움이란 힘과 무게의 싸움이다. 물론 부대 숫자가 많다고 사람 수만큼 곱해서 그만큼 유리한 것은 아니지만.

전열이 죽거나 다치면 곧바로 후열에서 채워야 하며, 빽빽한 대형으로 창을 하나라도 앞으로 내밀고 적을 압도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창끝을 잘 다루어 기량으로 적을 압도하는 것은 오히려 승패의 작은 부분이라고 할수도 있었다.

그래서 돌격대가 필요한 것이다.

평소대로였다면 충분히 신중하고 숙련되었으며, 적절하게 용감한 자프론의 창병들은 금새 질서를 회복했을 것이다.

공세까지는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안전책으로 버틴다면 아무리 강한 슈토르히 창병이라도 단기간에 제압할 방법은 없었다.

아마도 접전을 거쳐 조금씩 적의 대열을 파괴하고, 총병으로 숫자를 줄여나가야 했겠지. 종국에는 기병이나 포병의 도움을 받았어야 할 수도 있었다.

본래 더럽게 강한 방어력을 가진 창벽 끼리의 싸움이란 그런 것이니까. 최소한의 기강과 규율만 있다면 이기기는 어렵지만, 지지 않기는 쉽다.

하지만 측면에서 쐐기처럼 박힌 돌격대가 그 버틸 수 있는 능력을 삭제해 버렸다.

전열에서는 출혈이 계속되는데 이를 도와줄 든든한 뒷심이 빠져버렸다. 돌격대를 막기 위해 제2 전선을 만드느라 써 버린 것이다.

돌격대의 움직임을 확인한 슈토르히 창병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몰아 붙이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었다.

정면의 슈토르히 창병.

후면 ‘제2 전선’의 슈토르히 돌격대.

사이에 끼인 얼마 안되는 창병 밀집 대형이 깨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비록 일부였지만 대열이 산산조각났다. 다수가 자기 위치를 벗어났고, 또 상당수가 손에서 창을 놓았다.

그 빈 공간으로 슈토르히 연대의 밀집 장창 대형이 거침없이 전진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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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한참동안 참은 긴장과, 그 결과로 생긴 안도, 그러면서도 아직도 남은 걱정까지 뒤섞인 기묘한 한숨.

지금 내가 하는 일, 전투 지휘는 다른 인간이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차근차근 마무리한다. 우선순위를 만들고, 인력과 기한을 배분한 다음, 실무 작업자들에게 맡긴다.

실무자들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들의 열정을 낼 수 있는 환경을 맞춰 주는 것도 중요하다. 음, 나도 모티베이션이 중요한 인간이니까. 확실히 중요하지.

다음으로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살핀다. 뭐 달리 말하면 감시겠지만, 여기 감시가 필요할 정도면 애초에 인선을 잘못한 것이고.

그렇게 이쪽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면 그 다음은 ‘경쟁 업체’와의 싸움이다.

우리 성실한 실무자들이 적을 몰아 붙이도록 돕고, 적의 시도를 파악하여 대응한다. 뭔가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미리미리 잘라내고.

잠시 포대를 떠나 사령부에 와 있던 첼레스티나 역시 슈토르히의 활약이 눈에 들어왔나보다. 평소처럼 호들갑을 떨며 정보를 전한다.

“콘도티에레! 슈토르히가 해냈어요! 적이 왼쪽부터 무너지고 있네요!”

“맞아··· 역시 슈토르히 연대네···.”

“네에! 콘도티에레가 키운 정예들인걸요!”

“아니 그게 내가 처음에 만들기는 했는데 말이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조직과 훈련의 완성도를 설정하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슈토르히 연대는 오버 스펙이야.

오히려 내가 지금까지 계속 곁에서 지휘하고 있었다면 이 정도까지는 올라오지 못하지 않았을까?

모리츠, 루트비히, 첼리스티나, 크레시미르··· 대체 눈이 얼마나 높은 거냐 선임 중대장 녀석들. 그걸 끝까지 따라준 연대 병사들도 대단하고 말이다.

그 ‘대단한’ 슈토르히가, 감히 아군 방어선을 넘어온 적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내가 바란 것은 명확했다. 적의 예상 선택지를 확인하고 하나씩 제거해 나가자.

뭐 이미 산불이 나서 선택지가 많이 제한된 시점에서 절반은 이쪽으로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좀 걱정스러웠던 부분은 적은 유리한 방어 위치를 강제로 포기해야 할 상황이면서도 여전히 사기가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싸워보지도 않고 자멸해버렸다··· 라는 상황까지 바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등 뒤가 활활 타오르는 상황에서 오히려 기세를 올리며 공세로 전환할 줄이야.

전쟁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숫자의 싸움이다. 단순히 머리수의 싸움이란 것이 아니라, 대략 투입된 전력과 물자는 예상 가능한 범위의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기세가 높은 병력이 가끔 ‘에러’를 만들고는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까지 아군도 적군도 상정 범위 이상의 활약을 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봐 왔었지.

그런데 현재 성전군은 전군의 대부분이 그런 느낌이었다. 다들 정신적으로 고양되어 있었고, 자칫하면 지지는 않더라도 불필요한 희생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아군이 올려다 보는 앞에서 과시하듯 진행한 전투 직전의 종교 의식과 재편성은 나에게 뜻하지 않은 정보를 주었다.

우선 정확한 적의 숫자와 편제, 그리고 의도였다.

적군은 언덕 아래로 내려오고 싶어한다.

이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 그리고 아군은 당연히 그걸 막고싶어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주 중요한 정보이다.

그냥 내려갈 수 있으면 좋겠다··· 와 죽어도 내려가고야 말겠다는 분명히 다르니까.

농구나 권투와 같은 스포츠 시합에서 말하는 ‘페인트’와 비슷한 것이지. 겉으로 드러나는 의도와, 그 이면에 있을 숨은 의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만년 2류에 머물러야 한다.

일단 최면인지 마약인지 모르겠지만, 단체로 트랜스 상태가 된 검은 옷의 기사단은 복잡한 전술을 소화 못한다.

비교적 단순한, 아마도 전진과 후퇴를 기본으로 간단한 진형 변경 정도가 한계가 아닐까 싶다. 이는 예전에 여울목의 전투에서 싸우면서 한 번 확인했었고.

그런데 적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을 이 상태로 몰아넣었으니, 정면 돌파는 절대로 페이크는 아니라고 봐야했다.

이걸 안 이상, 적의 행동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적은 예비대를 둘, 혹은 셋으로 편성하겠구나.

전방 주력을 몽땅 버리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면, 아군 주 전열의 어딘가로 저 예비대를 투사하겠구나.

‘저것만 잡으면 아군이 이기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래서 적이 판단하기 쉽도록 살짝 상황을 변경해줬다. 주전선에서 열심히 싸우는 연대장들에게 ‘대열 측면을 보강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밀집 대형을 창병과 총병으로 이루어진 대열은 전장에서 가장 느린 존재이다. 어쩌면 포병보다도 말이다.

그래서 항시 측면도 후면도 대응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걸 하려다 보니 기동력이 더 떨어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튼.

우리 성실한 연대장들은 내 명령을 받아 모서리와 측면을 보강하고, 바로 옆에 다른 아군 연대가 있으니 당장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모서리를 둥글리고 경계선을 긋기 시작했다.

마치 측면을 위협당할 가능성도 있는 것처럼.

그게 아마도··· 적에게는 아군이 각 연대간의 전투 지경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사실 어느정도는 맞다. 내가 내린 지시는 이런 상황에서는 불필요할 수도 있으며, 괜히 아군으로 하여금 바로 옆의 아군을 경계시켰다고 볼 수 있으니까.

적은 거기 속아넘어갔고 예비대를 투입했다.

아마 내가 대놓고 약점을 보여주라고 지시했다면 백퍼센트 적장은 눈치를 챘겠지.

내가 보기에 지금 적장은 델레망드 삼각주에서 싸웠던 그 자가 분명하다.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위험한 모험은 하지 않는 인물 말이다.

애초에 약점 보여주기가 뭔지도 모르겠다. 전방 지휘관들에게 약점 보여주라 하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되묻겠자. ‘어떻게하면 되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이런 식으로.

어거지로 꾸며낸 약점은 그런 법이다. 그냥 봐도 알 수가 있다고.

하지만 이번은 그게 아니었다. 내 명령이 다소 때와 장소에 불합리했을 뿐이지, 평소에 하던 훈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지시였다.

그러니 적장에게는 연기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낚였을 테고.

당연하지, 연기를 한 적이 없는데. 아군은 모두 매우 성실하게 승리를 위해 행동하고 있을 뿐이라고.

···내 다소 불합리한 지시조차도 이렇게 철저하고 완벽하게 따라주다니. 믿어줘서 너무 고맙네.

내가 그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은 승리밖에는 없겠지.

그렇게 적은 남은 전력을 둘로 나누어 전선 돌파를 시도했다.

한쪽은 강화된 보병 연대. 저 부대의 지휘관은 다소 고지식하지만 견실한 인물이다.

조금의 낭비도 없는 움직임으로, 포격에 노출되는 시간을 최소화 하면서 병력을 투입하는 모습이라니. 아주 좋은 병력에 좋은 지휘관이다.

그들은 아군 연대 사이의 경계를 파고들었고, 이내 돌파구를 만들었다. 역시 아주 좋은 움직임이었다.

아마 여기서도 내가 ‘지는 척 해라’ 어쩌고를 했다면 바로 들켰을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적이 후퇴했을 수도 있다.

애초에 ‘지는 척’이란 게 뭔가?

상대를 봐주라고? 장기나 바둑 같은 추상 전략 게임이나, 축구나 농구 같은 구기 종목만 해봐도 알 수 있지. 봐 주면서 하려면 기량이 압도적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보통 지는 척 하려다가 진짜 진다고. 말도 안되는 지시이다. 보통은 지는 척 할 수 있는 상황이면 그냥 싸워서 이기면 돼. 왜 그런 명령을 해 대체.

하여간 그런 명령 내리는 놈들은 머저리다. 허허실실이니 의도된 약점 노출이니 하는 전술서의 서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멍청이고.

뭐, 내가 그런 명령 받고 수행하느라 고생한 적이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은 아니고.

적군이 ‘대열을 뚫고 진격하려고 한다’는 전술적 움직임에 대해서···.

아군의 대응은 ‘대열의 측면에 벽을 세우고 대열을 유지한다’ 였다.

그래서 적이 아슬아슬하게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양쪽 다 성실하게 자기 역할을 다 했다고.

그렇게 자신이 가진 카드 중 하나를 내놓은 적에게, 나 역시 최강의 카드로 답해주었다.

슈토르히 연대.

좁은 돌파구로 나와 급히 전개하느라 대열도 엉망이야, 병종간 밸런스도 무너져, 지휘관의 직접 통제도 못 받아.

그걸 대체 저놈들은 밥먹고 뭘 하길래 저렇게 강한가 싶은 슈토르히가 덮쳤으니 5분도 못 버티고 저렇게 와르르 무너지는 게 당연하지.

열심히 후퇴하려 하지만, 좁은 돌파구가 뒤를 막고 있다.

원래 전진보다 후진이 어려운 법이니까.

그렇게 적의 카드 한 장은 파훼됐고.

나머지 하나, 기병으로 열린 돌파구는?

“아라라라라라라!”

“아라라랏! 아라라라라라!”

“카라라라라라라라!”

저쪽도 내가 배정한 카드가 슬슬 자기 역할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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