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29화 (229/556)

28-19. 마르사코르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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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까지, 성전군 선두에서 대열을 이끌고 있던 자프론 연대의 창병들은 승리감으로 가득했었다.

창병 부대의 맨 앞줄에 선 용병대의 하급 장교, 베일리 하스먼도 그 중 하나였다.

힘든 싸움이었지만, 적진을 돌파했다. 이번에도, 총대장인 라모리 스텐던은 훌륭한 활약을 보여줬다.

일방적으로 포탄에 두들겨 맞는 것도 이가 갈렸고, 불리한 선형 대형으로도 끝까지 창대를 얽으며 버티던 방금 전의 적군도 상당히 강했다.

하지만 이겼다. 적은 대열을 무너뜨리고 도망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프론 연대는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 예비대의 선두에서 하급 장교 베일리 하스먼은 누구보다도 힘차게 부하들을 이끌었다.

자꾸만 빨라지는 부하들을 제어해 대열을 가지런하게 유지시키면서도, 자꾸 마음만 급한 부하와 동료들이 이해가 됐다.

자기 자신도 어서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적의 최전선을 붕괴시켰으니 남은 것은 황급히 정면을 막고 나선 적의 예비대.

숫자로 보나 기세로 보나 절대로 질 수 없다 생각했다.

새로 나타난 적의 총병들이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타타타탕!

“으아아악!”

“크흑!”

“대열 유지해! 전진! 전진!”

상상 이상으로 정확한 사격에 많은 동료들이 죽어나갔으나, 승리를 위한 대가이고 용병으로서 견뎌야 할 희생이라 생각했다.

현재는 돌격의 선두라 병과 비율이 깨진 상태이므로 창병들의 희생이 어쩔 수 없이 크다.

그러나 조만간 아군 총병들도 지원을 올 것이다. 제대로 대열을 갖추고 싸우면 결코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다시 대열을 정돈해 적 예비대의 방어선과 수평을 맞추고 다가갈 때, 갑자기 불쑥 모습을 드러낸 대포가 불을 뿜었다.

이 거리에서, 갑작스럽게 뿜어져 나온 화염과 포탄에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희생이 컸을 것이다. 몇십 미터 정도의 좁은 회랑 형태의 활로를 억지로 만들어 비집고 들어왔으니. 그걸 초 근거리에서 수평 포격을 가하다니···.

똘똘 뭉쳐 창대를 세우며 접근하던 성전군 용병들이 무더기로 죽어갔다. 생명 잃은 몸뚱이가 쓰러지면서 무수히 많은 창대가 주인을 잃고 함께 쓰러진다.

아무래도 적이 빈 틈을 막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대담한 근거리 포격을 하기 어려울 테니까.

적은 생각보다 만만한 상대는 아닐 수 있다.

그렇더라도 다행히 포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3문, 혹은 4문이다. 버틸 수 있다.

이제 창벽 간의 싸움에 들어간다. 적의 총격과 포격이 이어지면서 희생이 컸으나 아직 베일리와 그의 부하들은 건재하다.

몇몇 동료들은 부상을 입어 피를 흘리면서도 짐승처럼 포효한다. 승리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베일리 자신도 함성을 지르며 창대를 겨누고 한 걸음씩 다가간다. 적 투구 아래로 보이는 눈빛이 섬뜩하다. 그러나, 분명 적도 그렇게 느낄 것이었다.

따다닥! 따닥!

끼이익, 탁! 따악!

양측의 창대가 얽히는 순간, 베일리는 그간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과감하게 창대의 끝을 잡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서로 거리를 재며 조심스럽게 최전선을 맞추는 이 타이밍, 어쩌면 운 좋게 시작하자마자 적을 한 명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겁이라도 줄 수···.

“으윽!”

갑자기 창대를 잡고있던 왼손에 뜨거운 고통이 느껴졌다.

“크으읏, 끄윽!”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계속 신음을 흘린다.

이상하게 창대가 무겁게 느껴졌다. 손이 아파서 도저히 창대를 잡고 있을 수 없었다. 통증 때문에 왼손이 창대를 놓쳤고, 창 끝이 흙바닥에 처박힌다.

“흐아앗!”

갑자기 눈 앞으로 적의 창날 끝이 번쩍인다.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다 균형을 잃고 주저앉는다. 뾰족한 창 끝이 코를 스치는 듯한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쪽팔렸다.

창병 대열의 선두 장교라는 것은 직위가 높지는 않지만, 창을 다루는 실력과 배짱을 인정받은 것이니까.

가장 위험한 지점에서 싸우며 어그러지기 쉬운 밀집 대형을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이고 출세하기 좋은 직책이다.

그런데 창대를 놓치고 주저앉다니. 자기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서 빨리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잘 일어서지지가 않는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이어지는 왼손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다문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 나온다.

“으··· 으으으!”

세 개.

현재 성전군 용병대의 하급 장교 베일리 왼 손에 남은 손가락의 개수이다.

검지와 중지가 붙어있던 부분이 통째로, 강한 힘으로 뜯어내기라도 한 것 처럼 잘려나가 있었다.

아마도 처음 양측의 창벽이 부딪치는 순간, 적극적으로 창 끝을 내밀며 다가서던 순간 이렇게 된 것이겠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원래 창병들은 손가락을 자주 다친다. 아무래도 앞으로 나와있기 때문인지, 적군은 물론 아군 창대에 부딪쳐서 부러지거나 뭉개지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도려내듯, 뜯어내듯 검지와 중지만 사라지는 경우라니.

단순한 우연인가?

그냥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아흐으윽!”

“크흑!”

옆에서, 뒤에서 신음소리들이 연이어 터져 나온다. 철퍼덕 거리며 시체가 되어 쓰러지는 소리도 들린다.

왜지? 왜 이렇게 이쪽, 아군만 일방적으로 당하는거지?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나?

베일리는 깊은 공포와 절망감을 느꼈다. 피가 줄줄 흐르는 왼손을 감쌀 생각도 못했다.

절망이란 보통 포기에 이어서 오는 감정이다.

그것도 한 번의 포기는 아니다. 두 번, 세 번 포기가 이어지다 보면 스스로 만든 절망의 벽이 된다.

한 번의 포기는 하나의 선택을 제약하는 것을 말한다. 포기가 거듭되면 점점 선택지는 사라지고, 종국에는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된다.

거기에 이르면 남는 감정이 바로 절망.

나름 용병으로 짬밥을 먹어 왔고, 하급이지만 장교가 될 정도로 실력도 경험도 쌓아 왔기에 남보다 빨리 알 수 있었다.

아예 보는 눈이 없었다면 차라리 모른척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이건 도저히 상대가 안된다.

어떤 경우의 수를 생각해도 수단이 보이질 않았다.

“뭐, 뭐야! 괴물들인가?”

“으으윽··· 살려줘···.”

“물러서지 마 멍청이들아!” 창벽을 유지해!”

“밀집 대형! 밀집 대형!”

아군이 어떻게든 대응하려고 몸부림치는 사이.

성큼.

하고 적군이 반 걸음 다가선다.

이제 손가락이 남보다 두개 부족한 베일리가 뭔가 해볼 수 있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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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프론 푸코데모스는 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적진 돌파를 성공했다는 자신감과 승리감으로 가득했었다.

어지간하면 성격을 겉으로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스스로도 흥분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막지 못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불과 몇 분이 지났을 뿐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어 버렸다.

지금 최전방의 중대들이 보내오는 보고는 단말마의 비명에 다름아니었다.

그의 연대에 속한 창병들이 약한 것이 아니다. 대륙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믿음직한 부하들이다.

그런데 그 베테랑 창병들이 순수 기량에서 밀리고 있었다.

물론 이쪽은 무리해서 선두로 창병들만 진출시켰는데, 적군은 총병과 창병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이쪽에 피해를 강요시키고 있었다.

또한 연대 자체적으로 포병 역시 보유해서,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자프론의 연대를 괴롭히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진격이 틀어 막힐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전세가 갑자기 확 뒤집혔다거나 결정적인 위험이 보인다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대열이 정돈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성전군의 편이 아니었다.

현재 주 전열을 유지하고 있는 드라멜른 기사단의 보병들은 너무 큰 희생을 지불했고 피폐해진 상태였다.

아무리 ‘개전의 의식’을 통해 정신무장을 하고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치명상을 입은 몸뚱이까지 억지로 움직이게 할 정도는 아닐 테니까.

그들이 한계에 이르기 전에, 아직 힘이 남은 라모리의 직속 연대들이 뭔가를 해내야 했다.

“자프론 대장님! 전방에서 지원 요청이···.”

“총병 중대 두개를 전방으로 보내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돌파구를 유지하는 병력이···.”

“라모리 총대장께 지원 요청을 보내도록.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장님.”

억지로 적군의 방어선을 비틀어 열 때는 좋았지만, 그걸 유지하는데 생각 이상으로 노력이 들어간다.

어서 적의 후방에 복구 불가능한 피해를 입혀 자연스럽게 무너지게 해야 한다.

자프론 자신이 하지 못한다면··· 반대편에서 돌파를 시도하고 있는 기병들의 활약이라도 빌어야 했다.

‘부탁한다, 울터 콜린스.’

오랫동안 라모리 휘하에서 함께 싸워온 동료. 기병 지휘관의 이름을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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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프론의 보병 공세가 한계에 부닥친 그 때, 울터 콜린스가 이끄는 용병 기마대의 선두가 적의 후방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멈추지 말고 계속 움직이면서 중대 단위로 뭉쳐라!”

돌파 과정에서 어지러워진 병력을 정돈하며 울터가 외친다.

“억지로 자기 중대를 찾지는 않아도 된다! 가까운 지휘관의 지휘를 받도록 전파하라!”

“알겠습니다, 대장님!”

기병 지휘관으로서 인정받는 울터 콜린스의 가장 큰 재능이라 한다면, 부하들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면 위험하고, 어느 쪽으로 가면 살 수 있는가.

혹은 이 적은 현재 아군 부대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고 얼만큼의 전과를 낼 수 있는가.

이를 반은 경험을 통해, 반은 본능적으로 계산할 수 있었다. 덕분에 라모리에게 신임 받았던 것이고, 부하들에게도 신뢰받고 있고 말이다.

기병의 지휘는 정말 몇십초 차이로 생지와 사지를 오가게 된다.

적진에 뛰어든 순간 계획도 작전도 어그러지고 지휘관의 순간적인 판단에 의존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는 말이다.

그걸 지금까지 꽤 잘해왔기에 울터는 자신도, 부대도 살려올 수 있었다.

···블랑독에 들어온 후로 계속 패전하면서 부하들을 잃어온 것이 아쉬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그들이 있는 자리는 위험했다. 팔자 좋게 부대를 새로 편성하면서 명령을 전달할 시간은 당연히 없었다.

드라멜른 기사단의 중기병들이 선두에서 적의 화력을 받아내며 적의 대응력을 약화시킨다.

뒤이어 성녀가 이끄는 모스탈 수도회의 가면 수도사들이 결정적으로 적 보병의 수를 줄이고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마지막으로 울터의 기병들이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피하면서, 결코 넓지 않은 돌파구를 통해 조심스럽게 돌파했다.

그 결과가 현재, 치열하게 난전을 벌이는 아군 기병과 적군 보병의 사이를 뚫고 적 후방까지 이른 것이다.

적진을 돌파한다는 ‘첫 목표’는 성공했으나 이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히려, 이제 간신히 출발선에 오른 것 뿐.

아군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 어떻게든 확보한, 울터와 그의 기병대에게 만들어 준 무대였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전과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희생이 의미가 없어진다.

슬슬 집결하는 부하들을 살피면서, 주변을 살핀다.

정면, 연대급으로 보이는 적 보병 부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창병의 비율이 조금 더 많아 보인다. 기운 넘치는 것을 보면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측, 적 대열 일부가 완전히 어그러져 있고 상당수의 아군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저건 분명, 라모리 총사령관이 직접 파견한 돌파 부대였다. 아마도 자프론 푸코데무스가 이끄는 보병이겠지.

그렇다면 기병의 강점,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해 저들이 전과를 확장할 수 있도록 돕자.

후방에서 병력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적에게 상당한 혼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전군 우측으로! 전군 우측으로!”

판단을 내리는데는 30초가 걸리지 않았다. 어수선하던 분위기를 정돈해 부대를 이끈다.

“대장님, 저쪽에 적의 기병이 옵니다.”

“우리를 요격하려는 거겠지! 부대를 나눈다! 전군이 싸워 줄 필요는 없으니까.”

“옛! 대장님.”

비스듬한 정면에서 다가오는 적 기병대를 보며, 울터는 다시 머리를 굴린다. 무장이 잘 된 귀족 기병대로 보인다.

서두르지 않고 좌우로 대열을 벌리는 것을 보면 자신감과 자부심이 철철 넘쳐보인다. 선두의 기병들은 얼굴을 제외한 몸의 대부분을 갑주로 덮고 있었다.

무장의 질로 따지면 상대적으로 경무장인 울터의 연대가 열세이다.

허나, 기병의 싸움은 단순히 무기의 질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다. 무수히 많은 귀족 나으리들을 말에서 떨구며 쌓아 올린 커리어였다.

생각해보면, 블랑독에 참전한 이후, 자신의 강점인 기동성을 발휘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뤼나메르 교차로에서는 억지로 언덕의 적을 공격해야 했으며···.

로데브 강을 건너 적지로 들어갔을 때는 사방이 밭둑으로 가득한 녹색의 미로에 갇혀야 했다.

“선두 전진! 적을 돌파한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장기를 보여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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