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27화 (227/556)

28-17. 마르사코르 언덕

검은 사자와도 같았던 매서운 드라멜른 기사단의 공세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적군의 대열 선두를 부수고 백병전으로 이어갔다. 치열한 전투는 혼전의 양상을 보인다.

이미 아군 보병이 약화시킨 상태이기는 했으나,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창병과 총병의 밀집 대형이 상대이다.

그 상성상 불리하다고 할 수 있는 정면 공격에서 어느 정도의 효과를 보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또한 최초 교전이 시작되고 몇 분 지나기도 전에, 기사의 거의 절반이 말을 잃었다.

창날의 숲과 총탄의 비에 노출된 기병의 운명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아무리 잘 무장했더라도 말이다.

전원이 사망한 것은 아니더라도, 기사가 말을 잃은 순간 끝이다. 낙마의 순간에 다치기도 쉬울 뿐더러, 무사하더라도 조금 잘 무장되었을 뿐인 평범한 보병이다. 기병대로서의 돌파 능력은 거의 상실한 것이다.

격돌 순간에, 아니 이미 격돌 직전에 어느정도 승패가 갈리며 지휘관이 판단이 조금만 늦어도 막대한 희생이 발생하는 기병의 숙명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의도했던 바 이기에 절대 ‘실패’가 아니다.

귀중한 중기병 전력의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며 얻어낸 ‘전과’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역할을 다 한 드라멜른 기사단이 다시 좌우로 물러서며 빠진다.

방금까지 그들과 삶과 죽음을 오가는 사투를 벌이던 방어군 보병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들도 알 수 있었다. 적이 한계까지 싸우다 힘을 잃고 물러난 것이 아님을 말이다.

이 갑작스러운 후퇴는 분명 후속하는 공세를 약속하고 있다. 그것을 예상하는 데에는 특별히 대단한 전투 경험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뻔히 예상되던 후속 공격. 그게 저 하얗게 빛나는 성녀를 앞세운 새로운 기병대의 돌진이었다.

“뭐야 저 자식들은?”

“가면? 인간이 맞기는 한가?”

남달리 거대한 군마에 올라 탄 기병들.

치렁치렁한 검은 수도복 자락에, 어울리지 않는 전투적인 갑주를 걸친 모습.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가 저러지 않을까 싶은, 굳어버린 표정의 가면을 쓴 기사들.

방금 악다구니를 하며 싸웠던 검은 옷의 기사들도 무서운 상대였다. 최전선에서 창에 찔린 상태로 아직도 쓰러지지 않은 군마가 있을 정도였다.

간산히 물러난다 싶었더니, 지친 선두 대열이 교대할 틈도 없이 다음 공세가 밀어닥친다.

모스탈 수도회는 동부 변경의 이교도들을 토벌하던 무장 수도회다.

적의 심장부에 박아놓은 요새 수도원에서, 때로는 지키고 때로는 공격하는. 항상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서 싸워온 집단이다.

이들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가지를 고안했는데,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져오는 가면이 그 중 하나였다.

얼굴을 가리는 투구는 다 그런 점이 있지만, 상대의 표정을 알 수 없다는 점은 인간성을 느끼지 못하게 해 공포와 거부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게 단순히 방어를 위한 철제 투구가 아니라 가면이 되면··· 생리적인 거부감에 더해 상대를 구분하지도 못하게 만든다.

이게 반복되면 죽었던 적이 살아나 쫓아온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고.

죽지 않는 학살자들의 전설.

대륙 중심부와 다르게 ‘미개한’ 편인 변경 사교도들과의 싸움에서 밤을 지새우던 모스탈의 무장 수도사들이 여지껏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실질적인 파괴와 학살을 하기에 앞서, 본능적인 공포심을 자극한다.

그럼 무기를 맞대는 순간, 또 동료가 죽어나가는 모습을 본 순간 상상력이 멋대로 그 공포심을 확대시킨다.

적에게, 그리고 적의 군세에게 혼자 상상한 이미지를 덧씌워 버린다. 이는 필경 파멸에 이르는 지름길이 되고 만다. 자기가 만든 파멸에 자기가 빠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모스탈 수도회의 무장 수도사들은 그렇게 승리해왔다.

다만 여기에서도 그럴지는 아직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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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근데 저거··· 그 쌍년 아녀?”

“뭐? 누구?”

“그 우리 영주따님한테 지랄한 개년 있잖아! 성녀인지 나발인지! 그 년이 데리고 다니던 놈들이 가면 썼다던데?”

“아 그랬지! 저 가면놈들인가!”

오히려 가면 수도사들의 특이한 모습을 보고 유난히 분통을 터뜨리는 남자도 있었다. 제11 벨모제 보병 연대 소속의 창병 중대장, 콜테 다비에였다.

“저 가면 새끼들 모가지 딴 녀석에게는 내가 카르카냑 오리진 한 잔씩 쏜다!”

“오, 정말입니까?”

“중대장님 그러다 파산합니다!”

“시끄럽다. 아무튼 모가지만 따 와 내가 월급을 가불해서라도 고주망태를 만들어 줄 테니까.”

“저 성녀 잡아오면요?”

“그럼 시발 내가 술집 하루 빌린다!”

“오오오오오오!”

“자 이제 저 놈들 온다, 절대로 자리를 뜨지 마!”

“알겠습니다!”

카르카냑 오리진은 블랑독에서 정상 유통되는 포도주 중 가장 질이 좋은 상품 중 하나였다. 병사 월급으로는 한 잔 하려면 큰 마음 먹어야 할 정도의 가격.

그러나 콜테 중대장에게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누구보다 경애하는 트랑카벨의 남매를 모욕한 놈들을 가만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의 집안은 카르카냑의 목장 관리자이다. 주군 가문에 바칠 말을 고르고 옮기는 것이 바로 그의 임무였다.

트랑카벨의 장녀 아쥬흐 트랑카벨도, 지금은 어린 주군이 된 아실 트랑카벨도 그랬다.

그들은 콜테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작은 체구의 순한 말을 타고 승마를 배웠으며, 처음 말에 오를 때는 콜테의 어깨를 밟고 올랐었다.

그 어린 주군 남매의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부끄러움이 섞였던 감사 인사는 지금 생각해도 괜히 웃게 만드는, 그의 인생의 기쁨 중 하나였다.

지금은 그저 하급 가신들 중 하나일 뿐이고, 영지군의 중대장일 뿐이지만 잘 자라 영지를 이끌고 있는 그 남매를 볼 때마다 남다른 기쁨을 느꼈던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그걸 모욕한 놈들이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온다! 팔에 힘 꽉 줘!”

“옙, 중대장!”

“그리고··· 죽지 마라!”

이미 그들이 선 대열 앞에는 동료들의 시체가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방금 전의 돌격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시체였다.

그 외에도 많은 트랑카벨의 총병들이 쓰러져 있다. 총병대열이 후퇴하면서 콜테의 중대가 빈 공간을 대신 채웠기 때문이다.

다음 공격에서도 어쩔 수 없이 희생자는 발생할 것이다. 어쩌면 중대장인 콜테 본인이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총병은 후퇴할 수 있어도 창병은 후퇴할 수 없다. 그들이 최후의 저지선이다.

그러니까 여기는 못 지나간다, 시팔놈들.

“트랑카벨을 위하여!”

“트랑카벨을 위하여!”

첫 열과 두번째 열은 허리를 숙이고 창의 뭉툭한 끝을 땅에 대고 발로 고정한 형태, 세번째 열부터 그 자리에 서서 창대를 수평으로 겨눈 대형이다.

콜테는 그 세번째 열의 한 가운데 서 있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가면의 기마대의 선두. 하얀 빛을 발하던 성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저 뒤 어딘가에는 있겠지.

솔직히 무서웠다. 가면을 쓰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기마대는 마치 지옥에서 온 사자들 처럼도 보였다.

반드시 우리가 잡고야 만다는 의지를 다잡는다. 창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기병의 기세에 그대로 밀리면 창대를 놓치기 쉬웠으니까.

“어엇?”

그런데, 선두의 적이 갑자기 멈추고 말을 돌린다. 창 끝에서 몇 미터는 될까 싶은 아주 가까운 거리.

시커먼 몽둥이 같은 것들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당연히 무작정 돌입해올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다. 생각외로 똑똑한 놈들이었다.

“사격에 대비···!”

빠바박! 팡! 파팡!

빠박! 빠다닥!

뿌연 연기가 눈 앞을 가득 채우고 낯선 발사음이 귓가를 찢는다. 다음 순간, 눈 앞에서 불이 번쩍했다.

“끄아아아악!”

중대장 콜테 다비에는 얼굴 여기저기에 찌르는 듯한, 그리고 살이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느꼈다. 자신도 모르고 한 걸음 물러설 뻔 했다. 창대를 놓을 뻔 했다.

“아아아악!”

“눈이 안보여! 흐윽!”

“우, 움직이지 마! 적이 온다!”

주변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린다. 적의 사격에 당했다. 갑자기 멈춰서 쏘는 바람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몇 번이나 각오했던 일이 아닌가.

“당황하지 마!”

아직 눈 앞이 캄캄한 상태로, 콜테가 외친다.

“심하게 다쳤으면 뒤로 빠진다! 아니라면 창을 잡고 지켜라!”

“우욱, 욱! 알겠습니다!”

“주, 중대장님 얼굴이···.”

“나는 괜찮다!”

재빠르게 가죽 장갑으로 눈가를 닦는다. 희뿌옇게 빛이 들어온다. 얼굴이 심하게 따가운 것이 마치 얼굴 가죽이 벗겨진 것만 같다.

다시 양 손으로 창대를 단단히 잡는다.

슬슬 눈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야가 좁다. 아무래도 흘러내린 피에 시야가 가린 모양이다.

나란히 정면을 향해 뻗어진 아군의 창대. 자기 앞에 있던 병사가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총에 맞은 건가.

그리고, 그 너머로 돌입해오는 적군의 모습이.

철퇴를 휘두르며 상체를 숙인, 가면의 기마대는 실로 공포스럽다.

하지만 자신 역시 강하다.

‘당신들은 대륙에서 가장 훌륭한 영주님의 가신들입니다. 대륙 어디에서 침략해온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습니다.’

그렇다.

‘여러분은 강해졌습니다. 자신과 가족, 그리고 고향 블랑독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요.’

자신은 강해졌다.

지금까지 항상 이겨왔고, 앞으로도 이길 것이다. 트랑카벨의 이름으로, 콘도티에레의 지휘를 받으면서.

“이야아아아아!”

기합을 지르며 흔들리는 창 끝을 고정한다. 말 옆으로 상체를 불쑥 내밀고 철퇴를 치켜들던 가면 수도사의 가슴을 노린다.

뿌드드득!

창대 끝을 받친 오른팔에 묵직한 무게가 걸린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괴한 감촉이 창대를 통해 느껴진다.

다음 순간 창대가 부러졌다. 하얗게 날리는 작은 나무조각이 눈에 보일 정도로, 이상하게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그의 창 끝은 적병의 흉갑에 깊게 긁힌 상처를 낸 끝에 정확히 가면 아래, 목에 꽂혔다.

가면 수도사가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갑작스럽게 고삐가 당겨진 말이 두 발로 일어서며 기성을 지른다.

퍼걱!

“억!”

갑자기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뭔가가 투구를 때렸으나, 운 좋게도 빗맞은 모양이다.

“으허억!”

“컥! 머, 멈춰!”

“이 새끼야아아!”

콜테가 지휘하는 중대의 전열은 엉망진창이다. 물론 밀집한 창벽이 적지 않은 적을 말에서 떨구었으나, 요행히 틈을 잘 노리고 들어온 적들이 많았다.

사격으로 생긴 빈자리를 뚫고 들어온 가면 수도사들은 사방으로 철퇴를 휘두르며 공간을 넓혀갔다.

이대로면 점점 더 많은 적이 들어오고, 자칫하면 대열 자체가 물러서거나, 최악의 경우 무너질 것이다.

항상 창병은 총병의 지원을 받고, 창병은 총병을 호위해야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일단 창벽 안으로 들어온 적을 죽일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달려오는 적을 말에서 떨구는 것이면 모를까, 갑옷을 잘 입은 적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은 어려웠다.

“개새끼들아 뒈져라!”

“끌어내려! 끌어내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적 기병의 움직임은 멈췄다는 것이다.

공격하는 기병과 수비하는 보병이 마구 뒤섞인 상태에서, 트랑카벨 창병들이 악귀처럼 기병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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