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26화 (226/556)

28-16. 마르사코르 언덕

###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의 직속 보병 지휘관, 자프론 푸코데모스는 냉정해지기 위해 애썼다.

이 전장의 누구나 마찬가지겠으나, 현재 그에게 주어진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적의 약점을 찾아 최대한의 충격력을 가하는 것.

태생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는 장창 밀집 대형의 충격력은 기동성에서 기인하는 기병이나 중보병과는 다르다.

느릿느릿하지만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끈질긴 진격.

충격 기병의 공격이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 한다면, 장창 밀집 대형의 공격은 힘과 무게로 밀어 붙여 목표를 완전히 뭉개고 뜯어 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자프론은 마지막 충돌의 순간까지 자신의 병력을 최대한 통제했다.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창병 밀집 대형은 느리고 둔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보병 지휘관의 세심한 조율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대열을 어디까지 연장할 것인가.

어디에 힘을 집중시킬 것인가.

어디는 포기할 것인가 까지.

조용한 멈춤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고, 자프론은 자타공인의 무뚝둑한 인간이지만 병력 운용만은 누구보다도 세심한 남자이다.

“이대로 전진하며 적과 교전한다. 무리하지 말고 힘을 보존하도록.”

“알겠습니다, 대장님!”

동맹군인 드라멜른 기사단의 보병 운용은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 다소 무식한 공격은 분명 적에게 충분한 타격을 입힌 것으로 보인다.

단순 숫자로 따지자면 적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현재 적의 대응은 분명 강한 적을 상대하며 지친 모습이다.

자프론은 자신이 이번 전투의 주인공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승리를 위한 발판 정도는 될 수 있다 생각했다.

비록 자신들이 시체가 되더라도, 자기 시체를 넘어간 기직스나 울터의 부대가 반드시 적진을 붕괴시킬 수 있으리라.

“와아아아아!”

“앞으로! 앞으로!”

“크아앗!”

양측의 선두 전열이 충돌했다. 무수히 많은 장창이 얽히고 그 가운데 죽음이 불길한 꽃처럼 피어난다.

“죽어도 버텨라!”

“트랑카벨! 트랑카베엘!”

부하들의 어깨 너머로 악을 쓰는 적군의 모습이 보인다. 땀과 화약 연기가 뒤섞여 꺼멓게 들러 붙은 전장 특유의 지저분한 모습.

“흐아아압!”

“다쳤으면 뒤로 빠져! 이쪽으로!”

“밀어붙여라!”

소대장급인지, 주변에 대고 뭐라 악을 쓰는 바람에 온몸에 주름이 진 투구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긁힌 자국 투성이였다.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창을 찌르고 후리며 싸우다 보면 불가피하게 생기는 상처. 창 끝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치는데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병사라는 증거이다.

자프론 자신의 이마에도, 뺨에도 그렇다. 혹은 어깨와 목에도 그런 상처가 몇개나 남아있다.

훌륭한 병사들이다. 마치 자신의 부하들처럼.

그 훌륭한 병사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현실에 슬픔을 느끼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와 있었지만.

안타깝지만 ‘이쪽의 훌륭한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저쪽의 훌륭한 병사들’을 죽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다. 냉정한 마음으로 전장을 살핀다.

조금 전, 교전 초기에 비해 달라진 양상이 있다. 바로 창을 잃은 유격 병력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장창은 탄력있고 단단한 재료로 만들지만 전투를 거치면서 파손되는 경우는 당연히 있다.

부딪치고 찌르고 두들기다 보면 피로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깨져 나가기도 하고, 적에게 붙잡혀 꺾이기도 하며, 심지어 눈 먼 총탄에 맞아 부서지기도 한다.

이렇게 창을 잃으면 짧은 보조 무기라도 꺼내 아직 멀쩡한 창으로 싸우는 아군을 보조한다.

때로는 양측 사이에 무수히 쌓인 시체에 섞여 서로 얽힌 장창 사이를 나아가 적병의 정강이와 발목을 노리기도 한다.

공격 당한 측에서도 이를 어떻게든 대응하기 위해서 일부가 창을 버리고 반격에 나선다. 이 시점에서 어느정도 주력 전열을 약화시키는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이런 치열한 육탄전은 전투 초기의 질서가 무너지고 몰리고 있어 발생한다는 해석도 된다.

즉, 현재 트랑카벨 군의 전열은 분명히 약화된 상태이다.

짧은 초기 교전에서, 자프론은 그렇게 판단했다. 결론이 나온 이상 거칠 것은 없다.

“중앙 돌파다! 마지막 예비 중대를 중앙에 투입, 최대한의 병력으로 단숨에 중앙을 압박한다!”

“알겠습니다, 대장!”

“그리고 라모리 총대장에게 전령을 보낸다.”

“옛! 뭐라고 전달드릴까요?”

“적 방어선은 약화되어 있으며, 연대급 부대 사이의 간격이 약점으로 보인다. 이상!”

아마도 적장의 경험 부족이리라 생각된다. 부대들을 너무 정직하게 배치해놨다.

사각 형태로 배치된 보병 부대는 형태는 그럴지 몰라도 실제로 벽돌이 아니다. 때문에 벽돌 쌓듯, 차곡차곡 배치할 수는 없다.

부대의 폭을 유지하려면 모서리를 강화해야 한다. 베테랑 장교와 병사들을 배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별도의 예비대를 두기도 할 정도니까.

그러나 적의 배치는 견실할지 모르나 너무 정직하다.

때문에, 교전이 거듭될 수록 약화되는 것은 당연했고, 이는 각 연대급 부대 간의 연결 고리가 점차 약해지는 것을 뜻했다.

자프론은 여기에 걸어보기로 했다.

적을 많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밀쳐내고 문을 여는 방향으로.

###

두두두두두.

성전군의 마지막 전력, 혼성 기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도는 빠르지 않다. 보병이 가볍게 뛰는 정도의 속도일까.

모처럼의 언덕 위, 내리막의 힘까지 사용해 밀어 붙이면 좋겠지만 혼전 와중이라 기세보다는 정확함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칼날에 주신의 축복을!”

진격중인 기병대의 한가운데서, 그 자신도 검을 뽑아든 성녀 랑시아가 무기를 치켜들며 외쳤다. 기프트 발동의 신호인 하얀 빛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빛난다.

“북방의 파도처럼 나아가라, 드라멜른의 기사들이여!”

“와아아아!”

2천 기에 가까운 기병이 한꺼번에 이동하면서 내는 소음은 만만치 않았는데, 성녀의 목소리는 말발굽과 갑주, 무기들이 내는 소리를 압도하며 부대 전체로 퍼져간다.

대열의 선두는 드라멜른 기사단의 기병들이다.

가장 중무장하고 전투에 익숙한, 돌격이라는 중기병 본연의 임무에 가장 잘 맞는 병력이다.

그들이 가장 선두에서 이단자들의 방어선에 부딪친다.

물론 먼저 교전 상태에 들어갔던 드라멜른 기사단 보병들이 최대한 약화시켜놓았다고는 해도, 밀집대형을 유지하고 있는 보병에게 그대로 들이박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필연적으로 상호간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차근차근 뚫을 수 밖에 없다.

이 배치는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의 판단이었다.

그 위험한 돌격을 그나마 효율적으로, 능숙하게 할 수 있으리라 믿기에 드라멜른의 기병들을 선두로 세운 것이리라.

중간 열은 성녀 랑시아 자신과 함께하는 모스탈 수도회의 무장 수도사들.

마지막이 라모리 용병단의 직속 기병이다. 당연히 직속 부하를 아낀다는 차원의 배치는 아니다. 전술에 대해 모르는 랑시아가 보아도 말이다.

상대적으로 경무장이고, 숫자는 가장 많은 라모리의 기병대를 후위에 배치해 돌파 성공 직후의 전과 확대를 노리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기병 지휘관들이 동의한 것이다. 오히려 일단 적진을 돌파한 직후에는 선봉이 용병 기병대로 바뀐다.

적진 후방에 기다리고 있을 기병 예비대를 상대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니까.

정면에서 미리 신호를 받은 아군 보병의 대열이 열리고 있었다. 전장의 의식을 마치고, 거대한 군대의 부품이 된 드라멜른 보병들이 문을 열듯, 좌우로 천천히 물러서고 있었다.

적의 정면이 보인다! 장창과 총병이 뒤섞인 최전선 대열이 보인다.

적은 당황한 듯 보인다. 성녀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라모리 사령관은 이걸 예상했었다.

‘적 창병과 교전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습해야 한다. 적 지휘관은 알더라도 병사들은 모르는 타이밍을 노릴 수 있다’

어차피 총병이든 창병이든, 준비된 대열에 기병으로 들이받는 것은 어렵다. 심지어 이단자들의 주력인 트랑카벨 군은 총병 비율이 높다지 않는가.

파멸적인 근거리 일제사격은 때로는 장창 방진보다 위협적이다. 이 말에는 모든 기병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검은 성자의 이름에 영광을!”

“영광을!”

“으랴아아아아아!”

“검의 수호자를 칭송하라아!”

드라멜른 기병대가 함성을 지르며 돌입한다.

적 창병 대열이 흔들리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총병들 역시 정면의 보병이 사라지고 갑자기 기병이 돌입해오자 크게 당황한 모양이다.

타타탕! 타탕! 타타타탕!

드라멜른 기병대의 선두를 뿌연 총연이 뒤덮는다. 기마 총병들의 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으으윽!”

“커헉!”

연기속을 뚫고 들어온 총탄이 이단자들의 목숨을 끊어 놓았다.

타타타탕! 타타탕!

중기병이라지만, 무식하게 돌입하지는 않는다. 능숙하게 말머리를 돌리며 15미터 정도의 근거리에서 창병 대열에 총탄을 퍼붓는다.

“크으윽···”

“악!”

이쪽을 향하고 있던 창 끝이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빽빽한 창날의 벽에 듬성듬성 공간이 생긴다.

타타타탕! 타타탕!

탕! 타탕!

물론 이단자들 측에서도 맞고만 있지는 않는다. 적군의 총격에 드라멜른 기사단 측도 사상자가 생긴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세 차례의 일제사격이 끝나자 화약 연기는 좁은 공간에 쌓일 대로 쌓여서 뻑뻑해져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다.

그 때, 총을 다 쓰고 말을 돌렸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과 창을 뽑아든다.

“검은 성자의 이름에 영광을!”

“와아아아아아아아!”

이번에는 진짜 돌격이다. 말에 박차를 가해서, 부딪치기만 해도 뼈가 부러질 정도의 충격력을 가진 중무장한 기사와 그를 태운 질 좋은 군마가 달린다.

“으아아악!”

콰드득. 말의 몸을 두 자루의 창 끝이 찌른다. 말에서 떨어진 검은 옷의 기사가 그대로 적진 한가운데로 나가 떨어진다.

“미친새끼들! 막아!”

“버텨라!”

“으헉!”

옆에서는 정확히 기사의 몸을 노린 창 끝이 흉갑에 부딪쳐 노란 불꽃을 튕기다, 겨드랑이를 뜯어 놓았다. 육중한 기사의 몸이 허공에 나가떨어진다.

피와 비명, 부서진 창대 조각이 허공으로 함께 흩날린다.

아무리 기마 사격으로 정면의 숫자를 줄여 놨어도 창벽은 창벽이다. 역시 정면 기병 돌격으로 뚫기는 어려웠다.

아니, 이 무모해 보이는 기사들의 정면 공격조차 ‘무력화’ 공격의 일부이다.

말을 찌르고 기사를 찌르며 한쪽으로 쏠린 창들.

부러지고 망가진 창 끝과 육중한 말과 기사의 몸무게가 쏠리는 충격을 받아내며 어그러진 대열.

조금 더 운이 좋고, 능숙한 후속하는 기사들이 뛰어들기에 충분한 공간을 만들었다.

구멍난 정면으로.

한쪽으로 쏠린 창병 대열의 측면으로.

창벽 너머로 숨은 총병들이 지키던 빈 공간으로.

검은 옷의 기사들이 하나 둘 뛰어든다.

“씨팔 뚫리면 다 뒈진다! 죽어도 버텨! 죽어 이 새끼야!”

창벽 안으로 무모하게, 하지만 창에 뚫리지 않고 돌입해온 기사의 옆구리를 찔러 끌어내린다. 얼굴을 덮은 투구 아래로 보이는 턱에 단검을 꽂아넣는다.

하지만 발버둥치는 말에 밀려 넘어진 창병들 때문에, 대열의 선두가 일그러졌다. 두번째, 세번째 기사가 들어와 마구 검을 휘두른다.

이미 창벽 안에 적을 들이고 말았다는 절망감이 트랑카벨 군 병사들을 휘감는다.

그러나 창벽의 굳건한 대열은 이런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선두 동료들이 죽거나 다치고, 창을 잃어 저지력을 잃어버리면 그 후열이 다시 창을 앞으로 내리고 새로운 정면이 된다.

창을 잃은 선두의 동료들은 아군의 창벽 아래로 후퇴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아군을 보조한다.

창벽을 억지로 뚫고 들어온 적을 끌어 내리고, 아직 살아있는 낙마자들의 목을 따면서

“개자식들아 뒈지는게 무섭지도 않냐!”

“이단자들의 영혼을 불태울 수 있다면 기꺼이 내주마!”

창벽의 아래에서 나뒹굴며 부러진 단검으로 서로를 찔러대던 드라멜른 기사와 트랑카벨 군 부사관이 피거품을 뿜으며 욕설을 주고 받는다.

서로 중무장을 한 상태라 무기가 잘 들어가지 않는다. 마침내 주먹질을 하며 한 명이라도 적을 더 죽이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게 된다.

타타타탕!

“으윽!”

“맞았어!”

하지만 일단 대열이 고착화되자, 비스듬한 측면에서 사격 지원을 시작한 총병의 공격에 기병들이 쓰러진다.

드라멜른 기사단은 용맹하고, 그 전술은 어느정도 먹히기는 했으나 결정적으로 숫자가 많지 않았다. 삽시간에 절반 가까이가 말을 잃었으니까.

고슴도치처럼 창을 세운 보병의 정면으로 돌격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돌입했던 것이고.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주신이시여 나의 팔을 빌어 적을 치소서!”

“성녀의 뒤를 따르라!”

서서히 숨통이 끊어져가는 드라멜른의 기사들과 드잡이질을 하던 트랑카벨 군을 모스탈의 무장수도사들이 덮쳐온다.

그 선두에는 기프트의 하얀 빛을 내뿜는 성녀 랑시아 자신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