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5. 마르사코르 언덕
###
“우우우우우우우!”
한편 그 시각, 언덕 위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통곡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성녀님, 신의 사도들의 피가 저렇게나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이단자들의 흉흉한 무기가 교단을 지키는 기사들의 몸을 끊임없이 침범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통곡하는 것은 바로 모스탈 요새 수도원장, 네부카디 델 카스트로소였다. 흉터 투성이인 얼굴을 찌푸리며 통곡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공포스러운 장면이다.
“이 전장에 올바름은 더 이상 없다는 말입니까··· 아아, 저 훌륭한 청년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하다니, 이 무슨 비극인지!”
“진정하세요, 나의 투사님. 결국, 마지막에는 주신의 정의가 이 땅에도 세워 질 겁니다. 검의 대리인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에요.”
“오오오··· 부디! 부디 신의 빛나는 철퇴가 이단들의 머리 위에 쏟아져 내리기를!”
성녀 랑시아 아스트로메다는 측은한 눈으로 자신의 대리 투사, 네부카디를 바라보았다.
원래 정신적으로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았던 네부카디이지만, 최근 들어 더욱 ‘발작’과도 같은 현상이 잦아지고 있었다.
전투에서 얻은 상처가 늘어났기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었다.
그 발작이란 갑자기 감성적이 되어 죽은 전우들을 애도하고 신을 찬양하는 찬송가를 부르거나, 갑자기 잔혹해져서 이단 혐의자를 난도질하는 등 걷잡을 수 없었다.
다행히 성녀인 랑시아 자신이 함께 있을때는 발작이 일어나도 금방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도 있어서, 총사령관 라모리 스텐던 경은 그녀에게 마지막 순간 성전군 기병대의 지휘를 맡겼다.
라모리 휘하의 용병 기마대, 드라멜른 기사단 소속의 중기병대를 포함한 성전군의 주력 기병대에 모스탈 수도회의 전투 수도사를 합친 병력은 2천 기에 조금 못 미치는 수이다.
결코 적은 병력은 아니다. 기회가 많지는 않겠지만 잘만 활용한다면, 전장의 국면을 한 번 정도는 바꿔볼 수 있는 충격력이다.
옆에서는 라모리의 측근이라는 기병 연대장과, 드라멜른 기사단의 기병 지휘관이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눈물을 닦는 네부카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의상 간신히 참을 뿐, 사실 랑시아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용병인 라모리 사령관의 직속 병력이나, 그룬발트에서도 가장 유명한 종교 기사단의 병력이 ‘성녀’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자신을 탐탁치 않아 하는 것은 말이다.
물론 랑시아 아스트로메다 자신도 전장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녀가 된 후 첫 임무가, 모스탈 수도회의 무장 수도사들과 함께 동부 변경의 사교도들과 싸우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사교도들은 변경의 야만인들이었으며, 제대로 된 전투라기보다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도적 토벌과 같은 양상이었다.
때문에 성녀 랑시아는 자신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아무런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최소한 거기에 대해서는 객관화가 되어 있으니까.
그럼에도 라모리 스텐던 사령관은 자신을 기병대의 지휘관으로 삼았다. 반대 의사를 내보인 다른 장교들을 설득하면서까지 말이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지휘관으로 세울 간판 인재가 없기는 했다.
법황에게 공인 받은 용병, 그룬발트에서 유명한 종교 기사단, 동부에서 이교도 때려잡던 무장 수도사, 여타 순례자 기병들.
하나같이 개성 강하고 특성이 강한 부대를 하나로 묶어 통솔하려면 강한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설령 그 카리스마가 외부의 권위에서 온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서열 상 주교급 대우를 받는 성녀라는 직위는 이 잡탕 기병대의 우두머리를 하기에 아주 적절했다.
게다가 라모리는 그녀의 임무를 딱 하나로 한정했다.
신호를 내리면, 그 지점을 일점돌파할 것.
한번 적진을 돌파해 적의 저항을 분쇄했다면 굳이 통일된 부대 편제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 각 제대는 해당 지휘관의 판단에 의해 전과를 확대해 나간다.
이 보조임무까지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양측의 예비대가 충돌할 단 한번의 공세를 이끌어달라는 것이다. 그 후에는 부하 지휘관들이 알아서 하겠지.
랑시아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언덕 위에서 마지막 공격 신호를 기다린다.
그녀의 차분한 눈빛이 언덕 아래에서 죽고 죽이는 싸움을 거듭하는 양측의 병사들을 무심하게 내려다본다.
###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는 생각보다 격렬한 포화에 놀랐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볼 때와는 달랐다.
언덕 비탈의 기울기가 좀 더 완만해지는 지점이 적의 포화가 집중되는 지점이었다. 부득이하게 밀집도가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그 지점을 포탄이 쓸고 지나갈 때마다 부하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드라멜른 기사단과, 그의 직속 용병들을 가리지 않고 시체가 겹겹이 쌓여 마치 비늘처럼도 보였다.
포격에 의한 희생이었기에 신체 일부가 손상된 전사자가 많아서 더더욱 끔찍해 보인다.
포탄 한발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았는지,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고 상하체가 거꾸로 되어 구겨진 쓰레기처럼 언덕 중턱에 박힌 병사와 눈이 마주친다.
물론 이미 사망한 상태지만, 라모리는 그 병사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벌써 3~4년 정도 그의 용병대에서 근무했던 하급 부사관이다.
이름까지는 모르나, 능력이 있었는지 몇 번 표창을 하거나 직위를 맡아 활동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 익숙하지만 이름 모를 병사의 공허한 눈은 더 이상 생명의 빛을 띄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마치 그가 자신의 무능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왠지 반박이 하고 싶어진다. 그가 세운 계획에 따르면, 언덕 중턱에서 구겨지고 찢겨진 채 겹겹이 쌓이는 것은 성전군이 아니라 블랑독의 이단자들이어야 했다.
아군의 포화를 정면으로 받으며, 숨을 곳도 없는 언덕길을 기어 올라야 하는 것은 그들이어야 했다.
어차피 서로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뻔했으니까.
그 빌어먹을 산불만 아니었으면 분명 그렇게 되었으리라. 그게 아니더라도 선택지가 없지는 않았다.
법황청으로부터 지원군이 온다는 사실을 안 시점에서, 그리고 이미 약탈로 물자를 조달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블랑독 북부를 좀 더 불태우며 버티는 것도 나쁘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 빌어먹을, 천벌을 받을 산불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신성한 기사들이 수천 명이나 있고, 법황 공인 성녀까지 이쪽 진영에 있는데도 산불 하나 막을 수 없다는 말인가.
뭐 모르지, 성녀님의 영험함이 없었다면, 정말 화산이라도 폭발해서 싸울 틈도 없이 성전군 통째로 몽땅 날아가 버렸을지도.
부정적인 생각은 그만하자. 라모리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듯 뭉쳐오는 휘하의 기직스 연대장과 참모들을 밀쳐낸다.
“적에게 표적을 만들어 줄 셈인가! 평소대로 움직이게!”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적 중에 특별히 주의 깊은 포술장이 있다면, 분명 적이 뭉쳐있는 곳을 노릴 것이다.
거기 적 지휘관이 있으리라 추측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게 효율적이니까. 라모리 자신이라도 포대를 지휘한다면 그렇게 했겠지.
비탈 아래로 갈수록, 검은 옷을 입은 드라멜른 기사단의 시체가 늘어난다. 간소한 갑주를 걸친 보병, 어깨와 허벅지에 추가 장갑을 걸친 정기사, 흉갑만 걸치고 향로를 가진 군종 수도사까지.
직위고하를 막론한 시체가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드라멜른 기사단은 공세의 선봉을 맡아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마, 통상적인 용병 부대였다면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을지도 모를 정도의 피해겠지.
그러나 저들은 ‘개전의 의식’ 덕분에 공포도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아니, 주신의 세계에 대한 열망으로, 현실 세계의 자극에 반응이 줄어든다던가.
그렇게 꾸역꾸역 언덕 아래를 수비하는 적에게 붙더니, 놀라운 힘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적군의 배치가 방어선이 깊지 않은 선형 배치라는 점도 있었겠지만. 정말 엄청난 저력이었다.
이제 라모리가 할 일은, 드라멜른 기사단처럼 완고할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리는 아니더라도 보다 능숙하고 유능한 전투 전문가인 직속 병력으로 약점을 찌르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취약한 약점으로 확인 된, 단 한 점을 지정해 최후의 기병 돌격으로 끝낸다.
적은 숫자가 더 많고, 화력도 더 강하다. 정면으로 더 싸워봤자 힘이 빠질 뿐이다. 개전의 의식도 무한히 드라멜른 기사단 병사들의 정신을 잡아두지는 못하겠지.
기병으로 전열을 돌파한다고 적을 끝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거기로 적 예비대를 쏠리게 만들 수 있다면 두번째 세번째의 기회는 계속 생길 것이다.
다행히 적은 여러개의 연대급 부대로 나뉘어져 있는지, 부대간의 전투 지경선이 약점으로 보인다.
여기를 계속 노리면 분명 약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전군의 포병대는 아직 전멸한 것이 아니다. 예비 화약들이 몽땅 불살라지고, 산불이 심해 포대 대부분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포 몇 문 정도는 살렸다. 그걸 다시 끌어다가 기병과 함께 싸용하면 역으로 적에게 강타를 한 방 먹일 수 있겠지.
“라모리 대장님! 자프론 연대장께서 공격을 시작하겠다 하십니다!”
“알았다.”
후속군의 선두를 맡은 자프론 푸코데무스의 임무 역시 명확했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적의 약점을 확인하고 돌파를 준비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적이 알아채지 못하게 공격을 시작한다.
일일이 라모리가 추가로 명령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십 년 이상 보병 부대를 이끌어온 보병 전문가, 자프론이다.
라모리가 볼 수 있는 약점은 그도 볼 수 있었다.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만약에 적이 일부러 약점을 보여주는 함정을 파면 어떻게 하냐는 의견이 나왔었다.
참고로 아군의 방침은 그렇더라도 공격한다, 로 정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약점이 진짜라면 뚫어내면 그만.
실제 약점이 아니고 적이 판 함정이었다? 그럼 적의 카드를 드러내게 했으니 그 후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정쩡하게 망설이다가 적 포격에 벌집이 되느니, 그게 훨씬 나았으니까.
어차피 평지에서 쓸 수 있는 보병 전술은 제한된다. 그리고 비슷한 전력이라면 자프론의 베테랑 보병들은 결코 밀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고.
“전진! 전진!”
“지원 사격에 이어서 우리가 그대로 밀어 붙인다!”
몇개의 작은 단위로 쪼개진 자프론의 보병들이 바쁘게 이동하고 있었다. 지금 쯤이면 적이 발견하고 대응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신속했다.
비탈이고, 무겁고 불편한 장창을 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100점 만점에 100점을 주고 싶을 정도의 기동력 활용이었다.
옆에서 또 다른 보병 연대장인 기직스 미슈람 알메르타트가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차례는 잠시 뒤이다.
자프론의 선두 공세가 충분히 효과가 있는지, 함정에 빠졌다면 병력을 보강해서 다시 한번 밀어붙일 지 다시 판단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지점을 공격하기로 했으니까.
콰쾅! 퍼억!
“크아아악!”
“허억···.”
흙먼지가 후두둑 쏟아진다. 또 몇 명인가의 아군이 포탄에 희생되었다.
농담으로도 오래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마침 자프론의 베테랑 보병 군단이 돌입하고 있다. 선두의 드라멜른 기사단의 보병 대열이 열어준 틈으로 자프론의 연대가 전진한다.
“사격!”
타타타탕! 타타탕!
타타탓, 타탕! 타타탕!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총병들이 일제사격을 가하자 적군이 우수수 쓰러지며 혼란에 빠지는 모습이 보인다.
드라멜른 기사단의 무기는 사거리가 짧은 괴상한 중화승총이다. 영 미덥지 못한 무기지만, 개전의 의식을 거친 보병들이 다루기에 그나마 나은 무기라고 한다.
아니··· 그들이 아니면 다룰 수 없는 무기기도 하겠지.
때문에 적, 이단자들은 갑자기 ‘통상적인’ 총병들이 모습을 드러내 일제사격을 가하자 당황한 것 같았다.
여기 포탄도 몇 발 때려 넣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아직 포병대는 준비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고, 어쩌면 멀쩡한 포가 하나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자프론 연대의 공세는 늦춰지지 않는다.
“전진!”
“이대로 적을 몰아낸다!”
희끄무레한 총연이 자욱한 전장을 장창 밀집 대형이 나아가기 시작한다. 마치 안개의 바다를 가르고 항해하는 배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