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1. 마르사코르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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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 지금은 물러나셔야 합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대고 외치는 자는 모스탈 요새수도원의 원장, 네부카디 델 카스트로소이다.
“저 역시 주신의 신도, 신의 사랑받는 아이들이 싸우는 전장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차분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는 것은 교단의 성녀, 랑시아 아스트로메다이다.
“하지만 성녀님! 전방의 간악한 이단자들도 문제이지만, 후방의 산불도 문제입니다. 여기 머물고 계시다가 귀하신 몸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나의 투사님.”
성녀 랑시아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네부카디의 말을 끊는다.
“저 역시 여러분과 같습니다. 이번 전투를 반드시 이기기 위해 주신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하오나···.”
“가장 큰 실패는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피해는 없습니다.”
그러더니 랑시아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법황이 임명한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과 눈이 마주친다.
“라모리 경, 지금 산불은 진정이 된 것이지요?”
“음··· 지금 당장 끌 방법은 없지만, 그로 인해 더 피해가 늘어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 잠시 라모리가 대답한다. 다시 말하면 ‘이미 탈 것은 다 타버려서 더 탈 게 없다’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래 숲은 ‘안전한 후방’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갑자기 타오른 원인 모를 산불은 예비 보급물자와 예비 병력을 한꺼번에 태워버렸다.
그나마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예비 병력은 어떻게든 탈출했지만 보급품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방금 몇 차례 일어난 대폭발 덕에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성전군에 남은 예비 화약이 없다는 것을.
그런데 도대체 산불의 원인은 뭔지 궁금했다. 불이 난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옴과 동시에 이미 감당 못할 정도로 화재는 거대해져 있었다.
산불이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단 시간에 확 하고 퍼질 수 있는 것인가? 지금이 가물어있다고는 해도 말이다.
라모리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녀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이제는 싸울 수 밖에 없겠네요, 나의 투사님. 어차피 산불이 번지고 있어서 물러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이단자들이 세를 과시하고 있는 전방을 통하지 않고는 이 언덕에서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성녀님.”
랑시아는 한 걸음 다가가더니 네부카디의 손을 마주잡는다. 얼굴만큼은 아니더라도 온갖 화상과 상처로 뒤덮인 무장수도사의 손과, 하얗고 가느다란 성녀의 손이 대비된다.
“나의 투사님. 저를 정말 생각하신다면, 이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건 물론입니다, 성녀님!”
라모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살짝 안심했다.
악재가 겹치는 지금, 성녀가 전장에 남아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병력의 태반이 종교 기사단과 순례자들이다.
이들에게 있어 주신교와 교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성녀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자신의 투사를 설득하고 위로해준 랑시아는 다시 일어서더니, 이번에도 라모리를 향한다.
“라모리 경,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죠. 들어보아도 될까요?”
“지금은 한 가지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더 이상 방어전을 지속할 수 없으니까요.”
“공격··· 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라모리 경?”
“그렇습니다.”
“저는 군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동의해요. 최대한 협력하도록 할게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라모리의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원통함이다.
권력이나 지휘권에 욕심을 내고 살지는 않았다. 용병들 중에 자기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 억지로 오르려다 신세를 망친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그래서 라모리는 과하게 자신을 드러내거나 직책에 욕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런 야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과 주변의 안전함에 대한 집착이 허영심이나 과시욕구보다 앞섰을 뿐이지.
그런 점에서 이번 전투는 아주 특별한 기회였다. 적에 비해 부족하기는 하지만 뭐든 해볼 수 있는 전력, 성녀와 지휘관들의 전폭적인 지지.
차마 주변에 드러내서 말하지는 못했으나, 위기에 처한 아군을 구해낸다는 상황조차도 그림처럼 보기 좋았다.
여기서 이긴다면 당연히 라모리는 용병으로서 커리어의 정점에 이를 것이었으며···.
이기지는 못한다고 해도 시간을 최대한 끌고, 비탈을 억지로 오르는 적으로부터 최대한 피의 대가를 받아낼 예정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고용주인 법황과 교단의 전략에 부합하는 최선의 결과를 낼 작정이었다. 어느정도 자신도 있었고.
또한 개인적으로··· 상당한 전술가가 분명한 적장과의 숨김 없는 일전을 겨뤄보고 싶다는 호승심도 없지는 않았다.
아주, 아주 조금이지만. 투쟁을 업으로 삼은 인간으로서, 아니 남자로서 당연한 생각이라 하겠다.
그런데 방금, 그 모든 계획이 어긋났다.
잠을 줄여가며 세웠던 계획들, 치밀한 병력 배치와 자원 분배가 불타버린 숲과 함께 잿더미가 된 것이다.
특히나 몽땅 타버린 화약이 너무도 뼈 아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원하게 대응사격이나 해 보았을 것을.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라모리 사령관! 기직스 연대장입니다!”
밖에서 잠시 소란이 일더니, 자신의 측근이자 충성스러운 세 명의 연대장 중 한명인 기직스 마슈람 알메르타트가 달려 들어왔다.
라모리의 직속 연대장 중 최연소인 그는 전쟁터에서도 머리며 복장을 단정하게 갖추고 다니던 멋쟁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가 온통 헝클어져 있었고, 자랑처럼 걸치고 다니던 선명한 색의 비단 장식띠의 끝도 불에 그을려있었다.
다행히도 큰 상처는 없어 보였으며, 눈빛은 분노와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라모리가 먼저 말한다.
“기직스, 마침 왔으니 명령을 내리겠다.”
“옛, 사령관!”
“아군은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 귀관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전군의 후위는 어려운 일이니 부탁하겠다.”
“알겠습니다. 완벽하게 해내겠습니다!”
고민과 분노, 후회와 혼란으로 가득했던 기직스의 마음 속은 존경하는 총대장의 단호한 명령 한 번에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불만을 한 마디쯤은 털어 놓으려는 마음으로 왔으나,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었다. 빨리 부하들에게 돌아가 전투 준비를 하고 싶어졌다.
“라모리 사령관님! 드라멜른 기사단의 발란트 경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무슨 일이지?”
“전령! 드라멜른 기사단은 ‘개전의 의식’을 진행 중. 향후 지원을 부탁드린다. 이상!”
“...알겠다.”
전령의 말을 들은 라모리는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역시나, 현재 성전군의 실질적인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드라멜른 기사단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멋대로 전투를 시작하려는 것은 월권행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드라멜른 기사단의 ‘특성’도 있었으니까.
“발란트 경에게 전달하게. 준비를 마치고 판단에 따라 공격하라. 그때까지 최대한 지원을 준비하겠다. 이상이다.”
“준비를 마치고 판단에 따라 공격하라, 그때까지 최대한 지원을 준비하겠다! 전달하겠습니다!”
“좋네.”
어차피 공들여서 세웠던 작전이나, 적을 기만하기 위해 준비했던 계책들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제 선택지는 거의 남지 않았다. 피할 수 없다면, 편승하는 수 밖에.
“라모리 경, 저는 드라멜른 기사단 부대로 가볼게요. 전장으로 나가는 분들과 마지막으로 기도를 함께하고 싶습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성녀 랑시아가 자신의 대리 투사 네부카디와 함께 사령부를 나간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라모리 대장!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부탁하네.”
기직스 역시 자신의 부대로 돌아간다.
반드시 승리··· 라니.
지금의 라모리로서는 도저히 입에 담기 힘든 말이었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서는 또 모를 일이다. 전투에서 적군의 대열을 붕괴하여 퇴각시킨다는 전통적인 의미의 승리가 아니라면 말이다.
아직 성전군의 전력은 건재하다. 전방 지휘관들의 통제에 따라 혼란도 어느정도 수습되고 있었다.
라모리는 마음속에서 ‘승리’의 기준을 바꾼다.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히는 것으로.
자신들은 전멸해도, 후속하는 성전군이 끊임없이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이단자들, 블랑독의 군대는 기간이 되는 정규군이 큰 타격을 입으면 다시는 군을 복구할 수 없을 것이다.
전술적으로 패배하더라도, 전략적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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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께서 영을 내려보내 지상을 살피시메···.”
“그대는 주의 뜻에 따라 살 지어니. 영의 수족이 되어 행할 지어니···.”
“오로지 당신의 뜻에 따라 살게 하소서, 나의 손을 들어 주신의 적을 치소서···.”
드라멜른 기사단은 누가 뭐라고 해도 현 성전군의 주력이다. 일단 병력만 따져도 전군의 절반에 육박하는 6천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특히 5500여 명으로 이루어진 보병 군단은 전장의 등뼈였다. 언덕 중앙부를 차지하고 늠름하게 배치된 이들 말이다.
이틀간 적군의 포격에 시달리며 사상자가 많이 나왔으나, 여전히 그 위용은 여전하다. 지금 그들은, 전투에 앞서 ‘개전의 의식’을 치루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기사단 보병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럼 그 주변을 자락이 긴 수도사 복장을 한 종군 수사들이 돌아다닌다. 커다란 막대에 달린 큼직한 금속 향로는 일반족으로 성사에서 쓰이는 향로보다도 훨씬 크고 무거워 보인다.
끊임없이 병사들 방향으로 향로를 흔들며, 기도문을 외우며 천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걷는다. 병사들은 기도를 하며 향로로 부터 흘러나오는 연기를 받아들인다..
게슴츠레하게 반쯤 떠진 눈의 병사들 역시 나지막하게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향로로부터 흘러나오는 향기는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럽게 달착지근한 느낌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건,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상관이 없다. 지금도 후방에선 불타는 숲에서 멀어지기 위해 후위 부대들 사이에서 난리가 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건 개전의 의식, 신을 따르기로 서원한 전사들의 신성한 의식이다. 그 어떤 외부의 사건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언덕 아래의 적군이 포격을 가해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개전의 의식은 계속 되었겠지.
왜냐하면, 이건 그렇게 되기 위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주신께서 우리의 손을 빌어, 당신의 적을 치시도록···.”
“오로지 주신의 뜻대로!”
길고 길었던 기도가 끝나고, 종군 수사들이 일제히 향로가 달린 장대를 치켜들며 외친다.
그 말이 신호라는 듯, 드라멜른 기사단 보병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조금 전까지 게슴츠레하거나 감겨있던 그들의 눈이 또렷하게 떠진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이 세계나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 너머의 주신이 존재하는 세계의 이상향을 바라볼 뿐.
“발란트 경? 발란트 경!”
뒤에서 개전의 의식을 참관하고 있던 드라멜른 기사단의 지휘관, 집행관 발란트 디아모프 폰 잘렌펠트에게 성녀 랑시아가 찾아온다.
“무슨 일이신가요, 성녀님?”
“지금 출전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장에 나서는 분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싶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다만 개전의 의식을 마친 기사단 형제들은··· 주신의 세계가 아닌 현세의 자극에 다소 둔한 편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저 역시 주신의 뜻을 따르는 성녀입니다.”
성녀는 말고삐를 당겨 드라멜른 기사단의 대열 한가운데로 말을 몰아간다. 다음 순간, 그녀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달착지근한 냄새에 깜짝 놀랐다.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다. 오히려, 계속해서 맡고 싶은 냄새였다. 다만 농도가 너무 진했다.
어떤 향료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바로 뒤에서 큰 불이 나서 타는 냄새가 나는 이런 상황에서 연기처럼 자욱해질 정도로 태우다니··· 대체 얼마나 많이 태웠길래.
성녀로서 전장에 나선 경험이 적지는 않았다. 다만 이것은 모스탈 수도회와 함께 동부 변경의 이교도들, 통상 사교도라 칭해지는 자들을 토벌하는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드라멜른 기사단처럼, 교단 내의 다른 군사 수도회와 함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단순한 동부의 성녀가 아니라, 교단 전체의 성녀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그녀가 입을 연다. 지금은 성녀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