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19화 (219/556)

28-9. 마르사코르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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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깊게 손을 뻗어 바위를 살핀다. 다행히 바위 표면이 거칠어서 붙잡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손가락 두개로 더듬어 자리를 확인하고, 손 전체를 밀어 넣어 무게를 절반 쯤 실어본다. 그리고 힘을 다해 바위를 꽉 움켜쥐고 몸을 끌어 올린다.

“읏샤···.”

밑에서 보면 개구리처럼 꼴사나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어떻게든 평평한 바위 위에 올라서는 데 성공한다.

“어휴···.”

드 누아 북부 보병 연대 소속, 엽병 지휘관 메르클랑 나브룰은 잠시 암벽에 기대 한숨을 돌린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열심히 따라 올라오는 부하들이 보인다.

완전한 수직 암벽도 아니고 중간 중간 쉴 곳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몇 미터만 더 높았다면 포기했을 것 같다.

맨 몸이라면 얼마든지 오르내릴 자신이 있었지만, 무거운 화승총과 화약 일체를 짊어지고 암벽을 오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몸에 단단히 동여맨다고 맨 화승총이 자꾸 힘을 줘서 움직이니 옆으로 밀려나 덜렁거리는 것 같다.

대단히 위험한 이동이다. 때문에 이번에는 연대에서 특별히 선발 된 15명의 ‘등반 전문 특공대’들만 참여했다.

10여 미터의 돌벽을 무거운 화승총과 10발 분량의 화약을 짊어지고 올라가야 한다.

100미터 안팎 원거리 사격에서 두 발 중 한 발은 맞추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참여 요건이었다.

자칫해서 떨어지면 자신이 크게 다치는 것 외에도, 떨어질때 충돌음이나 비명 때문에 적에게 들킬 수도 있었다.

신중히 지원자를 가려 뽑은 메르클랑은 이를 악물고 암벽을 올랐다.

안타깝게도, 이번 언덕을 둘러싼 전투에서 드 누아의 연대들은 후위 대기를 명령받았다.

이번 전투는 치열하게 맞서는 백병전 보다는, 막대한 화력을 주고 받으며 적을 서서히 붕괴시키는 형태가 될 것 같다는 콘도티에레의 설명을 듣고 납득은 했다.

하지만 납득을 했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번은 가증스러운 법황이 보낸 성전군을 상대로 한 마지막 전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드 누아 군은 거기서 뭐 했나요?’라는 질문에 ‘뒤에서 트랑카벨 군이 적을 섬멸하는 것을 구경했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이 벼랑을 기어 오르는 우회 특공대 임무를 지명받았을 때 정말 기뻤다.

원래는 오늘 해가 뜨기 전에 오를 생각이었으나, 불을 켜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상황에서 암벽을 오르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전투가 한창일 때, 아군의 포격으로 적이 정신없을 때 오르기로 한 것이다.

“허억, 허억···.”

바로 근처 바위에 누군가가 또 올라온다.

부분 부분 끈으로 묶어 움직이기 편하게 고정하긴 했으나 거친 천으로 된 펑퍼짐한 수도복 차림이다. 그런 복장으로 잘도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생각이 든다.

2차 아넥시 전투에서 싸웠던 방어 교회 소속 수도사, 아르옌 그로반이었다.

둘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서로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킨다.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절벽 위쪽이다.

메르클랑과 나브룰은 끙끙대며 마지막 석벽 위를 오르기 시작한다. 아직 충분히 올라오지는 않은 상태에서 공격을 시작하기는 이르지만 상황을 봐야 했다.

아르옌 그로반 수사는 조심스럽게 고개만 내밀고 주변을 살핀다.

뻐엉!

바위 바로 아래에는 무슨 용도인지 모를 적군의 막사가 몇 채 서 있었다. 보급품이 든 상자도 잔뜩 쌓여있다.

주변에 경비병들이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혹시 들킬지 모르니 최대한 몸을 움추린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성전군의 포대가 있었다.

언덕 아래에, 포격은 물론 보병 공격도 대응할 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들어진 블랑독 연맹군의 포대와 같은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갖출 것은 다 갖춘 포대가 포탄을 쏴대고 있었다.

현재 상황이 어떤지, 막 암벽을 올라온 아르옌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오로지, 포대 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본다.

아슬아슬하게 조준사격을 할 수는 있을 거리이다. 적을 맞추지는 못하더라도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할 정도로는 방해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의 임무는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우회하여 언덕의 반대편에서 절벽을 오른다. 그리고 적 포대의 포수들을 저격하는 것이다.

특공대랍시고 들어가서 화약을 폭파시키거나 경비병을 제압하고 포대를 점거하는 그런 일은 절대 아니다.

그저 적을 귀찮게 하고 평소처럼만 활동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 그것만 해도 포대의 위력은 반감된다는 것이 작전을 전하는 첼레스티나 부관의 설명이었다.

분명 적은 대응하려 하겠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괜찮다.

포대 근처에서 적군이 다수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방해 효과는 있었다. 적은 암벽에 상당한 병력과 주의를 기울여야 할테고 이는 수적으로 열세인 적에게 또 다른 부담이 올 테니까.

적이 절벽 위로 나와서 우회 특공대를 공격하려 한다?

그건 절벽 아래 미리 준비하고 있던 드 누아 보병 연대의 나머지 병력들이 저격해 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적에게는 손해만 가는 작전인 것이다.

다시 고개를 내리고 원래 위치로 돌아온 아르옌은 몸에 이리저리 묶여있던 끈을 풀고 사격을 준비한다.

잘 포장된 화승총을 꺼내고, 단단히 봉인되어 있던 화약 가방을 연다. 잘 갈무리되었던 화승을 연결하고 격철이 잘 작동하는지를 확인한다.

아직 불은 붙이지 않았다. 부싯깃 상자는 있지만 불을 내는 게 또 큰 문제였다. 사람이 더 모이면 조심스럽게 불을 만들어 나눠 붙여야겠지.

‘방어 교회의 일원은, 원칙적으로 자신이 지키겠다 맹세한 요새의 외부에서는 전투 행동을 하면 안되는 게 규칙이네.’

벽에 기대에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아넥시에서의 혈전 끝에, 마침내 요새를 지켜냈고 큰 부상을 입었던 그의 스승이 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는 성직자의 몸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공부한다는 모순된 점을 인정하는 내용이네. 또한 힘을 가지게 된 우리가 패권을 다투는 쪽에 설지도 모른다는, 주객전도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목적이기도 하지.’

온 몸에 붕대를 감은 채로, 그의 스승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 사제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힘을 가지면 타락할 수 있다. 힘을 가진 교단을 상대로 투쟁하는 입장인 방어 교회는, 자신들도 타락할 것을 항상 두려워하고 있었다.

힘을 가지되,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한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방어 교회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 역시 한때 교단의 일원이었기에 말이다.

‘하지만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규칙을 어길 수 있는 과단성 또한 필요하다고 보네! 방어 교회 자체가 교단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말썽꾸러기들이 아니겠나?’

그의 스승은 말썽꾸러기라고 표현했다.

이단심문관에게 붙잡히면 끔찍한 고문 끝에 배교자의 낙인이 찍힌 채 비참하게 죽을지도 모르는 그들이 짊어진 운명을 말이다.

‘가시게, 아르옌 수사! 가서 교단의 거만한 이들로부터 핍박받는 이들을 지켜주시게나. 그게 주신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의무가 분명할테니. 자네가 바로 힘 없고 선량한 이들을 구하는 요새가 되는 걸세!’

원래라면 안되는 일이다. 블랑독 연맹군을 따라다니며 다음 전장을 찾아보고 싶다는 제자 아르옌 수사의 말에 요한 사제는 흔쾌히 대답했다.

‘자네는 아직 수행하는 몸이 아닌가. 아직은 좀 더 고민하고, 번뇌의 골짜기에서 굴러도 될 권리가 있으니까.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책임은 다 이 몸에게 떠넘기도록 하게나.’

그 말이, 아르옌 그로반 수사의 싸움을 지탱하는 요새가 되었다.

공방전 내내 함께 싸웠던 아넥시 주민들은 아넥시 수비대 중 최연소였던 이 수도사가 떠나는 것을 무척 아쉬워 했다.

그가 입고 있는 수도복은 주민 대표 루옹의 아내가 밤을 새서 새 옷처럼 고쳐준 것이다.

허리에 찬 단검은 아넥시에서 총병대를 이끌고 용감히 싸운 바트로가 준 것이다. 칼날은 타라트라바 강철로 만들어 매우 날카로웠으며, 자루와 검집을 감싼 가죽은 아넥시 대장간에서 새롭게 마련해줬다.

화약 가방과 장전용 예비 화약통에 담긴 화약들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주었다.

신고있는 신발도, 허리춤에 차고있는 주머니도, 심지어 그 안에 든 비상식량과 공구까지 아넥시 주민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르옌 수사는 홀로 종군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점화.”

“점화해!.”

“점화!”

어느새 다들 올라와서, 절벽 위쪽에 다닥다닥 붙은 우회 특공대 사이에서 속삭임처럼 명령이 전해진다.

두세명 중 한 명씩, 부싯깃 상자를 꺼낸다.

위에서 들리는 소음, 요란한 포성에 맞춰 부싯돌과 쇳덩이를 부딪쳐 불을 일으키고, 불쏘시개에 옮겨 붙은 불을 화승으로 옮긴다.

천천히 타오르는 노끈의 끝을 입으로 불어 빨갛게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한다.

그렇게 장전을 마치고 사격 준비가 끝났다. 총구를 막고 있던 천조각을 제거하고 사격 위치를 잡는다. 총을 들고 기어오르자니 더 힘들게 느껴진다.

각자가 바위 틈에 기대거나, 바닥을 깔고 눕는다. 총 끝은 모두가 포대를 향하고 있다.

사실 선발했다고는 하지만, 그 기준도 절반은 안 맞는 것이다. 실전에서 명중률은 아마도 훨씬 낮을 것이다.

그래도 안전한 줄 알았던 벼랑 쪽에서 날아온 총탄이니, 적진은 난리가 나겠지. 처음부터 그걸 노렸던 것이고.

그렇게 사격을 준비하려는 순간, 갑자기 적진이 시끄러워진다. 혹시라도 들켰나 싶어 바짝 긴장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메르클랑도 아르옌도, 당황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본다.

“저기.”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포대 방향을 가리킨다. 정확하게는, 포대의 뒤쪽, 숲 방향을 말이다.

모두의 눈이 커진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럴 때가 아니었다. 빨리 쏘고 빠져야 했다.

“...발사 준비. 발사 준비. 내 신호에 따라 발사한다.”

“옛···.”

“발사!”

탕! 타타탕! 타타탕!

15명의 특공대가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위 아래로 다시 고개를 내린다. 표적이 맞았는지, 적진이 어떤 상황인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으아악!”

“누가 총을 쏜 거야?”

“벼랑 쪽! 벼랑쪽에 적이다!”

“적이라고? 어떤 놈이 잘못 쏜 거 아냐?”

“시발··· 저거 뭐야! 불났다! 불났어!”

“일단 보급품부터 옮겨! 화약에 옮겨 붙으면 큰일 나!”

대담하게 벼랑을 기어 오른 병사들의 사격은 분명 혼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그들이 혼란을 일으키기도 전에, 적진은 이미 대혼란에 빠져있었다.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진짜··· 이걸 이제부터 어쩌지?”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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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한 병력은 우리 연대 후방에서 재편성하도록 한다.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해.”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대공은 서둘러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원군인 순례자 부대 덕에 급한 불을 끄고 한숨을 돌린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딱 그 정도 뿐이었다.

팽팽하던, 아니 솔직히 안프로니오 연대가 밀리고 있던 전선에 쏟아져 들어온 높은 기세의 지원군의 불길은 빠르게 꺼지고 식어갔다.

말하자면, 모루에 적을 올려두고 망치로 내리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적을 박살내기에 망치가 너무 약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기 목이 부러져버린 망치를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수습하고 고쳐서 써먹어야 했다.

그만큼 현 상황은 절박했으니까.

어쨌든 적의 전선을 밀어내고, 일시적으로나마 최전방의 압박을 줄인 것은 분명했다. 숨통이 트였으니 다음 단계를 생각할 여유도 있는 것이고.

어쨌든 완강한 적에게 부딪쳐 전방에서 돌파력을 잃고 지리멸렬해버린 저들을 그냥 두면 큰일이 난다. 최악의 경우, 사방팔방으로 도망다니면서 아군 대열을 뒤집어 놓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안프로니오 연대 역시 베테랑들로 이루어진 부대다. 잘 컨트롤하면 예비 병력으로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지.

어찌됐든 라모리 사령관은 안프로니오 연대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이보다 어려운 전장도 헤쳐나간 적이 있다. 자신들이 더 많은 적의 공격을 끌어들이고 버티는 만큼, 본진에는 여유 병력이 생긴다.

쓸데없는 괜한 고민은 그만두고 오로지 더 잘 싸우고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기 위한 생각이나 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성전에 발을 들인 이상,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예비 병력을 파악해서···.”

콰아앙!

“으으윽!”

“이게 무슨 일이야!”

엄청난 굉음이 등 뒤에서 울렸다.

“뭐지? 포격? 포격인가?”

“아닙니다, 대공 전하!”

명령을 받아 적고 있던 참모 장교의 턱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제 겨우 20대 중후반이지만, 전장 경험은 10년 가까이 된 믿음직한 가신의 아들인 청년이다. 그가 이처럼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사··· 산이 폭발했습니다!”

“뭐라고? 무슨 소리인가 대체!”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대공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려 언덕 위를 바라본다.

‘산이 폭발했다’

그 말 그대로, 엄청난 화염이 언덕 위를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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