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마르사코르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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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망원경으로 열심히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보통은 맨 눈으로 살피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에는 실제 싸우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한편, 옆에서는 첼레스티나가 발을 동동 구른다. 큰 일이 났다고 생각을 했는지.
“콘도티에레! 언덕 위에서 적의 지원군이 왔어요오! 숫자도 많아요!”
“그렇네··· 아군이 숫자로 압도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비슷한 숫자가 되어 버렸어.”
“그, 그런데 괜찮을까요, 콘도티에레?”
“저쪽 방향은 아실 경의 별동대가 뒤를 받쳐주고 있잖아. 아실 경과 모리츠가 알아서 잘 하겠지.”
“아! 그렇네요오···. 저기는 제10 연대도 있고, 지빌링엔도 있고··· 에헤헤, 역시 대단해요, 콘도티에레!”
호들갑떨던 첼레스티나가 안심했는지 다시 베시시 웃는다.
그렇다니까. 이미 유능한 현장 지휘관에게 맡겼으면 같이 고민하면 손해니까. 아실과 모리츠는 문제를 해결할 자원도 있고 능력도 있다.
내가 걱정할 부분은 혹시라도 전장 상황이 더 나빠질 여지가 있는지와, 현장에서 해결중인 문제를 도울 방법이 있는지 정도이다.
그거 말고도, 다른 전선에도 언제든지 문제가 생길 수는 있으니까.
불리한 전투에서야 전투 초반부터 온갖 기책을 다 써두지 않으면 질 수 밖에 없으니까 할 일이 많지만. 원래 유리한 전투에서는 유리한 상황을 잃지 않도록만 관리하면 된다.
스포츠 경기로 치면, 이미 몇 점 차이로 이기고 있는데 굳이 위험하게 수비를 줄여가면서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나 할까.
오히려 악착같이 도박수를 써서라도 점수를 따야 하는 것은 상대방이고, 그 틈을 잘 노려서 이득만 보면 된다. 그게 유리한 쪽의 전술이다.
“콘도티에레, 포격 지원을 해볼까요?”
“지금은 잠시 포병은 휴식하자. 너무 섞여있어서, 자칫하면 아군을 맞추는 수가 있어.”
“네에, 콘도티에레.”
포수들은 이틀간 고생 많이 해서 잠시 휴식을 준 상태이다.
아군이 불리하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포격 지원을 행할 필요성도 있지만, 그러기 전에는 오폭 위험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
오폭이나 오사, 아무튼 오인 전투의 경험은 자신감을 빼앗고 죄책감을 남기니까. 자칫하면 평생 갈 안좋은 기억이 될 수도 있고.
다시 말하지만, 유리한 상황에서는 그런 부담을 안을 필요는 없지.
게다가 포수들의 체력과 집중력을 회복시키고, 포신도 식혀 두면 갑작스럽게 적의 돌발 행동에도 대응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나저나 적의 기습적인 반격에는 나도 조금 놀랐다. 아 물론, 적의 위력에 당황했다거나 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나와 같은 전통적인 전장 운용에 익숙한 지휘관들은 저런 형태의 병력 활용을 꺼리는 편이다. 전술이라는 것은 결국 통상적인 인력 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준화되고 잘 훈련된 병력의 선호도가 아무래도 더 높을 수 밖에 없다.
전장에 투입되면 어떤 명확한 역할을 하고, 어떤 공격을 견딜 수 있으며, 얼만큼의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지가 예상가는 편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런 광신도 병력은··· 지휘관으로서 예상이 안된다. 덤으로 한번 투입이 된 이후에는 통제도 안될 것 같은데.
물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전장에 투입되자마자 충격력을 가진 돌격 보병으로서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는 있으니까.
불리하던 전방 분위기를 확 돌려 놓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후가 문제이다. 그렇다고 저 방향의 아군 병력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 병력을 밀어내서 전선의 균형을 되찾았다는 것에 가깝지.
그렇다면 그 후에는?
저 기세를 타고 돌입해온 광신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원래 전선을 지키던 용병들과 합류해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할 것인가?
아니면 기존 대열을 보강할 것인가?
장담하지만, 어느 쪽도 크게 의미는 없다. 우리 트랑카벨 정규 연대가 창병과 총병으로만 이루어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니까.
이 두가지 무기가 가지는 저지력과 충격력이 담보되지 않는 병력은 절대로 전선을 유지하는 주력 보병으로는 활용할 수 없다.
결국 전장에서 아군 대열을 돕는 예비 충격 보병으로 운영해야 할 텐데, 그런 통제가 가능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기도 하고.
잠깐, 다시 생각해보자.
나 역시 이번 전쟁에서 이런 보조 병력을 활용해서 싸웠던 적이 없지 않다.
수성전이었던 아넥시 전투는 그렇다 치더라도, 뤼나메르 교차로 전투에서 아군의 절반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민병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예를 들자면 평소에 암반을 부수다가 전장에서 적의 머리통을 깨부쉈던 쾨트의 광부들이라던가 말이지.
치열하게 맞물려가는 전장에서 이런 변칙적인 전력 투입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 함정 파놓고 우회 기병대 무력화시켰던 작전은 내가 생각해도 참···.
그런데 실패했으면 졌다. 기책으로 전술 열세를 땜빵하는 것도 어쩌다 한 번이지, 의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어쩌면 적장도 비슷한 목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저 광신자 돌격 부대는 일회용 병력이다. 일시적으로 전선에 충격을 주고, 공격중이던 아군 대열을 몰아내는 용도.
그 후에는 사실상 통제도, 수습도 불가능할 것이다. 처음에야 기세를 타서 아군을 몰아붙였겠지만···.
백병전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아니, 전장에서 이리저리 이동하고 돌격하는 것 부터가 매우 힘든 일이다.
평소에 비해 무거운 장구를 뒤집어 쓰고 있고, 어디서 적이 나를 노릴지 모르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 부터가 아무것도 안해도 체력을 쫙쫙 뽑아간다.
그런데 저 앞에 적이 보인다. 왠지 이쪽보다 잘 무장하고, 싸움도 잘 할 것처럼 생겼다.
그런데 내가 싸워야 할 상대다.
돌격 명령이 내려오면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모아 적진을 향해 달린다.
아니, 실제로 이미 여기서 많은 수가 낙오한다. 때문에 반드시 대열을 이끌어 줄 리더들이 필요하다.
선두 전열은 숙련병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 어중이떠중이들이 그 기세에 떠밀려, 눈 먼 돌격이라도 하게 되니까.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그냥 ‘무리’를 단독으로 공격임무를 맡긴다? 뒤에서 아무리 위협하고 고함을 질러도 전혀 그 힘을 발휘하지 못 한다.
아마 저들은 그 부분은 ‘종교의 광기’로 극복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종교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중독성은 어지간한 마약 이상이라잖아.
그 덕에 아무리 봐도 전문 군인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뜨내기들이 앞을 다투어 기세 좋게 돌입하는 데는 성공했다. 안타깝지만 기습당한 아군도 다소 피해는 있을 것이다.
그 후의 상황을 예상해보자.
종교적 광신이 지탱해주던 정신, 그리고 거기 따른 아드레날린 분비가 지탱해주던 신체. 이건 생각보다 오래 가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백병전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숙련병들은 무력화된 적의 목숨을 끊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이 있다.
인간의 목숨을 끝내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다. 아니, 그런 점도 있기야 하겠지만, 저항을 뚫고 인간의 목숨을 끊는 일이 제법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에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칼끝이 눈 앞에 보이면 어떻게 해서든 저항하려 드는 게 인간이니까.
상대 방어를 뚫고 부상을 입혀가며 무력화 시킨 직후에는, 그런 것 조차 피하고 싶을 정도로 체력을 아끼고 싶은 법이다.
그래서 기강이 잘 잡힌 부대는 이 마지막 ‘자비의 일격’을 후열에 맡는 경우도 있다. 뭐 그만큼 선두를 교대해주면서 체력을 유지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다시 적군의 어중이떠중이 돌격대로 돌아가서, 저런 발작적인 돌격은 곧 한계가 돌아온다.
광기와 아드레날린에 절어있던 몸이 다시 공포와 피로에 노출된다. 한동안은 마치 자기가 아닌 것처럼 잘 싸우지만, 비로소 자신을 찾고 나면 세상은 더욱 비참해진다.
이를 방지하는 방법은, 정말로 최후의 최후의 순간에 투입해서 마지막 충격으로 적을 무너뜨리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런 악조건도 극복하고 알아서 잘 싸우도록 체력과 기술을 길러주거나.
그게 되는 부대가 하나 있긴 하지. 슈토르히 연대의 돌격대 병사들이 봉급을 많이 받는 이유가 다 있다. 고급 인력이거든.
하지만 적의 돌격은 아군 대열을 무너뜨릴 만큼 강렬하지도 못했고, 지속능력을 보여줄 만큼 노련하지도 못했다.
잠깐동안 전장에 혼란과 충격을 주었으나, 그게 끝났다. 이제 그들은 외상으로 미래의 수입을 가져다 쓴 도박꾼이나 다름 없다.
이건 아실과 모리츠가 잘 대응 할 수 밖에 없다. 지시도 필요 없어. 그러니 그냥 그냥믿고 기다리자.
역시 유능한 부하,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으니 부담이 이렇게 덜하다.
“첼레스티나, ‘언덕 부대’ 쪽에서는 아직 신호가 없지?”
“네에, 전령을 보내볼까요, 콘도티에레?”
“음, 아니야··· 괜찮아. 지형이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네. 괜히 재촉하지 말자고.”
“네에, 콘도티에레!”
이전에는 대체로 아군이 불리했으니까, 항상 변수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심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군이 유리하니까, 변수가 없다는 건 조금씩이지만 이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위기가 오지 않도록 전선을 관리하고, 다시 틈을 찾아보도록 하자.
“첼레스티나! 포격 준비 부탁할게!”
“네에! 포격! 포격이네요! 어디다 쏠까요?”
“언덕 부대가 들키지 않으려면 이쪽에서 소란 좀 피워 줘야지. 언덕 위가 목표야.”
“알았어요, 콘도티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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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압!”
제51 포르망제 의용보병 연대 소속의 중대장, 엑토르 드 빌브레이 남작이 적의 몸 속에 깊이 박혀있던 검을 뽑아냈다.
적의 단단하게 굳힌 가죽 갑옷과 갈비뼈를 동시에 부수고 들어갔던 장검이 소리도 없이 뽑히자, 적병은 비명 대신 피거품을 뿜으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으아아아아아!”
가슴 깊이 타오르는 열정을 이겨내지 못한 엑토르가 소리질렀다. 짐승의 포효와도 같았다.
피투성이가 된 장검을 치켜들며, 마찬가지로 피투성이가 된 전신 갑주를 걸치고 고함을 질러대는 모습은 결코 중대장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튀어나갈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었다. 그만큼 저 앞에서 움찔거리며 눈치만 보는 적들이 미웠고, 또한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으로 보였다.
기세좋게 돌진해왔던 적들의 모습은 이제 없다. 그저 창날의 벽 앞에서 겁에 질려 눈치만 보는,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얼간이들의 무리가 남아있을 뿐이다.
조금 더 용감했던, 그리고 미친 것처럼 보였던 자들은 이미 바닥에 누워 피를 뿜고 있었고.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허약한 놈들에게, 고향이, 블랑독의 땅이 침략당하고 약탈당했다는 말인지.
적 용병대와 창날을 나누고 있던 때, 갑자기 저 놈들이 공격해왔을 때는 놀랐다. 자칫하면 포위당해서 피같은 중대원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등짝이 서늘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명령과 훈련에 따라 천천히 대열을 유지하며 물러났고, 측면에도 창벽을 만들어 적의 공격에 대응하도록 했다.
다행히도 엑토르의 중대는 능란하게 움직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별로 능란하지는 않았다. 훈련할 때는 잘 했으나, 역시 훈련과는 달랐다.
병사들은 긴장했고, 습기차서 질척대는 바닥은 평평하지만은 않았다. 심지어 정면은 여전히 적이 붙어있었고, 측면에서는 종교에 미친 놈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해결 됐다.
진형의 가장 외곽에 있었던 장교와 부사관을 비롯한, ‘싸울 줄 아는 놈들’이 장창 대열이 만들어질 때 까지의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중대장인 엑토르는 처음에는 대열을 유지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려 했지만, 차츰 적 창병과 거리가 멀어지고 달라붙는 광신자들이 늘어나자 ‘싸울 줄 아는 놈들’ 사이에 가담했다.
그래도 최소한, 적이 집요하게 휘두른 무기에 그의 창이 반쯤 잘려나갈 때 까지는 버텼다. 그 후에 창대를 집어 던지고 검을 뽑아 튀어나갔을 뿐.
적은 기세와 다르게 대단한 실력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대열이 정돈되었고, 창벽은 그 늠름한 가시를 사방으로 겨누며 위용을 뽐냈다.
촘촘한 창벽은 주변의 총병들을 위한 좋은 피난처가 되었다.
창병들의 곁에 바짝 붙거나, 아예 내밀어진 장창 아래로 숨어든 총병들은, 거기서 재장전을 하며 주변의 적을 노렸다.
최초의 기습 효과를 잃어버린 이상, 적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빽빽한 창벽에 가로막혔고, 주변에 있어봤자 날아오는 납탄에 무력한 표적이 될 뿐이니까.
“적이 도망친다!”
“이겼다!”
“와아아아아!”
기세를 잃고 창벽에 가로막힌 적은 후퇴를 시작한다. 무모한 공격에 무수한 시체를 남기고 말이다. 엑토르의 눈이 닿는 정면 쪽에만, 적의 시체는 수십 구는 되어보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무리 봐도 아군의 것으로 보이는 멀쩡한 창이 꽤 많이 버려져 있었다.
“...누가 창을 저렇게나 버렸냐?”
“죄송합니다, 중대장···.”
“아니 그게, 저 새끼들이 창대 사이로 들어와서 덤비잖아요!”
“창병이 창을 버리면 어떡해?”
“중대장님도 버렸지 않습니까?”
“나는 젠장할, 적이 창 끝을 꺾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이번에는 이겼고, 살아남았으니까 잠시 유쾌하게 웃을 수 있다. 그래도 적이 접근하자 창을 버리고 검부터 뽑아드는 버릇이 생길까 걱정이다.
물론 적이 창대 사이를 뚫고 들어오면 전열은 적당히 대응은 해 줘야 하지만 말이다.
“부상자들 챙겨라! 그리고 원래 대형으로 돌아간다!”
“알겠습니다!”
이제 다시, 쫓겨난 만큼 전진할 차례다. 잠시 퇴각했던 총병들과 함께 대열을 정돈하려고 하는데, 그의 눈에 뭔가가 들어온다.
“저기··· 저거 뭐지? 연기 아닌가?”
“검은 연기 저도 보이는데요.”
“뭐지 신호인가? 저기 적진 방향 아냐?”
언덕 위쪽, 숲 너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