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16화 (216/556)

28-6. 마르사코르 언덕

###

블랑독 연맹군 소속, 제51 포르망제 의용보병 연대 지휘관인 로아직 드 포르망제 남작은 검을 뽑아들고 적진을 겨눈다.

“이번에는 우리가 선두다! 이미 콘도티에레의 주력군이 적을 몰아붙이고 있다. 그 측면에서 승리를 지원한다!”

“옛, 연대장님!”

“블랑독은 우리의 땅이다!”

“블랑독은 우리의 땅이다!”

“전진, 앞으로!”

“전진 앞으로오!”

아실 트랑카벨 자작이 이끄는 별동대는 마르사코르 언덕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전투 상황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전장에 들어왔다.

하루종일 포성이 들리는데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 포성이 점점 가까워오자, 사령관 아실과 참모장 모리츠는 다수의 기병을 정찰대로 풀어 전장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아군은 적을 화력으로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니다. 지형적으로 유리한 적은 여전히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아군은 접근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 와중에 별동대는 딱 적의 측후방을 노리기 좋은 위치에서 접근하고 있다.

여기까지 파악하자, 행군 도중에 진형을 재편했다. 마침 행군 대열의 선두에 있던 제51 포르망제 의용보병 연대가 선봉을 맡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제51 연대는 성전군에게 점령되었던 블랑독 북부 출신들 중, 항전을 멈추지 않았던 이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부대이다.

사실 전쟁 초기 방관하던 주민들 중에서도, 성전군에 점령당하자 고향을 탈출해 로데브 강 남쪽으로 탈출한 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 중 전투 경험이 없거나, 훈련도가 낮은 자들은 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들은 트랑카벨 영지군 정규병의 훈련을 받는 중이다.

하지만 이미 전투 경험이 있거나 봉건 군대의 일원으로서 충분한 훈련을 받은 자들을 모은 부대가 제51 의용보병 연대인 것이다.

특히 현재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블랑독 북부는 그들의 고향이다. 연대장인 로이작 드 포르망제 남작부터가 블랑독 최북단의 영주였으니까.

그러므로 침략자인 성전군을 몰아내고 고향을 수복하는 것은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선봉을 맡게 된 것을 아주 기뻐할 정도로 말이다.

제51 연대 소속의 중대장, 엑토르 드 빌브레이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대열 맞춰라! 마음이 급한 건 알겠지만 조금만 천천히! 적은 기다려 줄거야!”

자꾸만 발걸음이 빨라지는 부하들을 만류하면서, 엑토르는 대열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중대 대열에는 유난히 갑옷을 잘 차려입은 중장갑 창병이 많다.

트랑카벨 가문에서 보급한 간소한 보병용 흉갑이 아니라, 제대로 된 기사의 갑주이다.

대량생산품이 아닌, 장인의 손길이 들어간 방어력과 장식성 모두를 겸비한 멋진 외양. 블랑독 북부를 지배하던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은 무장이다.

다만 이들은 대부분 기마 전투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건장한 성인 남성과 그 장비를 견딜만큼 튼튼한 군마를 살 정도로 부유하지 못하거나, 말을 풀어놓고 키우기에 적합하지 못한 지역 출신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 하급 귀족과 지주들은 도적이나 맹수로부터 고향을 지키기 위해 도보로 싸우는 법을 배웠다. 중무장을 하고 산야를 달리며 영토를 지켜온 조상들처럼 말이다.

엑토르가 가주로 있는 드 빌브레이 남작가는 성인 남자가 60명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장원의 주인이다.

항상 일손이 부족해, 봄만 되면 영주의 주 업무가 목재 수급과 울타리 수리였을 정도이다.

작고 가난한 손바닥만한 마을 공동체 하나. 그렇다고 섬기는 상위 영주가 있지도 않았다. 주변 마을들도 다 비슷한 수준이었기에 오히려 평화로웠다.

성전이 벌어진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그는 정순파가 아니었고 주민들 중에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전군이 들어왔을 때도 별다른 저항은 하지 않았다. 저항을 해도 의미도 없었을 뿐더러, 이러다 지나가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전군의 가혹한 공출이 시작되었을 때는 항의했다. 빠듯한 비축량의 절반 이상을 몰수해 갔기 때문이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엑토르와 마을 청년 몇이 흠씬 두들겨 맞았을 뿐. 더 이상 귀찮게 굴면 이단 심문에 넘긴다는데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고는 그 직후에 터졌다. 공출을 실어 보내고 기고만장해진 성전군 용병 몇이 마을에 눌러 앉았던 것이다.

여동생을 희롱하고 강간하려던 병사 둘을 때려 죽인 것은 이틀 후 아침의 일이다. 아마 허름한 차림의 소녀가 영주의 여동생인줄은 몰랐던 것 같기는 하지만 상관 없다.

동료의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온 나머지 일곱 명을 영민들과 합세해 끝장 낸 것은 그날 저녁의 일이다.

그 후에는 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영민 전체를 불러 모아 사정을 설명하고, 마을을 떠나겠다 결심한 이들을 보호하며 무장하고 남쪽으로 탈출했다.

다행히 큰 일은 없었다. 주변 영주들과는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새로운 점령군을 좋아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아직 안전하던 아넥시 부근에 도착해 한숨 돌리고, 다시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남쪽으로 이동해 로데브 강을 넘었다.

제51 연대에 입대한 것은 얼마 후의 일이다.

그의 중대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하급 귀족이나 지주 출신들이 많았다.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갑옷을 입고, 어색한 무기인 장창을 들고, 생소한 방식인 밀집대형으로 싸우는 훈련을 함께 받았다.

그들의 상황은 트랑카벨 영지군의 근간을 이루는 가신 계층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무엇보다 중심이 되는 ‘주군’이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각자 크고 작은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들이 모여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뭉쳤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런 부분에서는, 봉건 질서가 자리잡기 이전의 부족 연합 전사단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들을 뭉치게 한 하나의 목적이란,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고향을 되찾는 일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혼자서는 하기 힘들었던, 침략자들을 죽여 없애는 것.

“적이 코 앞이다! 훈련대로 해보자!”

“알겠습니다!”

엑토르 드 빌브레이 중대장은 다소 긴장이 됨을 느꼈다. 전투 자체에 대한 긴장도 그렇지만, 과연 그의 부대가 제대로 창병의 역할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한 걱정이다.

당연히 제51 연대의 실전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바로 최근 델레망드 부근에서 벌어진 성전군 용병과의 전투에서도 선두에서 싸웠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잘 준비된 적의 대열을 공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형도 협소했고, 중대마다 진격 방향이 조금씩 다르다보니 대열을 유지하는 장교들도 진땀을 빼고 있었다.

미리 경고받은대로 바닥이 질퍽거린다. 고운 모래로 된 바닥을 발로 밟으면, 쑤욱하고 들어가며 잠긴 만큼 물이 고인다.

불편하기는 하지만, 아얘 발목까지 잠겨서 걸음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정도면 충분히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아까부터 눈 앞에 적군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언덕 위로부터 증원군이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들과 같이 창병도 있고, 짧은 무기로 무장한 자들도 있다. 총병인지, 다른 근접 무기인지는 확실히 알기 어렵다.

이제 적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전투가 시작된다. 창 끝을 하늘을 향해 세워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타다당! 탕! 타탕!

휘익! 탁!

“흐읍!”

“크으윽!”

산발적으로 총알이 날아온다. 누군가가 맞았는지 신음소리가 들린다.

누군가의 창이 총에 맞아 부러졌는지 나무 조각이 후두둑 소리와 함께 어깨 위로 쏟아진다. 그 가느다란 창대가 총에 맞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솔직히 엄청 무섭다. 손에도 힘이 들어가고, 이도 꽉 물게 된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다리를 오무리게 된다. 자기가 지금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주변에서 알 것 같아 무섭다.

지금이라도 창을 내던지고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싶었다. 총에 맞은 척 할까? 젠장할 중대장 괜히 한다 했나?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다. 죽은 놈들 복수는 해 주면 되는 거다! 게다가 적도 두 발 쏠 여유 따위는 없다!

“쏴라!”

타타타타타탕! 타탕!

“뒷열 앞으로! 쏴라!”

타타타탕! 타다다당!

요란한 총성과 함께 화약냄새가 화악 하고 풍겨온다. 이번에는 이쪽의 반격이다.

창병과 비슷하게 보조를 맞춰 행군하다가 앞으로 나온 총병들이 적진을 향해 일제사격을 퍼붓는다. 투두두둑, 하고 하얀 연기 너머에서 총에 맞아 벌렁 넘어가는 적병의 모습이 보인다.

타타탕! 타탕!

탕! 탕! 타당!

적의 사격은 아군처럼 화끈하게 한 번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전방에 붙은 총병들이 위치를 바꾸면서 순차적으로 쏜다.

그리고 우리 총병들이 등장하자 화력은 그쪽으로 집중되는지, 휙휙 날아오던 총탄이 사라졌다.

긴장으로 비오듯 쏟아지던 식은 땀이 멈추고 머리가 좀 돌아가기 시작한다. 1초가 1분 같던 시간이 다시 정상적으로 흐르고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긴다.

자기가 생각해도 비겁한 것 같다. 내가 맞아야 할 총탄을 우군이 맞아준다고 갑자기 여유가 생기다니. 사람 마음이 그리 간사한데 뭐 어쩔 수도 없고.

아까는 그게 자신의 역할이었고, 지금은 우군의 역할이라 그렇겠지. 그냥 자기 역할에 충실하는 수밖에 없다.

마음을 다잡은 엑토르는 좌우를 돌아보며 외친다.

“창 내려! 창 내려!”

“창 내려어어!”

촤좌작, 선두 대열이 일제히 수직으로 세워졌던 창을 앞으로 향한다. 사람 키의 2배가 훨씬 넘는 긴 창이 일제히 정면을 겨눈다.

바리케이드는 무릎에서 허리 정도 높이이다. 창 끝에서 20미터 정도 될까. 적은 아직도 바리케이드에 의지해 싸울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이윽고 적장이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적 창병들도 전진해오기 시작했다.

엑토르는 전술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반대편의 적은 이미 후퇴할 만큼 후퇴해서 후퇴할 공간이 없는 게 아닌가 싶었다.

너무 좁은 공간에 뭉치면 화약무기에 쓸려 학살 당한다는 것은 문외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중대장으로서, 부하들이 너무 밀집하지 않도록 항상 신경쓰고 있기도 했고.

“간다! 밀어내자!”

“하아! 하아! 하아!”

기합소리와 함께, 한 걸음씩 접근한다. 흔들리는 창 끝이 눈에 들어온다.

한 걸음 더 다가가자 피아간의 창대가 엇갈린다. 창날과 창날, 창대와 창대가 부딪히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한 걸음 더.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창대가 얽혀 귀가 아플 정도로, 따닥따닥하고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단단하지만 탄력있는 창대끼리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흐아압!”

“무리하지도 말고, 물러서지도 마!”

“시팔새끼들!”

“버텨! 버텨!”

무수히 많은 창대가 맞물린다. 서로 잘 무장된 창병들이지만 과감하게 접근하지는 못한다. 서로의 창날과 창대가 꽉 물린 백중세.

서로 투구와 흉갑 정도는 입고 있고, 창대를 잡은 손도 장갑 등으로 보호받고 있었기에 작은 상처도 입히기가 쉽지 않다.

설령 창날 안으로 파고 들지라도, 워낙 많은 창대가 서로 맞물려 있는 상태라서 물리적으로 밀고 들어가기가 힘든 것이다.

투척무기를 던져도 중간에 창대에 맞아 떨어질 정도로 빽빽한 밀집 대형 두 개가 맞부닥친 상황이니까.

숙련도로 따지면 성전군 측, 안프로니오 연대의 창병들이 더 뛰어나다.

용병 대공으로 유명한 델 안프로니오 가문의 고참병들은 경력이 10년이 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세는 블랑독 연맹군 측, 제51 포르망제 의용보병 연대의 창병들이 우세하다.

그들의 상대는 이틀에 걸쳐 포격에 시달렸고, 자신들은 행군으로 피곤하기는 했어도 막 전장에 들어온 참이다. 게다가 고향을 수복한다는 직접적인 대의도 있었다.

또한 숫자 역시 이쪽이 우세하다.

안프로니오 연대가 미리 바리케이드를 준비하고 방어하는 유리한 입장이라고는 하나, 2개 연대를 상대로 해야한다.

그간의 사상자를 무시한다 해도 숫자의 차이가 두 배나 난다.

안프로니오 연대의 1500명에 대해, 트랑카벨 정규 보병 연대인 제21 연대는 1200명과 의용보병 연대인 제51 연대의 1700명을 합치면 1500대 2900이니까.

다소의 지원병력이 있다 치더라도 최소 1.5배의 싸움이다. 당장은 팽팽하더라도, 창병 대열의 피로도 축적은 빠를 수밖에 없다.

특히 총병 간의 사격전은 격차가 점점 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사격전은 백병전보다 숫자라는 변수가 무겁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군을 오폭할까봐 두려워 소극적으로 변하기는 했으나, 트랑카벨 본대로부터 포격 지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성전군의 패배는 확정적이었다. 좌익 방어선이 무너지면, 더더욱 좁아터진 언덕으로 쫓겨 들어갈 것이다.

성전군 입장에서는 그건 절대로 두고볼 수 없는 최악의 사태였다.

그랬기에, 지금껏 소극적인 포격 지원과, 소수의 후속 병력 지원 말고는 손대지 않고 있던 성전군 본대 쪽에서도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